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강원도

원주 강원감영은 야경이 너무 멋져

by 즐풍 2023. 11. 29.

2023_200

 

 

2023. 11. 25. 토요일 밤에 산책

 

 

요즘은 어느 지역이든 갈 기회가 있으면 산행 후 관광 명소를 둘러본다.

카페 산악회를 이용하면 산행 후 귀가를 서둘러야 하니 이런 일은 언감생심이다.

오늘만 해도 치악산의 해미산성을 둘러본 후 원주역사박물관과 한지체험관에 이어 행구동 수변공원과

마지막 코스로 강원감영을 둘러본다.

사실 강원감영은 전에 포스팅했기에 전혀 둘러볼 생각은 없었으나 주변에 주차할 일이 있어 주차하고 나니

조명을 켜 놓은 게 보여 들어가 보지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원주 강원감영  原州 江原監營

사적 제439호

 

원주 강원감영은 조선시대에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으로,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왕조는 태조 4년(1395)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여 관찰사를 파견하였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원주가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지리적으로 수도인 한양과 가까워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찰사는 행정과 군사의 최고 책임자로,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을 올바르게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감영에 잠시 머물면서 강원도 각 지역을 돌아보는 순력巡歷체제로 업무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의 임기는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게 되고, 관찰사는 강원감영에 머물면서 때때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돌아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留營이라고 한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다시 짓기 시작한 이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하여 다시 지었다.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수행했으나, 1895년에 8도 제도가 23부 제도로 바뀜에 따라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1900년 이후 강원감영은 원주의 지방군대인 진위대 본부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한때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500년 동안 강원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강원감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포정루 布政樓

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이다. '포정'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인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 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라고 하였다. 「여지도서」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꿔 달았다.

                                                                                    (안내문)

예전과 마찬가지로 포정루를 통해 들어선다.

 

중삼문 中三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중삼문·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은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문'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안내문)

편액은 관동관찰사영문이다.

 

안쪽으로 들어가 다시 보는 관동관찰사영문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의 공간 

 

담벼락 아래로 공적비가 즐비하다.

 

내삼문 內三門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澄淸門으로, 포정루·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확인 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안내문)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강원감영의 관찰사가 근무하는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중앙집권적 관료체계였다.

서양은 왕이 거처하는 도시와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없으면 영주들의 지배하에서 일정한 세금을 내고

유사시 군사를 지원하면 되는 봉건제를 채택했다.

서양의 이런 봉건제도는 우리에게는 없었으므로 시대별 나라로 구분한다.

 

선화당 宣化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

 

선화당은 강원감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관찰사가 강원도의 정무를 보던 집무실인 정청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 · 농정 · 조세·민원·군사· 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 6년(1665) 이만영 관찰사가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67년 이후산 관찰사

때 완공되었다. 선화당은 한때 일본군수비대, 원성군청, 강원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곳 선화당을 거쳐 간 관찰사는 500여 명으로, 황희, 정철 등도 이 선화당에서 백성을 살폈다.

                                                                                                                (안내문)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은 언제나 앞쪽 문은 열려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추워도 집무실 문은 창호지 한 장만 발랐는데도 겨울은 춥지 않게 지낼 수 있다.

언제부터 온돌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하동 칠불사의 아亞자방은 유명하다.

2000년 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아자방에 불을 지피면 열기가 100여 일을 간다고 한다.

선화당에도 구들장에 불을 넣으면 강원도가 아무리 춥다고 해도 업무를 보는 데 불편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베루사유 궁전이 대리석으로 처발라 아무리 번쩍번쩍해도 겨울엔 베치카로 추위를 막을 수 없어

왕비는 추위를 참지 못하고 개를 안고 잤다고 하니 우리네와 사정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상민들도 온돌방을 썼으니 프랑스의 왕이나 왕비보다 겨울은 따듯하게 보냈다.

온돈방만큼은 우리의 기술이 세계 최고인 걸 알 수 있다.

 

강원도관찰사 江原道觀察使

 

조선시대에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최고의 지방 장관으로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리었다.

1466년(세조 12)에 관찰사로 호칭이 정착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는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통제하여 조선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안내문)

책방과 선화당 

 

원주 강원감영은 세 개의 구간으로 구성된다.

포정루에서 내삼문까지 1단계 출입 구간, 선화당과 내아, 책방이 있는 집무 구간,

마지막으로 이 솟을대문을 지나면 있는 후원 등이다.

지금부터 원주감영의 숨겨진 비경을 들려다 볼 차례이다.

 

영주관 瀛洲館

 

영주관은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산 중 하나인 '영주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1897년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남긴 「정선총쇄록」에 의하면 밖에는 '관풍각', 안에는 '영주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관풍각觀風閣은 풍속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의 관풍찰속觀風察俗에서 따온 이름이다. 연못 가운데 있는 데서 영주관을 드나들기 위하여 건물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무지개다리를 설치하였다. 아치형 다리를 놓은 것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이다.

                                                                                                  (안내문)

 

강원감영 후원 권역 江原監營  後苑 圈域

 

강원감영의 후원 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각, 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의 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후원 자리에는 한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삼신산三神山: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믿는 세 신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 지리산을 방장, 한라산을 영주로 일컬었다.

                                                                                           (안내문)

 

후원에는 연못에 영주관, 채약오, 봉래관을 지어놓아 연회를 베풀며 시문을 짓는 풍류를 즐길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한자의 운율을 맞춰가며 서로 시문을 짓는 문화가 발달했다.

지금처럼 룸살롱이나 요즘엔 없어졌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방석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돈봉투가 오갔던 것과 전혀 다른 풍류를 즐겼다.

 

 

 

봉래각 蓬萊閣

 

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완이 연못 북쪽에 처음으로 봉래각을 세웠다. 그러나 물이 넘쳐 누각이 여러 차례 허물어지자, 1704년에 관찰사 홍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새로 지었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관찰사 신완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

                                                                                    (안내문)

 

조오정 釣鰲亭

 

조오정은 전설에 나오는 '자라를 낚는 정자'라는 뜻으로,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여섯 자라는 바다에서 다섯 산을 떠받치다가 거인 용백에게 잡혀 죽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에 나오는 자라다.

                                                                                                               (안내문)

 

영주관 건물 뒤편엔 관풍각이란 편액이 걸렸다.

 

채약오 探藥塢

 

채약오는 신선이 드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산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명선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안내문)

채약오는 흔히 말하는 팔각정이 아니라 육각정인 셈이다.

오해 벼 수확이 끝나자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새로 올려 산뜻한 느낌이다.

멀어서 보이지 않던 천정으로 연못에 반영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후원에 있는 연못은 고여 있는 물이니 낮에 보면 상황은 조금 틀릴 것이다.

하지만 밤에는 명경지수처럼 맑고 고요하게 보인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조명이 켜진 틈을 타 여전히 먹이를 잡는다고 연못을 휘저으며 파문을 일으킨다.

녀석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사진을 찍어야 그나마 반영 상태가 좋다.

왼쪽 건물이 봉래관, 정면 건물이 영주관, 초가지붕은 채약오이다.

 

 

 

14세의 소녀가 남장을 하고 홑몸으로 설악산을 오르다.

조선말기의 여류시인인 금원錦園 김씨金氏(1817∼미상)는 강원도 원주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아 부모가 글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시문을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경전과 역사에도 능통했다. 27세 때는 시문으로 명성을 떨쳐서 '여자 사마司馬'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그녀는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는데, 1830년 3월 14세 때 남자로 변장을 하고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과 설악산을 여행하였다. 또한 1845년에는 의주부윤으로 부임하는 남편 김덕희金德喜를 따라 서도지방(황해도와 평안도)을 유람하였다. 이후 1850년 그녀는 충청도, 금강산 및 관동팔경, 황해도 및 평안도, 한양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로 기록하였다.

금원 김씨는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고도 미련이 남아 인제의 설악산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녀는 대승폭포와 수렴동의 경관을 활달하고 호방한 필치로 묘사하였는데, 특히 대승폭포를 읊은 시에서는 중국의 여산폭포보다 낫다고 찬탄하였다.

 

千峯突兀揷天余  천봉 우뚝 서 하늘 찌르는데,

輕霧初收畵不如  가벼운 안개 걷히니 그림도 그만 못하리

好是雪山奇絕處  좋구나, 설악산의 기이한 절경이여

大乘瀑布勝庶廬  대승폭포가 여러 여산폭포보다 낫네.

 

(설악산 장수대분소에서 대승폭포로 오르는 길에 세워진 여러 개의 좋은 시구 중에서 

원주 사람인 김원 김씨에 대한 안내문이 있어 올린다.)

금원 김씨의 동상이다.

 

 

이때 본 설악산 귀때기청봉의 털진달래가 궁금하면... 

 

한창 절정인 설악산 귀때기청봉의 털진달래꽃

2023_57 2023.5.16. (화) 07:31~15:27, 8시간 산행, 한 시간 50분 휴식, 12.6km 이동 2020.9.2.에 받아놓은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은 21개의 스탬프를 받아야 끝난다. 당시 한라산 국립공원은 등산객들에

electee.tistory.com

 

야경은 또 다른 매력과 함께 신비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이런 야경을 감상하며 데이트를 하면 한결 훈훈한 느낌이 들겠다.

 

후원 감상을 끝내고 다시 관찰사의 집무 공간으로 들어서며 선화당을 본다.

 

책방 冊房

 

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인구 · 세금 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보급, 인쇄·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 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안내문)

선화당 뒤편에 있는 책방 

 

선화당 바로 옆에 있는 관찰사의 살림집인 내아다.

집무 공간과 거주 공간이 같은 곳이라 출퇴근하는 맛은 없겠다.

 

 

 

선화당 회랑인 큰 마루

 

선화당 복도 

 

내아 內衙

 

내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당으로,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은당(戴恩堂): 영조 35년(1759) 내아에서 관찰사의 노모와 가족들을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하여, 임금의 은덕과 은혜를 가라는 뜻으로 '대은당 (戴恩堂)'이라는 편액을 지었다.

                                                                                     (안내문)

 

 

낮보다 밤의 야경이 더 운치 있는 원주 강원감영을 즐겼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곳에 있던 원성군청과 원주우체국이 헐리고 차례차례 복원되었다.

전체를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했겠지만 이 정도로도 훌륭한 느낌이다.

원주를 방문하면 낮과 밤의 강원감영을 즐기며 비교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