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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수원국립농업박물관 관람 후기

by 즐풍 2023. 12. 21.

2023_215

 

 

 

2023. 11. 2.  옥요일 오전

 

 

언젠가 가족과 함께 손자를 데리고 수원 화서공원을 돌 때 수원국립농업박물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분당으로 캐논 카메라 다이얼 모드 수선을 맡기러 가는 길에 수원에 들러 화서공원을 둘러본다.

마지막 구간에 있는 농업박물관에 들어서며 농업의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 두루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는 농업이 책임진다.

이러한 농업의 생산기반인 농지는 도로와 주택, 시설 등이 들어서며 점차 사라진다.

눈 뜨고 나면 사라지는 농지를 대신해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농업혁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부분의 박물관이 그렇듯 이번에도 안내문으로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차세대유전체연구사업단 본관 건물 앞 반송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잠깐 배웠던 4·H운동 기념상을 보니 박제된 역사를 보는 느낌이다.

 

드디어 수원농업박물관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농업박물관에 들어서면 유물보다 사진과 안내문이 대부분이다.

 

 

우리의 밥상을 이루는 식(食)의 근간이 되는 음식 재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밥(주식)과 반찬(부식)으로 이뤄진 한상차림 식문화를 형성해 왔는데, 이러한 문화는 주식인 밥의 부족한 영양분을 반찬에서 보완하기 위해 나타났다. 밥은 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식을 쪄서 만들었으며, 반찬은 채소, 육류, 어류 등 다양한 영양소를 지닌 재료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음식 재료는 우리의 밥상을 이루며 식생활의 근간이 되었다.

 

 

구석기시대

 

약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에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동굴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풀이나 열매를 채취하고, 돌을 두들겨 만든 주먹도끼, 찌개, 찌르개 등 뗀석기를 사용하여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용 풀이나 열매를 채집하여 먹었다. 

뗀석기를 사용해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거나 손질하였다.

 

 

신석기시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시기로서 먹거리가 풍부하고 밭농사에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쉬운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 정착하여 살았다.

밭에서 콩이나 조, 팥, 피, 수수 등을 기르고 개와 돼지를 키웠으며 물고기와 조개를 수렵 · 채취하는 어로생활을 통해 식생활을 유지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식생활

 

청동기 시대에는 강가나 계곡 근처의 구릉지나 산기슭에 소규모로 모여 살았다.  집 안에 화덕을 설치하여 난방에 활용하거나 음식을 익혀 먹었다. 정착지 주변에 논과 밭 등의 경작지를 만들어 식량을 조달하였다. 탄화된 쌀과 볍씨 자국이 있는 토기 등을 통해 벼농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패총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등 청동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탄화된 쌀을 통해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농경문청동기에는 농부가 따비로 밭을 갈고 있는 조각이 있어 청동기 시대의 농경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요리로 알려진 '맥적'은 고기를 장과 마늘로 양념하여 불에 굽는 요리이다.

불고기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고기 요리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중국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이 장양(藏釀)을 잘한다는 기록이 있다. 장양은 술 빚기, 장 담기, 채소절임과 같은 발효식품을 일컫는 말로 해석된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식생활

 

삼국시대 식재료를 확보하는 방법으로 백제와 신라는 주로 밭농사와 논농사를 이용하였고, 고구려는 밭농사를 중심으로 식재료를 확보하였다. 주식으로는 밥이 자리 잡았는데, 철제 솥이 보급된 것이 가장 큰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채소, 육류, 어패류 등의 재료를 반찬으로 하여 부식을 만들어 먹는 식사의 기본 구조가 확립되었고,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음식 재료와 조리법, 가공법, 발달하였다. 밥과 반찬, 국으로 이루어진 한상차림 문화가 시작되었으며, 농산물의 가공

방법과 술, 장, 젓갈 등의 저장 방법도 발달하였다.

 

 

고려 시대 전기

 

고려 초기에는 국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막기 위해 가축의 도축이나 어로활동 등 살생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육류나 생선을 대신할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발달하였다.

요리에 초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참깨를 재배하여 참기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조미료가 유입되어 다채로운 맛을 즐기는 식생활을 영위하였다.

 

 

 

고려 시대 후기

 

고려 후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가축 도살법과 여러 가지 육류 조리법이 발달하여 고기 요리가 성행하였다. 그리고 만두의 일종인 상화(霜花)가 들어오고 술을 증류하는 기술이 알려져 증류식 소주가 등장하였다.

이 외에도 포도주, 사탕, 후추 등이 전해졌으며 고려가 원나라에 전해 준 음식으로는 유밀과(고려병), 인삼주, 생선국 등이 있다.

 

 

 

조선 시대의 식생활

 

조선 시대에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양반 제도가 정착되었고 『경국대전』을 통해 관례 혼례, 장례, 제례 등의 기본

규범이 확립되었다.

『규합총서』, 『농가집성』 등 조리서와 농서 등이 출판되었고, 각 지방에 따라 특색 있는 향토음식이 발달하였다.

우리 식생활 문화의 전통이 재정비되는 시기이자 우리나라 음식의 완성기로서 오늘날과 비슷한 식생활 문화가 자리

잡았다.

 

 

 

남쪽에 위치한 나라들로부터 고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 외래 작물이 유입되었다.

특히 고추는 고춧가루와 고추장으로 가공되어 김치를 비롯한 각종 음식의 조리에 중요한 향신료로 사용되었다.

 

비빔밥은 조선 전기에는 '혼돈반', 조선 후기에는 '골동반' 또는 '부븸밥'으로 불렸다

비빔밥 한 그릇에 흰색의 쌀밥과 여러 가지 색의 반찬이 한데 어우러져 한식 상차림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반상은 밥과 반찬이 처음부터 상 위에 전부 차려 나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새참은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사이 먹는

음식으로 만들기 편하고 먹기 쉬운 국수나 수제비, 밥과 상추쌈 등이 주를 이뤘다.

 

 

 

대한제국 시대

 

19세기 중엽 청나라, 러시아 및 일본과의 교류, 서양 문화의 유입은 우리 식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쌀, 보리, 인삼, 해삼 등을 외국으로 수출하고 술, 향료, 조미료 등은 수입하였다.

이에 따라 서양의 문물과 다양한 음식, 조리법 등이 전해지면서 서양 음식문화가 조선 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 쌀 등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수탈하면서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다. 원래 우리의 전통적인 식문화는 각자 한상차림으로 식사하는 독상이 기본이었으나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한상에 음식을 차리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 문화로 변화하였다.

 

이동식 화로와 풍구

 

 

장독대

 

독은 저장용 도구로 예전에는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전통 농가에서는 물독 · 쌀독 ·  장독 · 술독 · 김칫독의

다섯 가지 독을 '오(五)독'이라고 하여 기본으로 여겼다. 장독대의 위치는 집 안에서 햇볕이 많이 들어 따뜻한 곳으로

정하였다.

 

 

본관 건물을 빠져교육동으로 이동하면 또 다른 국립농업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은 꽃이나 채소를 수경시설을 이용해 키우는 곳이다. 유치원생들 10여 명이 재잘거리며 들어서자 활기가 돋는다.

며칠 후 우리 손자도 예약을 통해 이곳을 다녀갔다는 데 무척 즐거워했다고 전해온다.

 

 

 

수경재배로 키운 상추는 부드럽게 아삭거려 노지에서 키운 채소보다 한결 식감이  좋게 느껴지겠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문이 개방된 곳은 모두 둘러본다.

 

 

농사 시작의 흔적

 

농사의 흔적은 탄화 곡물이나 논밭 유적, 토기에 남은 곡물의 압흔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곡물 압흔은 토기 태토胎土 (토기의 재료가 되는 점토) 안에 섞였거나, 토기 제작 과정에서 섞인 후 눌려 흔적이 남은 것을 말합니다. 토기에 곡물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토기를 제작할 때 그 주변에 곡물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에서는 조와 기장이 가장 많이 확인되며, 청동기 시대의 토기에서는 조와 기장 외에 벼의 흔적도 확인됩니다. 또 청동기 시대의 토기에서는 쌀벌레인 바구미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구미는 쌀을 장기간 보관할 때 주로 나타나는 곤충으로 당시에도 벼를 수확한 후 일정 기간 보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수확과 저장의 과정이 반복되는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문화의 근본을 이른 농업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초기까지는 수렵과 채집 활동을 통해 먹거리를 습득하였으며, 신석기시대 중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전역에서 조 · 수수 · 기장 · 보리 ·· 벼 등의 곡물이 출토됩니다. 그중에서 조와 기장은 신석기시대 후기로 갈수록 많은 양이 출토되며 이를 통해 농사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 잡곡 농사가 보편화되고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농사의 흔적은 유적에서 발굴된 볍씨와 탄화곡식, 토기에 남아있는 곡물 압흔 눌린 자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논 유적과 밭 유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전국적으로 잡곡 농사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서러운 배고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어지러운 세계사의 풍랑 속에 서러운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일점강점기 때 일제는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21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했습니다.

농업생산력 확충을 위해 수로 개선, 토지 개선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생산량이 늘지 않자 공출과 배급, 소비에 적극 개입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미곡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국가에 의한 농민 수탈정책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정부는 농업 증산 3개년 계획 1949~1951을 실시하며 자급자족 달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은 6·256·25 전쟁의 발발과 열악한 농업 생산기반, 부족한 투자 재원, 영농자재산업의 후진성 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후 보릿고개가 연례적으로 반복되자 1960년대부터 증산시책과 함께 범국민적인 절미 운동과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쳤습니다. 절미 운동은 부엌에 작은 항아리를 두고 밥을 짓기 전, 쌀을 한 줌씩 모아 팔거나 저금하는 운동이었습니다. 10여 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장려운동과 절미운동은 쌀 중심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1970년대 들어 정부는 최우선 과제를 식량증산에 두고, 그중에서도 주곡인 쌀의 자급에 집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개발된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의 수확성이 당시 다른 품종보다 30% 이상 높게 나타나자 정부는 통일벼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1976년에는 식량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채독

 

낟알 등 마른 곡식이나 감자, 고구마 등 농산물을 보관하는 용구다. 흙으로 만든 독을 구하기 어려운 산간지역에서 싸릿대를 엮어서 만들었다.

독의 안쪽과 바깥쪽에 기름종이나 진흙, 쇠똥 등을 발라 틈을 메웠다. 대나무가 흔한 지역에서는 대나무를 길게 잘라 엮어 만들기도 하였다.

 

 

나무독

 

오지독을 쓰기 어려웠던 산간 지역에서 피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독이다.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에

숯불로 태워서 안을 조금씩 긁어내 만들었다.

주로 강원도에서 김치를 보관할 때 사용하였다. 좌우의 줄(탕개)은 바닥면과 나무통을 단단히 틀어

조이는 역할을 한다.

 

 

 

 

연자방아

 

맷돌의 일종으로 둥글고 판판한 아래짝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위짝을 옆으로 세워 말이나 소의 힘으로 돌려서 벼 · 보리 · 수수 · 조 등의 곡식을 찧는 데 쓰였다. 많은 양의 곡식을 찧을 때 사용하며 쓰였다. 많은 양의 곡식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자방아에 동원된 소는 멀미를 참으려 무던히도 노력했을 듯 싶다.

그래도 수레를 끄는 것보다 피로는 덜 했겠다.

 

 

빻는 도구

 

곡물을 갈아 가루로 만드는 대표적인 도구가 맷돌이다. 맷돌은 윗돌의 누르는 힘과 윗돌 · 아랫돌이 닿는 면의 요철을 이용하여 마찰력을 키워 골고루 빻을 수 있도록 한다. 윗돌의 구멍에 곡물을 흘려 넣고 손잡이를 돌려 사용하며,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갈 때는 손잡이에 긴 막대를 걸어 노를 젓듯이 밀었다 당기며 맷돌질을 한다.

 

예전에 우리 집에도 있던 맷돌은 사실상 동네 공동재산처럼 필요한 사람은 아무 때고 빌려갔다.

이젠 집집마다 믹서기가 맷돌을 대신하고 있다.

 

 

 

곡물의 도정

 

수확한 곡식은 찧어서 껍질을 벗기는 도정 과정을 거쳐 조리하게 된다. 도정용 도구는 신석기시대의 갈돌과 갈판을 시작으로, 돌확을 거쳐 절구와 맷돌로 분화되어 왔다. 절구는 디딜방아 · 물방아 · 물레방아로, 맷돌은 연자방아로 확장되어 적은 힘으로 많은 양의 곡식을 쌓고 찧을 수 있게 되었다.

 

△ 상, ▽ 하

 

 

 

전시를 열며

 

국립농업박물관에서는 개관 후 첫 전시로 < 문화가 되다> 기획전을 마련하였습니다. 농업은 아주 특별한 산업입니다. 우리 민족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역사이자 문화입니다. 오랜 세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온 예술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문화와 예술의 관점에서 우리 농업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자리입니다. 

1부 ‘Agri+Culture'에서는 농사가 시작된 선사시대의 유물과 농사의 의미가 담긴 문자들을 통해 우리 문화의 근본을 이룬 농업을 살펴보고,

2부 '농업, 먹거리 삶'에서는 농사를 중시했던 선조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과 근현대 생활 자료를 중심으로 농업의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3부 '삶 속의 예술, 농업'에서는 현대 작가의 눈으로 새로 해석하고 미감을 더한 작품들을 통해 예술로서의 농업을 선보입니다.

이번 기획전을 통해 농업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이 우리 사회의 뿌리임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찧는 도구

 

농산물의 껍질을 벗기는 찧기 도구 중 절구와 디딜방아가 가장 많이 쓰였다. 절구는 공이를 사용해 곡식을 쉽게 찧을 수 있도록 나무나 돌을 다듬어 만든 도구다. 보통의 절구는 1명 또는 2명이 마주 서서 공이를 찧어 사용하며, 발로 밟아 공이질을 통해 많은 양을 찧을 수 있게 만든 것이 디딜방아이다.

이 외에도 대량의 곡식을 한꺼번에 찧기 위해 가축의 힘을 이용한 연자방아와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한 물방아, 물레방아가 있다.

 

 

 

주루막 囊

어깨에 메고 다니며 나물이나 열매를 채취하여 담는 주머니로, 산간지역에서 사용했다. (위 오른쪽)

 

썰매와 멱신 雪橘 烏拉草 

근현대

눈이 쌓인 곳에서 물건을 져 나를 때 이동의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착용한다.(아래 오른쪽 두 개)

 

 

시골에 산 때는 이런 건 보지도 못했다.

도로 사정이 좋은 시내에서나 가용 가능한 수레다.

 

말과 되, 저울추

 

 

 

물레의 종류

 

 

 

 

물레紡織車

근현대

목화솜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낼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밭에서 수확한 삼의 껍질을 쪼개어 여러 가닥의 실로 엮고, 물레를 이용해 실을 찾는다.

 

 

질 좋은 삼베

 

생산된 견직물

 

 

곤충산업의 발전

 

곤충은 예로부터 질병 치료 약재로 널리 사용되어, 조선시대 의학서 『동의보감』에도 95종의 약용 곤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꿀벌을 기르는 양봉과 누에를 기르는 양잠은 근대에 들어 농업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아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활용 범위가 확대되어 식용, 사료용, 화분매개용을 비롯하여 생체 모방 기술이나 기능성 의약품의 소재로까지 쓰이고 있다.

 

 

 

정밀농업

 

4차 산업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드론 등을 통해 노동력 및 자원 투입은 최소화하고 생산량은 최대화하는 농업 방식이다..

위성 이미지, 무인항공기 데이터, IoT 센서, 기상 정보 등 다양한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예측 분석한다. 이러한 데이터 기반의 정밀농업을 통해 환경(기상, 토양 등), 투입재, 생육, 병해충 방제, 수확량 등 농업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로봇농업

 

농업인구의 감소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업 분야에서 로봇은 농업환경에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농업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의 전 과정에서 스스로 환경을 인식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자율적인 동작으로 지능화된 작업이나 서비스를 제공한. 농업로봇은 스마트팜 운영의 필수적인 요소로 채소 자동 이식. 과일 내외부 비파괴 선별, 채소 접목, 축산분야 방제, 운반, 수확 그리고 가축 관리 등에 활용되고 있다.

 

 

농업 무인항공기

 

농업용 무인항공기는 드론에 작업기를 부착하여 방제, 파종, 작황 예찰, 해충 감시 등에 활용하는 정밀농업 분야 필수 측정 장비로서 작업자의 노동 강도를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집약적인 영농 현장의 대안으로 무인항공기의 이용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양제, 미생물제 등 친환경 제제와 비료 살포, 방역, 벼 직파 재배에까지 사용 분야가 확대되고 있다.

 

드론이나 무인항공기로 농약을 살포할 때는 무척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바람이 불면 농약을 써서는 안 되는 옆집 무기농 밭까지 농약이 살포되면 1년 농사 헛되기 때문이다.

 

농업박물관을 관람항 때 초등학생들이 들어오며 활기를 띠다 못해 너무 웅성거린다.

고요했던 박물관은 활기를 가득 띠며 시장바닥 같은 느낌이다.

어딜 가도 아이들이 많아야 활기를 띠는 데, 이젠 출산율 감소로 장차 소멸국가로 분류되니 걱정이 크다.

 

박물관을 빠져나와 화서역으로 가는 길에 보는 서호에는 기러기들이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낙엽이 다 졌을 서호공원의 단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