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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심심할 때 천안우정박물관 어때?

by 즐풍 2023. 12. 18.

2023_212

 

 

 

2023. 11. 21. 목요일 오후

 

천안 흑성산성을 보러 산에 올랐으나 흑성산성은 볼 수 없었다.

흑성산성은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되었으나 복원된 건 정상에 만든 성문과 성곽이다.

이들은 현대 기술로 너무 거창하게 만들어 현실감이 전혀 없는 얼토당토않은 복원이다.

그마저도 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천안독립기념관을 먼저 관람하고 산행했기에 이번엔 천안 우정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이동하는 동안 나무가 우거져 조망할 곳은 거의 없었고, 도로를 지나 작은 산을 넘어야 했다.

도착한 천안우정박물관이 있는 우정인재개발원은 우체국 직원들의 전문 역량을 향상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다.

인재개발원 1층에 천안우정박물관을 설치해 방문객들에게 우정 역사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겼다)

 

 

 

 

 

금석 홍영식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 조약에 이어 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등

세계 각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도 근대적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1881년(고종 18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883년에는 부사자격으로 

미국의 우정성과 뉴욕 우체국 등을 시찰하였으며 귀국 후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고종황제에 

진언하여 1884년 4월 22일 (음력 3월 27일) 칙명으로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립하고 

초대 총판(總辦)이 되었다.

 

 

안내문에 우정총국(郵征總局)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잘못 쓴 게 아닐까 하고 사전을 찾아보니

우정총국(郵政總局)과 (郵政總局)으로 소개한다.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옆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郵征總局 重修 記念碑)를 보면,

 

이 사적은 우리나라 근대 우편사업의 발상지이다. 이곳에 1884년 4월 22일(고종 21년 음력 3월 27일) 칙명(勅命)으로 우정총국(郵征總局)이 설치되고 초대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임명되어 그해 11월 18일(음력 10월 1일)부터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동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 개설연(開設宴)이 계기가 되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 총국 업무는 중단되었다. 또한 이 사적은 우정총국 개설 전에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전의감(典醫監)으로 사용되었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는 일시 교육기관으로 쓰인 적도 있다.

그 후 1956년부터 체신부(遞信部)에서 관리하여 오던 중 1970년 10월 22일 문화재 사적 제21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2년 9월에 경내 구역을 확장 정비하여 건물을 전면 중수하는 한편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로 유실된 우정총국 현판을 복원하고 준공함에 이르러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워 유래를 밝히려 한다.

 

고 쓰여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우정총국(郵征總局)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우정의 발달

 

삼국시대의 우역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소지마립간 9년(487) 3월에, '비로소 사방에 우역을 두고 우역을 맡은 관청에 관도(官道) 수리를 명했다'는 기록이 전해 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우역제도에 관한 첫 기록이다.

우역에서 우는 걸어서 전하는 것이고 역(驛)은 말을 타고 전하는 것인데, 고대부터 긴급을 요하는 전(傳)에 한해 역마를 이용하도록 제도화했다.

 

 

고려시대의 우역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흡수 통합하여 귀족정치체제를 수립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우역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것이 육과체제와 22역도 체제였다.

전국의 도로를 대·중·소 등 3등급으로 나누어 전국에 총 547개소의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고, 각 역에는 22명의 역승(驛丞)을 두어 관리한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우역

 

조선시대의 역(驛)은 고려시대의 우역을 답습하며 한양 경복궁 앞을 기점으로 개편되어 중앙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에 설치하였다. 주로 대로변 주현(州縣) 각 읍에 설치하였고 각 도(道)에는 종 6품 찰방(察訪)과 종 9품 역승을 파견하여 도내의 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각 역에는 역장 · 역리 • 역졸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公役)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우편제도가 도입된 1884년(고종 21) 이후 존폐가 논의되어,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신설되면서 임무를 넘기고 폐지되었다.

 

 

근대 이전의 통신

 

조상들은 예로부터 소리를 멀리 보내는 방법을 고안하여 언어와 상호보완적인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여 왔다.

인류의 문자의 발명은 통신발달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어 우역 등과 같이 서신을 멀리 전달하는 방법이 발전해 왔다.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깃발, 봉화, 신호연 등의 시각신호와 북, 나팔, 징, 종과 같은 소리신호 등의

간접적인 통신수단 등이 활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봉화는 기원전부터 사용하였던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고려 의종 3년(1149년) 때 봉수제도로서 확실히 성립되었다. 또한 오늘날 우편의 전신인 우역제도는 신라 소지왕

(487) 때부터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근대 통신의 도입

 

근대통신의 발전은 1840년 영국의 Rowland Hill에 의한 우표사용과 1845년 S.F.B Morse에 의한 전보의 실용화,

1876년 A.Graham Bell에 의한 전화의 발명으로 통신의 대중화에 기틀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통신은 1884년 홍영식에 의해서 한성의 우정총국과 인천 우정분국간의 우편업무를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현대통신으로의 발전

 

우리나라의 통신사업은 1898년 전국에 임시 우체국을 설치하는 등 착실히 성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1905년 통신권을

박탈당하며 암흑기를 맞았고 미군정 이후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대한민국 체신부가 탄생하였다. 1950년 6·25 사변으로 인하여 우편사업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질적 * 양적 향상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다양한 우정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1883. 1.12    우정사 설치

1884. 4.22    우정총국 설치홍영식 총판 임명

1884.11.18    근대우편업무 개시 (한성-인천 간), 문위우표(2종) 발행

1884. 12, 8    우정총국 폐쇄 (갑신정변)

1885. 9.28    한성전보총국 개설한성-인천 간 전신업무개시

1900. 1. 1     국제우편업무 개시만국우편연합 설치

1902, 10.18  최초 기념우표 발행 (고종즉위 40주년 기념)

1908. 10. 1   사서함제도 및 약속우편제도 실시 1921. 4. 16 경성철도우편국 설치

1910. 10.      우편대체저금 및 속달우편제도 실시 1935. 8. 1 사설 우편함제도 실시

1946.4.8       미군정청체신국을 체신부로 개편

1948.8.15     대한민국 체신부 탄생   

1983. 7. 1    체신예금 및 보험업무 재개 

1984.2.29    우체국 온라인예금 실시

1988. 9.16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이전 개원(충남 천안)  

 

각종 직인과 인장

 

 

 

 

 

 

만국우편연합(UPU) 상징 조형물  

 

5대륙을 상징하는 다섯 명의 메신저가 지구를 둘러싸며 편지를 전달하는 형상이며, 제명은 UPU의 표상인 "세계를 하나로 감싸며 "이다. 프랑스 조각가 Charles Rene de saint-Marceaux에 의해 1909년 10월 4일 스위스 베른공원에 세워졌다.

 

 

 

 

 

 

 

 

 

 

 

목숨과 바꾼 마지막 편지

 

우편엽서 한통 움켜쥔 채 급류에 휩쓸려 간 집배원 이시중 씨의 「거룩한 희생」

이시중 (李時中) 미상 ~ 1926. 7. 22 

1926년 7월 전주우림면과 나전면에 (또는 우림면에) 우편물을 배달하던 중 홍수로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떨어진 한 통의

우편엽서를 건지다 급류에 휩쓸려 순직하였다.

전주우체국에서 시신이 걸려 있던 바위를 깎아 순직비를 세웠으며, 현재 우정공무원교육원에 이전되어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농민신문 한 통 전하려 10km 눈보라 길을 걷다가 추락한 집배원 오기수 씨의 「거룩한 희생」

오기수 (吳基洙)  1932, 5, 17~1980, 12, 12

1980년 12월 폭설을 무릅쓰고 산골마을에 한 통의 농민신문을 배달하던 중 벼랑 아래로 추락하여 순직하였다.

당시 순직 소식이 주요 신문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1981년 Union Postale 지와 1982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현재 추모비가 우정공무원교육원에 세워져 있어 직원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급류에 휩쓸리면서도 우편물 8통 동료에게 전달한 집배원 차선우 씨의 「거룩한 희생」

차 선 우 1982. 2. 27 ~ 2011. 7. 27 

2011년 7월 104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용인시 처인구 금어리에서 동료집배원과 우편물 8통을 배달하다

급류에 휩쓸려 배수로로 빨려 들어가 순직하였다. 정부는 고 차선우집배원에게 옥조근정훈장을 추서 하였고,

우정공무원교육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1만 6천여 집배원은 물론, 전 공무원에게 사명감과 희생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우체통의 변천 과정

 

 

 

 

우표문화 Stamp Cultureinterest

 

우표수집의 의미 

우표수집은 우표를 어릴 때부터 소중히 간직해 온 마음과  정성이 담긴 것이어서 금전적인 것 이상의 가치가 있으며,

폭넓은 교양과 지식을 얻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미이다. 우표수집을 통해 각 나라의 역사와 명승고적, 동식물,

예술, 문화, 기술 등 수많은 정보와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국내외의 여러 우표 수집가와 상호교류를

통해 우의와 친목을 도모할 수도 있다.

우표수집 취미를 뜻하는 '필라텔리(philately)'라는 말은 1864년 11월 3일 프랑스의 「엠 헬팽 (M. George Herpin)」

이라는 우표 수집가가 그리스어로 사랑한다는 뜻인 'Philo'와 요금을 지불했다는 'Atelos'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이다.

 

 

우표수집대상 Collectable Stamps

 

미사용우표 Unused stamps

우편에 사용되지 않은 우표로 도안을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며, 보통, 기념, 연하, 특별, 시리즈, 캠페인, 항공, 자선 우표 등이

있다.

 

사용필우표 Used stamps

우편에 사용된 우표로 깨끗하고 일부인이 선명한 것을 골라 우표에 날인된 일부인의 종류별로 수집하며 우표수집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소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사용필 우표를 많이 수집한다.

 

우편엽서류 Postcards

간단한 모임의 통지서, 퀴즈 응답 등의 용도로 봉투가 필요 없으며 최저 우편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종류로는 보통,

왕복, 연하, 기념, 광고, 그림, 경조, 항공서간, 고객 맞춤형 우편엽서 등이 있다.

 

 

인쇄 실수로 유명해진 우표  

잘못 인쇄해 희귀성을 갖게 된 대표적 사례는 1918년 미국에서 발행된 24센트짜리 첫 항공우표의 경우이다. 이 우표는

초기 일부 인쇄분이 용지의 방향을 거꾸로 넣는 바람에 경비행기가 뒤집혀 나는 모습으로 인쇄되었다. 당시 24달러를 주고 이 항공우표 한 시트(100장)를 우연히 구입한 윌리엄 로비란 사람은 인쇄실수로 유명해진 우표를 얻는 큰 행운을 얻었다.

인버테디 제니 홈페이지

 

 

사용하기엔 너무 비싼 우표

1908년 해협식민지는 에드워드 7세의 옆모습을 도안으로 한 우표 겸 인지를 발행했는데 그 액면가가 25$ 와 500$ 의 고액이었다. 액면가격에 걸맞게 흰 흙가루(백악)가 충분히 묻힌 최고급 용지를 사용했다. 당시의 해협식민지의 통상 요금은

1센트로 이 우표는 통상우편 요금보다 5만 배나 비싼 관계로 우표로서는 당초부터 사용될 수 없는 우표였다.

 

 

손편지와 함께한 역사

 

정조(1752~1800) 어필 한글 편지 [복제]

[正祖御筆牒] 1798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정조가 4~5세였을 때부터 1798년(정조 22)까지 작성한 글씨 2점과 세손 시절에 쓴 편지 6점 및 재위 기간 쓴 편지 8점, 총 16점이 모아져 있는 한글 자료이다.

편지의 내용은 대개 큰 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음식 등의 물건을 보내거나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조선 시대의 한글 편지 가운데 어린이의 필체로 쓴 편지가 드물고 또 연령대에 따라 한글 필체의 변화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원이 아버지께 [복제본]

1586년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420 년 동안 무덤 속에 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는 1998년 4월, 고성 이씨 문묘를 이장하던 중

관 속에서 학술적으로 귀한 자료이다. 가볍고 얕은 사랑이 일상화한 우리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람들을 놀랍게 한 것은, 관 속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와 바로 이 한글 편지다. 미투리는 이응태의

부인이 자기 머리카락으로 삼은 것이었고, 한글 편지 역시 부인이 썼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성 이씨(固城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 아이를 뱃속에 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부모형제를

두고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용태(李應)의 의복도 나왔고, 미라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편지는 부부의 날 같은 때 대중매체에 자주 오르내린다.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 전문 [복제]

 

원이 아버지께...

방술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겠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임세권 안동대 사학과 교수 풀어씀.

 

 

 

 

 

서울에 있는 우정총국이 궁금하면...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우정총국은 최초의 우체국이야

2023.11. 23. 목요일 오후 전에 다니던 회사 입사 동기의 딸내미 결혼식을 보고 시간이 남아 종로에 있는 조계사를 보러 왔다. 먼저 눈에 띄는 우정총국부터 들린다. 한 달 전인 지난달 11월 21일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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