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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원주역사박물관의 현석 최규하 전 대통령 유물전

by 즐풍 2023. 12. 28.

 

 

 

2023. 11. 25. 토요일 오후

 

 

오전에 치악산 해미산성 탐방에 이어 비로 원주역사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원주역사박물관과 같은 공간에 있으니 현석실도 함께 포스팅하면 좋겠지만, 중요성에 비추어 별도로 한다.

현석 최규하 전 대통령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휩쓸려간 경우에 속한다.

당시 군부에서는 맹랑하게도 물러설 것을 종용하기까지 하는 포악을 부렸다.

평생 온순하게 공직에 봉직하시던 분으로 수모를 감당하며 그 직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의 당태종은 형제를 살육하고 아버지까지 겁박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그는 중국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정관지치를 만들어 낸다.

서예도 능해 원주 흥법사 터의 진공대사탑비는 당태종의 글자에서 뽑아낸 집자체이다.

그에 비하면 조선의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등극하며 왕권 강화에 힘썼을 뿐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을 몰아냈던 군부는 삼청교육대로 국민을 괴롭히고, 재벌을 압박해 4천억 원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사후에 '서울의 봄'이란 영화로 또 한 번 국민의 혈압을 높이더니 이젠 묻힐 땅이 없어 영혼이 구천에 맴돈다.

권력을 탐하더니 말로가 좋지 않은 사필귀정이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현석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한다)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서 운용하던 전용차량 중 비공식 나들이와 원주를 방문할 때 주로 타시던 푸조 604이다.

1979년식으로 2,664cc, 길이 4,721mm, 차폭 1,784mm이다.

 

 

대한민국 원년둥이 최규하

최박사네 손자, 나라의 유용한 인물이 되다.

 

최규하 대통령은 1919년 7월 16일 치악산 아래 원주 옥거리(현 원주시 평원동)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쓴 「나의 어린 시절」에서 "나의 태어난 해인 기미년은 '대한민국 원년'이기도 하다"라고 적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로 이름 높았던 한학자 최재민(崔在民)이고,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한자 · 한문교육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나라의 유용한 인물이 돼라"라고" 가르치셨고, "공직에서 거둔 공적을 스스로 자랑함을 부끄럽게 여겨"라는 겸묵의 덕목을 일러주어 그의 성격형성과 생활태도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8년 원주공립보통학교(현 원주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학교에서 휴식시간에 거의 교실 바깥에 나가 놀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어 '공붓벌레'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193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적부에 언어가 모두 명확하다고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외국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은 도쿄고등 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인보다 더 일본어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어학실력을 가진 우수한 인재이다 보니, 조선총독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고등사범학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일본인 학교 교사로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차별이 심해지면서 사직 후 만주로 건너가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들어가면서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외교관 최규하 

외국어의 달인, '헌신부난'의 외교

 

최규하 대통령은 한평생 대한민국의 국익을 수호하는 외교관이었다. 뛰어난 영어능력으로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을 역임하다가 변영태 외무부 장관의 눈에 띄어 통상국장에 임명되며 외교관의 길이 시작되었다.

1952년 주일공사를 거쳐 외무부차관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외무부 부훈을 '헌신부난(獻身赴難, 몸을 던져 어려움을 헤쳐나감)'으로 내걸고 일에 몰두했다. 1960년 4.19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5.16 쿠데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문관으로 임명됐고, 1964년 다시 말레이시아 대사로 파견됐다. 1967년 외무부장관이 되며 각종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4년 동안 외무부장관을 지냈는데,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를 '공직자로서 매너가 되었고, 사심이 없고, 청렴결백한 사람이며, 건국 후 최고의 관료 중 하나’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대통령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대화와 오일쇼크 대처를 주도했으며, 당시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석유를 확보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치인 최규하

국민과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공직자의 자세를 선도하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5년 12월 김종필 총리에 이어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고, 이듬해 3월 국회의 동의를 받아 국무총리가 됐다. 유신체제의 44 공화국 시절인 1976년 국무총리로 임명돼 1979년까지 4년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

국무총리 시절 그는 부정부패 척결에 힘을 썼다. 일례로 취임 후 언론 인터뷰에서 "부인조심, 비서조심, 자녀조심"이라는 말로 공직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주말만 되면 수행 비서도 없이 전국 민정시찰을 다니는 확인행정을 하였고, 심지어 사북탄광의 석탄채굴 현장에 방문하여 지하 450미터 지하 막장에 들어가 광부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랐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시국 관련자 687명을 사면·복권하는 등 잇따른 전향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혼돈의 회오리가 계속되면서,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1980년 8월 1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모범적인 공직자였지 위기 시의 리더는 아니었으며 '성공한 대통령'도 아니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그가 공직생활 중 보여줬던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자세, 공평 무사한 인사, 청렴결백함, 끈질긴 외교협상력 등은 대한민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모든 공직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장일순의 묵란도

 

무위당 장일순이 대통령 취임(1980년) 이후 선물한 '난그림'이다.

장일순은 원주보통학교 후배이며 같은 동네인 '삼광'에서 살았고, 서울로 유학한 동일한 경력이 있다.

 

 

최규하 총리 수송

 

당시 최규하 총리님께선 정부 요직을 두루 섭렵하시고 총리일 때 환갑을 넘기던 시기라 뜻있는 분들이 뜻을 모아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지은 뜻깊은 병풍 선물이다. 한문을 모르는 세대를 위해 한문만 따로 표기한다.

북원경 전통 치악산 정기 낙락장송 경륜(經綸)학덕 지혜변설 풍우 입(현)석 지조 산 위로 축수 육십령

두 폭 짜리 병풍은 당대 내노라하는 문인인 노산 이은상 글을 최고의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쓰시고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니 가치가 높다.

 

 

제10대 대통령 취임사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본인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에 즈음하여, 먼저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방금 본인은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선서를 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다시 한번 통감하였습니다.

(중략)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1980년대를 맞이하는 역사의 큰 전환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주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이미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생공업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 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가치체계의 불안정이 초래됨으로써 부분적으로 마찰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우리가 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하의 발전과제와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외형적인 제도의 모방만으로는 정착되기 어렵고, 먼저 국가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합리화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대한 책임, 권리에 대한 의무 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문명국가의 불가결의 요건인 법치국가의 국민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적응능력을 기르면서, 자선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또 우리의 기약하는 바

국가발전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본인은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위한 국민적인 참여의 영역을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와 경험을 시국타개와 국정운영에 동원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본인이 거듭 말한 대로 국민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듣기 위하여 그들과의 대화를 폭넓게 갖고자 하며, 또 국정의 기본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정계원로, 중진, 그리고 인격과 덕망이 겸비된 분들로 구성되는 기구를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국난과 역경을 겪어왔으나, 그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스스로의 생존과

문화전통을 수호하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번의 국가적 시련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인내와 자제로 대동단결하여 보다 차원 높은 국가건설의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도도한 대하를 형성하듯 우리 국민 모두가 영광된 조국의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 같이 전진해 나갑시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양복과 한복 

 

 

대통령의 원주 생각 

치악의 정기를 이어가다.

 

최규하 대통령은 평생 유난히도 원주를 사랑하였다. 그가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고향인 원주 곳곳에 남긴 흔적이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모교인 원주초등학교에 다목적 강당을 선물하였고, 도서관 신축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고 편지도 직접 써 보냈으며, 1985년 원주초등학교 본관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자, 복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치악체육관은 최규하 대통령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2배 정도 크게 지어져서, 지역의 각종 행사 및 체육대회, 프로농구팀 원주 DB의 홈구장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그 외에도 지금은 철거된 원주교 앞 분수대를 비롯하여 치악교와 연결도로도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치악산과 간현유원지 등 원주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94년 최규하 대통령이 봉산동에 있는 옛집 터를 원주시에 시립박물관 건설부지로 희사하였다. 이에 원주시는 봉산동 옛집 터 주변 토지를 구입하여 박물관 및 전통한옥복원 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여론에 의해 계획이 변경되어 원주 역사를 테마로 하는 박물관이 건립되었고 생가 터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살았던 옛집과 비슷한 평면 구조로 다시 지어졌다.

무엇보다 최규하 대통령은 원주시민들의 가슴에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으로서의 자부심을 남겼으며, 대통령 본인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정·관계 인사들과 만날 때면 낙후된 원주 발전을 위해 신경 써 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한다.

 

 

 

 

교육입국은 1986년 3월, 모교인 원주초등학교에 보내셨고,

心不負人(심불부인)은 종혜에게 일상의 신조로 삼을 것을 권하며 내린 교훈 같은 사자성어다.

 

 

최규하 대통령이 쓴 휘호

 

원주시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부탁하여 강원감영의 선화당 현액글씨를 받아, 새긴 후 선화당에 걸었다.

원글씨는 대성학원 장윤 이사장이 소장하고 있다가 원주시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바로 이 현액이다.

 

 

강원감영의 야경이 궁금하면...

 

원주 강원감영은 야경이 너무 멋져

2023_200 2023. 11. 25. 토요일 밤에 산책 요즘은 어느 지역이든 갈 기회가 있으면 산행 후 관광 명소를 둘러본다. 카페 산악회를 이용하면 산행 후 귀가를 서둘러야 하니 이런 일은 언감생심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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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쓰시던 이런 유물은 불과 40~50여 년 전에 대통령의 지위에서 사용하시던 것이다.

그분의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셨는지 짐작이 간다.

 

 

담배함, 곰방대, 재떨이

 

애연가였던 최규하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던 곰방대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1992년 의사가 건강 때문에 담배를 끊으라고 하자 담배를 끊었다.

 

 

청렴한 생활인 최규하

작은 것이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생활 철학을 실천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 생활을 청산하고 서교동의 사저로 돌아왔다. 왕복 4차선 도로변 골목 주택가에 위치하였고, 국가원수의 거처라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워낙 조용한 성품 탓에 이웃들은 옆집에 전직 대통령이 산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고 한다.

주변에 살았던 이웃들은 대통령 내외의 검소함에 대해 입을 모아 칭송했다. 퇴임 후 모시던 비서관에 의하면 최규하 대통령께서는 기름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잘 켜지 않아 집안이 춥고, 응접실의 선풍기는 40대 초입에 접어든 따님과 나이가 같았으며, 철 지난 달력을 잘라 그 뒷면을 메모지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홍기 여사는 1996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발병 초기에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했으나 투병 기간이 길어지며 350350여 일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면회가 안 되는 때를 제외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내의 병실을 찾았으며, 달력을 잘라 만든 메모지에 아내의 간병일지(약 먹는 시간과 양, 증세 등)를 깨알같이 적었다.

뿐만 아니라 주전자, 구두 등 다양한 생활유품에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쓴다."는 생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달력을 뜯어 쓴 메모지와 펜과 잉크 벼루 등이 인상 깊게 보인다.

 

 

 

만년필과 잉크

최규하 대통령이 사용한 만년필과 잉크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 뒤로 두 명의 대통령은 비슷한 금액을 재벌에게 갈취해 떵떵거리며 살았다.

귀 뒤로 어느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선거 비용으로 사과 박스에 600억을 받았다.

또 어느 대통령은 똥오줌 못가리고 검사공화국을 만들어 폭주하며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린다.

개돼지로 사는 국민들은 그래도 좋다고 한다.

즐풍이 선 곳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