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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강원도

해 질 녘의 양양 낙산사 탐방

by 즐풍 2023. 1. 5.

2022_229

 

 

 

2022.10.29. (토) 해 질 녘에 잠시 탐방

 

 

이미 추분을 지난 지 일주일이 넘었으니 낮이 많이 짧아졌다.

양양 낙산사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6:50이라 양양지역의 일몰까지는 겨우 40분 밖에 안 남았다.

날이 흐려 햇빛을 가린 데다 해도 기울어 날은 어둡기조차 하다.

양양에서는 설악산을 안 오르면 하조대나 낙산사가 명소이기 늦게라도 낙산사에 들어섰다.

 

 

□ 양양 낙산사 

신라시대 문무왕 시절 창건된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입니다.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의상대를 중심으로 깊은 동해와 사찰 지붕의 청기와
그리고 그 푸르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해수관음상까지
차분한 발걸음으로 거닐기 시작한 낙산사의 풍경들은 마음 속에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을 살다 보면 가끔 나를 잃을 때가 있습니다.
지친 마음을 돌보고 치유가 필요할 때, 고요한 휴식만큼 간절한 건 없죠.
진정한 쉼의 시간을 찾아 낙산사로 떠나봅니다.                                                 (출처_양양군청)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 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 의상대 (義湘臺)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만든 정자이다. 

원래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지을 당시 머무르면서 참선하였던 곳으로 예부터 의상대라 불렸다고 한다.
6각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난간을 비스듬하게 세운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_문화재청)

 

낙산사에서도 홍련암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의상대다.

 

 

낙산사 동종

 

관음상과 보타락

 

멀리서 보는 홍련암

 

 

 

 

 

홍련암

 

홍련암의 관세음보살님

 

늦은 시각에 왔는 데도 홍련암에 제법 많은 사람이 북적인다.

2005년 산불에도 부처님의 가피로 이곳은 온전했다고 하니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듯싶다.

 

 

 

 

 

너무 오앤만에 포스팅하다 보니 이곳이 어느 전각인지 모르겠다.

 

 

원통보전 대들보로 만든 첼로와 바이올린

 

2005년 4월 4일 양양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낙산사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는 겪었다.

금곡 주지스님과 사대부중, 전 국민의 뜻을 모아 옛 모습을 새롭게 되살려 복원했다.

이 첼로와 바이올린은 다시 그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강릉의 악기 장인 임창호 옹이 불타고 남은 원통보전의 대들보로 만든 것이다.

옻칠과 나전장식을 더한 이 첼로와 바이올린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온 국민의 가슴에

희망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안내문)

 

 

연하당

 

지장전

 

해수관음상 주변에서 조망하는 속초 방향

 

해수관음상

 

7층 석탑

 

 

원통보전 앞 7층 석탑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천여 년 간 국교로 자리 잡고 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 7층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 하나이다.  (출처_문화재청)

 

 

원통보전은 화재 이후 새로 지었는데, 지붕이 너무 큰 느낌이다.

 

□ 건칠관음보살좌상 (乾漆觀音菩薩坐像)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건칠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한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보관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_문화재청)

 

 

 

 

 

 

빈일루 

 

 

 

원통문

 

낙산사 홍예문 (洛山寺 虹霓門)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낙산사에 행차하여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예문 위에는 1963년 세운 누각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1칸의 문루이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고 세워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출처_문화재청)

 

 

낙산사 홍예문을 나설 땐 주위에 아무도 없는 밤이다.

낮이 짧으니 밤이 서둘러 달려든 느낌이다.

천천히 여유를 두고 둘러봤으면 좋을 양양 낙산사다.

언제 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