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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청자 관람

by 즐풍 2023. 12. 24.

 

 

 

 

2023. 10. 8. 일요일 오전에 관람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건 당연히 도자기이다.

전국 어느 박물관을 가도 도자기가 가장 많고, 땅이나 바다에서 백 년이고 천 년이 지나 발굴된다고 해도

여전히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것도 도자기이다.

태안과 목포에는 해양유물전시관이 있다.

도자기를 싣고 바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좌초된 도자기를 건져 올린 건 전시하는데

그 양이 자그만치 몇만 점씩 수장고에 쌓여있다.

당시 배가 침몰되며 숨진 사람은 안타깝지만 침몰된 도자기는 후세에 국보급 문화재를 선물한 셈이다.

시공간을 넘어 가장 완벽한 상태로 유물에는 그림과 글자가 남아 당시의 풍류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그런 작은 실마리는 당시 사회를 밝히는 작업도 어렵게 복원해 간다.

이번에는 우리의 도자기 역사 중 가장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청자를 살펴본다.

(도자기 설명은 안내문으로 대신한다.)

 

 

 

 

청자 꽃모양 잔 받침 靑磁 花形 盞托

고려 12세기

 

잔을 올려놓기 위한 용도로 본래 잔과 한 짝을 이룬다. 그릇 중앙에 잔을 올려 두는 받침의 모양은 오목한 것과 돌출된

것이 있다. 넓은 테두리로 된 꽃모양의 받침 부분이 마치 비취옥을 깎아 만든 듯하다.

 

 

청자 네 귀 달린 항아리 靑磁 四耳壺

고려 11-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압출양각 연꽃모양 향로 青磁 壓出陽刻 蓮花形 香爐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동물 모양의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향로의 몸체만 남았다. 

중국 하남성 청량사 여요에서 발견된 청자향로와 조형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1124)에서 언급했던 여요 자기와 고려청자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고려 왕실과 의례용 청자

 

고려 왕조는 성종(재위 981-997) 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제를 정비하면서 의례용 자기를 제작했다.

고려는  『상정고금례詳定古今』 등 예제에 관한 책을 간행하고 제기도감祭器都監, 도제고都祭庫 등의

관청을 설치하여 왕실과 국가 의례용 기물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관리했다.

의례용 그릇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철饕饗, 용龍, 이룡螭龍 등의 무늬를 장식했다.

고려 왕실은 상상 속 동물인 도철무늬를 장식한 청자 향로에 향을 피웠다. 용은 태조(재위 918-943)가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는 당부를 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국가 주요 행사인 팔관회가 열릴 때 꼭

기려야 할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뿔 없는 용을 뜻하는 이룡은 상서로운 존재로서 왕실의 존엄함을 상징했다.

 

 

청자 양각 물가풍경무늬 정병 青磁 陽刻 蒲柳水禽文 淨瓶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보물

 

정병은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데 쓰이거나

여러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다. 서긍의 『고려도경」 (1124)에는 민가에서도 정병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정병의 한쪽 면에는 갈대 밑에서 노니는 기러기 한 쌍이, 

다른 면에는 수양버들 아래 쉬고 있는 원앙 한 쌍이 새겨져 있다.

 

 

청자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 靑磁 陰刻 蓮唐草文 梅瓶

고려 12세기, 국보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귀하게 여겼다. 『고려도경』(1124)에는 고려인들이

연꽃을 비롯하여 연근·연밥 까지도 신성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매병의 연꽃은 비췻빛 비색과 조화를 이루며 12세기 고려인이 추구한 미감을 보여준다.

 

 

청자 원앙모양 향로 뚜껑 青磁 鴛鴦形 香爐 盞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향로의 뚜껑이다. 향 연기가 뚜껑의 구멍을 통해 원앙의 입에서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다. 

원앙 깃털 세부를 예리한 음각과 반양각 기법으로 묘사했다. 눈은 산화철 안료로 검게 찍어 생동감을 더하였다.

 

 

청자 죽순모양 주자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보물

 

대나무의 새싹인 죽순모양으로 만든 상형청자이다. 조형과 장식, 유색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몸체의 알맞은 비례로 죽순의 모습이 더욱 우아해 보인다. 

대나무모양으로 표현된 손잡이와 주구는 사실적이면서도 창의적이다.

 

 

 

청자투각칠보무늬 향로 青磁 透刻七寶文 香爐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국보

 

음각·양각·투각·철화·상감·철화·상형 등 청자의 모든 장식 기법을 구사하여 완성했다. 

뚜껑은 칠보무늬로 장식했고, 몸체는 겹쳐진 연꽃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 향로의 백미는 향로를 등에 지고 있는 토끼 세 마리이다. 크기는 작지만 토끼의 특징을 담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청자 귀룡모양 주자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국보

 

등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안에 '왕'자를 하나하나 새겨 넣었고, 발가락에도 주름을 세밀하게 장식했다.

비취색 유약도 두껍게 입혔다. 생동감 넘치는 전성기 상형청자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청자상감 소나무·인물무늬 매병 松下人物文 梅甁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학, 소나무로 꾸민 장식은 고려의 문학 작품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신선 세계에

들기를 갈망하는 내용과 닮은 부분이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과 곡조에 맞춰 춤추는 학은 중국

당나라 은제 향합이나 원나라 회화에도 등장할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 青磁 象嵌 牡丹文 壺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국보

 

선상감으로 외곽선을 만들고 그 안에 모란꽃잎을 상감했다. 고려시대 왕과 신하들은 모란을 대상으로

시 짓기를 즐겨했다. 이규보도 궁궐 안 산호정에 모란이 피면 시를 읊는 사람이 많다고 기록을 남겼다. 

모란을 애호했던 분위기가 담겨 있다.

 

 

청자 상감 보자기무늬 매병 青磁 象嵌 褓文 梅瓶

고려 12-13세기, 보물

 

매병의 어깨 윗면에 화려한 조각보 장식이 상감되었다. 이 무늬는 뚜껑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파손을

막고 장식이 돋보이도록 부드러운 비단 조각보를 올려놓았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청자상감 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青磁 象嵌 梅竹鶴文 梅瓶

고려 12-13세기, 경상남도 하동군 출토, 보물

 

추위를 견뎌내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와 사계절 내내 푸른 대나무는 군자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무늬가 인상적인 이 매병은 고려인이 동경했던

이상 세계를 펼쳐낸 듯하다.

 

 

청자 연리무늬 잔과 합 靑磁 練理文 盞·盒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의 바탕흙과 흰 흙, 붉은 흙을 함께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고 투명한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우면 세 가지 흙이 섞여 대리석 같은 무늬가 나타난다. 이러한 자기를 '연리문 자기'라고 한다. 중국과 달리 바탕흙의 색감 표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연꽃동자무늬 주자

고려 12세기

 

 

청자 퇴화 주자와 병 靑磁 堆花 注子·甁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보물(주자)

 

퇴화 기법은 흰 흙과 붉은 흙을 물에 개어 붓으로 무늬를 표현한 장식 기법이다.

 붓질 흔적이 남아있어서 회화성이 돋보인다. 중심 무늬를 대담하게 그려서 흑백의 대비를

극대화하거나 둥근 점을 찍어서 보조 장식만 하는 경우도 있다.

 

 

비색청자의 비밀

 

고려청자의 비색을 내기 위해서는 좋은 원료를 확보하고 높은 온도로 청자를 구울 수 있는 기술력이 필요하다.

가마에서 불 때는 시간, 온도를 올리는 속도, 고온을 유지하는 시간, 불을 빼고 식히는 속도 조절 능력 등 축적된

기술과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색청자는 고려인이 구현했던 수준 높은 청자 제작 기술과 독창적인

미감의 결정체이다.

 

고려 비색청자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은 중국 청자와 비교한 유약 성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비색청자유약에는 산화망간 (MnO)이, 중국 비색청자에는 산화 티타늄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

흙과 유약의 성분 분석 등으로 고려청자의 기술이 밝혀지고 있지만, 고려청자의 비색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비색청자의 완성

 

고려청자의 비색은11세기 후반부터 완성도가 높아져서 

12세기에 가장 세련된 색을 띠었다. 반투명한 유약과 차분한 광택이 특징인 비색은 유리질로 변한 얇은 유약층에

가득 들어차 있는 미세한 기포들 속으로 빛이 퍼지면서 나타난다. 비색청자는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일대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고려인은 고려청자의 은은한 녹색을 스스로 ‘비색’이라고 부르며 중국 청자의 비색과 구분하였다.

1123년 개경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 기록한 “도기의 빛같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한다'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은 우수한 고려 비색청자에 대한 고려인의 자부심으로 볼 수 있다.

 

 

여의두무늬병 靑磁陽刻如意頭文甁

 고려12세기

 

 

청자 철화 병과 매병 靑磁 鐵畫 甁·梅甁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철화 기법은 붓을 이용하여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것이다. 철화청자는 전라남도 해남 진산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으며, 강진 사당리에서도 무늬가 아름다운 작품이 제작됐다.

 

 

청자상감·금채 원숭이무늬 항아리 青磁 象嵌金彩 樹下猿文 扁壺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경기도 개성 고려 궁궐 터 출토

 

금채 기법은 완성된 도자기의 유약 표면에 붓으로 금을 그리고 약 700-800°C로 다시 굽는 장식 기법이다. 

『고려사』에는 1297년 원나라에 금으로 채색한 옹기를 보냈다는 기록과 사신 조인규趙仁規(1237-1308)가

원나라 세조世祖(재위 1260-1294)에게 '화금자기畵金磁器'를 선물했다는 내용이 있다.

 

 

청자상감·동화 모란무늬 매병 靑磁 象嵌銅畫 牡丹文 梅瓶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보물

 

매듭이 달린 보자기를 덮은 것처럼 어깨를 장식했다. 모란무늬의 꽃잎에 구리 안료를 덧칠하여 마치

꽃잎이 붉게 피어나는 듯 화려한 느낌을 더했다. 매병의 부드러운 형태와 장식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는 고려청자가 완성되었다.

 

 

청자상감모란 넝쿨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고려 12-13세기, 국보

 

상감기법의 종류에는 가는 선을 상감하는 선상감과 넓은 면적을 상감하는 면상감무늬의 바탕면만

상감하는 역상감이 있다. 이 주자는 세 종류의 기법을 모두 활용하여 상감청자의 화려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유려한 곡선의 몸체와 역상감된 모란 넝쿨무늬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화려하다.

 

 

청자상감 국화 모란무늬 참외모양 병 青磁 象嵌 菊花牡丹文 瓜形 瓶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국보

 

고려 왕실과 귀족은 정원을 만들어 꽃과 나무를 키우고 감상하는 취미를 즐겼다. 왕실과 종교 의례에서도

꽃을 바쳐 정성을 표현했다. 모란과 국화가 상감된 참외모양 병은 꽃을 꽂았던 꽃병으로 여겨진다.

 

 

상감청자와 장식 기법의 공유

고려, 경기도 개성 출토

 

금속기 표면에 은선을 끼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것을 '입사기법이라고 한다. 상감청자와 나전칠기, 

입사공예는 재질만 다를 뿐 기법 자체는 비슷하다. 물가풍경 무늬나 국화무늬처럼 같은 무늬가 각각

다른 재질의 공예품에 등장하기도 한다. 고려 관청의 장인 체계에는 공예품 도안을 담당하는 '화업'

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화업이 공예품마다 기법과 무늬를 공유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병에 입사된 버드나무 무늬

 

 

청자 주자와 승반 靑磁 注子承盤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차와 술 문화가 발달하면서 청자주자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또 끓인 차나 따뜻하게 데운 술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승반을 두기도 했다. 깊은 발처럼 생긴 승반에 주자를 넣고 뜨거운 물을 채워 넣으면 차나

술을 보온하는 데 유용했다. 동물모양

장식이 달린 뚜껑에 깊은 승반을 갖춘 주자는 중국 북송대 경덕진 가마의 청백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벽화나 그림에도 주자와 승반이 함께 그려진 예가 있다. 

 

청자 잔과 잔 받침 靑磁托 (오른쪽 작품)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청자 음각 연잎무늬 주자 靑磁陰刻 荷葉文 注子

고려 12세기

 

청자 양각 꽃무늬 잔 青磁 陽刻 花文 盞

고려 12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자상감 국화문 시명 병 靑磁 象嵌 菊花文 詩銘 甁

 

어느 곳인들 술 잊기 어렵구나

청문에 이별도 많네

옷깃을 여미며 눈물을 닦고

말을 재촉하며 피리소리 듣는다.

구름 낀 나무 있는 파릉언덕

이때 술 한 잔 없다면

떠나고 머무는 심정을 무엇으로 달랠꼬...

 

 

위 시의 첫 구절인 何處難忘酒를 검색해 보니, 백거이와 유호인의 시가 보여 함께 올린다.

 

[何處難忘酒] / 백거이(白居易 772~846)

 

其一

何處難忘酒  어떤 때에 술 생각을 잊기가 어려울까?

長安喜氣新  장안에서 새로운 기운을 즐기노라.

初登高第日  처음 과거에 오르던 날

乍作好官人  잠깐 동안 좋은 관리가 되었었다.

省壁明張牓  중서성 벽에는 합격 방문 붙었고

朝衣穩稱身  조복은 몸에 꼭 들어맞았다.

此時無一盞  이럴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爭奈帝城春  서울의 봄을 어찌 보내랴

 

其二

何處難忘酒  어떤 때에 술 생각을 잊기가 어려울까?

天涯話舊情  하늘가에서 옛 벗을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는데

靑雲俱不達  우리 모두 청운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白髮遞相驚  머리만 희었기에 서로 깜짝 놀란다.

二十年前別  이십 년 전 이별하여

三千里外行  삼천 리 밖을 떠돌아다녔지

此時無一殘  이러한 때 한 잔 술도 없다면

何以敍平生  무슨 수로 허망한 마음을 풀어나 보나.

 

[何處難忘酒] / 유호인(兪好仁 1445~1494)

 

何處難忘酒  어느 곳인들 술을 잊겠는가.

防秋二十年  오랑캐 막기 20년이 되었네.

黃昏低寒月  황혼에 겨울의 달은 낮게 떠 있고

靑海接胡天  푸른 바다는 하늘에 닿아있다.

鐵騎邊常警  갑옷 입고 말에 올라 항상 변방을 지키는데

鄕書雁不傳  기러기조차 고향소식 전하지 않네.

此時無一盞  이럴 때 한 잔 술이 없다면

羈抱更茫然  나그네 회포는 더욱 막막하리라.

 

何處難忘酒  어디를 가던 술을 잊기 어렵구나.

衰齡謝事歸  나이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傷鴻思戢翼  다친 기러기 날개 접을 생각하고

老驥不任鞿  늙은 말도 굴레를 감당 못하는구나.

林壑無人過  숲 속 으슥한 곳을 지나가는 사람 없고

雲途有夢飛  구름 자욱한 길 어두워 길을 재촉하네.

此時無一盞  이럴 때 한 잔 술도 없이

奈此送殘暉  어찌 이 저녁노을을 보내겠는가.

 

우리나라도 시나 시조를 보면 운율을 맞추는 경우도 많지만 한시는 중국에 특징으로 

5언 또는 7언 율시가 많이 눈에 띈다.

하나의 글자에 하나씩의 의미를 담은 한자는 어쩌면 우리말보다 글자 수를 맞추기가 더 쉽겠단

생각도 든다.

한자는 그들의 글자이니 쉽지만, 우리네 조상은 글을 빌려 쓰며 그들과 대등한 수준의 한시를

읊었으니 우리 조상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청자상감매화·대나무·학무늬 매병 青磁 象嵌 梅竹鶴文 梅瓶

고려 12-13세기, 보물

 

서정적이고 우아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여유로운 공간 배치와 붓으로 그린 듯 섬세한 상감무늬가 뛰어나다.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참외모양주전자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병 青磁 象嵌 雲鶴文 瓶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청자상감 국화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青磁 象嵌 菊花文 瓢形 注子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국화무늬 도장을 세로로 촘촘하게 찍어서 상감하고 구슬무늬를 염주처럼 배치했다.

구슬무늬는 중국 원나라 양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13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한다.

술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자상감 집·인물무늬 항아리 青磁 象嵌 人物文 扁壺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옆면에는 보상화 넝쿨무늬를 가득 상감했고 어깨 부분은  구슬과 매듭무늬로 장식했다.

13세기 후반 원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요소이다.

고려시대 가옥의 형태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예이다. 

 

고려시대 기와집은 ㄱ 자로 꺾은 단출한 그림이다.

삼국시대부터 기와가 발견되니 기와집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자상감 물가풍경무늬 주자 青磁 象嵌 蓮池水禽文 注子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청자상감 물가풍경무늬 잔과 잔 받침 青磁 象嵌 蒲柳水禽文盞·盞臺

고려 13세기 후반-14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잔 받침은 1291년을 뜻하는 '신묘'라는 연대가 새겨진 틀이 남아있어서 13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용이 장식되어 왕실용으로 여겨진다. 금속기로도 만들어진 예가 전한다.

 

 

청자상감 물가풍경무늬 귀때발 青磁 象嵌 蒲柳水禽文 片口鉢

고려 14세기

 

중국 원나라에서는 고리를 달아서 휴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에서는 의례용이나 차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청자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매병 靑磁 象嵌柳竹文梅甁

고려 14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14세기 매병은 전성기의 유려한 곡선이 사라지면서 과장된 모습의 S자 형태로 변했다.

이 시기에는 국가 주도의 관리 체제가 소홀해지면서 그릇의 품질이 떨어졌다.

 

 

청자상감 버드나무·대나무무늬 병 靑磁 象嵌柳竹文 甁

고려 14세기

 

같은 형태의 병에 술과 관련된 시가 상감되어 있어서 술병으로 여겨진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 동화리 유적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병의 목을 깨서 출입구에 묻어 놓은 사례가 있어, 제례용으로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청자의 쇠퇴와 새로운 길

 

14세기 대내외적인 변동 속에서 국가 주도의 청자 생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자기의 품질이 다변화되는 한편, 나라의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청자에 ‘기사己巳(1329)’, ‘경오庚午(1330)’, ‘임신壬申(1332)' 등 제작 연대를 뜻하는 간지를 새겨서 관리하고자 했다. 또 술을 관리하는 '양온', 왕실 물품 등을 담당하는 '준비색准備色' 등 해당 관청의 이름을 그릇에 새기는 관청명 청자를 만들었다.

14세기 중반 이후, 고려 사회의 혼란이 더해 가는 가운데 왕실과 조정이 생산을 주도했던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 중심의 자기 가마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품질이 더욱 낮아지는 변화를 맞았다. 이와 같은 자기 제작 환경은 조선 초 분청사기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보원고 寶源庫

1363년 이전부터 1392년까지 (추정)

 

궁궐의 귀중품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등 왕실 관련 행사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