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의 단아한 아름다움

by 즐풍 2023. 12. 24.

 

 

 

2023. 10. 8. 일요일 오전에 관람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조선시대에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잘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비취색 청자에 영향을 받아 조선 초기에는 청화백자가 유행했고,

후기에 들어서면서 탁한 색의 백자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6년부터 3년간 이천에 근무할 때 이천과 여주, 광주가 관할지역이었는데

이때 세 지역은 지역별 특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 얘기를 세세하게 분류하면 갑론을박이 이어질 수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한다.

당시 몇 점 수집한 도자기가 지금도 갖고 있는데, 이사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관리해야 했다.

그런 바탕이 깔렸기 때문인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도자기 사진을 분류하면서

이건 국보급이고, 또 이건 보물급이네 하며 한내문을 보면 대충은 맞기도 한다.

이번 편에서는 백자 위주로 사진을 롤리며,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백자 병 白磁 甁

조선 15세기 - 16세기, 보물 제1054호

조선 15-16세기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백자 병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병으로, 그릇의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부피감이 일품이다. 순백색 표면과 당당하고 절제된 형태가 조선 왕실과 사대부가 추구했던 미감을 느끼게 해 준다. '옥호춘玉壺春'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백자상감연꽃 넝쿨무늬 대접 自磁 象嵌 蓮唐草文 大楪

조선 15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국보 제175호

 

조선시대 상감백자 중 가장 뛰어난 예술품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한 형태와 연꽃 넝쿨무늬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를 닮았지만, 섬세한 상감기법과 유백색의 부드러운 질감은 고려 연질 백자의 전통을 이었다.

 

 

백자상감모란·나비무늬 편병 白磁 象嵌 牡丹蝶文 扁瓶

조선 15세기

 

15세기 백자는 고려 백자의 전통을 잇는 유백색 연질 백자와 중국 명나라 백자의 영향을 받은

단단한 경질 백자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납작한 편병은 무른 연질 백자로 은은한 살굿빛이 돈다. 

이러한 연질 백자는 경상도를 비롯한 지방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백자 항아리 白磁 壺 

조선 15-16세기,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발견

 

푸른 기가 살짝 감도는 순백색 대형 항아리이다. 

입구 부분이 둥글게 말리고 몸체의 무게 중심이 어깨에 있는데, 이는 조선 15-16세기 백자 항아리의 특징이다.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백자로 왕실 행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자철화 매화·대나무무늬 항아리 白磁 鐵畫 梅竹文

조선 16세기 - 17세기 전반, 국보 제166호

 

품격 있는 장중한 형태와 뛰어난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철화백자이다. 

백자의 품질과 그림의 표현 수준으로 보아 도화서의 궁중 화원이 무늬를 그린

왕실용 철화백자로 생각된다. 당시 화단畵壇의 사군자 표현 기법을 가늠할 수 있다.

 

 

백자 청화 매화··대나무무늬 항아리 白磁 青畫 梅鳥竹文 壺

조선 15세기 후반 - 16세기, 국보 제170호

 

조선 15-16세기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항아리이다. 매화나무 위 한 쌍의 새와 들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마치 한 폭의

화조화처럼 운치있게 그려냈다. 처음에는 중국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이 컸지만, 차츰 이 항아리와 같이 조선의

정서와 미감이 담긴 청화백자로 발전했다.

 

 

조선 왕실과 의례용 백자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의례 용기로 '용준'이 있다. 용준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백자 항아리에 청화나 철화 안료를

써서 용무늬를 그린 것으로, 조선 왕실 연회와 제례에서 술을 담거나 꽃을 꽂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 명나라 용무늬 청화백자를 본떠서 청화백자 용준을 제작했고 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운영된 경기도

광주 관요 가마터에서 나온 용준 조각으로 알 수 있다.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용준 중에서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은

17세기 전반의 철화백자 용준이다.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청화백자 용준을 제작했다.

1754년(영조 30) 기록에 “청화안료로 그림 그리는 것은 사치한 풍속이므로 일절 금하지만, 용준은 예외로 둔다.”라고

했을 정도로 용준은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했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또 다른 도자기인 봉황을 청화 안료로 그린 항아리는 청화백자 용준과 양식 변화를 함께 하며,

왕실 의례를 비롯해 궁중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

 

 

백자철화포도·원숭이무늬 항아리 白磁 鐵畫 葡萄 猿猴文

조선 18세기, 국보 제93호

 

탐스럽게 열린 포도와 포도넝쿨을 잡고 노니는 원숭이를 생동감 있게 구성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철화백자이다.

유백색 바탕에 철화 안료의 깊고 진중한 색감과 능숙한 필치가 어우러져 원숙한 세련미를 드러낸다.

18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 금사리에 위치했던 관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자 투각· 청채 모란무늬 필통 白磁 透刻青彩 牡丹文 筆筒

조선 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

 

다섯 곳에 구멍을 내어 붓을 꽂도록 한 형태가 독특하다. 몸체 중앙부에 모란꽃과 이파리를 음각과 투각 기법으로 장식하고 청화 안료로 섬세하게 채색했다. 조선 후기 문인의 사랑방에 격조를 높이는 용도로 백자 문방구를 선호했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청화백자에 담긴 왕실과 문인의 취향

 

18세기 중국 청나라와의 교류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유입된 다양한 문물과 문화는 조선 사회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절제와 근검을 미덕으로 삼던 18세기 조선 왕실은 사치 풍조의 확산을 우려해 화려하게 장식한 그릇과 청화백자의

제작을 금지하고,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수입되는 사치품의 소비를 규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에는 왕실과 상류층은 물론 부유한 일반 백성에게까지 고급 도자기 소비가 확산되었다.

차를 즐기며 서화를 감상하고 문방구, 골동품, 서책 등을 수집하는 문인 문화는 조선 청화백자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에는 왕실 및 문인의 미의식과 절제된 품격을 보여 주는 뛰어난 청화백자가 만들어졌다. 깨끗한 설백의 유색과

담백한 무늬 표현이 이 시기 청화백자의 특징이다. 대나무, 난초, 분재 등 문인 취향의 소재가 간결하게 그려졌고, 

서정적 정취를 담은 시가 쓰여지기도 했다.

 

 

 

 

 

백자철화 구름·대나무무늬 항아리 白磁 鐵畫 雲竹文 壺

조선 17세기

 

바람에 휘어진 대나무와 뭉게구름이 장식된 철화백자 항아리이다. 

17세기에는 이처럼 둥근 형태의 항아리 제작이 늘어났다. 지방 백자 가마에서는 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지역 특징이 드러나는 무늬를 장식했다. 이 항아리는 17세기 지방 백자의 생산 경향을 잘 보여준다.

 

 

백자철화 국화무늬 편병                                 백자철화 대나무무늬 편병

조선 17세기                                                    조선 17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백자철화 끈무늬 병 白磁 鐵畫 繩文甁

조선 16세기, 1995년 서재식 기증, 보물 제1060호

 

병의 목에 끈을 묶어 드리운 것 같은 모습의 백자 병이다. 철화 안료로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없이 그

어 내린 무늬가 특징이다. 굽 안 바닥에 한글로 적힌 '니나히' 혹은 '니가히'는 사람 이름으로 여겨진다.

 

 

백자로 꽃피운 도자 문화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이라는 연이은 전쟁으로 17세기 조선 사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궁중에서는 의례용 기물을 고쳐 쓰고 관요에서는 품질이 떨어진 회백색 백자를 제작했다. 수입품인 청화 안료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로 장식한 철화백자를 제작해 궁중 의례와 외국 사신 접대에도 사용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관요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적인 백자 제작을 허용하는 변화가

있었다. 18세기 전후 복구를 완료하고 경제 활동이 증가하면서 백자 수요층이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부유한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특히 문인의 취향이 반영된 청화백자가

유행했다.

 

광주 지역에서 땔감을 찾아 10년 주기로 옮겨 다녔던 관요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752년(영조 28)

지금의 분원리에 관요가 자리를 잡으면서 관요의 운영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한편, 18세기 중국 청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의 화려한 도자기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절제와 근검을 미덕으로 삼던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는 이를 사치품으로 규제했으나

중국 도자기를 애호하는 풍조는 여전했고, 조선 청화백자에도 이러한 영향이 반영되었다.

점차 청화백자의 기형, 장식 소재와 기법이 다양해져 다채로운 백자 문화를 이루었다

 

 

 

 

백자 달항아리 白磁 壺

조선 17세기 후반, 보물 제1437호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1 비율을 이루는 둥근 항아리다. 그 모습이 보름달을 닮아 ‘달항아리'라고 불린다. 

반원형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서, 몸체 가운데에 접합 흔적이 있다. 좌우 대칭이 살짝 어긋난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으로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1 비율을 이루는 둥근 항아리다. 그 모습이 보름달을 닮아 '달항아리'라고 불린다. 

반원형 몸체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서, 몸체 가운데에 접합 흔적이 있다. 좌우 대칭이 살짝 어긋난 느낌을 주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한 미감으로 조선 후기 백자의 조형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This type of large white porcelain jar with a height of more than 40 centimeters. With a round, voluminous body,

a nearly 1:1 ratio between the height and the widest diameter, and a milkywhite color, thesejars are often

referred to as "moon jars" for their resemblance to a full moon. Moon jars are one of the most iconic vessels

representing the artistic achievement of Joseon white porcelain.

 

 

 

백자로 꽃피운 도자 문화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이라는 연이은 전쟁으로 17세기 조선 사회는 어려움에 처했다. 

궁중에서는 의례용 기물을 고쳐 쓰고 관요에서는 품질이 떨어진 회백색 백자를 제작했다. 수입품인 청화 안료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로 장식한 철화백자를 제작해 궁중 의례와 외국 사신 접대에도 사용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관요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적인 백자 제작을 허용하는 변화가 있었다.

18세기 전후 복구를 완료하고 경제 활동이 증가하면서 백자 수요층이 왕실과 사대부는 물론 부유한 일반 백성까지

확대되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특히 문인의 취향이 반영된 청화백자가 유행했다.

광주 지역에서 땔감을 찾아 10년 주기로 옮겨 다녔던 관요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1752년(영조 28) 지금의

분원리에 관요가 자리를 잡으면서 관요의 운영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한편, 18세기 중국 청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의 화려한 도자기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절제와 근검을 미덕으로

삼던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는 이를 사치품으로 규제했으나 중국 도자기를 애호하는 풍조는 여전했고, 조선 청화백자에도

이러한 영향이 반영되었다. 점차 청화백자의 기형, 장식 소재와 기법이 다양해져 다채로운 백자 문화를 이루었다.

 

 

 

백자양각매화·문자무늬 계영배 白磁陽刻 梅花文 戒盈杯 (왼쪽 사진)

조선 19세기

 

'가득참을 경계하는 잔'의 의미를 지닌 계영배이다. 잔 안쪽에 관이 있어 압력에 의해 어느 정도

액체가 채워지면 넘치지 않고 밑으로 흘러나가도록 만들 수 있다.

수압과 대기압의 상호작용으로 액체를 흐르게 하는 과학적 원리가 담겨 있다.

 

백자 양각 매화무늬 잔과 나비무늬 받침 白磁陽刻 梅花文 盞·蝴蝶文 盞托 (가운데 사진)

조선 19세기

 

양각 기법을 써서 꾸민 최고급 잔과 잔받침이다. 무늬틀을 사용해 잔의 매화무늬와 잔 받침의 나비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이처럼 양각 기법은 백자의 유색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다.

 

 

새로운 취향과 백자 제작의 다양화

 

19세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부유층이 늘어나고 중국·일본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이전에는 없던

다양한 백자 그릇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저술된 백과사전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정조 때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한 뒤로 백자 위에 꽃무늬를 불룩하게 구워내더니, 오래지 않아 다시 청채를 사용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당시 고급 백자의 유행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점차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화려한 도자기가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의 생활 속에 폭넓게 자리를 잡아갔고,

이러한 취향은 관요 백자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차와 술을 소비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주자와 잔이 만들어졌고 각이 진 병 등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했다. 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거나 청화나

철화 안료로 그릇 전면을 칠하는 등 장식 기법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도자기

 

19세기 조선 왕실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무늬로 장식된 청화백자를 사용했다. 구름과 용, ‘수복’ 글자,

보상화 넝쿨, 영지 넝쿨 등 격식을 갖춘 무늬로 장식된 청화백자가 왕실용으로 제작되었다.

한편 왕실 행사에서 청나라 자기가 사용되기도 했다.

19세기 왕실용 백자의 두드러진 변화는 그릇에 글자를 표기하는 방식이 다양해진 점이다. 청화 안료로 굽 안

바닥에 궁궐 전각 이름 등을 표기하거나 끝이 뾰족한 도구로 굽 주변의 유약 표면을 쪼아 그릇이 사용되는 연도,

행사와 장소, 크기와 수량을 한글로 새겼다.

이는 관요에서 사적인 백자 제작이 늘어나자 왕실용 백자를 별도로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이렇듯 조선 왕실도 국내외 도자 생산 환경의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행복의 염원을 담은 청화백자

 

19세기에 청화백자의 소비 계층이 확대되면서 행복, 장수, 재물 등 대중의 염원이 담긴 무늬가 성행했다.

모란, 석류, 불수감, 십장생, 잉어처럼 당시 유행한 길상화의 소재 외에도 영지, 보상화, 밤, 소나무, 그물망 무늬 등

중국과 일본 자기의 다양한 상감무늬가 조선 관요 백자에 장식되었다.

여기에 관요 장인들이 사사로이 백자를 제작하는 사번까지 확대되면서 관요 백자의 무늬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또한 '크락 [Kraalk] 양식'이라고 하는 중국과 일본의 수출용 자기에서 보이는 능화창, 이국적인 꽃무늬 등이 그려진

조선 청화백자도 있어 동아시아 무역 도자기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엔 학 그림이 있는 도자기만 모아서 살펴본다.

 

청자 철채·퇴화 구름·학무늬 매병 靑磁 鐵彩堆花 雲鶴文 梅瓶

고려 12-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

 

철채 청자는 그릇 전체에 산화철 안료를 바르고 청자 유약을 입힌 것으로, 검은빛이 나서

흑유자黑釉磁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자의 바탕흙과 유약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릇은 검은색이어도 

청자로 분류한다. 어깨 부분에 학과 구름을 퇴화 기법으로 그려 넣었다. 바탕과 무늬의 흑백 대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항아리 靑磁 象嵌 雲鶴文 壺

고려 12-13세기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매병 青磁 象嵌 雲鶴文 梅瓶

고려 12-13세기, 보물

 

유려한 곡선미와 비색 하늘을 배경으로 무늬들이 베풀어졌다. 

고려청자에 자주 등장하는 구름과 학무늬는 중국청자에서는 보기 힘든 고려청자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학은 높은 기상과 장수를 상징한다.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주자 靑磁 象嵌 雲鶴文 注子

고려 13세기, 경기도 개성 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