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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수원박물관의 깜짝 놀랄 수원화성 옛날 사진

by 즐풍 2023. 12. 16.

2023_210

 

 

 

2023. 10. 20. 금요일 오후

 

수원박물관에는 한국서예박물관도 같은 건물에 있다.

한국서예박물관은 앞서 포스팅했고, 수원박물관은 전시 규모가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원화성 안에 수원화성박물관이 있기에 양쪽에 분산되기도 했겠다.

그러나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볼 수 없던 1950년대 전후의 수원화성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전시관이 아니 복도에 걸린 액자 사진이었는데, 즐풍은 그 사진에서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625 전쟁이 지나간 상흔이 그대로 남은 수원화성을 보며 가슴이 아렸다.

전쟁의 복구가 끝나고 국력이 신장되자 이젠 온전한, 어쩌면 처음보다 더 정교하게 복원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수원화성의 사진 속 풍경과 현재의 상태를 비교할 기회를 만들었다.

 

안내문을 대부분 그대로 옮긴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많은 문인석과 공적비가 즐비하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입구엔 선경직물의 특별전시가 있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전시를 개최하며

 

2023년은 탄탄한 경제 특례시를 목표로 하는 수원특례시 1주년이며, SK그룹의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모태는 1953년 수원시 평동에 터를 잡은 선경직물입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옷 하나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국내에서 합성직물을 생산한 선경직물이 있었습니다.

선경화섬, 선경합섬을 설립하여 원사 생산에 이르기까지 선경직물은 수원 경제 발전의 물줄기 속에서 도약했습니다.

기업 운영하기 좋은 수원특례시의 수원박물관이 수원 산업 발전의 밑거름이자 직물 생산기지의 역사인

선경직물을 소개합니다.

 

 

 

최종건 1969년 신년사

 

나는 수원 토박이라는 것을 자랑해 왔으며, 한때도 내 마음이 나의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에 한국에서 제일가는 공장을 세워보겠다는 일념으로 한평생을 뛰어왔습니다.

내가 선경직물을 일으켜 세울 때의 나의 밑천은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과 낡아빠진 직기 15대뿐이었습니다.

 

 

폐허 위 공장재건모형

2021년 55.5×120.0×37.5cm 수원선경산업관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선경직물 모습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1953년 최종건은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로 변한

방직공장을 인수하였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폐허가 된 선경직물 건물을 복구하고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서

부서진 방직기 부속을 찾아 직기를 다시 조립하여 선경의 기틀을 세웠다.

 

 

'닭표 안감'으로 제작된 닭 모형

2021년 폭 50.0×높이 100.0cm 수원선경산업관

 

1954년 선경직물이 생산한 인조견 '닭표 안감'으로 제작된 닭 모형이다. '닭표 안감은 물에 한 번 세탁해 다림질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재단이 가능한 당시 유일한 안감이었다. 세탁해도 줄어들지 않는 성질 때문이었다.

닭표 안감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선경직물은 전국 직물업계에서도 명성이 쌓였다. 1955년 말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 박람 인조건 부문에 출품해 상공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선경직물의 특별전시를 둘러보며 그들이 당시 우리 경제에 기여한 점을 이해하나

맛보기로 올리는 정도에 그친다. 

 

 

1층 특별전시관에서 수원의 첫 산업인 선경직물을 둘고 보고,

2층에서 본격적으로 수원역사박물관을 관람한다.

 

 

서호납줄갱이를 돌에 조각했다.

돋보기로 확대한 사진을 보면 비늘의 요철이 그대로 드러나고, 아가미와 눈동자도 매우 섬세하게 조각했다.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했다면 수원 서호에서만 서식한다는 걸 안 다음 가공하기 쉬운 납석에 새겼겠다.

이제  서호납중갱이는 조각으로 화석화된 걸 돋보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이제는 멸종되어 영영 볼 수 없는 서호남줄갱이를 이렇게나마 보게 된다.

 

 

서호납줄갱이

분류 : 잉어과 / 크기 : 5.5cm

 

서호납줄갱이는 1913년 최초로 보고된 한국 특산종으로, 수원 서호에서만 서식하던 물고기이다. 서호납줄갱이는 몸길이 5.5cm의 작은 잉어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멸종 어류이다. 몸체는 비교적 등이 높으며 입이 작고 눈이 크다. 몸색은 등 쪽이 갈색이고, 배는 은백색을 띠고 있다. 수원 서호에서만 서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습성이나 생활, 성장발생과정 등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각시붕어와 비슷하게 생겼고 흰줄납줄개로도 불렸다. 1913년에 처음으로 JordanMetzy가 서호에서 채집하여 신종으로 발표했다. 1935년 mori가 22 개체를 채집하여 기록한 이후에 완전히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모식표본 유일본이 시카고 야외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

 

 

돌검. 돌화살촉. 반달돌칼, 가락바퀴 石劍.石鏃.半月形石刀, 紡錘車

청동기시대

 

호매실동, 금곡동 유적 내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기 유물들이다. 돌검은 돌을 갈아 만든 단검이다.

돌화살촉은 사냥도구로 사용되었다. 반달돌칼은 곡물의 이삭을 따는데 쓰인 농기구로 한반도 전역에 걸쳐 출토된다.

가락바퀴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방적구[紡績具]이다.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유물들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수원

 

통일신라시대 수원과 경기지역은 한산주로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대중국 교섭통로였다.

한산주 일대는 나당전쟁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곳으로, 통일초기에는 신라의 국경지역으로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신라말에는 남양만 일대에 당성진, 혈구진, 장구진을 설치하여, 대중국 교섭의 관문으로 활용하였다.

한산주는 신라말 군사·정치적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고려의 정치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당성진, 혈구진을 거점으로 하는

해상세력과 철원, 수원, 죽산 등의 지방세력이 성장하는 새로운 기반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독무덤으로 쓰이는 옹기

 

 

고려시대의 수원, 수주시대의 수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할 때 수성군의 김칠과 최승규 등의 호족세력이 귀순하여 공을 세워

수성군을 수주로 승격시켰다. 수주는 1018년(현종 9)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수원부가 되었다.

 

 

팔달문 동종 八達門銅鐘

1687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

 

팔달문 동종은 1080년 개성에서 제작되어 수원부 만의사萬義寺에서 사용되다가 1687년 만의사 주지 도화가 다시 주조하였다. 1796년 화성 축성과 함께 종각에서 사용했고 1911년 팔달문으로 옮겨졌다가 2008년 9월 수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종의 상대는 범자를 새겨 넣은 원형 문양을 두 줄로 돌렸고, 아래 네 개의 유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유곽 안의 유두가 보상화문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확대한 유곽 

 

신라시대의 비천상과 달리 고려시대엔 이렇게 보살입상을 만들었는데, 면이 거칠다.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

1858년 번각본

 

오륜행실도』는 오륜을 실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담은 책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심상규(沈 1766~1838),

이병모(李秉模 1742~1806) 등이 세종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중종대의 『이륜행실도倫行實圖)』를 합하고

수정하여  1797년(정조 21)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1858년의 번각본이다. 효자, 충신, 열녀 등 150여 인물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수원 출신 최루백의 효행과 관련된 일화가 담겨있다.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성씨는 고대 왕실이나 귀족층에서 주로 쓰이다가 고려 문종대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성씨 사용이 확대되면서 본관이

생겼으며,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성씨로는 수원 김씨, 수원 이씨, 수성 최씨, 수원 최씨,

수원 백씨, 수원 방씨, 수원 엽씨, 수원 견씨 등이 있다.

 

 

수성 최씨 세보 隋城 崔氏 世譜

1856년 

 

수성 최씨 세보로 시조 최영규崔永奎부터 25대까지 기록되어 있다. 최영규는 본래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17대 후손이었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렬왕 대에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302년(충렬왕 28)에 그동안의 공로가 '최외(崔: 높고 크다)'하다고 하여 최씨崔氏 성을 하사 받고

수성백隋城伯으로 봉해졌다.

 

 

이덕해 묘 출토유물

조선 중기, 出土物

 

서흥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를 지낸 여주 이씨 이덕해李德海의 묘를 1974년 4월 14일 이장할 때 출토된 장군병 1점 외에

백자 명기 12점이다. 이덕해의 부친은 이구李鉤이고, 조부는 이승종李承宗이다.

 

 

이승종李承宗 묘 출토유물

 

이승종은 자가 사윤士胤이며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학李鶴(1481~1537), 형은 이승무李承武,

동생은 이승서李承緖이다. 이승종은 1543년(중종 38) 무과에 합격하였고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

1974년 이승종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편병 1점 외 자기 13점과 갓끈 구슬 5점이다.

 

 

 

 

풍산 홍씨 호패 豊山 洪氏 戶牌

18세기 후반

 

수원유수를 지낸 홍명호(洪明浩 1736~1819) 홍희신洪羲臣 1761~?)과 이들의 아들인 홍낙유(洪樂游 1761~?)·홍순모

(洪淳謨 1791~?)의 호패다. 호패의 2품 이상은 아패牙牌, 3품 이하 잡과 입격자는 각패 角牌, 생원진사는 황양목패

黃楊木牌 등으로 만들었다.

1766년(영조 42)과 1771년(영조 47)에 만들어진 홍명호의 각패角牌(홍명호 초명:명한鳴)와 1787년(정조 11)에 만든

아패, 1806년 (순조 10)에 만들어진 홍희신의 아패, 1783년(정조 7)과 1813년 (순조 13)에 각각 만들어진 홍낙유·

홍순모의 황양목패다.

 

 

수원의 선비문화

 

조선시대 수원은 정조와 수원화성으로 대표되지만 그 이전부터 충과 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급제자가 많았던 수원은 상무 전통과 함께 문무를 겸비한 유교 문화가 꽃피었다.

수원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선비들은 유력한 명문 벌열閥閱 가문은 아니지만 수많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화성 16경 華城十六景 

 

춘8경 春景                                                                                추8경 秋景

화산서애 花山瑞靄   화산의 상서로운 안개                              홍저소련 虹渚素練  흰 비단을 편 듯한 화홍문 물가 

유천청연 柳川晴烟   버드내에 비갠 후의 아지랑이                  석거황운 石渠黃雲   만석거의 황금 구름 

오교심화 午橋尋花   오교(매향교)에서 꽃을 찾음                    용연제월 龍淵霽月   용연의 개인 달 

길야관상 吉野觀桑   관길야(觀吉野)의 뽕을 봄                         귀암반조 龜巖返照   거북바위에 드리운 석양 

신풍사주 新豊社酒   신풍루 앞에서 좋은 날 술 마시기              서성우렵 西城羽獵   서성 밖에서의 사냥  

대유농가 大有農歌   대유평(大有坪)의 농사하는 노래              동대화곡 東臺畵鵠   동장대의 새 과녁에 활을 쏨 

화우산구 華郵散駒   영화역(迎華驛)에 말을 풀어 놓음             한정품국 閒亭品菊   미로정(未老閒亭)에서 국화를 품평함 

하정범일 荷汀泛鷁   연꽃 물가에 채일(채색 배)을 띄움            양루상설 陽樓賞雪   화양루(華陽樓)에서 눈경 감상

화성 축성 이후 정조는 신료들과 더불어 화성 춘8경과 추8경 즉, '화성 16경'을 지정하였다.

이는 여타의 지역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화성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관심과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화성 16경'을 단원 김홍도에게 그리게 하고, 병풍으로 제작하여 화성행궁에 배설하도록 하였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화성 16경' 중 「서성우렵」과 「한정품국」만이 현재 남아 있다.

 

 

수원의 물과 길

 

수원은 물고을로 서해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의 매홀과 신라의 수성, 고려의 수주 등은

모두 '물골'을 뜻한다. 한남정맥의 주봉인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은 서해까지 흐르며 안성천 문화권을

만든다.

수원은 전국 6대로 중 해남로(제주)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1795년 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오는 수원대로水原大路가 열리면서 수원은 모든 임금이 찾는 도시가 되었고,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이 길을 따라 개설되었다.

 

 

수인선의 역사

 

일제는 여주 및 이천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려 1930년 수려선을 개통하고, 1937년 서해안의 천일염

또한 수탈을 목적으로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려선과 수인선은 수원 경기남부 교통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했다.

광복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도로망과 전철이 속속 개통되면서 점차 이용객이 줄어든 수려선은 1972년,

수인선은 1995년 마침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분권화와 새로운 교통 수요에 의해

수인선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고, 2020년 9월 복선 전철로 수인선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재현한 전철

 

 

1960년대의 수원 만나기

 

 

 

 

 

이때 가마니는 몇 년을 돌려쓰는 재활용품이었는데, 지금은 종이로 된 10kg 쌀포대라 간편하다.

 

 

 

 

수원의 독립운동

 

수원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저녁 화홍문 방화수류정(용두각) 아래에서 시작됐다.(이병헌, 『3·1 운동비사』, 1959년) 수원화성 행궁과 수원화성의 서장대, 연무대, 서호, 성 안팎의 장터, 일제의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번졌고,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수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유학자, 그리고 농민, 상인, 학생과

기생들까지 수원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며 조국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수원은 3·1 운동이 대부분 사전 계획되어, 조직적이며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3·1 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 '구국민단'을 결성하였고, 수원 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와 사회주의 청년들의 수원청년동맹 결성,

수원예술호연구락부 조직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였다. 또한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으로 식민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으며 학생들의 낙서와 격문사건, 조선총독 암살계획, 부민관 폭파사건 등 해방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항거를 계속하였다.

 

 

이제부터는 수원화성의 옛날 사진을 올린다.

 

무너진 동포루와 봉돈이 보이는 성곽

1950년대

 

창룡문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위의 모습으로 여장이 모두 무너져 있다.

허물어진 동포루 뒤로 봉돈과 팔달문 누각이 보인다.

 

 

 

6·25 전쟁으로 파괴되기 전의 장안문과 성안팎 모습

1950년대 초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 전의 장안문과 성안팎 모습이다. 장안문이 파괴된 1951년 1월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안문을 잇는 성벽은 무너져 있지만 문의 누각과 옹성의 오성지 등이 온전히 남아있다. 장안문 안쪽의 농경지와

홍원직물도 보인다.

 

 

 

초석만 남은 서장대와 성벽

1967년 | 게리 헬쎈

수원화성 성곽의 담장인 여장이 없는 성벽이 팔달산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며, 세월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듯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초석만 남은 모습이다.

 

위 사진에서는 서장대의 초석이 보인다.

 

 

서쪽 성벽과 화서문 일대

1967년 | 게리 헬쎈

 

팔달산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보인다.

성안의 민가들과 성밖의 농경지 끝으로 만석거가 보인다.

이제는 나무가 우거져 이런 서진을 찍을 수 없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대유평 일대

1953년 8월 24일 | 로버트 리 윌워쓰 | 수원화성박물관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중심으로 성 안팎으로 논과 밭이 펼쳐진다. 성안 밭에는 일하는 농부와 새참을

이고 가는 여성의 모습이 보이고, 성밖으로는 정조대왕의 농업개혁 상징인 대유평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이렇게 넓은 문전옥답이 사라졌다니 안타깝다.

 

팔달문과 도심 풍경

1950년대

 

1950년대 팔달문을 중심으로 도심 지역을 촬영한 사진이다.

팔달문 왼쪽 으로 1952년 가건물로 세웠다가 신축한 중앙극장이 보인다.

 

 

장안문 옹성 측면

1953년 8월 24일 | 로버트 리 윌워쓰 | 수원화성박물관

 

6·25 전쟁 당시 파괴된 장안문은 중층문루와 선문이 없어지고 옹성과 옹성 문루만 남았다. 옹성 문루는 수원화성이

축성된 이후인 1824년(순조 24)에 만들어졌는데, 기와가 떨어져 흩날리는 듯한 모습은 전쟁의 상흔을 보여준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문 밖으로 옹성을 두르고 옹성 성벽 위에 문룰 세웠다.

문루 아래에 있는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누각이 사라진 창룡문의 옹성

1950년대

 

6·25 전쟁으로 누각이 파괴된 창룡문의 옹성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화서문이나 창룡문의 옹성은 양쪽으로 연결되지 않아 되돌아 나가야 한다.

 

 

파괴된 장안문

1952년

 

6·25 전쟁 당시 파괴된 장안문의 모습으로 누각이 파괴되어 없어졌으나옹성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본 장안문

 

 

팔달문과 성 안쪽 모습 

1952년

 

6·25 전쟁 당시 팔달문 안쪽의 시내 모습이다. 

시내 도로 왼편에 팔달식당이 보이고 오른편엔 허름한 건물 앞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야간에 본 팔달문 안쪽

 

 

동장대 밖 마을

1967년 | 게리 헬쎈

 

6·25 전쟁 당시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주변에는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성곽 밖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고된 생활 속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았다.

 

다른 위치에서 보는 동장대의 바깥 풍경은 정원처럼 꾸몄다.

 

 

전쟁을 버텨낸 팔달문의 위엄

1950년대

 

지난 세월의 무게로 누각의 기와가 들뜨고 풀이 자랐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남문인 팔달문은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옹성 안에서 보는 팔달문

 

 

 

팔달문 앞 사람들과 지나가는 버스

1953년 8월 11일 | 로버트 리 윌워쓰 | 수원화성박물관

 

오랜 세월과 전쟁으로 팔달문 문루는 2층 왼쪽의 잡상만 남았고 판문도 파손되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의 사진으로 군용 지프차가 문 앞에 서있고,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옆으로 길가에 앉아있는 노인들과 이발관 간판이 정겹다.

 

밖에서 보는 팔달문 

 

 

방화수류정과 피란민들의 움막집

1950년대

 

방화수류정 주변에 형성된 피란민촌의 모습이다. 많은 움막집과 함께 방화수류정 누각에도 움막이 쳐져 있는 모습이다. 

그 앞길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소녀와 여성은 어머니와 딸로 보인다. 

6·25 전쟁 발발 후 수원에 수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곳곳에 이러한 피란민촌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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