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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수원박물관과 함께 있는 한국서예박물관

by 즐풍 2023. 12. 15.

2023_209

 

 

 

2023. 10. 20. 금요일 오후에 관람

 

 

수원화성을 둘러본 후 수원화성박물관에 이어 이번엔 수원박물관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먼저 수원박물관부터 관람하고, 같은 건물에 별실로 마련된 한국서예박물관에 들어섰다.

순서로 보면 수원박물관부터 포스팅해야겠지만, 사진이 적은 서예박물관부터 작성한다.

전시된 유물은 많으나 필요한 사진만 몇 장 찍은 걸 정리해 올린다.

 

어느 박물관이나 그렇듯 안내문을 그대로 옮긴다. 

 

 

 

 

 

서예書藝

 

서예란 문자를 매개로 하는 조형 예술입니다. 서예의 필수 도구는 전통적으로 붓, 벼루, 먹, 종이가 있습니다. 벼루에 물을 따르고 먹을 간 뒤 이때 생겨난 먹물에 모필毛筆로 이루어진 붓을 적셔 백색의 화선지에 글씨를 써서 예술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서예는 한자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작자의 심상을 표현하는 예술 분야이자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애호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예'라는 용어를 광복 이후인 1945년부터 사용하였고,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서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문자를 다루는 예술인 서예는 서체도 다양합니다. 한자는 문자 형태의 발달과 변화에 따라 생성된 다섯 가지 서체로 나뉩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고유의 문자 한글이 있으므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한글 서예가 발달하였습니다. 한글 서예의 서체는 크게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 『월인천강지곡』  등 판본에 쓰인 글자를 기본으로 한 판본체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달한 '궁체'가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고결한 정신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글씨 쓰기를 연마하였고 서예를 중요한 교양으로 중시하였습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뜻의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예는 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글씨는 곧 마음과 정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구대 암각화 盤龜臺 岩刻畫

국보 제285호(國寶 第285號)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암석岩石에 새긴 그림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시베리아, 몽고 등의 동북아시아 대륙과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널리 분포합니다. 우리나라 암각화로는 울산 태화강 강변의 반구대와 천전리 川前里, 고령의 양전동良田洞이 유명합니다. 반구대 암각화의 원래 크기는 가로 10m, 세로 3m이며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표현 대상 전부를 쪼아내는 '면 쪼기' 기법과 그 윤곽만을 쪼아낸 '선 쪼기' 기법으로 새겨졌습니다.

새겨진 것들은 크게 바다 동물과 육지 동물, 사람,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다 동물로는 고래, 물개, 거북 등이 있고 육지 동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보입니다.

사람은 얼굴만 새겨진 경우와 바로 선 모습, 옆으로 선 모습, 배에 탄 모습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노와 비슷한 물건 등이 있습니다. 왜 이런 그림들을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그중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감을 잘 잡고 또 그런 사냥감이 아주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긴 것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이 같은 암각화는 우리나라 조각이나 그림의 초기 예로 여겨지고 있는데, 문자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사람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에서 글씨의 출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반구대 암각화는 탑으로 되어 있는 것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이미지 처리한 것입니다.

 

 

 

 

 

오세창이 쓴 <서시기례일출> 徐市起禮日出

오세창(1864~1953) | 20세기 | 종이에 먹

 

경남 남해 금산면 바위에 새겨진 글자 '서시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을 위창 오세창이 옮겨 쓴 것이다. 서시과徐市過此 또는 남해각자 南海刻字로 불리었다. 1860년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吳慶錫이 중국 연경의 학자들에게 글자 해독을 문의하였고 이때 금석학에 뛰어났던 하추도(河秋濤 1823~1862)가 '서시기례일출'이라 풀었다고 한다.

오세창은 이사李斯가 전서를 만들기 이전 진秦나라 때의 주문籀文이라고 하면서 동방의 석문石文 가운데 최고最古라고 평하였다.

 

 

삼국~고려시대 서예

 

세계 문화사 속에서 글씨가 예술의 한 분야로 우대되는 것은 중국문화권뿐이다. 중국문화권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

漢字의 뿌리는 상형문자라서 자체의 기본 모습이 회화성繪畵性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글씨와 그림의 뿌리는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 개념도 등장하였다. 한자는 그림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기호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예'라는 독창적인 예술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고대 역사가 시작되는 하夏, 은殷, 주周의 서예 관련 유물을 통해 서예의 기원에 대해 살펴본 후 진秦을 거쳐 서예가 예술로 승화되는 한漢과 진晋을 알아본다. 또한 명필들의 개성 넘치는 서체가 대거 출현하는 당 이후의 화려한 서예 문화도 파악한다. 이어서 우리나라 서예가 시작되는 삼국시대를 비롯해 이를 발전시켜 나간 통일신라 시대와 화려하게 꽃을 피운 고려시대의 다양한 서예 유물을 접하면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예가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자리 잡게 되었는지 확인한다.

 

 

<단양 신라 적성비> 탑본 丹陽新羅赤城碑 搨本

545~550 | 종이에 탑본

 

충북 단양군 적성산성赤城山城에 위치한 <단양 신라 적성비>를 탑본한 것이다. 1978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땅속에서 발견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했던 여러 정책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새겨진 글자는 총 400 여자 정도이나 판독된 글자는 약 3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예서에서 해서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서풍을 보이며 행간과 자간이 일정한 간격으로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당 태종 글자로 집자한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탑본 唐太宗 集書 原州興法寺址真空大師塔碑 搨本

당 태종(599~649) | 940년 | 종이에 탑본

 

강원도 원주시 흥법사에 940년(태조 23) 건립된〈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앞면을 채탁하여 만든 탑본첩이다. 현재 절터만 남은 흥법사에는 비석의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고 비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비석 앞면은 고려 태조(877~943)가 지은 비문에 맞춰 최광윤崔光胤이 당나라 태종(599~649)이 직접 쓴 <진사명晋祠銘〉과〈온천명溫泉銘〉의 글자를 모아 새겼다. 당 태종 글씨는 집자비集字碑 글씨로 이용될 정도로 애호되었다.

 

 

김구가 쓴 <이겸인 묘표> 탑본 金絿 筆 李兼仁墓表 塌本

김구(1488~1534) | 1515년 | 종이에 탑본

 

자암自庵 김구가 쓴 외조부 〈이겸인 묘표〉의 탑본이다. 자암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양사언楊士彦,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서예의 4대가로 손꼽히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을 대표하는 명서로 추앙받았다.

글씨는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의 위진고법魏晉古法을 추구하여 일가를 이루었고 살던 곳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로 불렸다. 후에 자신의 글씨를 중국 사람이 사갔다는 말을 듣고는 붓을 들지 않아 전해지는 필적이 드물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쓴 오언율시 탑본 安平大君 筆 五言律詩 搨本

안평대군(1418~1453) | 15세기 | 종이에 탑본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행초서를 나무판에 모각模刻해 탑본한 것이다. 내용은 이백李白, 등의 오언율시이며 말미에 안평대군의 자字 '청지淸之'가 쓰여있다. 알려진 필적 가운데 대자大字에 속하며 송설체를 바탕으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필법을 구사하여 율동감이 두드러진다.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쓰고 글자와 글자 사이를 잇거나 간명하게 처리하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진적眞蹟이 드물고 모각이 다수 전한다.

 

 

이광사가 전서로 쓴 오언시李匡師 筆 篆書 五言詩

이광사(1705~1777) | 18세기 | 종이에 먹

 

원교圓嶠 이광사가 두보杜甫의 오언시 <희관즉도부제단편喜觀即到復題短篇》을 전서로 쓴 작품이다. 필획의 굵기를 균일하게 운필하고 엄정함을 갖추어 썼다. 이광사가 전·예서로 쓰인 여러 비문 글씨를 배웠다고 자술했듯이 진나라秦代 석각에 쓰인 글자를 바탕으로 썼다.

이것은 본래 서첩이었기에 각 면의 하단에 이광사의 다양한 인장이 찍혀 있다. 낙관은 [광사匡師], [李匡師印이광사인], [道甫도보]이고, 처음에 찍힌 두인은[東海上圜嶠主人동해상원교주인]이다.

 

 

조선후기

 

백하 윤순의 뒤를 이은 원교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촉체와 함께 조선 고유색을 완전히 드러내자 조선 사회를 크게 풍미하였다.

청조 고증학의 부속 학문인 금석학이 발달하고 비학 이론이 전해져 오던 시기에 추사 김정희가 등장한다. 고증학을 바탕으로 비학파의 혁신적인 서법 이론을 주창하며 추사체를 창안하니 서풍이 크게 변하였다. 추사의 지인과 제자들도 추사체를 추종하였는데 정수를 체득하지는 못하였다. 구한말에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자아 상실과 전통 단절을 겪으며 더 이상의 서예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주자성리학을 지키며 망국의 울분을 달래던 유학자들에 의해 조선 선비의 서법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훈유시 訓諭詩

 

1743년(영조 19) 관례를 치르는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에게 훈유한 어제어필 사언시와 이에 딸린 당부의 글이다. 영조가 짓고 쓴 훈 유 4편을 석각 한 인본첩에 실려있다. 

弘毅立志 寬簡御衆 넓고 굳세게 세우며, 너그럽고 소탈하게 사람을 다스려라

公心一視 任賢使能 공정한 마음으로 일관되게 보며, 현명한 이에게 맡기고 능한 이에게 시켜라

 

 

영조 어제 어필 필진도  英祖 御製 御筆 筆陣圖

영조(1694~1776) 1746 | 석각 탑본

 

영조가 1746년(영조 22) 3월에 짓고 쓴 <필진도>를 돌판에 새긴 뒤 탑본한 것이다. 글씨는 왕희지의 진체晉體와 조맹부의 촉체蜀體 서풍으로 각각 구분하여 썼다. 「필진도」는 중국 동진東晉의 여류서예가 위부인衛夫人이 지은 글이며, 제자인 왕희지가 이를 읽고 <제위부인필진도 후 題衛夫人筆陣圖後〉를 지었다. 영조는 이 글을 지을 때 <희지필진도>를 참고하여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 내용은 다르며 '정심正心'을 강조하고 있다.

 

 

무량수각 無量壽閣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대미상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전각이며 극락보전極樂寶殿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의 필적으로 유명한데, 같은 모각이 해남 대흥사와 서울 운현궁 등에 전합니다. 김정희 특유의 예서풍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예로 특히 마지막 문閣자의 門을 좌우를 바꾼 것이 흥미롭습니다.

 

 

근대명인 近代名人

 

구한말에서 광복 이후에 활동했던 근대 명인들의 글씨에서 다양한 서풍을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 추사의 말년제자 소치小癡 허련許鍊을 비롯하여 정학교, 김성근金根, 김가진 등은 조선후기 이래의 전통적 서풍을 구사했습니다. 이에 비하여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김돈희金敦熙 이한복 등은 중국 서풍이 좀 더 가미된 양상을 보입니다. 이밖에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이나 특유의 한글체를 창안했던 손재형 등은 강한 개성을 보여줍니다.

 

   예서 연광정시 隷書 練光亭詩

   노원상(盧元相 1871~1926)| 1928년



   호정 노원상은 평양 출신의 서화가입니다. 

   같은 지역 평양에서 활동한 조광진曺匡振의

   글씨를 근본으로 삼아 공부했으며, 


   이 밖에도 이희수李喜秀, 차헌규車憲圭,
   
   김규진金圭鎭등을 통해 서예의 법을 배웠습니다.



   예서로 쓴 이 작품은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손꼽히는 경승지이자 평양 대동강에

   위치한 누각 연광정을 소재로 한 시입니다. 


   글자는 파책(부채꼴처럼 펼쳐지는 획법)이

   생략된 고예풍古隷風으로 썼습니다. 

   금석金石을 통해 옛 글자의 원형을 이해하고자

   했던 조광진의 서예 연구 인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마지막 글자 '산山'자에서 조형성이 매우

   돋보입니다. 

   노원상 58세 때 작품입니다.

 

 

강산여화 江山如画

김규진(金圭鎭 1863~1933)

 

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평양의 명필 눌인 조광진(振 1772~1840)의 지두서指頭書 <강산여화 江山如>를 따라 쓴 작품입니다. 조광진의 유전 작품은 많지 않지만 추사 김정희의 발문이 달린 <강산여화>는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안도 중화 출신인 김규진은 외숙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배운 뒤, 이어 조광진의 서풍에도 관심이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부드럽고 두터운 필의를 함유하여 한나라 예서풍으로 쓴 조광진의 지두서를 김규진 역시 임서하듯 붓으로 그 기운을 실어 쓴 작품입니다. 말미에는 조광진의 작품과 일치하기 위한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듯 간결하게 해강海圖' 이라고만 썼습니다.

두인은 [천람天覽]이며, 말미의 인장은 [김규진인金圭鎭印]입니다.

 

 

풍청천묘숙 風淸千畒竹

김용진(金容鎭 1878~1968) | 1958년

 

'청량한 바람이 부는 너른 대나무 밭'이라는 뜻이며 김용진이 쓴 대자大字 예서입니다. 한나라 장천비張遷碑>필의를 바탕으로 골기骨氣를 살려 고졸한 예서풍을 구사했습니다. 1958년 음력 6월에 쓴 필적입니다.

낙관한 인장은 [용진인容鎭印]. [김씨구룡산인인金氏九龍山人印]입니다.

김용진은 안동 김씨 세가의 후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2살에 세마를 시작으로 수원군수, 내부 지방국장 등을 지냈습니다. 젊어서부터 서화에 관심이 많았고 고서, 골동품 수집에도 취미가 있었습니다. 전·예·해·행서 각 서체의 글씨를 두루 구사했으며 그림에서도 사군자를 비롯하여 수선, 모란, 등꽃, 연꽃, 장미 등 문인화풍의 채색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어부도 漁夫圖
   지운영 池雲英 (1852~1935) | 1928년


   백련白蓮 지운영은 1904년 상해로

   유학하여 상해 화단의 화풍을 다양하게 

   체득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는 근대기

   한국화단의 중심에 서 활동하였습니다.


   이 어부도는 지운영이 지향했던

   은일적 삶을

   보여주며 은은하고도 근대적 색채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화제를 통해 춘고 春皐 박영효(朴泳孝 1861

   ~1939)에게 증정하기 위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학도 일품부수 松鶴圖 一品富壽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등 4인 합작 | 1914년

 

안중식이 선학仙鶴, 조석진趙錫晉이 노송老松, 이도영李道榮이 모란牧丹을 그린 뒤 김응원金應元이 제서題書한 합작도입니다. 학은 고귀한 기상을 상징하는 영물로 인식되어 선비의 이상적인 성품과 비유되었는데 전통 회화에서는 소나무와 짝을 이루어 그려졌습니다.

대폭의 화면 중심부에는 엷은 먹으로 윤곽을 그린 뒤 수묵 채색한 고고한 학이, 그 뒤에 소나무 등걸을 사선으로 포치 하였습니다. 소나무 뒤에는 화사한 색감의 일본식 채색 화풍을 반영한 모란이 있습니다. 예서로 '일품의 부와 장수를 누리소'라

쓴 뒤 행서로 '갑인甲寅 여름에 담헌澹軒의 자리 위에서 공사 마친 기쁨을 축하한다. 잘못된 곳이 있으면 대가들이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썼습니다. 우측 하단의 인장은 [삽십만매화화화실三十萬梅華畫室]입니다.

 

 

단계연 端溪硯 

중국 | 현대

 

벼루 가운데 최상품으로 손꼽히는 단계연은 중국 당대唐代 무덕(武德 618~626) 연간에 광동성 고요현高要縣의

'단계'라는 계곡에서 생산된 벼루다. 단계연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단계연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닥에 보이는 미세한 무늬인 청화에 있다. 벼루를 물에 적시거나 벼루를 물에

담그면 청화가 뚜렷이 보인다. 이 단계연 역시 청화靑花와 외곽에 정교하게 조각된 십장생을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크기가 매우 커서 압도적이며 감상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사례로 보인다. 

 

 

단계연의 확대한 그림인데, 나무와 동물 그림이 정교하다.

이 정도로 섬세하게 조각할 정도의 벼루라면 가공하기 좋은 석재일 것이다.

 

양반가 사랑방의 서재

 

 

사군자 四君子

 

사군자란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을 말합니다. 매화는 초봄에 제일 먼저 꽃망울을 틔우고,

난초는 깊은 산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국화는 늦가을 서리를 이겨내고,

대나무는 눈 내리는 겨울 추위에도 푸른 잎을 간직합니다.

이런 각 식물의 특성을 군자의 은은한 풍모와 변치 않는 절조에 비유하곤 합니다.

또 '세한삼우寒三友'라 하여 어떤 역경에도 변하지 않는 송松, 즉, 우리 조상은 의미 있게 여겼습니다.

고려 때 문인들 사이에서 묵죽, 묵매가 유행되었고, 사군자 그림에 뛰어난 조선시대 인물이 많았습니다.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 신위申緯는 묵죽으로, 어몽룡魚夢龍은 묵매로, 이하응李昰應 등은 묵란으로

유명합니다.

 

               
   매화도 梅花圖
   김유탁(金有 1875~1939)


   화면 하단에서 상단으로 뻗어가는 매화 고목의

   형상을 중심 구도로 담묵淡墨을 이용하여

   잔가지를 거침없이 구사한 작품입니다. 


   가지보다 더 옅은 먹으로 그려 넣은 꽃송이들이

   번다하게 달려있어 매화꽃이 절정인 이른 봄

   계절을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고목과 잔가지

   모두 물기를 가득 머금은 윤묵潤墨을 사용하여

   생기 가득합니다. 


   상단의 행서 제서는 김유탁이 직접 지어 쓴 시로

    "서로가 의지하니 그만 심어도 되련마는 하나 같이

   봄기운이 뿌리까지 닿았네. 만약 그대가 장생술을

   믿지 않는다면 한번 숲속에 들어가 태가 붙었는지

   보게나. 

   
   彼此相依合休栽 一般春意到根荄

   如君不信長生術 試去林間看接胎"라는

   내용입니다.

 

 

문방사우 文房四友

 

문방사우란 선비들이 글방에서 친구처럼 늘 가까이하는 네 가지의 문방구를 말합니다. 지紙, 필筆, 묵墨, 연硯

즉 종이, 붓, 먹, 벼루입니다. 또 글방의 네 가지 보배라는 뜻에서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도 하는데, 이는 송나라

소이간蘇易簡의 『문방사보文房四寶』 란 책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또 붓을 걸쳐두는 필가筆架, 먹 가는 물을 담는 연적硯滴, 종이를 누르는 서진書鎭, 또 벼루를 담는 연상硯箱,

편지나 종이를 끼워 두는 고비 등도 글방에서 필요한 집기입니다.

이밖에 글방에서는 서화나 책에 인장을 자주 찍습니다. 이번 전시에 한국과 중국의 인각과 인장 재료가 다양하게

출품되었습니다.

 

 

심여철석 心如鐵石

손재형(孫在馨 1903~1981) | 1955년

 

소전素筌 손재형이 『삼국연의三國演義』 중 “자룡은 환난에서도 나를 따르면서 마음이 철석같았으니 부귀에 동요될 사람이 아니다.

子龍從我於患難 心如鐵石 非富貴所能動搖也”에서 글자를 취하여 예서로 쓴 작품입니다. 소전의 나이 53세 음력 12월 6일에 썼습니다. ‘심여철석’이라는 내용을 상기한 듯 내리그은 필획은 굵고 호쾌하며, 특히 ‘심’ 자 '석'자의 자획을 좌우 대칭이 되도록 의도한 점은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줍니다. 소전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 서예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특유의 조형성을 부여한 ‘소전체素筌體'라는 서풍을 창안하고 많은 추종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심능종 인장 沈能種 印章

19세

 

심능종(1775~1827)의 본관은 청송이고 자는 화필 華弼이다. 1801년 (순조 1) 사마시에 합격하여 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정조 재위 시절 벽파의 영수로 알려져 있는 심환지沈煥之(1730~1802)의 아들이다.

이 인장은 심능종의 묘 이장 시 출토되었는데 인면印面에 [화필]이 새겨져 있다. 심능종이 생전에 애용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태석이 새긴 인장 金台錫 印章

김태석(金台鎬 1874-1951) | 1935년 

 

성재 김태석이 새긴 인장 3과입니다. 두인頭印은 인면印面에 [좌금우서 낙천지명左琴右書 樂天知命]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호인雅號印과 성명인에는 각각 [하산도인霞山道人], [이씨각종지인李氏覺鍾之印]이 새겨져 있습니다.

즉 김태석에 의해 새겨진 '하산 이각종'이라는 인물이 사용하던 인장이었습니다. 인장 옆면에 새겨진 측관側款을 통해 1935년 봄 성재 김태석이 황해도 벽성碧城을 여행했을 때 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운사 백파율사 禪雲寺 白坡律師碑

1855년(철종 6) 건립 | 1994년 탑본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경기문화연구회 기탁

완당학사阮堂學士 김정희金正喜 찬병서撰幷書

 

 

다음은 경주 통일신라의 흥덕왕릉에서 출토된  십이지신을 순서대로 탁본한 걸 찍은 사진이다.

두 개를 하나씩 묶어 함께 올린다.

 

 

 

 

 

 

 

 

 

 

 

 

같은 건물에 있는 수원박물관이 궁금하면...  

 

수원박물관의 수원화성 옛날 사진 볼만한데

2023_210 2023. 10. 20. 금요일 오후 수원박물관에는 한국서예박물관도 같은 건물에 있다. 한국서예박물관은 앞서 포스팅했고, 수원박물관은 전시 규모가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원화성 안에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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