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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한밤중에 원주 강원감영의 사료관 둘러보기

by 즐풍 2023. 12. 18.

2023_213

 

 

 

2023. 11. 25. 토요일 밤에 관람

 

티스토리를 작성한다는 게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쉽고 편한 거부터 작성하다 보니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가고 정신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두 달이 넘에 밀린 것도 있으나 한참 뒤로 미룬다.

앞으로도 더 작성할 게 대략 열서너 개 남았으니 요원한 느낌이다.

 

즐풍은 나름대로 폴더를 작성한 것과 안 한 것을 아이콘을 달리하여 한눈에 보이게 한다.

그중에 박물관은 즐풍의 의견을 넣지 않고, 글자를 다운 받아도 나름대로 편집해야 한다.

타자를 잘 치는 사람은 오히려 글자를 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독수리 타법을 고수하는 즐풍도 젊은이들처럼 피아노 치듯 탄지신공을 날리고 싶다.

 

                                                                                                         (내용은 안내문으로 대신한다)

 

 

 

 

강원감영(江原監營)

 

환영합니다. 이곳은 강원감영입니다.

강원감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방 관청입니다.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여덟 개의 도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8도 아래에는 더욱 작은 지역으로 오늘의 '시'나 '군'과 같은 '목'과 ‘군’, '현' '현'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왕을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현재 서있는 이곳 강원도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과 함께 전국 팔도의 한 행정구역이며,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 전체를 다스렸던 관찰사가 머물던 곳입니다.

강원감영은 1665년(현종 6) 선화당이 세워지면서 많은 관리들이 일하는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1895년 당시에는 총 57개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감영에는 관찰사가 일했던 선화당, 감영의 정문인 포루,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거쳐가야 했던 중삼문과 내삼문, 관찰사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행각과 내아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포정루

 

 

강원감영 사료관 (행각 行閣)

 

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 (1395, 태조 4~1895, 고종 32)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관할하던 감염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수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염 전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은 옛 감염의 건축물 중 행각 건물에 해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군사훈련과 재판

 

관찰사는 나라의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역할과 함께 자신이 담당한 지역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군사 훈련에도 책임을 맡고 있었고, 매월 군사훈련을 시행한 결과를 중앙에 있는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군사훈련을 당시의 표현으로 조점(操點). 합조(合操)라고도 했는데, 원주에서는 치악산을 무대로 산성에서 훈련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강원감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에는 군사훈련에 사용된 무기를 보관한 군기고(軍器庫), 화약을 보관한 화약

고(火藥庫), 군인들의 식량을 보관한 군향고(軍餉庫) 등 군대와 관련한 건물이 확인됩니다.

오늘날 법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논쟁하는 가운데 판사의 결정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것처럼 당시

관찰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도둑질을 하거나 심각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조정하고 판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감영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고, 관찰사의 판결과 심문에 따라 곤장을 맞기도 하고, 금전으로 배상을 하기도

했으며, 무거운 죄를 짓거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옥살이를 했답니다.

 

 

갈유병(褐油甁)

조선시대(가원감영 연목 석축), 원주역사박물관

 

 

감영 향시(鄕試) 주관 

 

조선시대에 지방에 사는 지식인이나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향시(鄕試: 문과향시, 무과향시, 생원진사시 초시)를 거쳐야 했습니다. 즉 강원도내의 응시자들이 과거를 보려면 감영이 있는 원주로 모여야 했고, 감영에서는 향시를 준비하고 시행하였습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감사는 도회소都會所라는 '과거시험준비-시행위원회'를 설치하여 과거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도회소 주관 아래 경시관, 도사 등이 감사가 지정한 문신 수령인 참시관 2인과 함께 과거를 준비하고 채점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시험을 치르기 전 녹명소(錄名所)를 통해 응시자 본인에 대한 확인 및 증명서 발급의 업무가 있었습니다. 녹명소는 별도 기관이 아닌 임시기구였으며, 행정자료인 호적(戶籍)을 함께 대조해야 했기 때문에 감영이 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의 예비시험인 조흘강(照訖講)도 감영에서 시행되었는데, 감사는 생원진사시 초시, 문과 초시, 무과 초시 등의 향시를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속업무 또한 관장하였습니다. 응시자와 합격자의 성명 및 인적사항의 보고, 과거 시험의 과정인 초장-중장-종장이 실제로 어떻게 시행되고 몇 명이 몇 장의 시험지를 제출하였는가와 관련한 보고, 우수 답안지의 편집 및 보고 등은 모두 감사가 담당하였습니다.

감영에서 치른 과거시험(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등 기본 사항을 적은 명단을 사마방목(司馬榜目)』이라 하는데, 태조 때부터 1894년까지 치러진 총 230회의 시험결과를 보면 전체 47,997명의 합격자 가운데 원주에 거주한 사람이 570명이었다. 이는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은 합격자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만큼 원주의 향학열이 높고 지역에 우수한 인재가 많았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司馬試, 監試) 합격자 현황

서울(京) 안동(安東) 충주(忠州) 원주(原州) 개성(開城) 평양(平壤)
14,338명 783명 625명  570명 569명 529명

 

 

 

분청사기음각문병 (粉靑沙器陰刻文甁)

조선시대 (강원감영 연못 터) , 원주역사박물관

 

 

휴대용 업무편람(關東可考)
조선시대, 원주역사박물관

 

 

심약과 검율

 

심약은 관찰사의 건강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종 9품 관인 심약은 주치의처럼 감사의 건강과 질환을 살펴보았고, 관찰사의 순력에 동행하면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바치던 삼을 책임지기도 했고, 매년 1월부터 10월까지 여러 지역의 약재를 모아 중앙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원감영의 옛 건물 중에는 심약이 머무는 심약당(審藥堂), 약재를 모으는 채약방(採藥房), 인삼을 보관하는 보삼고(補蔘庫) 등이 있습니다.

재판을 하는 관찰사에게 법률적인 조언과 자문을 해주는 검율도 있었습니다. 종 9품 관인 검율은 관찰사의 법률 보좌관으로 법률의 해석과 적용, 집행에 대한 사무를 책임지며, 법규와 형벌 집행을 도왔습니다. 즉 관찰사가 범죄사건을 처리할 때 사건내용을 잘 살펴서 처리하는 방법을 자문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감영 내에서 검율이 머무는 곳은 검율당(檢律堂)이라 합니다.

                       원주감영 후원의 채약오 採藥塢

 

 

관찰사

 

조선의 왕이 각 도의 책임자로 보낸 관리를 당시에는 관찰사(觀察使) 또는 감사(監司)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 군대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에서 2년 정도에 걸쳐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목, 군, 현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이 어떻게 백성들을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관찰사가 여러 곳을 살펴보며 돌아다니는 일을 순력(巡歷)이라고 합니다. 여름에는 주로 영동지역인 강릉과 삼척에 머물렀고, 봄·가을·겨울에는 춘천과 원주에 있었답니다.

17세기 중반부터 관찰사는 원주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감사의 임기도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는데, 이때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건축됩니다. 관찰사는 주로 원주의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때때로 순력 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유영이라고 부릅니다.

관찰사는 높은 지위와 그만큼의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를 품계라고 하는데, 종 2종 2품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다른 부서에 있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또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관찰사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원주 강원감영 사료관 앞에 놓인 관찰사 조형물

 

비장과 중군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관찰사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을 함께 파견하였습니다. 정 6정 6품이나 종 5품의 5 도사(都事), 정 3품(무관) 정 3품(무관)의 중군(中軍), 종 4종 4품의 경력(經歷), 판관(判官) 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찰사의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을 비장(神將) 또는 막료(幕僚)라고 불렀습니다. 비장은 거두어들인 곡식 장부를 감시하거나, 관찰사를 대신해서 강원도 내의 농사 형편을 살피기도 했고, 식량이 모자라는 봄철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답니다.

비장청은 8명에서 1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됩니다. 중군은 관찰사의 안전을 담당하거나 군사업무를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 중군은 2년의 임기동안 관찰사를 보좌하고 감영에 있는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또 중군을 보좌하는 군관이 2 사람, 그 외 29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업무를 도왔는데 이들은 군대와 관련한 업무와 더불어 치안을 담당한 오늘의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관찰사 신완의 편지 (觀察使 申玩 簡札)

조선시대 (1646~1707), 원주역사박물관

 

 

124년 전의 기억 『정선총쇄록(善叢叢瑣錄)』의 강원감영 

 

『정선총쇄록(善叢叢瑣錄)』은 오횡묵(吳宖默)이 1887년 3월부터 1888년 8월까지 강원도 정선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쓴 일기입니다. 오횡묵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園)입니다. 19세기말 정선군수·자인현감 · 함안군수 · 고성부사지도군수(智島郡守) · 여수군수 등 각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을 두루 거쳤는데, 그는 재직할 당시 있었던 중요한 일과 여행을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오횡묵은 1887년 4월 15일부터 이틀간 원주의 강원감영을 방문했는데 당시 강원감영의 규모와 여러 건물들에 대한 감상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오횡묵은 윤 4월 4월 15일 원주의 안창(安倉)을 거쳐 만종(萬宗)에 이르렀고, 북문을 통해 감영에 들어와서 그 첫인상을 한 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천하의 고을을 두루 돌아보니  
팽호(彭湖)가 남방에서 우뚝하네
산후의 책들에 형설의 공부 쌓자니
등용문登龍門)에 머리는 세고 책들은 낡아갔네  
날으듯이 소매 떨치고 대황(大荒)에서 내려와서
동쪽으로 도성문 밖 이백 리를 나왔네 
여주의 주점에서 말을 먹이고
용진(用津)의 물 가에서 배를 저었지
앞으로는 큰 들판에 임하여 볼수록 널따란데
벽맹(碧甍)과 화동(畵棟높다랗게 치솟았네
철옹(鐵甕과 금탕(金湯천부(天府)는 웅장하고
종명(鐘鳴정식(鼎食인가의 연기 풍성하구나
그 당시 세운 것이 어찌 저리 웅장할고
글어 당겨 두루 감싼 건 산과 물이로다

거령(巨靈)은 흙을 움켜 창창하게 던졌고
풍이(馮夷)는 거품 뿜어내어 왕왕히 흐르네
창창하고 왕왕한 것은 서로 서리고 날아서    
서린 건 섬강(蟾江)이 되고 나는 건 치악(雉岳) 되었네
광천(廣川)은 그 앞에 마주하고
영원(영原)은 발꿈치를 둘렀는데
한 가운데 높다랗게 포정사(布政司자리하고
아영(亞營) 본부(本府마주보고 벌려있네 

조야(晁野)가 승평(昇平)하기 오백년이 된 것
공제(控制)와 승접(承接)을 위 아래로 한 까닭이고
동방이 평안하여 관청에 일이 없음은 
그 위에 어진 자사(刺史) 있음이었지
자래로 소중한 건 착한 삶 얻기에 달렸나니 
어찌 서하(西河)의 산천 험고할 뿐이리오

                                                                                                  『정선총쇄록(善叢叢瑣錄)』  윤·4월 15일

 

오횡묵은 감영의 거처에 짐을 풀어놓은 뒤 먼저 객사에 들러 보고 절차를 밟았고, 포정문을 지나 선화당에서 관찰사를 만납니다. 이후 안내자를 따라 징청문(澄淸門 내삼문)으로 나와 관풍각을 지나게 됩니다. 그는 감영의 후원 공간을 거닐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를 지었고, 중영(中營)의 담당자와 인사한 다음 감영에 소속된 여러 건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윤 4월일 오전 그는 정선을 떠나기 전 관찰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뒤, 정오경 감영의 동문을 나와 봉천(鳳川)을 건너 원주를 떠나게 됩니다.  

 

 

영리와 영노비

 

감영에는 오늘날 도청의 공무원과 같이 강원도에 사는 백성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각종 문서와 서류, 세금업무 등을 처리하던 영리(營吏)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원도 각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방의 향리들 중 한 사람씩 뽑아 임명하였습니다.

영리는 감영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로 관찰사의 명령을 받아 각 지방 수령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얼마나 잘 살피고 있는지를 감시했고, 관찰사가 순력 할 때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감영의 업무는 중앙에 6조(曹)가 있는 것처럼 6방(房)으로 나누어 영리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방(吏房)에서는 주로 인사와 비서의 업무를, 호방(戸房)에서는 세금과 농사 등에 관한 업무를, 예방(禮房)에서는 제사와 예절, 손님접대 등에 관한 업무를, 병방(兵房)에서는 군사 및 병선에 관한 업무를, 형방(刑房)에서는 재판과 죄인, 감옥에 관한 업무를 끝으로 공방(工房)에서는 수공업과 건물의 건축과 수리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각 방에는 비장(裨將)이라고 하는 수장을 두었으며 호방과 이방, 형방의 우두머리를 삼공(三公兄)이라고 불렀습니다.

영노비(營奴婢)는 감영과 병영에 소속된 노비로 건물을 새로 짓고 수리하는 일, 창고를 지키는 일, 군량을 운반하는 일 등을 맡아하였고, 대략 31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강원도의 중심도시 원주

 

원주에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강원감영이 설치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째로 원주는 중앙에 있는 왕의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되고 또 그 명령을 강원도에 속해 있는 다른 각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원주지역이 강원도에서 인구와 토지 면적이 가장 풍부한 지역으로 도시의 규모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편리한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편했습니다. 일례로 육로와 함께 남한강 물길이 서울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강원도 각 지방에서 거두는 대부분의 세금을 이곳 원주에서 모아 서울로 옮겼습니다.

이곳 원주에 강원감영이 자리 잡은 이유는 바로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고, 또한 강원도 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오는 물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며, 강원도 전체를 책임진 강원감영이라는 국가 기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주지방은 강원도 행정의 중심으로 기능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 권역과 군사 배치 권역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원주는 고구려 때에 신라와의 대치 관계 속에서 국원성(國原城)을 지키는 주요한 중심지역으로 평원군(平原郡)이라 불렸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소경의 하나인 북경(北原京)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5도 양계(五道兩界)의 지방제도에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는 영군(領郡) 중 하나로 수령이 파견된 원주(原州)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지방통치제도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원주가 변함없는 행정적·군사적 요지로 주목받아왔던 사실을 보여줍니다.

 

 

감영(監營), 작은 도성(都城)

 

강원감영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포정루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감영 외곽에 세워져 있는 4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은 각각 수명문(水明門-동문), 취적문(翠滴門-서문), 진남문(鎭南門-남문), 공북문(北門북문)이라 했는데, 이 4대문의 경계가 곧 강원감영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 되고, 여기를 지나 관찰사가 일하는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포정(布政)'이란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각 지방을 통치하는 기구였던 포정사(布政司)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여기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관찰사가 강원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등 뭇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정루 건립과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강원감영에는 선화당과 관풍각, 감사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집무실, 창고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감영의 규모는 점차 늘어나 1750년에는 31동 509칸, 1870년에는 33동 454칸, 1875년에는 43동 459칸, 1891년에는 55동 670 칸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감영 내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은 각기 고유한 기능과 용도가 있었는데, 각 건물은 당(堂)·사(舍)·각(閣)·누(樓)·청(廳)·방(房)·문(門)·창·고庫) 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전궐패(殿闕牌)를 모시고, 손님이 묶었던 객사(客舍),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내아(內衙), 후원에 있던 봉래각(蓬萊閣)과 부평각(浮萍閣), 관풍각(觀風閣), 환선정(喚仙亭), 군사시설인 중영(中營), 화약고(火藥庫), 군기고(軍器庫), 군향 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羅將)이 일하는 군(軍牢房),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司)이 있었습니다.

영주관(관풍각)

 

선화당(宣化堂) 후원(後園)

 

선화당은 관찰사가 일하던 곳으로 강원감영의 중심건물입니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행정과 농사, 세금을 거두거나 재판하는 등에 대한 첩보(牒報, 보고서)를 상세하게 읽어보았고, 문제가 되는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선화당 뒤편 후원에는 관찰사가 휴식을 하거나 사람들과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손님을 맞이하여 음악을 듣거나 춤을 감상하는 연회를 열었던 관풍각(觀風閣)과 환선정(喚仙亭), 봉래각(蓬來閣)이라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옛 선비들이 남긴 시에는 연못에 떠있는 누각과 정자를 오가는 조각배 두 척이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 밑에 매여 있었는 데, 감영의 아름다운 후원 풍경과 노를 저으며 아담한 누각과 정자를 드나드는 사람들 모습이 마치 신선이 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수 백 년 전에 있었던 많은 건물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무너지기도, 다시 세워지기도 하였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건물의 위치가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현재 강원감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옛 건물은 바로 포정루와 선화당입니다.

선화당 측면

 

영아전과 무임, 기술직 장인

 

감영에는 감사와 중군 및 영리를 보조해 주는 비서격의 업무를 보던 영아전(營衙前), 각종 군사 및 경찰업무를 담당했던 무임(武任),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장인(匠人) 등의 사람들이 함께 일했습니다.

영리(營吏)는 감영의 6房 행정사무를 담당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당시 강원도내 26개 군현 중 14개 군현에서 뽑힌 120명의 영리가 감영에서 교대로 일했다고 합니다.

영아전은 영리와 비슷한 사무를 담당한 이들로 감영이 소재한 곳, 즉 원주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충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영 내에서 각종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무임이나 장교, 관노비도 대부분 감영 소재지에 거주하였습니다.

강원감영에는 군관(軍官) 3명, 화사(畵師) 1명, 사자관(寫字官) 1명, 집사(執事) 16명, 지인(知印) 51명, 사령(使令) 28명, 군뢰(軍牢) 27명, 세악수(細樂手) 10명, 관노[營奴] 42명, 관기[營妓] 19명, 영비(營婢) 9명 등이 있었고, 이 사람들은 집사청(執事廳)이나 관노청(官奴廳), 비장청(神將廳), 영노청(營奴廳) 등에서 각기 배정된 역할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나막신 (木鞋 목혜)

조선시대 (강원감영연못 터)

 

쌍륙말 (雙六馬)

조선시대 (강원감영, 연못), 원주역사박물관

 

여러 무늬 수키와 (複合文瓦)

조선시대, (강원감영 포정루)

 

내아 상량기 (內衙上樑記)

조선시대, (강원감영내아)

 

글씨 새긴 암키와 (銘文瓦)

조선시대, (1760, 강원감영 내아 터)

 

 

정미의병(丁未義兵), 그들은 누구인가?

 

누구일까? 총을 들고 있는, 얼핏 앳되어 보이기도 한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1876년(고종 13) 한반도의 조선 정부는 일본과 억지 조약을 체결하면서 자유로운 권리를 하나씩 빼앗기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7월 고종황제는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일제는 조선의 외교, 사법, 경찰을 비롯한 한 나라가 지닌 고유한

권리를 앗아갔습니다.

1907년(정미, 丁未) 고종의 퇴위와 함께 그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서울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은 크게 분노하여 항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8월 2일 원주감영에 있던 진위대(鎭衛隊) 군인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당시 군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로 구성된 민병(民兵)과 함께 일제에 대항했는데, 이들이 바로 정미의병(丁未義兵)입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시작된 정미의병은 이전의 의병부대와는 달리 해산된 군인과 함께 공부하는 유생, 평민과 천민, 상인과 노동자, 농민 등 전 사회계층이 구성원으로 참여해서 펼친 항일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인이 참여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와 조직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아울러 산간지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정미의병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전국적인 활동

 

원주진위대 소속이었던 특무정교(特務正校, 군인 장교) 민긍호(閔肯鎬)는 동료인 박준성(朴準成)·손재규(孫在奎) 등과 함께 각자의 의병(義兵) 부대를 편성했고, 강원도와 충청북도 · 경기도 일대에서 일제에 대항해 맹활약하였습니다..

정미의병은 이전 1905년에 시작된 을사의병(乙巳)에 이어 전국적인 항일의병으로 성장, 확대되었습니다. 강화지역의 허위(許蔿와 연기우(延基羽), 호남지역 장성의 기삼연(奇三衍), 나주의 전해산(海山), 함평의 김태원(金泰元), 심남일(沈南一), 무주의 문태수(文泰洙), 임실의 이석용(李錫庸), 경기 북부일대에는 이강년(李康秊)과 경상도 영해의 신돌석(申乭石), 황해도 평산의 박정빈(朴正彬), 이진룡(李鎭龍), 평안도의 김여석(金汝錫), 함경도의 홍범도(洪範圖), 차도선(車道善) 등 많은 인물들이 의병부대를 일으켜 항전했습니다.

 

1908년 전국에서 일어난 정미의병 세력은 총 48개 부대(鎭), 1만여 명에 달하는 군인들로 13도 창의군(三道倡義軍)을 결성,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했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으면서 무산되었고, 여러 의병부대는 분산되어 독자적인 항일 전을 수행해 갔습니다.

이후 정미의병 활동을 펼치던 많은 이들은 활동 무대를 북쪽으로 옮기면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항전을 계속 펼쳐나갔고, 해방(解放)의 토대를 만들어낸 대한독립군(獨立軍)으로 계승·발전하게 됩니다.

 

사료관 실내

 

 

감영(監營)의 옥(獄)으로 끌려간 순교(殉敎)의 영혼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대대적인 탄압이었습니다. 그때 천주교인들은 약 1만 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천주교 박해를 반대하였던 정조(正祖) 임금과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사후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잡은 벽파) 세력은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며 탄압하기 시작했고, 중국인 주문모와 이승훈(李承薰) · 정약종(丁若鍾) · 최창현(崔昌) · 강완숙(姜完淑) · 최필공(崔必恭) · 홍교만(洪萬) · 김건순(金健淳) · 홍낙민(洪) 등 300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살아남은 교도들은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 ·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 · 소백산맥의 깊은 산골로 숨었는데, 이후 1839년(헌종 5) 3월부터 10월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진행됩니다..

 

기해박해 대상지역은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 등으로 천주교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적되었고, 비록 투옥을 모면한 사람일지라도 가산과 전답을 버리고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기록인 『己亥日記(기해일기, 앵베르 외 편저)에 따르면 참수되어 순교한 사람이 54명이고, 감옥에서 죽고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또한 6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원주감영에서 순교한 천주교도 중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은 최해성(崔海成 요한 1811-1839), 최해성의 고모인 최비르지타(1783-1839) 그리고 김강이(金鋼伊시몬, ?~1815)입니다.

 

 

감영(監營)의 옥(獄)에서 핀 순교(殉敎)의 빛

 

“네 종교를 배반하면 국왕께 충실한 백성이 되고, 재산도 모두 돌려주겠다."

"원주 지방을 다 주신다 해도 저는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원주 부론면 손곡리 교우촌에 살았던 최해성(요한)은 1839년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었습니다. 마을회장으로 일하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감영의 포졸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21차례의 문초와 18번의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 1839년 9월 6일, 29세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최비르지타는 최해성의 고모로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가 감영의 관원이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밝혔다가 조카와 같이 고문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도로 활동했는데, 남편이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황사영(1775-1801)을 박해로부터 숨겨준 죄로 유배당하자 같이 따라갔습니다.

이후 남편이 병사하자 최해성의 부친에게로 옮겨와 살았고, 감영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배교를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교살을 당하게 됩니다.

 

김강이는 충청도 서산지역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천주교도가 되면서 많은 재산을 다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동생 김창귀(타대오)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피신을 다니다가 경상도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만들었고, 이후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에 정착했습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김강이는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체포돼 안동에 수감되었고, 이내 원주 감영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온갖 문초에도 굴하지 않다가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형벌로 인한 상처가 심한 데다 이질까지 앓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고, 8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1815년 12월 5일,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관찰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일, 한 해의 농사

 

관찰사가 순력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엇보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풍년일 때는 사람들의 경제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고,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울수록 나라의 살림 또한 풍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흉년일 때는 반대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나라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야 했습니다.

실제 관찰사가 매달 왕이 있는 중앙에 보고하는 문서에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강우량, 즉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에 대한 측정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생산량은 얼마나 되는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조사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농경과 함께 전국 각 지방의 관청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해서도 매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가거나 오는 전입·전출 현황, 주소지 변경과 출생·사망 신고 등 인구의 증감 사항에 대한 통계도 주기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원주 강원감영의 야경이 궁금하면... 

 

원주 강원감영은 야경이 너무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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