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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강화도 역사박물관 관람

by 즐풍 2023. 12. 11.

2023_204

 

 

 

2023. 10. 14. (토) 오후

 

 

오전에 강화산성을 순성 할 땐 비가 내려 불편하더니 강화역사박물관에 도착하니 비가 그친다.

비를 맞으며 강화산성을 순성 했더니 더 다닐 생각이 사라져 강화역사박물관과 붙어 있는 강화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모든 박물관이 그렇듯 전시된 안내문은 학예사 등의 전문가가 작성한 것이라 즐풍의 의견을 덧대지 않고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낸다.

 

 

 

 

 

 

강화동종 江華銅鐘

보물 제11-8호, 총 높이 194.1cm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다. 1688년(숙종 14)에 강화유수 윤지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 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강화유수 민진원이 1711년(숙종 37)에 깨진 종을 녹이고 재료를 더해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銘文)에 옛 종은 사인(思印)이 만들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祖信)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사인 비구는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화동종은 8개 중 하나이다.

강화동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 용이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몸이 서로 얽히어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고려시대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강화동종을 약탈하여 가려고 하였으나 무거워서 배에 싣지 못해 갑곳리 토끼다리 근처에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강화의 불교문화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문화는 오랜 시간을 걸쳐 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372년 고구려를 통해 들어온 이래 문화의 사상적 기초가 되어 조각, 회화, 공예, 건축 등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발전해 왔다.

강화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은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道和尙이 건립한 진종사 眞宗寺라고 전한다. 진종사는 강화 제일의 사찰인 전등사의 전신으로 강화는 이른 시기부터 불교문화가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강화는 재조 대장경(팔만대장경)을 선원사에서 조판하는 등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배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수의 사찰을 중창·복원하는 등 꾸준히 불교문화를 유지해 나갔다.

 

 

『감로도』란?

 

불화는 쓰임에 따라 의식용, 교화용, 장엄용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감로도는 죽은 자(亡子)를 위한 천도의식을 지낼 때 걸어 놓는 대표적인 의식용 불화이다. 또한 불화는 형태에 따라 벽화, 경전화 그리고 벽걸이 그림인 탱화 등으로 나눠지며 감로도를 비단이나 삼베, 종이에 그려 벽에 거는 형태로 제작한 것을 '감로왕탱' 또는 '감로탱화'라고 한다. 

감로도에는 아귀로 표현된 억울하게 죽어 의지할데 없는 무주고혼 無主孤魂들에게 천상의 신들이 마시는 감로를 맛 보여 극락왕생하게 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부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귀도에 빠져 먹지 못하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님에게 방법을 물어 백중일(음 7월 15일)에 과거와 현재의 부모를 위해 온 세계의 부처와 스님께 음식을 공양한다는 『불설우란분경佛說舌蘭盆經』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화면은 주로 3단으로 나누어져 상단의 천상계天上界, 중단의 시식례 施食禮, 하단의 지옥과 속계俗界로 이루어진다. 감로도는 사상적으로는 효를 중시하였고, 도상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풍속 장면이 가득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한국적인 불화이다. 

 

 

청련사의 원통암 감로왕탱
1907년/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 두홍제작


19세기말에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경기파회승들의 불화 양식을 갖춘 그림으로 당시의 불교신앙을 시사해 줄 뿐 아니라

조선후기 불화와 근대불화를 연결해 주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다른 감로왕도와 마찬가지로 청련사의 감로왕탱 또한 상, 중, 하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 

복제품,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빗살무늬토기 완형 복제품이며,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뾰족 바닥이다. 해안이나 강 주변에 주로 발견되며, 

초기에는 토기 전면에 사선문이나 물고기 뼈 모양의 어골문을 새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단부에 문양이 확인된다.

 

반월형돌칼                              가락바퀴

 

참성단  塹星檀


마니산 꼭대기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동그란 모양으로 쌓은 아랫단 위에 네모난 제단을 올렸다. 단군과 선조들은 말을 달리고 바다를 건너 강화의 신성함을 찾았다. 최근에도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에서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올려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인돌' 
유네스코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고자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세계유산협약)을채택하였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구분된다. 강화의 고인돌은 전북 고창, 전남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의 고인돌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만들어진 선사시대 거석기념물이며 무덤의 일종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6만여 기의 고인돌 중 4만여 기가 한국에 있다. 강화, 고창, 화순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등의 형식이 지역에 따라 각각 확인된다. 이러한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시대 사회상과 문화교류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산이다.

 


고인돌의 나라, 강화


강화는 산과 물이 풍부한 곳이며, 고인돌을 만들기 좋은 편마암이 풍부하여 고려산과 별립산을 중심으로 고인돌 16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강화는 고조선의 대표적 특징이자 한반도 북쪽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고인돌)이 다수 분포한다.

 

 

세계유산 강화 고인돌 : 강화 부근리 고인돌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중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한국을 대표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고려산과 봉천산을 잇는 평탄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석재는 흑운모 편마암이며, 고임돌(지석)을 좌우에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이 올라가는 구조이다. 두 개의 고임돌은 약 52톤가량의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지상에서부 2.6m이고 전체적으로 약 3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인근의 고인돌과 비교하여 크기에서뿐만 아니라 평지에 단독으로 위치하는 입지 면에서도 차별성을 보인다. 이러한 점을 토대로 당시 유력자의 무덤인 동시에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기념물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짧은 목 항아리 (왼쪽 두 개)
김포 양촌 유적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대여
높이 12.5cm / 바닥지름 10.8cm  높이 10.3cm / 바닥지름 7.8cm
짧은 목 항아리로 구연부 일부가 결실되었다. 회청색, 황회색을 띠며 공통적으로 구연은 바깥으로 외반 한다. 

바닥은 둥글거나 평평하다. 외면에는 횡선문이 있다.

토기 주구호 (오른쪽)
김포 양촌 유적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대여
높이 9.7cm | 바닥지름 9.8cm
토기 주구호로, 구연부가 일부 결실되었다. 회색을 띠고, 태토는 세사립이 포함된 점토를 사용하였다. 

구연은 외반 하며, 주구가 형성되어 있다.

 

 

‘高木根縣’ 명 항아리
인화-강화 도로구간 유적 통일신라시대 1호 주거지 출토
저부와 구연부 일부가 결실된 도기 호壺이다. 견부 중앙에는 해서체로 ‘高木根縣’ 4자를 음각으로 필사하였다. 

견부 하단에는 1조의 횡침선이 있고, 외면에는 격자 타날의 흔적이 있다.

 

토기에서 찾은 ‘고목근현(교동)’의 흔적
인화-강화 도로구간 유적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주거지 1기, 수혈 13기 등의 생활 유구가 출토되었다. 강화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통일신라    시대의 주거지이며, 내부에는 구들과 아궁이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아궁이에서는 '高木根縣(고목근현)이 새겨진 도기호가 출토되었다.      '高木根懸'은 강화가 고구려의 영역일 때 불리었던 교동의 옛 지명이었다. 고구려의 지명이 새겨진 도기가 통일신라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점을 통해 통일신라 때 공식적인 지명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지명이 지속적으로 전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화-강화 도로구간 유적, 통일신라시대 1호 주거지 출토 도기호

 

 

 

 

 

 

 

외규장각은 1782년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이다.
병인양요 때 많은 소장도서가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당했다가 2011년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청자상감운학문수구호 靑磁象嵌雲鶴文水口壺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자상감연화국화문병 青磁像做蓮花文甁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자죽순형주자 靑磁竹荀形注子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자상감국화문병 靑磁象嵌菊花文甁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자상감국화문주자 青磁象嵌菊花文注子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청자상감연화문병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고려 도읍, 강도
고려의 강화천도는 당시 무신집정자인 최우의 주도하에 1232년 2월에 공식적으로 논의된 후, 6월에 강화도로 천도가 결정되었다.
개경의 많은 인구가 이주하였으며, 도성에 있는 궁궐과 사원의 명칭은 개경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강화는 몽골의 침입에 의해 도망친 임시적 수도가 아닌 몽골의 침입에 항쟁하며 고려를 지키기 위한 공식 수도였다.

 

강도의 궁궐
강화천도 이후 약 1년 반이 지난 1234년에 궁궐을 포함한 국가의 기본 시설이 완성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궁궐을 짓고 천도하는 것과 다르게 당시 고려 왕실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성곽은 강도를 외성-중성-내성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다.
관청리 일대에서 궁궐이나 사원 유적의 특징인 장대석 기단과 길이 60m의 회랑을 비롯한 대규모 건물지가 확인되어 강화 고려 궁궐지로 추정되고 있다.

 

강도의 사원
강도시기는 외세의 침략과 함께 한 시기이기에 나라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팔관회·연등회 등 각종 불교 행사가 축소되지 않고 개경에서 강도로 이어졌다.
궁궐, 종교행사 등의 격이 내려가지 않았고, 개경 10대 사찰 중 법왕사法王寺, 보제사普濟寺, 왕륜사王輪寺는 개경과 강도에 동일하게 세워졌다.
강도시기에는 혈구사穴口寺와 선원사禪源社가 창건되었다. 선원사의 창건주는 최우이며 다른 사원이 국가 주도하에 설립된 것과 다르게 무신집단에 의해 설립된 사원이다.

 

강도의 생활
강화천도와 함께 개경의 주요 관료들이 강화로 들어오면서 강도에는 새로운 활기가 불었다. 강화로 천도하기 직전 개경에는 약 10만 호 (인구 30~50만 명)가 있었으며 개경의 많은 인구가 강화로 이주했다. 유교 시설과 학교도 건립되어 국자감, 양현고, 동·서학당이 강도 시기의 기록에 등장한다. 고종은 9재 생도를 연미정燕尾亭에 모아 과거를 시행하여 55명의 관리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강도에서의 죽음
개경에서 강화로 삶의 터전을 옮긴 고려 왕실과 귀족들 중 일부는 이곳에서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강화에는 4기의 고려 왕릉인 석릉 (21대 희종), 곤릉(22대 강종의 비), 홍릉(23대 고종), 가릉(24대 원종의 비)을 비롯하여, 이규보, 김취려, 허유전과 같은 고위 관료의 묘가 확인되었다.
강화읍 대산리 유적에서는 고려시대 공동묘역이라고 생각될 만큼 많은 수의 토광묘가 발견되었는데 천도 이전인 11세기부터 ~ 개경환도 이후인 14세기까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개경환도,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는 최우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조직이다. '야별초'로 시작하여 1231년 이후 몽골 침입기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다. 이후 1250년에 몽골군 포로로 구성된 '신의군'이 합쳐지면서 '삼별초'라 불렸다.
1270년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는 몽골에 대한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삼별초를 해체하고자 하였으나, 몽골항쟁의 선두에 선 삼별초는 해체를 거부하며 왕실에 반기를 들었다.
주요 활동 지역은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 갔으며 지속적으로 여·몽연합군에 항쟁하였다. 1273년 여·몽 연합군의 제주도 항파두성 함락을 마지막으로 삼별초는 해산되었다.

 

 

보상화문전 寶相華文塼
고려, 동국대박물관 소장

 

 

 

도기매병 陶器梅瓶

고려, 강화역사박물관 소장 

 

1251년 새로 만든 대장경판에 분향하다

 

幸城西門外大藏經板堂, 率百官行香. 顯宗時板本, 熾於壬辰蒙兵, 王與群臣更願, 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왕이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은 임진년(壬辰年, 1232)에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렸으므로
왕과 신하들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웠는데,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
                                                                                             『고려사』 권 24세가 고종 38년 9월

 

 

 

조선 제2의 수도 강화
강화는 국가가 위급할 때 왕실과 조정이 피난하여 전란을 극복하는 안전보장처이며 내륙으로 문화와 물자가 드나드는
인후(목과 코)와 같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제2의 수도인 강화에는 높은 관직인 종 2품 유수가 배치되는 강화유수부가
있었고, 임금의 거처인 행궁과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외규장각이 설치되었다.
강화는 고려시대 이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풍부한 식량이 확보되었고,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반드시 기지야 하는 해상관문이자 전략적 국방요지였다.

 

 

5진 7보 54돈대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강화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국방 강화를
위하여 5진 7보 54돈대가 설치되었다.

 

조선 경제의 관문

조선시대의 강화는 국가 비상시를 대비한 물자보관소의 기능을 하였다. 또한 삼남지방과 평안도, 황해도의 생산물과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서울로 나르는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월곶진[연미정]은 전국에서 올라온     조운선의 물품을 점검하는 곳이었다.  

 

 

조선 주요 마장지, 강화
군사상의 이유로 강화 전 지역에는 고려시대부터 말을 키우는 마장이 설치되었다. 강화는 예부터 수초가 풍족하여 말을
키우기에 유리하고,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말의 수송이 쉬웠다. 진강목장(양도면)과 길상목장(길상면)은 국가가
특별히 관리하는 말 1,500 필을 방목하였으며, 매음도목장(삼산면)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탔던 명마 사자황을 키웠다.

 

사고
사고는 고려와 조선의 실록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다. 강화사고는 1606년 마니산에 있다가
1660년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조선과 서구 충돌의 장, 개항기의 강화


19세기 후반 조선을 향하여 서양세력들이 밀려 들어오면서, 수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강화는 조선과  서구문명이 충돌하는 현장이 되었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는 기독교 선교를 빌미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조선의 충돌이었다.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 등 문화재 약탈을 자행하여 조선인에게 서양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시켰다. 
1871년 일어난 신미양요는 중국에 진출한 미국 상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명목으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한 사건으로, 대원군은 이 사건 이후 “침범하는 양이洋夷와 화친할 수 없다."는 척화비를 곳곳에 세워 서양에 대해 쇄국정책을 단행하였다.
고종이 집권하고 개항의 필요성이 높아져 갈 때인 1876년,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근대국가로 전환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제국주의 침략에 본격적으로 노출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강화에 최초의 근대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건립하고, 강화의병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양헌수 梁憲洙, 1816~1888

 

조선 후기 무관으로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프랑스 로즈 제독이 7척의 전함을 이끌고 강화부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양헌수는 공격 선발대 500명의 포수를 이끌고 강화도 정족산성으로 잠입하였다. 

이에 프랑스군은 대령 올리비에가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양헌수부대의 선전으로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철수하기 전 프랑스군은 강화의 외규장각과 기타 관아 및 전등사 등에서 각종 서적과 군기(軍旗), 은자(銀子) 등 귀중품을 약탈했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관아 건물과 민가에 방화했다.

 

 

어재연 魚在淵, 1823~1871


조선후기 무관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지킨 장수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병인양요 때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이후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6월 2일 진무중군에 어재연을 임명하여 강화도에 급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수비대는 '열과 성을 다하여 걱정적으로 싸웠다'는 미 해군의 기록처럼 치열하게 맞섰지만 미군의 근대적 군사력에 밀려 광성보는 함락당하고 말았고 어재연 장군은 동생 어재순을 포함한 수백의 조선군사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광성보 전투


1871년 신미양요 때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보로 진격하여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시켰으나 갯벌 때문에 무릎까지 빠지고 군화가 벗겨지는 등 광성보 상륙은 쉽지 않았다.
어재연(1823~1871)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미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하였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취하였으나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퇴각하였다.

 

 

수자기 帥字旗

19세기, 면 · 마, 415*435cm  

장수를 뜻하는 수(帥) 자가 적혀 있는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 걸고 싸웠던 깃발로 미군에 의해 약탈되어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다가 136년 만인 2007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수자기는 어찌 된 일인지 모이지 않아 전에 사용한 걸 다시 올린다.

 

 

강화중성 江華中城
강화중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으로 1232년에 강화로 천도한 후 1250년(고종 37)에 판축기법으로 축조한 토성으로 강화읍 옥림리에서 선원면 신정리까지 약 11.39km에 달한다. 판축기법은 흙을 쌓고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여 우수한 강도를 얻는 축성기법이다.

 

강화외성 江華外城
사적 제452호
길상면 초지리 초지돈대에서 강화읍 대산리 적북돈대까지 총길이가 약 23km에 달한다. 조선 중기 이후 강화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해안방비를 위해 광해군 때부터 여러 차례 수개축(修改築)이 이루어졌다. 성은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부구간은 영조 때 전성(塼城)으로 개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