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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수원화성박물관 자세히 살펴보기

by 즐풍 2023. 12. 15.

2023_208

 

 

 

2023. 10. 20. 금요일 오후

 

 

수원화성을 밖에서 먼저 돌고, 다음은 안에서 또 돌고 난 뒤 수원화성박물관에 들어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원화성을 온전히 안팎으로 돌며 제대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돌든 주요 포인트마다 안내문이 있으니 성벽의 구조에 대하여 대략 알게 된다.

같은 안내문이 안팎에 다 있으므로 한 번 더 읽는다면 복습하는 셈이다.

 

수원화성박물관에 들어서면 수원화성에 대한 더 많은 자료를 알게 되지 않을까?

1층은 대체로 정조를 모시며 총애를 받은 채제공에 대한 연대기록물이 주류를 이룬다.

수원화성은 채제공과 정약용이란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축성이 가능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수원화성과 정조대왕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겼으니 출처를 따로 표시하지 않는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그리고 신도시 수원건설을 위한 정조의 노력을 알리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입니다. 수원화성의 동북공심돈을 본 딴 건축물로 2009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습니다.

수원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동서양의 군사 시설 이론이 잘 반영되어 있으면서 방어기능이 뛰어나, '성곽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평강채씨 연원

 

평강平康 채씨蔡氏는 신라 부마駙馬의 후손으로서 고려에 와서 경평공景平公 송년松이 장상將相을 겸했고 그 아들 정楨이 평장사平章事로서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지고 정효공靖孝公이란 시호를 얻어 원종묘정元宗廟庭에 배향됨으로써 평강 채씨의 가호를 얻었다. 이후 자손이 연이어 관직에 올랐으며 고려말에 양생陽生이 군기 소감軍器少으로 있었으나 불사이성不事二姓*의 정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임피臨陂에 숨어 살았다. 이조에 들어와서 공의 7대조에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를 지낸 난종蘭宗이란 분이 있어 유문절공柳文節公 희춘希㫩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자는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죽촌竹村 경선慶線이고 자는 성균진사증이판成均進士贈吏判 충연忠衍이고 자子는 화순현감증 이조판서和順縣監贈 吏曹判書 진후振後이며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이 있었는데 이분은 태학사太學士 문혜공文惠工 호주湖洲 유후裕後의 제弟이며 공(채제공)의 고조高祖다.

*불사이성: 두 성씨를 모시지 않는다. 곧 고려 왕씨와 조선 이씨 두 왕조를 모실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번암선생집해제 발췌

 

 

평강채씨 지석 平康蔡氏誌石

19세기 | 2점 37.4×26.8×2.9 수원화성박물관

 

평강채씨 시조 채송년蔡松年 이하 19세 채윤공蔡倫恭까지의 계보를 새긴 지석이다. 채송년은 고려 때 평장사 지냈고 시호는 경평이다. 이어서 글자를 파내고 다시 새긴 흔적이 있는데 “4대는 의심스러운 상태로 전하니, 족보에 실려 있지 않다 傳疑 四代, 譜乘不載.”라고 기록하였다.

배위는 임진군부인臨津郡夫人 김씨金氏이며 묘소는 평강 平康유진면 금벌동에 있다. 조상의 이름, 자, 호, 관직, 배위, 묘소에 대한 내용으로 지석 앞뒤로 기록되어 있다.

 

 

 

정조 친필 번암시문고 현판 御製御筆 書樊巖詩文稿 懸板

1791년 1점 37.3×75.5 | 수원화성박물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던 채제공은 72세 때인 1791년(정조 15) 그동안 자신이 지은 시문을 정리해 묶었다. 이를 살펴본 정조는 감상평을 겸한 어제시를 친히 짓고 써 주며 채제공을 격려하였다. 

이때 지어 준 어제시 '서번암시문고  御製御筆 書樊巖詩文稿' 새긴 현판이 번암 집안에서 전승되어왔다. 어제시는 채제공과 그의 선조인 채유(1599~1660)의 문장을 함께 칭찬하는 내용으로 정조도 번암을 비롯한 평강채씨 문장가들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채제공 초상화 초본

 

 

정조가 채제공을 위해 지어준 치제문 蔡濟恭 致祭文 

 

정조가 1799년(정조 23) 세상을 떠난 채제공의 제사에 애도의 뜻을 담아 지은 제문이다. 제문의 내용은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군주를 섬겨 오랜 기간 관직 생활을 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뜻이 굳건하고 일을 잘 처리하여 오직 믿을만한 신하였다는 것이다.

채제공은 1798년 12월 중순부터 병이 생겨 1799년 1월 18일에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50여 년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삼정승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홀로 재상을 도맡을 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정조는 수차례 사관을 보내 병문안을 하였고 성복成服하는 장례일인 1월 21일 좌부승지 유한녕兪漢寧을 통해 치제문을 보냈다. 그리고 삼 년 동안 녹봉을 주고 장례일 전에 시호를 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듯 정조는 각별하게 아끼던 채제공을 위해 제문과 애도문 등을 직접 지어 주어 추모의 정을 표현하였다.

 

가경嘉慶 4년 기미년(정조 23, 1799) 1월 21일,

국왕은 근시신近侍臣인 좌부승지左副承旨

유한녕俞漢寧을 보내어, 고 판부사 채재공의 제사에 고한다.

 

삼가 행하는 화성의 일은 내가 비록 경영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이 모두 맡고 있는데 이에 곧 일을 마치게 되었네.

해마다 원침園寢(현륭원)에 참배할 때 나는 진실로 누구와 함께 해야 하나.

먼저 가고 뒤에 돌아오는 것이 길 안내자와 같았구나.

경이 제사를 돕고 시에 화답하는 것이 늘 있었던 일상이었는데,

이제 모든 게 끝났구려 내 마음이 너무도 아프다오.

경의 시는 문집에 모아져 있고 경의 편지는 상자에 가득해라.

존경과 애통함이 모두 이르렀고 마음과 예가 진실로 하나 되었네.

‘擧直措枉*’(곧은 것을 들고 굽은 것은 둔다) 네 글자를 부절로 삼노니,

경은 비록 이미 떠났지만 어찌 네 글자를 강구하고 도모치 않으리.

경의 뛰어난 영혼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구나.

영혼이 있다면 이 술잔을 들게나.

*거직조왕擧直措枉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옳지 못한 사람은 내버려 둔다는 뜻.

 

 

정조가 채제공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어준 뇌문 蔡濟恭 賜祭誄文

 

1799년 3월 26일 채제공의 장례일에 정조가 각신(규장각 소속 신하)을 보내어 내린 애도문이다. 채제공의 행적을 찬양하며 애도의 뜻을 담아 정조가 직접 지은 글이다. 『홍재전서』 권 25 문숙공 文公 채제공蔡濟恭장일치제문致祭文」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어 있고 『번암집』의 권수 하下에는 「사제뇌문」이란 명칭으로 수록되어 있다.

『홍재전서』에는 430 편의 애제류 산문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특히 애제류 산문에서 신하에게 내린 치제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그의 문학적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정조는 주로 노론계 서원의 배향인물 등에 치제 하였는데 남인인 채제공에게 치제문, 사제뇌문을 지어주었던 것은 임금과 신하의 특별했던 관계를 보여 준다.

                                                                                               1799년 52.2 ×72.0cm, 경기도유형문화재

 

가경嘉慶 4년 기미년(정조 23, 1799) 3월 26일,

의정부 영의정 규장각제학 화성부유수 장용외사 사시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각신閣臣을 보내어 그 영전에 대신 영결을 고하게 하노라.

.....

서루西樓에 걸린 초상화, 위로는 수성壽星에 응할 터이고,

백발白髮과 상홀象笏에는, 오히려 전형이 남았다네.

이에 화성華城에 현륭원을 조성하여, 청승靑繩(임금의 행차)이 길에 올랐다네.

....

세상에 드물게 나는 인물이건만, 경 또한 기미성箕尾星을 타고 떠났지.

조정에 노성한 대신이 없으니, 나라의 일 장차 어찌할 것인가.

또한 듣건대 어버이께 효성스럽기로, 경만 한 이가 드물었다지.

이제는 다 끝이 났으니, 눈물만 한결같이 뿌릴 따름일세.

나라 사람들 슬퍼서 방아를 문득 그쳤건만, 나는 아직 궤장을 내리지 못하였네.

사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 것은, 서가에 가득한 문고文稿이니.

인쇄에 부쳐, 장차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네.

친히 뇌문을 지으니, 오백여 마디의 말일세.

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 나의 글에 부끄러움은 없네.

아들 홍원에게 이르노니, 선친 욕되이 말고 한결같이 따르라.

 

 

초상화 완성본에서는 모자를 바꿔 썼다.

 

교지

 

 

정조가 그린 파초그림 正祖大王筆芭蕉圖 

18세기 후반 / 종이에 수묵/84.2×51.3cm /보물 743호 /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복제)

 

왼쪽 위에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 낙관이 있다.

이 파초그림은 서화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정조가 그린 국화그림 正祖大王筆菊花圖

 

18세기 후반 / 종이에 수묵/86.5x51.3cm / 보물 744호 /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복제본)

오른쪽 위에 정조의 호인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낙관이 있다. 이 국화그림과 파초그림은 쌍폭으로 추정된다.

 

 

정조어필 비망기備忘記 

1796년 63.2X152.5cm,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98호

 

1796년(정조 20) 2월 12일 좌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는 비망기다. 1789년(정조 13)과 1790년 두 차례 좌의정을 지내고 1793년(정조 17)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은 1795년 12월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조가 사간원 헌납 유하원을 유배시키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를 가르친 적 있던 채제공이 유하원을 두둔하자 정조는 직접 어필로 비망기를 내려 파직을 명하였다. 왕이 친필로 비망기를 내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왕의 기강은 진작되지 못한 채 사사로운 뜻만 멋대로 행해지면서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도다. 영의정을 지냈고 원로에 있는 자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보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홀로 뜻을 저버리는 과오를 범하였으니, 옛날 대신들이 임금을 섬기는 방도보다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좌의정 채제공에게 파직의 전법을 시행하노라.

 

 

 

 

 

 

훈유사편 訓諭四篇

 

1743년(영조 19) 영조가 사도세자의 관례 때 교훈이 될 만한 글 4편을 석각 한 인본첩이다. 내용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대리석 석판 22매에 새겼는데, 석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4구의 <훈유시>를 비롯하여 훈유의 간행을 명한 <수훈원량元>, 사도세자의 자를 관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한 <예자설>, 사도세자에게 화압 즉, 수결로 '달'자를 내려주며 그 의미를 되새기라고 당부하는 <예압설>이 그 내용이다. 영조의 화압이 '통'이니 사도세자에게 내려 준 입자와 합하면 '달'이 된다.

違 子押卽通字, 而受賜昔年也. 其欲勉䲱, 手寫付爾, 用于將來. 奚比於日後, 其臣之製獻,

'달達 '나의 화압花押은 즉 '자이니 예전에 하사 받은 것이다. 힘써 타이르고자 내가 직접 써서 너에게 주니 앞으로 사용하도록 하라. 조만간에 신하들이 지어서 바친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영조예필 - 송죽 英祖睿筆 松竹 

1700년경 | 110.2×64.8cm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26호 | 수원박물관 | 영인본

 

영조가 7세(1700년, 숙종 26) 때 쓴 글씨이다. 족자 뒷면 하단에 흥선대원군(1820~1898)이 영조의 글씨라고 밝힌 기록과 낙관이 찍혀있다. 어린 나이에 쓴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필력이 굳세고 당당하다. 왕의 글씨를 어필御筆이라 하고, 왕세자가 쓴 글씨를 예필睿筆이라 한다. 

 

英廟七歲時御筆 真稀世重珍 須敬守寶藏

영조 임금 7세 때의 어필로 참으로 세상에 드문 귀중한 보배이니 공경히 지키고 보배로이 간직하라.

 

[인장] 석파石坡 대원군장大院君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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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직접 짓고 쓴 시 현판 英祖御製御筆 懸板

1750년 48.5x85.0cm | 수원박물관

 

영조가 1750년(영조 26) 9월 15일 직산현(천안의 옛 지명) 영소정 대하에 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직산현 영소정기稷山靈沼亭記> 의하면, 1665년(현종 6) 현종이 온양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직산 동헌에 머물게 되었는데, 앞에 작은 연못이 있어 연꽃을 심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후 1717년(숙종 43) 3월 숙종이 온양으로 가다가 이곳을 찾아 연꽃이 무성한 것을 보고 선왕인 현종의 일화를 되새기며 추모의 정을 실어 시를 지었다고 한다. 훗날 영조는 이와 같은 선왕들의 옛 일을 회고하며 감흥이 일어 부왕인 숙종이 지은 시의 운을 빌려 칠언절구 수를 지었다고 한다. 그중 한 수를 현판에 새겨 이를 기념하고자 한 것이다.

 

奉和御韻

삼가 어운(숙종이 지은 시의 운을 빌려 시를 짓노라

 

奉讀御詩靈沼亭  삼가 어시(숙종이 지은 시)를 영소정에서 읽노라니

追惟丁酉涕先零  정유년(1717) 추억하여 눈물이 먼저 흐르네

於乎聖德乾坤大  아! 천지처럼 큰 성덕을

小子筆端豈敢形  소자의 붓으로 어찌 감히 형용하리

 

崇禎紀元後 三庚午九月 既望拜予敬書

1750년 9월 절 올리며 받들어 쓰다.

 

 

 

사도세자가 쓴 무안왕묘비명 탑본 武安王廟碑銘 搨本 

1785 37.5x26,2cm

 

사도세자가 지은 무안왕묘비명 탑본이다. 무안왕은 중국 촉나라의 장군인 관우의 시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51세가 되는 1785년(정조 9)에 무안왕묘비를 건립하였다. 관우의 사당인 동묘에 현존하며 관왕묘비라고도 한다.

이 비는 사도세자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비문은 사도세자가 생전에 숙종이 지은 관우상명운을 빌려 지은 것이다. 전서로 ''경모궁예제예필"이라고 했는데,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은 사도세자를 뜻한다. 글자의 크기가 약 9cm에 이르는 큰 해서로 필력이 힘차고 왕성하여 사도세자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이 비 뒷면에는 정조가 짓고 쓴 무안왕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사도세자 무덤, 현륭원의 조성

조선시대 왕실 무덤은 왕과 왕비의 경우 능(陵),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의 친어머니인 경우는 원(園), 왕족이지만 세자가 아닌 경우 묘(墓)라 하였다.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墓)로 불리며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일반 왕자의 예법으로 치르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왕실 및 백성들에게 세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정조 역시 정통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조는 1776년 3월에 즉위하면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영우원(園)으로 격상하였고 경모궁(景慕宮, 현 혜화동 서울대학교 병원 내)이라는 사당도 만들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흐른 1789년(정조 13), 정조는 다시금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읍치가 자리 잡고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명하신 분을 융성스럽게 받는다는 의미를 담은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면서 정통성 회복을 꾀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도세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왕실원인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다.

 

 

 

사도세자의 권위 회복추진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날 정조가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영조는 세손이 정치적 대립 구도 속에서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을 경우 왕위 계승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세손을 일찍 죽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훗날 진종. 1719~1728)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하였다. 이는 생부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복권시키기 위한 준비이자, 반역죄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처지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를 왕위의 정통성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였다. 따라서 정조는 아버지에게 '장현'이라는 새로운 존호를 올리고 영우원과 경모궁의 격상. 현륭원 조성 등 사도세자 사업을 착실히 진행해 나갔다.

 

 

수원화성의 축성 계획

 

1790년 부사직(副司直) 강유(姜遊 1722~?)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자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수원에 성곽을 쌓을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의 건설로 정치, 사회, 경제, 국방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서학을 익힌 규장각 소속의 신진관료인 정약용에게 축성 계획을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의중을 꿰뚫고 중국과 일본의 성(城)은 물론 중국을 통해 입수한 서양과학기술 서적을 연구하여 1792년 성을 쌓기 위한 이론과 기술을 정리한 보고서인 성설(城)을 정조에게 올렸다.

정조가 직접 축성의 기본방향을 밝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에는 정약용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 설계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그는 실학에 관심을 가진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성리학만이 아니라 토목학과 건축학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능력을 정조에게 인정받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성 계획에 참여하였다.

정약용은 기존에 있던 조선의 축성술을 총망라하고 중국과 일본 성곽의 장점을 참고하였다. 더욱이 축성의 편리한 시공을 위해 거중기, 유형거 등 여러 가지 기구들을 설계하였는데, 기술자들의 안전과 효율성을 높임은 물론 축성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정약용이 저술한 「기중도설(起重圖)」에 거중기에 대하여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으며 1794년 화성을 건설할 때 처음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명나라 때 중국에 온 선교사 겸 과학자 요한네스 테렌츠 (Joannes Terrenz, 중국 이름 등옥함鄧玉函)가 「기기도설寄器圖說」이 참고가 되었다.

이밖에 화성 축성과 관련된 정약용의 글은 「성설(城說)」, 「옹성도설(甕城圖說)」, 「포루도설(砲樓圖說」, 「현안도설(懸眼圖說)」, 「누조도설(漏槽圖說」, 「총설(總說)」 등이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1년 36.822.8cm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영인

 

1794년(정조 18)에서 1796년(정조 20)까지 축조된 수원화성에 관한 경위와 제도 의식 등을 기록한 종합공사보고서이다. 책의 체재는 권수 1권, 본편은 제1권에서 제6권까지로 축성공사와 관련된 내용이며, 3권은 증축공사에 대한 내용으로 총 10권 책이다.

성곽 시설물의 도면뿐만 아니라 축성도구, 재료의 쓰임과 비용, 중앙관리로부터 공사인부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임금지불에 대한 모든 내용이 총망라된 책으로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건축보고서의 진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城役儀軌)』

 

수원화성 축성은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에게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이어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 발간되었다. 책의 체재는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은 제1권에서 제6권까지로 축성공사와 관련된 내용이며, 부편(附編) 3권은 행궁의 증축공사에 대한 내용으로 총 10권 책이다.

책의 구성은, 책머리에는 이 책의 편찬방법 · 경위 · 구성방침을 실은 범례가 있고, 권수에는 본편과 부편의 총목록을 실은 총목)과 성곽축조에 관계되는 일지를 실은 시일(時日), 성곽축조 및 의궤편찬에 관한 관청의 관리명과 담당업무를 실은 좌목(座目), 그리고 성곽과 각종 건조물과 공사에 사용된 부재와 기계 · 도구 등의 그림 및 그 설명을 실은 도(圖)를 수록하였다.

이 책은 그 내용만으로도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지만, 정교한 활자나 높은 수준의 인쇄술을 잘 나타낸 표본적인 서적으로도 귀중한 것이다. 그 밖에도 조선후기 축성공사의 실태와 무기 발달에 대응한 축성법을 잘 나타냈고, 대역사에 소요된 물동량과 경영의 본말을 알 수 있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다. 더욱이 이 책은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200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명니의궤  

 

명니의궤는 정조 집권 후반기 역점 사업인 현릉원 행차, 혜경궁 홍씨 탄신 잔치, 수원화성 축성에 관한 방대한 내용이 날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본 의궤이다.

정조는 '의궤등록'을 읽기 어려워하는 혜경궁 홍씨를 위해 1797년에 한글의궤 제작을 지시하였다. 당시 완성된 「명니의궤」는 총 48권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13 책만 프랑스 소재 2개의 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활자본 의궤와는 다르게 채색으로 그려진 필사본 권 39 「성역도城役圖」는 「화성성역의궤」 목판화 도판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이전에 보지 못했던 화성행궁의 주요 건물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성역의궤 』 와 비교해 볼 때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수원화성을 확인할 수 있고 혜경궁 홍씨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정조의 효심까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이후 간행된 왕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왕실의례를 한글로 기록한 의궤 편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27년(순조 27) 간행된 『조경뎐진쟉정례의궤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1797년 34.2 ×22.0cm |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및 프랑스 동양어대학언어문명도서관(BULAC) (영인본)

 

 

석재로 쌓은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 보은읍 오정산에 위치한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은 신라시대 서기 470년에 축성된 대표적인 석축성(石築城)으로,  3년에 걸쳐서 축성했다고 하여 삼년산성으로 불린다. 체성은 내외벽면을 나란히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석재를 축조해 올린 협축(夾築) 방식으로 축성되었다. 

 

 

벽돌로 쌓은 강화외성

 

강화외성은 수원화성과 더불어 벽돌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전축성(城)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1233년 내성을 쌓았고, 1237년에 흙으로 외성을 쌓았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이를 보수하여 사용하였으며 병자호란 후 외성 안쪽은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개축하였다. 강화유수 김시혁의 건의로 1743년(영조 19)에 외성을 벽돌로 다시 쌓아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성곽의 결정체,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성곽과 이웃나라 성곽이 지닌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설물을 고안한 성곽 건축의 결정체다. 수원화성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 성곽 문화가 지닌 우수성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 성곽의 장점을 결합하여 만든 성곽이다. 각각의 시설물들은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도 않으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해당 기능을 가진 시설물을 배치한 점은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또한 화성에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다. 축성 기간 중 지나치게 춥거나 더울 때는 공사를 중지하고, 기존의 설계를 바꿔가면서까지 민가의 훼손을 최소로 줄였다. 수원화성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려 한 정조의 의지가 담긴 새로운 개념의 성곽이다.

 

 

수원화성 전도

 

 

유럽 최강의 요새 크론보르성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크론보르성은 화포 공격에 대비하여 수원화성처럼 성벽 안쪽을 흙으로 채운 내탁 방식에 망루 등의 방어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낮지만 별 모양처럼 빗겨 세워져 있어 포탄의 충격을 완화하기에 용이한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벽돌 쌓기의 중국 평요고성

 

명청시대에 축성된 평요고성은 한족 도시 양식의 전형적인 예를 갖추었다.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26차례의 증축을 거치면서 벽돌로 쌓은 성곽이 되었다. 이 성곽에는 수원화성처럼 성 안에 사는 읍성으로 지금까지도 관청, 사찰, 청대에 건축된 점포 등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들여쌓기의 일본 히메지성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수원화성처럼 '규형 쌓기 (지반에서 중간 부분까지는 들여 쌓다가 위로 갈수록 바깥으로 내어 쌓는 방식)'를 하여 성벽을 일직선으로 쌓았을 때 무너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에서는 함경도 경성의 읍성이 대표적인 규형 쌓기였다. 이 모형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히메지성의 천수각 부분이다.

 

 

화성행궁 華城行宮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6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관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에 걸친 행차를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을 참배할 때마다 행궁에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뜻있는 지역 시민들과 수원시가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수원에 지은 정조의 궁궐, 화성행궁

 

행궁은 휴양, 피난, 능행(陵幸) 등을 위해 국왕이 왕궁을 나왔을 때 임시로 생활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10여 개의 행궁이 있었다. 정조는 1789년 이후 매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을 찾을 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처음 화성행궁은 1790년에 340칸으로 완성되었으나 수원화성 축성 과정에서 대대적인 증축을 하여 576칸으로 확대되었다. 화성행궁은 국왕이 항상 머무는 정궁(正宮)인 창덕궁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철저하게 정궁의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정조가 1804년 국왕의 지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화성행궁에 거처하고자 이를 대비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의 정문 이름은 신풍루(新豊樓)로 정조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성행궁의 중심 건물은 봉수당(奉壽堂)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 이곳에서 왕실잔치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마련되었다.

국왕의 행차 시에 사용했던 행사용 건물인 낙남헌에서는 수원의 백성들을 위한 과거시험과 화성 축성의 준공식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낙남헌 앞담장은 높이 세우지 않고 열어놓아 언제든 백성들이 찾아와 국왕에게 억울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가 돌아가신 후 그의 아들 순조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지어 정전인 운한각(雲漢閣)에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다.

 

 

팔달문 각자 八達門 刻字

 

팔달문은 1794년 2월 28일 터 닦기 공사를 시작으로 8월 25일에 상량하고 9월 15일에 문루가 완성되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반원형 옹성은 1795년 4월 21일에 착공하여 5월 12일 홍예가 이루어지고 5월 20일에 완공되었다. 팔달문 각자는 옹성 안의 성문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패장 가선 이도문 85명이라고 새겨져 있다. 팔달문 각자는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갈아낸 무사석 위에 새겨져 있다. 수원화성 위에 4대문 중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유경 전령 李儒敬 傳令

 

1796년(정조 20) 6월 23일 서울에 있는 장용영 내영에서, 화성성역의 도청을 지낸 이유경 (1747~1804)에게 보낸 전령이다. 이유경은 수원 출신의 무관으로 함평 이씨 이창운의 아들이며 1774년(영조 50) 무과에 급제하여 1777년(정조 1) 선전관을 거쳐 정조대 주요 군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전령은 현륭원과 수원부의 무사武士들 중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13명에게 전달할 시상품 내역을 알려주며 이를 나누어 주라는 내용이다. 장용군 이좌인李佐仁에게는 부상으로 곧장 무과 전시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직부첩 문서를 내렸다. 다른 별관 향무사鄕武士 출신 12명에게는 베, 쌀, 부채 등을 상으로 지급하게 하였다.

 

 

조선의 상업중심지, 수원

 

정조시대에는 상업을 천대시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장사와 유통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확대되었다. 조선 전체의 상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했던 정조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 신도시에 한성부와 유사한 시전을 설치하여 조선의 상업중심지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상업 정책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다.

 

성내의 시전 설치 

시전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용품을 파는 시장의 역할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18세기말 새롭게 이전된 수원 읍내에도 신풍루 앞 대로 좌우에 입색전(비단을 파는 상점), 어물전(생선과 과일을 파는 상점), 목포전(무명 모시 목화를 파는 상점), 상전(소금과 일용 잡화를 파는 상점), 미곡전(잡곡과 백미, 담배와 국수를 파는 상점), 지혜전(종이류와 신발을 파는 상점), 관광전(관을 담는 궤인 곽을 파는 상점), 유철전(놋쇠와 쇠를 다루는 상점)이 있었다.

도시 중심부에 상점이 늘어서는 경향은 서울을 비롯한 18세기 지방 대도시의 중요한 변화로, 장안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가로변에 기와집 상점들이 처마를 잇대고 계속 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조가 추구한 대로 왕성한 상업 도시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수원의 상업발전 정책

좌의정 채제공은 수원의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에서 부호들을 모아 수원에 시전을 짓고 장사를 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수원과 인근지역에 5일장을 설치하여 신도시를 중심으로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말게 하여 도시를

발전시키자고 하였다. 그러자 해남 지역에 있는 윤선도의 후예들이 수원으로 올라와 상업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790년(정조 14) 5월 수원부사 조심태는 보다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그는 수원 지역 인물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잘 아는 자를 택해서 자본금을 주고 장사를 하게 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돈 65,000냥을 조달하여 수원 상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신도시가 만들어진 지 불과 2, 3년 만에 전국 최고의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결과 수원에는 성내 시장과 성외 시장이 만들어져 새로운 상업 발전의 모델이 되었다.

 

만석거와 둔전

수원화성의 북쪽에 만들어진 인공 저수지 만석거둔전인 대유둔의 모습이다. 만석거에 모인 관개수를 사용하기 위해 만석거 남단 수로 입구에 수갑(水閘)을 설치하였다. 수갑은 중국 강남지역에 보급된 수문으로 판목(板木)을 이용하여 쉽게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다. 이 수갑으로 들어온 관개수는 무자위(수차)를 통해 논으로 흘러들어 모내기에 사용될 수 있었다.

 

 

당시 만석거의 둔전으로 쓰이던 농지는 이제  '국립식량과학원'의 중부작물부로 활용하고 있다

 

 

신풍루에서의 진휼

 

혜경궁 홍씨 회갑연 다음날 정조는 어머니의 은혜가 모든 백성에게 미치도록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사민(四民: 홀아비, 과부, 고아, 자녀 없는 노인) 50명과 진민(賑民: 가난한 사람) 261명에게 쌀을 지급하였고, 이곳뿐만 아니라 산창, 사창, 해창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이로써 수원의 사민 539명, 진민 4,813명에게 약 368석의 쌀이 지급되었다. 이는 그 당시 약 6만 명의 수원 인구 중 약 10분의 1에게 혜택을 베푼 셈이다. 을묘년에 왕실에서 맞이하는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정조의 마음이었다.

 

 

 

봉수당 진찬연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마련하였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외가인 풍산 홍씨 일가를 초대하여 신료들과 함께 술잔이 올려질 때마다 춤과 음악으로 어머니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였다.

눈앞의 펼쳐진 장면은 잔치의 마지막 순서인 선유락이다. 선유락은 뱃놀이를 뜻하며 가장 많은 인원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화려한 궁중무용이다.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

 

크나큰 복록으로 새로운 명을 맞이하니      菲祿穰穰迂命新

생황 불고 퉁소 불어 청춘을 머물게 하리     鳳笙鸞吹駐青春

땅은 관화에 부합해 삼축소리 비등하고      地符觀華騰三祝

해는 유홍절에 이르러 육순에 올랐도다.     歲屆流虹濟六旬

내빈 외빈은 그대로 꽃 핀 숲의 모임이요    內外賓仍芳樹會

동반 서반은 꽃보다 고운 사람들일세          東西班是勝花人

해마다 오늘같이 즐겁기만을 원하노니       年年只願如今日

장락당 안에는 술이 몇 순배나 돌았는고     長樂堂中酒幾巡

 

                                  (홍재전서 6시 2,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을 기뻐하며 읊은 시)

 

1795년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는 궁중음식이 차려지고 궁중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궁중무용이 공연되며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왕실잔치답게 진찬연에 참석한 왕실과 내외빈뿐만 아니라 일반 군사들의 잔치상도 마련되었다.

무대를 장식하는 꽃 말고도 무대 위의 여령, 악사, 초대 손님까지 모두 머리에 꽃을 꽂았으며, 진찬상과 손님들에게 마련된 잔치상의 음식에도 꽃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꽃을 궁중채화라고 하는데, 궁중행사의 목적에 맞게 비단, 모시, 종이 등으로 제작하여 장식하는 조화다.

 

왕실 연회의 종류와 등급을 규정짓는 상징물로 음식상에 올려지는 채화를 상화라고 한다. 잔치의 주인공인 혜경궁의 진찬상에는 자기 그릇에 담긴 70종의 궁중음식과 소별미(일종의 다과상) 12종이 올려졌으며, 42개의 상화(床花)로 존엄을 표시하고 장수를 기원하였다. 또한 국왕 정조를 비롯한 내외빈, 문무백관 등에게 차려진 잔치상에도 역시 품계에 따라 종류와 수량을 달리하여 상화가 장식되었다. 궁중상화를 비롯한 궁중채화는 아름답되 사치스럽지 않게 성대한 왕실잔치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여민동락의 낙성연

 

행사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놀이를 마련하여 모두가 함께 즐기도록 하라!

1794년 1월 7일 화성 축성을 시작한 이래 2년 9개월의 시간이 흐른 1796년 9월 10일 마침내 공사가 끝났다. 이날 정조는 매우 감격하여 화성 축성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또한 축성을 기념하고자 10월 16일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수원의 백성들을 모아 화성행궁의 낙남헌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낙남헌에 대형 차일을 치고 중앙에 화성 축성 총리대신인 채제공과 수원유수인 조심태가 자리하고, 대형 단에는 공사 감독관들이 자리했다. 아래 넓은 마당에는 화성의 선비들, 백성들, 인근 승려들도 참가했다.

무대 위에서는 서울과 수원 무희들의 궁중무용이, 아래 마당에서는 광대들의 사자놀이와 산대회가 펼쳐졌다. 이렇듯 화성 낙성연은 단순한 축성 축하 잔치가 아니라, 축성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화성의 희망찬 미래를 축원하는 대동의 잔치였다.

 

 

낙성연에 참여하지 못한 정조

 

당시 궁중에 홍역이 돌아 9월 22일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가 홍역에 걸리자 정조는 원자를 데리고 규장각 옆 이문원으로 피신을 갔다. 행여 원자가 홍역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고자 하는 계획과 정조 자신이 상왕이 돼 화성으로 내려가겠다는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게 되므로 정조는 낙성연 참여를 포기하였다.

 

 

조선 최대의 국왕행렬 1795년 수원행차

 

정조는 임금의 궁궐 밖 나들이 행행(行幸, 행차)을 자주 했다.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차를 했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위해 수원행차도 13회나 하였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의 실천이었다.

특히 1795년에는 정조의 재위 20년이 되는 해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는 해로써 왕실의 경사를 만백성과 함께 하고자 대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수원으로 행차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정조는 왕권의 건재함을 알리며, 자신의 친위세력과 백성들을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을묘년 수원행차의 시작, 돈화문 출발

1795년 윤 2월 9일, 정조와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수원으로 향했다. 이날부터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8일 동안 화려하면서도 의미 있는 행차가 진행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수원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거행함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함과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민폐를 최소화하며 왕실의 경사를 백성과 함께 나누고자 한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는 국왕의 행차였다.

 

국왕의 위엄을 보여준 수원행차

을묘년 수원행차는 왕실여성을 포함한 왕족들과 정승, 판서 등 신하들이 동원되었고 궁녀와 호위군사들까지 대략 6,3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였다. 이처럼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재정 능력, 그리고 한나라의 국왕으로서 과감하게 8일 동안 궁궐을 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정조의 왕권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795년 수원행차는 행차기간으로 보나 동원된 인원수로 보더라도 그야말로 조선시대 최대의 국왕 행차였다.

 

 

 

 

 

33년 만의 재회, 혜경궁 홍씨의 현륭원 참배

 

정조는 수원행차의 첫 행사로 현륭원 참배를 계획했으나 장거리 여행으로 지쳐있는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하루 뒤로 미루었다. 수원에 도착한 셋째날(윤2월12일) 새벽,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계시는 현륭원으로 향했다. 정조의 누이동생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 역시 뒤따랐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33년 만에 무덤을 찾은 혜경궁 홍씨는 그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설움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였다.

 

철의 여인,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1735~1815) 1735년(영조 11) 6월 도성의 서대문 밖 평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풍산이고 아버지는 홍봉한(洪鳳漢)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李氏)다. 10살이 되던 1744년 1월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왕세자빈이 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불행은 남편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1762년 5월 영조의 명령에 의해 사도세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을 겪었다.

사도세자 서거 후 혜빈)이 되었고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궁(宮)으로 격상되었다. 말년에는 궁중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한중록』을 집필하여 사도세자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였다. 1815년(순조 15) 81세 고령의 나이로 서거하였으며 현륭원에 마련된 사도세자 옆자리에 합장되었다.

 

 

전령傳令

1793년|71.4×106.3cm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47호 | 영인본

 

정조는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으로 조성하였다. 이를 보호한다는 목적 아래 1793년(정조 17)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내·외영으로 구분하여 외영을 수원부에 신설하였다. 더욱이 수원화성 축성을 앞두고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사 水原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키며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직하게 하는 직제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전령은 바로 이날 수원유수에 제수된 채제공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임명한 문서이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정조의 수결이 있고, 인장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하였다.

 

 

 

장용외사에게 장용영 절목의 문제점을 아뢰라는 전령 傳 

1793년 55,0x171.2cm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47호

 

국왕 친위부대 장용영이 1793년(정조 17) 내·외영으로 확대 개편됨에 따라 1월 25일 장용영 절목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5월 24일 장용영 내에서 장사 채제공에게 보낸 전령이다. 그 내용은 새 절목에서 내영이 외영을 관할하고 외의 인사업무에 내영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채제공에게 이 문제를 중앙에 아뢰어 고치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틀 뒤 채제공은 비변사에 장계를 올려 절목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확대 개편한 장용영 외영이 중앙의 내영에 예속된 군대가 아니라 동등한 기구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화성을 지키는 조선 최강의 군대 장용영

 

1785년(정조 9)       1787년(정조 11)     1788년(정조 12)

장용위(壯勇衛)  → 장용청(壯勇廳)   →  장용영(壯勇營)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창설한 장용영(壯勇營)을 한양과수원에 두었다. 한양도성에 주둔한 장용군사를 장용영 내영'이라 하였고, 현륭원과 화성을 호위하고자 수원에 주둔한 장용영 군사를 장용영 외영'이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들을 통틀어 장용영내외영(壯勇營內外營)이라고 불렀다.

장용영의 군사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무예 24기로 모범을 삼아 훈련하였다. 장용영외영은 초기에는 현륭원과 화성행궁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화성축성 후 그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수도 남쪽을 방어하는 중심 부대가 되었다. 장용영 외영은 화성을 중심으로 5위 체제로 편성되는 장락위와 수원 외곽 5읍에서 수원을 수호하는 협수체제로 분리되어 있었다. 정조는 수원에 주둔한 장용영 외영을 특별히 장락위라고 하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수원 때 왕을 호위했으며, 수원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실시한 결과 조선 최강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등패 藤牌 직경 3자 7촌 (일종의 방패)

 

2022. 6. 2. 화성행국에서 벌이는 무예 24기 공연할 때 쓰던 등패는 이렇게 방패로 쓰고 있었다.

 

 

 

깍지와 촉돌이 決·鐵機

조선후기 · 일제강점기 규격 다양

 

깍지는 활시위를 잡아당길 때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엄지손가락 첫마디에 끼워 사용하는 도구이다. 긴 뿔이 달린 형태는 수깍지 뿔 없이 반지 모양의 형태는 암깍지로 구분한다. 촉돌이 혹은 촉도리라고 하는 도구는 화살촉을 화살에 끼우거나 뽑을 때 혹은 헐거워진 것을 조정할 때 사용한다. 몸체의 뾰족한 부분으로 확대에 박힌 촉을 뽑았다. 깍지나 촉돌이는 주로 짐승의 뿔이나 뼈로 만들었다.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 玳瑁白銀裝玉具寶刀

 

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마감하여 제작한 환도다. 은으로 장식하고 코등이는 백옥을 사용하였으며, 칼자루에는 보도와 잘 어울리도록 중간에 매듭을 맺고 술을 달아 격식을 높였다. 이 칼은 칼집의 아랫마개 장식, 윗마개 장식을 제외하면 철종 어진 속의 어도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여 높은 신분의 인물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을묘년 수원행차 때 정조나 최고 지휘관도 이러한 칼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도

조선후기, 철제 / 77cm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단병기로, 환도라고 부르는 것은 칼집에 띠돈(고리)이 있기 때문이다. 이 환도는 상어껍질과 뿔로 장식되어 있다.

 

 

환도

조선후기 철제 171.8㎝

전형적인 관제官製형태의 환도이다. 띠돈이 옥으로 되어 있으며 장식은 은으로 되어있어 높은 신분층의 사람이 사용한 것이다.

 

 

녹로 노 轆轤 弩

 

장거리 발사를 위해 녹로를 사용하여 보다 강력하게 활시위를 당겨주던 노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과 벽돌로 쌓은 부분 및 누각모두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1710호로 지정된 서북공심돈은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시설물로서 화서문을 보호하고 적을 공격하는데 용이한 시설물이다. 치 위에 벽돌을 이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아서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내부는 3층으로 만들어져 있고 2층과 3층 사이에 마루를 깔았으며 사다리를 놓아 위아래로 통하도록 하였다. 군사들이 공심돈 내부의 작은 구멍으로 백자총, 큰 구멍으로 불랑기포를 쏘았으며, 장수는 맨 위 누각에서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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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수원

 

정조는 수원을 무대로 개혁 의지를 실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백성들을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펼쳐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역사는 그를 탕평군주, 개혁군주, 애민군주로 평가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칭송하였다.

220여 년 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이곳에서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해 나갔다. 이후 수원은 수도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탈바꿈해 갔고 수원이 성장할수록 왕권의 지엄함도 높아져갔다. 이렇듯 수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정조의 개혁정책은 왕권을 강화시켰고 이는 왕실과 관료들보다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위한 길이었다. 힘없는 민초들을 위해서 쓰는 국왕의 힘, 이것이 바로 정조가 바라던 진정한 왕권 강화였다. 비록 정조의 급작스런 승하로 인하여 꿈은 스러졌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정조의 개혁정신은 이곳 수원에서 계승되고 있다.

앞으로도 수원화성은 체계적인 복원 계획에 따라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성장하여 정조의 개혁정신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거중기 擧重機

 

거중기는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지금의 기중기와 비슷한 도구이다. 위와 아래에 각각 4개씩의 도르래를 연결한 후 그 끈을 물레에 감아당기면 무거운 물건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어 수원화성 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편집한 사진들 샘플, 바닥에 펼친 책을 보기 좋게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