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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원주역사박물관 관람 후기

by 즐풍 2023. 12. 27.

2023_218

 

 

 

2023. 11. 25. 토요일 오후에 관람

 

 

즐풍의 고향이 원주라도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나갔기에 원주는 잘 모른다.

이런 원주에 온 김에 시간을 내 원주역사박물관에 들린다.

강원도에는 춘천에 국립춘천박물관이 생기며 대부분의 유물은 춘천에 있고, 원주에는 일부만 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원주역사박물관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박물관에 비치된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일산동 오층석탑 一山洞石塔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일산동 오층석탑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12년 정책들에 있던 것을 남산 추월대,

강원감영 동치로 옮겼다가 2000년 다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받침 부분을 일종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오층의 몸돌을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탑의 몸돌이 완만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탑의 각 층 지붕들은 두께가 얇고 네 귀퉁이의 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 날렵하게 보인다.

탑 위의 장식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위로 갈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전체적으로 간결하고도 장중한 모습을 보인다.

 

 

 

일산동 석불좌상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일산동 석불좌상은 원래 원주시 봉산동 천왕사지로 전해지는 절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원주 남산 추월대로 옮겨졌고, 1962년에 강원감영으로 옮겼다가, 2000년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두 불상 모두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없어졌으며, 현재 불상의 머리는 새로 만든 것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팔각형으로, 윗단과 아랫단이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손은 파손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양손을 가슴으로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두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손 모양인 지권인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단정한 체구,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옷 주름, 배 위의 띠 매듭, 화려하게 장식된 대좌 등에서 통일신라 말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인 (石人)

 

석인은 격식을 갖춘 무덤[陵墓] 앞에 세우는 사람 형태의 석조물이다.

돌로 만든 동물 [石獸]과 함께 무덤을 지키는 능묘조각의 하나로, 벼슬아치의 옷[公服] 차림인 문관 형상의 문인석(文人石)과 갑옷 · 무기로 무장한 무관 형상의 무인석(武人石)이 있다.

석인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조각수법이 퇴화되고 형식화되면서 상징적인 의물(儀物)로 남게 되었다.

 

 

일산동·원동석탑재와 불상

 

일산동 옛 원주군 청사[江原監營] 원동 남산에 있었던 석조물 부재로 2000년과 2006에 각각 우리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일산동 석조물이 감영으로 옮겨지기 전에는 제일감리교회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석탑 부재와 불상의 조성양식으로 보아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산동 삼층석탑(一山洞三層石塔)

 

탑은 기단의 덮개돌[基檀甲石]과 사천왕상(四大王像)이 조각된 1층 몸돌 [塔身]만 남아 있던 것을 2003년 9월 9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석탑의원 부재 기단의 개돌과 1층 몸돌은 일산동 제일감리교회에 있던 것을 옛 원주군 청사[原監營]로 옮겼다가 2000년 우리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 이 탑이 있었던 제일감리교회 터에는 많은 기각과 석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름(寺名)과 사모는 알 수 없지만 격식을 갖춘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층 몸돌의 드러난 네 면에는 불교의 이상세계를 지켜주는 사천왕상이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었고, 뒷면에는 사리를 넣었던 둥근 홈이 파여 있다. 원래의 부재들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의 것으로 보인다.

 

 

전천왕사지 석조미륵보살입상(傳天王寺址 石造彌勒菩薩立像)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1960년 경 봉산동의 옛 활터였던 학봉정(鶴鳳亭)의 과녁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후 봉산 너머 보현사 앞뜰로 옮겼다가 다시 춘천의 강원도 향토박물관으로 옮겼던 것을 2001년 우리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석조보살입상 외에도 원주에는 표현양식은 다르지만 크기와 형태가 비슷한 13구의 석조보살입상이 남아있는데, 이 보살입상과 함께 원주지역의 독특한 조각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주 학성동 철조석가여래좌상

 

이 불상은 원래 원주시 학성동 정지들(옥뜰, 읍옥평邑玉坪)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 있던 5구의 철불과 함께 서울로 옮겨졌다.

불상의 얼굴은 네모에 가깝고 가늘게 뜬 눈과 꼭 다문 입에서 엄숙함을 느낄 수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만 감싼 옷 주름은 얕은 선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쇠로 만든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말기인 9세기 무렵이며, 고려 초기까지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의 제작 시기도 그 무렵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의 유적조사 결과와 사진에 의하면 이 불상이 있었던 정지뜰에는 오층석탑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상이 발견된 정지들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치악의 봄(春)   

                    김시습(金時習, 1435-1493)

雉岳崎嶸聳碧空  치악쟁영용벽공   치악산이 가파르게 푸른 허공에 솟았네

烟霞明滅有無中  연하명멸유무중   안개와 노을이 밝았다 없어져 있고 없는 듯

一泓春水苺苔滑  일홍춘수매태활   한 웅덩이 봄물에 이끼는 미끄럽고

千丈蒼崖擲躅紅  천장창애척촉홍   천길 푸른 벼랑에는 철쭉꽃이 붉구나

路轉層峯殘雪在  로전층봉잔설재   길을 돌아가는 층층 봉우리에는 남은 눈이 있고

巖廻石棧晚雲濃  암회석잔만운농   바위를 돌아가는 돌계단에는 저녁 구름 짙었네

靑山處處行應好  청산처처행응호   푸른 산 곳곳을 다니는 것이 좋으나

脚力有窮山不窮  각력유궁산불궁   다리 힘은 한도가 있고 산은 끝이 없구나     

 

 

치악의 여름(夏)

                        이이(李珥, 1536-1584)

節彼雄鎭 절피웅진  높은 저 웅대한 진산이

庇我東陲 피아동수  우리의 동쪽 지경을 비호하도다

閉陽從陰 폐양종음  가뭄을 닫고 비를 내림이

明神所司 명신소사  밝은 신께서 맡은 바이로다

眇予失職 묘여실직  미약한 내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旱魃肄虐 한발사학  한발이 혹독하도다

蒼生何罪 창생하죄  백성들이 무슨 죄입니까

日塡溝壑 일전구학  날마다 구렁에 빠집니다

竭誠昭告 갈성소고  정성 다해 밝게 고하노니

庶紆歆格 서우흔격  굽어 흠향하옵소서

儻運玄機 당운현기  진실로 현묘한 기틀 운전하시어

亟施膏澤 극시고택  빨리 기름진 은택 베푸소서              

 

 

치악의 가을(秋)

                        구사맹(具思孟, 1531-1604)

崧高雉嶽鎭東維  숭고치악진동유  높다란 치악산이 동쪽을 비호하는데

氣象雄深未易窺  기상웅심미역규  기상이 심하여 쉽게 엿볼 수 없도다

疊嶂龍飛連鳳舞  첩장용비연봉무  첩첩 봉우리는 용이 날며 봉황이 춤추고

脩岡蟒走接鯨馳  수강망주접경치  신 산등성이는 구렁이가 달리고 고래가 달리네 치

揚靈每遣雲霞繞  양영매견운하요  신령함이 드러내어 구름과 노을로 둘러싸게 하고

利物偏多雨露滋  이물편다우로자  만물을 이롭게 하느라고 비와 이슬로 젖게 하네

祀典從來降禮秩  사전종래강예질  제사를 지냄은 전부터 예우를 융숭히 함이니

長垂玄佑定無疑  장수현우정무의  깊이 깊은 도움을 줄 것이 의심 없도다                

 

 

치악의 겨울(冬)

                        김세렴(金世濂, 1593-1646)

玆岳鎭東脈  자막진동맥  이 치악은 동쪽의 맥을 진호하여

合沓摩蒼窮  합달마항공  중첩됨이 푸른 하늘에 미쳤구나

衆嶺若奔馬  중령고분마  산봉우리 이어짐은 빨리 내닫는 말과 같아

氣勢何輝雄  기세하휘웅  기세가 어찌 후덕하여 웅장하지 않겠는가

突兀毘盧峯  돌올비로봉  비로봉이 우뚝 서있음이

不與群岳同  불여군악동  여러 산과 더불어 같지 않아

九月小帶雪  구월대소설  구월에는 흰 눈이 따를 두르고

雲氣常蒙龍  온기상몽룡  구름의 기운이 항상 덮이고 있구나

 

 

계절별 치악의 기상과 풍경을 적은 고시를 위에 옮겼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4언율시와 5언율시, 7언율시가 계절별로 대표작으로 선정되어 걸렸다.

이런 율시는 물론 모든 서류에 작성할 한자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 요즘 시대에 태어난 게 다행이다.

김세렴의 치악의 겨울과 관련된 시를 보며 치악산에 있는 세렴폭포가 어쩌면 김세렴과 관련이 있겠단 생각이 든다.

2002년의 자료 검색으로 세렴폭포의 한자는 洗念瀑布라는 게 보인다.

생각을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의미를 가진 폭포라는 뜻일 텐데, 실제 이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원주에서 출토된 구석기 타제석기 

 

빗살무늬 토기

복제품

 

 

고대의 유적과 유물

원삼국기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한성(서울)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기원후 약 300년까지를 원삼국(原三國) 시기라고 하며, 이때 한반도의 중부지방에서는 철기가 일상생활에 사용되고, 굴가마에서 새로운 기술로 만든 회색의 두드림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의 전통을 지녔으나 보다 새로워진 소위 '중도식 토기'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문화를 바탕으로 각 지역 중심지에서는 정치적 집단이 성장하였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 호저면 매호리 향미 집터유적과 부론면 법천리의 원삼국기 덧널무덤이 알려져 있다.

 

 

 

고대의 유적과 유물

백제시대

 

기원후 3세기 중반 고이왕대에 이르러 백제가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주변의 정치적 집단들을 아우르게 됨에 따라 원주지역도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 남겨진 대표적인 유적이 부론면 법천리의 돌방무덤이다.

이 돌방무덤에서 특히 중국의 “양형청자(羊形靑瓷)” 등과 함께 조기·민어·상어 등 크고 고급 어종인 바다 생선의 뼈가 출토되어 법천리를 포함하는 원주지역이 백제시대로부터 강을 이용한 중요한 수상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법천리 고분군에서는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6-7세기에 해당하는 “옆트기식의 돌방무덤”이 조사되어 원주 일대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도 주요한 위치에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부론면 법천리 고분군 7호분 석곽묘

 

7호 석곽묘(石槨墓)는 상부가 유실되고, 콘크리트 도로에 의해 일부 덮인 상태에서 노출되었다. 묘의 형태는 남쪽 단벽은

최후에 폐쇄한 평면 장방형 (長方形)의 횡구식(橫口式) 석곽묘이다. 바닥에는 할석(割石)과 강돌로 시상(屍床)을 설치하였으며, 석곽의 북쪽 바닥에는 강돌 3개를 놓아 시신의 일부를 고정시켰다. 유물은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1점, 단경호 (短頸壺) 1점, 철도자(鐵刀子)가 출토되었다.

특히, 토기는 원주지역에서 지방양식화된 신라토기로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으며, 법천리 고분군에서 차지하는 편년적 위치는 원삼국시대의 토광묘(土壙墓)-백제의 석실분(石室墳)-신라의 석곽묘(石槨墓)로 이어지는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고대의 원주

 

원주는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정치연맹체인 마한의 동쪽에 있던 소국의 하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三國)이 정립하여 각기 영토를 확장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였고, 이후 고구려,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5세기 중엽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원주지역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군현(郡縣) 제도를 실시하면서 평원군(平原郡)이라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문무왕 때 구주(九州) 오소경(五少京)이 설치되어 평원군을 북원소경(北原小京)이라 하였고, 경덕왕 때 북원경(北原京)이라고 하였다. 북원경은 통일신라 5소경 가운데 하나로서 북방 경영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9세기말 신라가 쇠퇴하면서 각처에서 반 신라적인 세력이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의 하나였던 양길(梁吉)은 원주지역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궁예(弓裔)의 부하였던 왕건(王建)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어 태조 23년(940)에 원주(原州)라고 고쳐져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원주의 산성

 

•  견훤산성

섬강으로 흘러드는 문막의 궁촌천(川)을 낀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견훤이 축조하여 건등산(山)에 진을 친 왕건(王建)과 대적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성 내에서 이미 삼국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최초의 축성 연대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 금두산성

치악산 향로봉 남서쪽에 위치하는 산성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합되어 있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있으며, 비교적 넓고 완만한 경사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축조방식이나 출토유물, 퇴락의 정도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  영원산성

통일신라 때 축성되어 신라말기에 양길(梁吉)이 웅거 했던 곳이며, 고려시대에 원충갑(元沖甲)이 합단(哈丹)을 물리친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원주로 쳐들어 온 왜적을 맞아 당시 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하였고, 그의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김시백(金時伯)도 죽어, 충(忠)·효(孝)·열(烈)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개수(改修)되어 승병(僧兵) 들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해미산성

금대산성(金臺山城)이라고도 하며, 궁예(弓)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리지(地理誌)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때 원주의 송필(宋弼)이란 사람이 이 산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원주가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성의 축조방식은 영원산성보다 고식(古式)에 해당하며 다시 개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해미산성이 궁금하면... 

 

원주 치악산 곰바위봉의 해미산성海美山城

2023_198 2023. 11. 25. (토) 09:26~13:23, 3시간 57분 산행, 휴식 50분 포함, 6.8km 이동, 시작고도 189m, 최고 고도 637m 목우가 원주에서 모임이 있다기에 태워다 줄 겸 함께 출발한다. 원주에 있는 4개의 산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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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고려(918~1392)는 중앙의 골품관료 중심으로 운영한 통일신라의 한계를 극복하고 각지의 지방 세력인 호족(豪族)을 지배층으로 포섭하여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태어난 왕조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고려는 벌집구조로 이루어진 다원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고, 그 결과 다양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룬 문화를 일굴 수 있었다.

신라 말 고려 초 원주의 호족도 이 목표에 동참하기 위해 중앙 관직에도 진출하고, 원주를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원주의 대표적 성씨인 원주 원씨 가문에서는 원극유(元克猷)와 같은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배출되고, 또한 해린(海麟) 같은 불교 지식인도 나왔다. 원극부(元克富)와 같은 향리(鄕吏) 가문은 대대로 지역 행정을 이끌기도 하였다.

 

 

 

불교의 중심지 원주

 

고려는 통일된 국가를 유지하는 정치·종교이념으로서 호국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이 당시 원주는 이름난 승려 가운데 왕의 정신적 지주였던 국사나 왕사, 대사 등이 다수 있었고, 지금 남아있는 불교유적을 보더라도 불교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고려 초 원주에는 대표적인 선종 승려였던 희양산문의 지증 도헌 스님이 거돈사를 창건하였고, 봉림산문의 진공 충담 스님이 흥법사에서 열반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법상종 승려 지광 해린 스님이 법천사를 하산소로 삼아 머물렀다.

 

 

 

영전사지 보제존자사리탑 사리구 (今傳寺地 普濟尊者舍利塔 舍利具)

 

이 사리구들은 원주시 본부면 가마지절터(현 태장동 영천에 있던 3기의 탑들을 191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화를 개최하면서 서울 경복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탑지》, 《정자발》, 《청동합》, 《정동명》, 《은제도금육각사리기》, 《석제사리호》, 《정동사리호》, 《은제원통형사리기》 등 많은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탑지(塔誌)의 기록에 의해, 고려 우왕 14년(1322년)에 건립된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의 유골을 장엄한 부도탑(浮屠路)으로 밝혀졌다.

이 석탑의 존재를 맨 처음 파악한 세키노 타다시 <조선고적조사약보고>에 '전폐영전사 삼층석탑(傳廢令傳寺 三層石塔)'으로 표기한 이후, 영전사 삼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운곡 원천석 선생의 원곡집과 이희 선생의 송화잡설, 대동야승 등 고문헌에 이 절터 이름이 '영천사(靈泉寺)'로 기록되어 있다.

 

 

법천사(法泉寺) 터 등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는 통일신라 말에 세워져 임진왜란 당시에 불탔다.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로, 이자겸을 배출한 인주 이씨 가문의 소현 스님을 제자로 둔 지광국사 해린(984~1070) 스님의 하산소로 하였다. 법천사 터는 원주시 부론면 명봉산 기슭에 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法泉寺)는 신라말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鼎賢)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문종의 스승이었던 지광국사 해린(海麟,984~1070)이 왕실의 후원으로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렸다.

조선 초기 학자인 유방선(柳方善)이 이 절에서 강학하였으며, 권람·한명회·강효문·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어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법천사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탑(智光國師塔, 국보)과 탑비(塔碑, 국보)가 고려 선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법천사 터에는 탑비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조선이 건국된 뒤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조선 초기에는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부국강병민사상의 원리가 매우 강조되었다. 그 결과 한글창제를 비롯한 문화가 발달하고 영토가 확장되었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고,

차별적인 신분제도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이 발달하면서 토지의 사적 소유가 많아지고 생산자인 농민의 지위도 점차 상승되었다. 비교적 안정된 사회가 유지되었으나 그 내부에는 지주제의 발달에 따른 갈등관계가 야기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붕당(朋黨)에 따른 대립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무렵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16세기 후반부터 50여 년 동안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16세기 이래 해이해지던 조선의 통치체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조선왕조는 문란해진 통치기구를 정비하고 각종 조세제도를 개편하고자 노력하였다.

 

 

 

강원감영

감영은 조선시대 각도의 감사(監司)가 거처하며 집무를 보던 관청으로서 강원도 원주를 비롯하여 충청도 충주(1602년 공주로 옮김), 경상도 상주(1601년 대구로 옮김), 전라도 전주, 황해도 해주, 함경도 함흥(1600년 영흥으로 옮김), 평안도 평양 등지에 있었다. 감영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관둔전(官屯田) 등으로 충당되었고, 소속 노비는 450명이었다. 강원감영(江原監營)은 현재 원주시 일산동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아와 그 정문 건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원주 강원감영이 궁금하면...

 

원주 강원감영은 야경이 너무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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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강원의 수부, 원주

 

조선은 139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팔도제(八道制)를 실시하여 강원감영(江原監營)을 원주에 설치하였고, 관찰사(觀察使)가 거주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원주는 강원도의 수부(首府)로서 행정, 치안, 사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원감영이 관할하는 행정체제는 정 3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와 목사(牧使)가 다스리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원주목(原州牧), 종 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다스리는 양양(襄陽)·삼척(三陟)·회양(淮陽)·춘천(春川)·철원(鐵原)의 5개 도호부(都護府), 종 4품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평해(平海)·통천(通川)·고성(古城)·간성(杆城)·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의 7개 군(郡), 종 5품 현령(縣令)이 다스리는 울진(蔚珍)·흡곡(谷)·금성(金城)의 3개 현(縣), 종 6품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이천(伊川)·평강(平康)·김화(金化)·낭천(浪川)·홍천(洪川)·안협(安峽)·양구(楊口)·인제(麟蹄)·횡성(橫城)의 9개 현(縣)이 있었다.

 

 

서원 

 

서원은 선현(先賢)을 봉사(奉祀)하여 존숭 하며, 강학(講學)을 통해 유학을 진흥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사립교육기관이다. 1542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朱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 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순흥 지방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이후 1550년 이황(李滉)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설립되면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의 발전으로 지방 사람들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서원은 원래 사학(私學)이었으므로 국가로부터 정식 대우를 받지 못했고, 국가가 승인한 사액서원(額書院)의 경우에만 면세전(免稅田) 3결과 노비 1구가 내려졌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 당초부터 지방 유지인 사대부로부터 원전(田)이라 하여 토지나 노비를 희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방관의 배려로 면세의 특혜를 누렸다.

이러한 서원은 그 수가 증가하면서 폐단이 생기게 되어 영조와 정조에 의해 정비되어 가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정리되었다.

 

 

원주의 서원

 

칠봉서원(七峰書院) - 호저면 산현리 칠봉

칠봉서원은 1612년 당시에 서당으로 건립되어 학생을 교육하다가 1624년에 운곡(谷) 원천석(元)을 봉안하고 운곡서원(谷書院)이라 하였다.

이후에 관란(觀瀾) 원호(元)·항(恒) 정(鄭宗榮)·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을 배향하였고, 1663년에 칠봉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도천서원(陶川書院) -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터

도천서원은 1693년에 예전의 흥법사터에 건립되어 관설(觀雪) 허후(許厚)를 봉안하였고, 1871년 서원철폐 때 칠봉서원과 함께 철폐되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 부론면 법천리 서원말

도동서원은 1721년에 예전의 법천사 터에 건립되어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을 봉안한 서원으로, 보통은 광암사(廣巖祠)로 알려져 있다.

 

취병서원(翠屛書院) - 문막읍 건등리

취병서원은 사(四寒) 김창일(金昌一)을 봉안한 서원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본래 사당은 취병산 기슭에 있었으나 후손들이 건등리에 새로 사당을 마련하여 경행사(景行祠)를 세우고, 순조 연간에 취병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서당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마을단위의 학교가 있었는데,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서당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수요의 증가와 교육의 질적 향상을 보이며 민중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서당은 훈장(訓長)·접장(接長)·학도(學徒)로 구성되었고, 서당교육의 내용은 강독(講講)·제술(製述)·습자(習字)로 이루어졌다.

강독은 천자문(千字文)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명심보감(明心寶鑑)·소학(小學)·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운다. 제술은 오언절구·칠언절구 등을 짓는 것이다. 습자는 해서(楷書)를 위주로 하여 학습 진전에 따라 행서(行書)·초서(草書) 등을 익혔다. 서당교육의 특색은 계절에 따라 학습 내용과 방법을 조화한 계절학습과 놀이를 통한 유희학습 및 여가선용학습이 이루어진다. 원주의 대표적인 서당으로는 지산서재(芝山書齋)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1차 침입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이고, 2차 침입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해서 말한다.

왜병(倭兵)은 부산에 상륙하여 한쪽은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양평으로 건너와 서울로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추풍령을 넘어 청주를 거쳐 죽산과 용인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기 때문에 초기에 원주는 직접적인 침입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7월 이후 원주지역도 예외 없이 격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왜군의 원주 침입 경로

부산(모리) -서울-동두천-철원-평강-김화-회양-안변-통천-고성-양양-강릉-한계령-삼척 - 두타산성 - 정선-영월-영춘 - 남한강 상류 - 평창 - 주천-신림 - 원주(영원산성)

 

 

 

영원산성 전투 김제갑

 

임진왜란 때 원주에 왜적이 침입하자 당시 원주목사였던 김제갑은 관군과 원주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목숨이 다하도록 끝까지 항전하여 충(忠)·효(孝)·열(烈)의 귀감이 되었다.

충(忠)

김제갑(金悌甲)의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이황의 문인으로서 155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거쳐 정언·충청도관찰사·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 모리의 군사가 원주에 침입하자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 산성에 들어가 싸웠는데 성이 함락되었어도 왜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효(孝)

김시백(金時伯)은 김제갑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영원 산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시신 곁을 떠나지 아니하면서 나이 겨우 20세에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열(烈)

이씨(李氏)는 김제갑의 아내로 영원산성이 함락되어 남편과 자식이 왜적에게 죽게 되자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 아니하고 산성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민긍호 의병장 활약

원주우편국 습격

 

 

의병활동

 

의병(義兵)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어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렀고, 한말의병은 특히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한말의병은 크게 1894~1896년의 제1차 을미의병(乙未義兵)과 1905~1910년의 제2차 을사의병(乙巳義兵)·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나누어진다.

제1차 의병전쟁은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에서 1895년 말에 크게 일어나 원주출신 이은찬(李殷瓚)이 김산에서 봉기하였다.

제2차 의병전쟁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해 군사지배권을 장악하려 하였을 때 일어나 1905년 원주에서 원용팔(元容八)이 의병장으로 봉기하였다.

1907년 8월에 한국군의 해산에 따라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합세한 무장항일전이 시작되어 원주 진위대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서울 진격작전의 주축을 이루었다.

 

 

 

의병장-민긍호, 이은찬

민긍호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서울출신이다. 1897년 원주 진위대 고성분견대 정교(正校)를 지내다가 1901년 특무정교(特務正校)가 되고서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 수비대를 해산하려고 하자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 경찰을 습격하였다. 이후 많은 소단위의 의병 부대를 편성하여 강원도·충청도·경상도를 전전하며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컸다.

 

이은찬(李殷

본관은 전주(全州)로 원주 출신이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각기에서 의병이 재기하자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해산군인을 포함하여 소집한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면서 이인영(李부대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규합에 전력하였고, 13도 의병연합부대가 편성될 때 중군이 되어 서울 공략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와 임진강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나전 공작무늬 서류함과 도안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 선물용으로 제작된 서류함이다. 2개를 제작하여 하나는 선물하고 남은 특별한 의미의 작품이다. 뚜껑 안쪽에는 청강 장일순의 글씨가 장식되어 있다.

 

나전 봉황·무궁화· 넝쿨무늬 꽃병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작품으로 무궁화, 넝쿨무늬 등을 전면에 시문한 화병이다화병은 옹기에 옻칠을 해서

완성시킨 와태칠기이고 화병받침은 나무에 옻칠을 한목칠기이다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김봉룡의 전형적인 나전공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

 

일제 강점기에 양질의 옻칠을 생산하던 원주는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옻액 생산이 미미해지자 정순영, 김창수, 장기철 등 지역에 뜻있는 인사들이 원주 칠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1957년 1월 10일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는 칠기 제조·판매를 하기 위해서 독일산 칠정제기까지 들여왔다.

칠을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원주시 반곡동과 관설동 소재 치악산에 옻나무를 심어 직접 관리 생산했다. 무려 124.4ha나 되는 넓은 면적에 옻나무를 심은 지 10여 년이 지났을 무렵 이미 칠을 채취해서 정제까지 하게 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는 칠의 소비를 위해 공예품을 만들 장인이 필요하였다. 이때 횡성 출신의 칠장인 홍순태의 소개로 김봉룡 선생을 공예부장으로 초청하였다. 이때 김봉룡은 소목장 천상원, 끊음질 심부길, 칠장 홍순태에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고, 당대의 거장들이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공장에 불이 나면서 김봉룡은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김봉룡 선생은 이후 원주칠공예소를 설립하면서 원주가 나전칠기의 고장으로 자리 잡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원주칠공예주식회사는 여러 번의 화재와 자금난으로 1981년 4월에 문을 닫았고, 1988년 7월 5일 치악칠공예주식회사로 양도될 때까지 존재했다.

원주가 옻칠공예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원주칠공예주식회사와 김봉룡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 칠기장에서 문짝 두 개만 확대한 사진다.

 

 

칠화칠기

 

칠화(漆畵)는 색칠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대개는 색칠(色)이라는 말 자체가 칠화(漆畵)를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옻칠의 한 기법이며 기물이나 가구 등에 옻칠로써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을 말한다.

옻칠에는 생(生)과 숙칠이 있는데, 칠화는 그중 숙칠을 원료로 하고 거기에 각종 안료를 넣어 색을 낸 것이다. 그러나 옻칠은 그 특이한 성질 때문에 여러 색을 내기는 곤란하며 대개 주(朱) · 황(黃)·녹(綠ㆍ남(藍) · 흑(黑) 색에 국한된다.

칠화의 기법은 중국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흑칠 바탕에 주칠로 그린 교묘한 칠화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칠화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한국 낙랑(樂浪) (塚)에서 출토된 채화칠협과 협칠기 등이다.

한편 신라의 천마총,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칠화 유물이 발견되어 한국 칠화의 역사도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나전칠기가 우세하여 칠화 제품이 거의 잊혔다. 칠이 공기와 접하면 검게 변화는 특성 때문에 검은색과 대비되는 반짝이는 자개를 쓴 것이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명맥이 끊기었던 칠화칠기능이 원주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칠화칠기법에 관심이 많았던 일사 김봉룡 선생의 영향 때문이다. 일사 김봉룡 선생은 평양의 채협총에서 발견된 칠화칠기 유물의 사진을 보고, 통일신라 이후 단절된 칠화칠기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1978년 신세계미술관에서 '나전칠화전'을 열어 국내에 처음으로 재현된 칠화칠기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제자 양유전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칠화칠기의 계승에 힘쓰며 필생의 업이 되었다.

이렇게 되살린 칠칠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시간이 갈수록 고운 색을 드러내게 된다. 원색에서 조금 가라앉은 칠화의 색은 "깊고 따뜻한 아름다움'이다.

 

 

칠화용 무늬원형벽걸이 漆畫龍文圓形壁掛

1970년대

 

 

칠화난초무늬원형벽걸이 漆畫蘭草文圓形壁掛

1970년대

 

 

나전칠기

 

나전칠기란 목기의 바탕을 소재로 나전을 가공 부착하여 칠을 한 공예품을 말한다. 나전은 우리말의 자개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나는 조개껍질을 말하며 청(靑瓦), 야광패(夜光貝), 진주(眞珠)등이 있다. 전은 장식한다는 뜻으로 공구를 사용하여 가공한 후 상감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철기에 대한 역사는 삼한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전칠기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당의 나전기술의 이입에 의해 크게 발전을 보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주대(代)부터 나전칠기가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나전칠기보다 더 전성을 이루었고 작품 역시 우수하고 아름다웠다.

서궁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나전칠기에 대해 그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 만하고 나전이 장식된 말인장도 매우

정교하다'라고 서술되었다.

당시 국가 공영 공예품 제작소였던 중상서(中尙署)에는 화업(畵業), 소목장(小木匠), 위장(韋匠), 마장(麻匠), 나전장(螺鈿 匠) 등의 나전칠기 제작과 관련된 장인들에 의해 양산된 사실이 고려사 식화지에 기록되어 있다.

원주는 1968년 일사 김봉룡 선생이 이주를 한 이후 칠공예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일사 김봉룡 선생은 원주 정착 이후 오직 원주 옻칠, 나전칠기의 원주정착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여는 다양한 업적들을 원주에서 일궈냈다. 현재 제자 이형만을 비롯하여 다수의 공예가들이 나전칠기의 발전을 위해노력하고 있다.

 

 

나전 석류무늬 과일 쟁반

 

흙칠 원형 바탕에 석류무늬를 줄음질 기법으로 시문하였고, 테두리에는 주칠 바탕에 나전으로 당초무늬를 둘렀다.

 

 

일사 김봉룡 문서함

 

학 두 마리와 소나무를 시문한 서류함이다. 도안은 1964년에만 들어져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고 끊음질과 줄음질기법이 적절히 조화된 수작으로 평가된다.

 

 

자개

 

원패(原具)는 후패(厚貝)와 박패(薄貝)로 가공되는데, 이것을 다시 얇게 가공한 것이 자개이다. 원패는 산지별 · 색상별 · 형태별로 그 용도가 다르다. 크게 소라류, 전복류, 진주패로 분류된다.

첫째, 소라류에는 야광패가 있는데 진주광이 강하게 반사되면서 짙은 분홍이나 푸른색이 나타난다.

둘째, 전복류는 색패, 청패, 호주패, 멕시코패, 신발패 등 종류가 다양하다. 색패는 전통공예인 나전칠기에 처음으로

활용된 가공패이며 푸르고 붉은색이 강하고 영롱하여 활용범위가 가장 많다.

청패는 무늬가 없는 단색으로, 깊고 은은한 청색을 띠며, 필리핀 등지에서 생산된다. 호주 패는 호주에서 생산되는 전복류 중 가장 큰 조개이며, 흰색의 바탕에 붉은색이 어우러져 있고, 넓은 면적을 이용하는데 적합, 멕시코패는 멕시코연안에서 생산되는 전복류로 청록색의 진한 색상이 어우러지면서 공작의 푸른색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신발패는 필리핀 등 동남아에서 주로 생산되며, 생김새가 신발이나 당나귀 귀와 비슷하여 신발패 또는 당나귀 귀패로 불리며, 은은한 청색을 띤다.

셋째, 진주패는 자개 중에서도 가장 두꺼워서, 문양의 입체적 효과를 나타내기에 적절하고 부조의 표현이 가능하며, 백색, 황색 등을 띤다.

 

 

 

도 안

 

도안은 작업을 위한 밑그림이다. 도안을 할 때 사용되는 도구인 세필붓과 제도기 등을 이용해 무늬와 그림도안을 그린다.

일사 김봉룡은 실톱을 통한 줄음질 기법의 변화에 맞추어 나전 밑그림의 도안화에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봉룡은 안중식, 지성채 등의 서화가·문인들에게서 글과 그림을 배웠으며, 이러한 배움이 밑거름이 되어 도안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김봉룡의 나전도안은 전통의 방식을 넘어서서 나전문양을 작고 섬세하게 하면서 공간을 잘 활용하며 한쪽에 치우치기도 하고 또 다른 한쪽은 여백을 살리는 변화를 보여준다. 김봉룡을 대표하는 넝쿨무늬는 작품에 따라 때로는 간결하게 때로는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산수무늬는 안중식 산수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고, 봉황과 용은 김봉룡을 대표하는 소재로 이는 민화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처럼 김봉룡의 나전 도안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 전 칠 기

 

나전칠기(螺鈕漆器)는 칠공예 장식기법의 하나로 조개껍질뿐만 아니라 대모(玳璃)·상아(象牙)·호박()·보석 따위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어 물건의 표면에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당나라 나전(螺) 기술의 도입에 의해 크게 발전을 보게 되어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나전칠기보다 더욱 전성을 이루었다. 그 작품 또한 우아하고 아름다웠는데, 고려 인종 때 서긍(徐兢)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나전칠기의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하게 여길 만하고 나전이 장식된 말안장도 매우 정교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 화 칠 기

 

칠화칠기(漆畵漆器)는 옻칠에다가 여러 가지 색을 나타낼 수 있는 안료를 칠과 혼합해서 다양한 문양을 장식하여 완성하는 칠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 나전기술이 도입된 이래 고려시대에 독창성을 띠면서 크게 발전을 본 나전칠기에 앞서 칠화칠기는 삼국시대에 성행하였다. 백제의 경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칠화두침(漆畵頭枕)과 칠화금장족좌(漆畵金裝足座), 신라의 경우 금관총에서 출토된 칠화편과 경주 98호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 칠화판(騎馬人物 漆畵板) 등이 있다.

 

 

 

 

원주의 역사와 민속작품인 칠기 등을 짧은 시간에 관람했다.

전시된 유물보다 안내문이 더 많아 차라리 이렇게 포스팅할 때 읽는 게 더 좋다.

어느 박물관이든 포스팅하면 그때마다 한 번 더 복습하게 된다.

그렇다 한들 기억에 오래 남지 않고 금방 휘발되어 사라지는 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