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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회화관 관람

by 즐풍 2023. 12. 5.

 

 

2023. 10. 8. 일요일 


 (이번에도 모두 박물관의 안내문을 옮긴 것으로 별도 표시는 생략한다) 

 

 

 

불교조각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상이 소개된 때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이며, 본격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6세기부터이다. 불상 제작 초기에는 단순히 중국 불상을 모방했으나, 점점 우리나라 특유의 조형감각이 두드러진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불상이 사실적인 인체 표현보다 강건한 기상을 강조하였다면, 백제 불상은 정교한과 세련미가 

더 보이며, 신라 불상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통일신라 불상은 삼국 불상의 특징을 하나로 아우르는 한편, 8세기에는 중국 당나라의 사실적인 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불상을 만들었다.
9세부터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행하지 않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을 한 불상이나 지권인智拳印(곧추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손갖춤)을 비로나자불毘盧遮那佛(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 유행했다.
 
고려시대에는 새 왕조의 활력을 반영한 거대한 불상과 지역별로 특색 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피던 시기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왕실이나 상류계층에서도 

불상 제작을 후원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여성과 지역민의 후원 아래 전국 각지에서 승려 조각가들이 집단을 

이루어 불상을 제작했다.
 
불교 조각실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표적인 불상과 보살상을 시대별, 주제별로 전시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쇠와 돌로 만든 대형 불상,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과 금동으로 만든 작은 작은 불상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불교 조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Korean Buddhist Sculpture


Buddhism came to Korea from China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lthough the first Buddha images 

in Korea were imitations or simplifications of Chinese prototypes, distinctive features gradually emerged 

in Goguryeo, Baekje, and Silla. With unification in the late 7th century, the styles of the Three Kingdoms 

gradually merged. By this time new stylistic influences from Tang China were having an impact, 

and these were adapted with the creation of the mature classical style during the 8th century, a golden age

 in Korean Buddhist sculpture. 

From the 9th century, images of the Shakyamuni Buddha with the earth touching gesture as well as those 

of the Vairocana Buddha with the wisdom fist gesture prevailed, while Chinese influences faded considerably. 

Buddhist sculpture continued to flourish in the Goryeo dynasty. In its first half, from the 10th to 12th centuries, 

many colossal images inspired by the vitality of the new dynasty were created. In the second half, the dominant 

political influence of Yuan China led to the adoption of the Tibeto-ongolian style in Buddhist sculpture.

During the Joseon dynasty, Buddhism was officially suppressed. Despite the various hardships generated by

this policy, images continued to be made in Buddhist monasteries, exhibiting the taste of commoners

and female lay worshippers.

 

 

 

 

 

부처(철조불좌상)
고려 11세기, 충남 서산 보원사 출토, 1916년 입수 


쇠로 만든 이 부처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 터에서 옮겨졌다.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손갖춤은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항마촉지인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은 고려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특히 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된 철불 세 구와 비교하면, 얼굴 모습을 비롯하여 왼쪽 어깨에서 한번 접힌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겉옷인 대의를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걸친 모습), 왼팔이 접히는 곳에 표현된 리본 형태의 

옷주름, 항마촉지인의 손갖춤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같은 조각가 집단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Though the head may look disproportionately large for the body and  the shoulders narrow,

the proportions are in good balance when looked upon from below, as it would have been by a worshipper. 
The chin is rather narrow, and the lips droop down at the edges, while the drapery resembles a series

of wide belts. 

These features  are also found in iron Buddhas from the Wonju area, Gangwon-do  province.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9세기, 1911년 입수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보관을 쓰지 않은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손갖춤으로는 한쪽 손으로 반대편 손가락을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얼굴이 동그랗고 표정이 현실적이며, 신체는 둔중하고 옷주름은 계단 모양으로 규칙적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광배와 대좌는 통일신라 후반기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Vairocana Buddha is an embodiment of the light of the Buddhist dharma pervading the universe. 

Vairocana images were first made in Korea during the 8th century and gained enormous popularity

in the 9th century.

This statue is notable for its round face, a well-proportioned body, and an exuberant halo.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甘山寺 石造彌勒菩薩 立像 
통일신라  719년 무렵, 경북 경주 감산사 터 출토, 국보 81호, 1916년 입수 


불상은 경주의 감산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광배 뒷면에는 이 불상을 만든 사람, 만든 목적 등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집사부시랑執事部侍郎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의 은혜와 임금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만들기 시작한 아미타불과

 미륵보살이다. 불상을 만들던 도중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죽자 김지성의 명복을 비는 내용도

 아미타불 광배 뒷면에 함께 새겨졌다. 

미륵보살은 온화한 표정과 허리를 약간 비튼 자세를 보인다. 통일신라 8세기 전반 석조 조각의 수준을 

잘 보여 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These statues were dedicated by Silla official Kim Ji-eong in memory of his deceased parents and

in gratitude for the king around 719-720. Amitabha Buddha stands upright with a stern face,

while Maitreya Bodhisattva bends his body slightly at the waist wearing a benevolent mile.

These pieces typify the high standard of stone carving in the early 8th century in the Unified Silla.

 

 

아미타불에 새겨진 글 甘山寺 石造 阿彌陀佛 立像 銘文


若夫至道者不生不滅猶表跡於周宵能仁者若去若 來尙流形於漢夢濫觴肇自西域傳燈及至東土遂乃
佛日之影奄日域以照臨貝葉之文越浿川而啟發龍 宮錯峙鴈塔駢羅舍衛之境在斯極樂之邦密爾有重
阿湌金志全誕靈河岳降德星辰性叶雲霞情友山水 蘊賢材而命代懷智略以佐時朝鳳闕而銜綸則授尙
舍奉御逡雞林而曳綬則任執事侍郎年六十七懸車 致仕避世閑居侔四皓之高尙辭榮養性同兩踈之見
機仰慕無著真宗時時讀瑜伽之論兼愛莊周玄道日 日覽逍遙之篇以爲報德慈親莫如十號之力酬恩
聖主無過三寶之因故奉為國主大王伊湌愷 元公亡考亡妣亡弟小舍梁誠沙門玄度亡妻古路
里亡妹古寶里又爲妻阿好里等舍其甘山莊田建此 伽藍仍造石阿彌拖像一軀伏願託此微因超昇
彼岸四生六道並證菩提 開元七年歲在己未二月十五日奈麻聰 撰奉敎沙門釋 京融大捨金驟源口口口
亡考仁章一吉准年卅七古人成之東海 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
金志全重阿准敬生已前此善業造歲口 十九庚申年四月十二日長逝爲口之


아버지 인장 일길찬이 47세에 돌아가시자 동해 흔지(지금의 포항) 앞바다에 그의 유골을 뿌렸다.
후대에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 착함이 그들을 도울 것이다. 중아찬 김지전(김지성)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이 착한 업을 이루었으므로 성덕왕 19년 4월 22일 그를 위해서도 이것을 만든다.

 

 

 

석조 약사불좌상 
통일신라, 9세기, 경북 경주 남산 삼곡, 1916년 입수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 삼릉곡 정상 가까이에 있는 마애대불磨崖佛 건너편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약사불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구해주며 음식과 옷을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약단지를 들고 있다.
통통한 얼굴, 건장한 신체, 얌전하게 흘러내린 계단식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절정기인 8세기 불상의 

여운이 보인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 표현,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화려하고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 등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이므로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 鐵造 佛坐像
고려, 10세기,  경기 하남 하사창동 절터, 보물 332호, 1911년 입수 


쇠로 만든 이 부처는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도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돌로 만든 대좌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부처는 높이가 2.88m에 무게가 6.2톤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불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옷차림과 손갖춤을 하고 있으나 허리가 급격히 가늘어진 조형감과 추상화된 세부 표현

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불상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부처의 양 무릎에는 딱딱하게 굳은 옻칠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 불상 전체에 두껍게 옻칠을 한 다음 도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This statue has the same earth touching hand gesture as the famous Buddha of the  seokguram Grotto.

Traces of hardened varnish are visible on its knees. This indicates that the image was originally covered

with a thick coat of varnish, which had gold pasted over it.

 

 

부처 木造 佛坐像


조선, 18-19세기, 1999년 구입  
조선 후기에 널리 제작된 삼불좌상 중의 한 점이다. 삼불좌상은 일반적으로 중앙에 석가불,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로 구성되며, 조선 후기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인 대웅전에

주로 봉안되었다. 

이 불상은 석가불의 오른쪽에 봉안된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불상의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고, 어깨는 움츠렸으며,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이러한 불상의 형태와 자세는 높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예불자의 자신을 고려하여 제작한 결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부처 鐵造 佛 坐像 (철조불좌상)
고려, 高麗 10세기, 경기 포천 출토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 손목의 위치로 보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단우견偏袒右肩(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겉옷인 대의를 왼쪽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걸친 모습)의
착의법, 무릎 앞의 부채꼴 주름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허리가 길어진 

부자연스러운 조형미 등으로 미루어 석굴암 본존불을 계승한 고려 초기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처에서 볼 수 있는 둥글고 온화한 얼굴, 항마촉지인의 손갖춤, 대의의 깃이 왼편 어깨에서 

뒤집힌 점, 대의의 물결식 옷주름 등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북부지역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비로자나불 鐵造 毘盧遮那佛坐像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통일신라 말-고려 초

 
비로자나불은 온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여래如來(부처를 부르는 다른 말로 '진리의 체현자' '열반에 다다른 자'라는 뜻)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단정한 얼굴, 안정감 있는 자세, 표면에 이음매가 보이지 않는 뛰어난 주조 기술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이 엿보인다.

그러나 형식화된 옷주름 등 세부 표현에서는 사실성이 떨어지는 고려 철불의 특징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

 

 

금동불의  제작 방법

 

금동불은 동으로 주물 한 뒤 도금한 불상을 말한다. 금동불은 대개 밀랍蜜蠟을 이용한 실랍법失蠟法으로 만들었다. 

실랍법에는 안 틀을 두지 않는 방법과 안틀을 두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안틀을 두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밀랍덩어리 자체를 조각한다. 그다음에 바깥쪽에 진흙으로 된 틀을 씌우고 가열하여

밀랍을 제거한 다음, 쇳물을 부어 만들었다.
이에 비해 안틀을 두는 방법은 먼저 흙으로 간단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섬세한 조각을 위해 밀랍을 입히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하면 밀랍이 입혀진 부분에만 쇳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용되는 놋쇠의 양이 절약되는 장점이 있다.

 

 

관음보살 金銅 觀音菩薩 坐像
조선초, 15세기경, 높이 38.6cm, 1908년 입수 


관음보살이 가진 자비의 마음이 예술로 발현되어 성스러운 미美의 경지에 도달한 상이다. 

세운 무릎 위에 오른팔을 올리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는 수월관음水月觀音 모습에서 연유하며,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취하는 자세라는 의미로 윤왕좌輪王坐라 부른다.
역삼각형 얼굴과 가늘고 긴 상체, 원형의 커다란 귀걸이와 온몸을 휘감은 화려한 장신구는 명나라 

영락永樂 연간(1403-1424)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2016년 조사에서 조선 15세기와 17세기 두 차례 복장물이 납입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조선 전기 직물 편 일부와 "뎡향(정향)”, “인삼' 등 옛 한글이 표기된 포장 종이 등도 함께 발견되었다.

 

 

목조보살입상 木造菩薩立像
조선, 17세기, 전반 높이 93.0cm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걸치고 손에 연꽃 가지를 든 보살입상으로, 조선 후기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상이다. 왼손을 위로 올리고 오른손을 내려 연꽃 봉오리가 달린 가지를 든 자세로 미루어  

삼존상의 일부였다면 좌협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살상은 상체에 내의와 천의, 하체에 군의와 요포를 겹겹이 입었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가슴, 팔, 

허리에 모두 장신구를 걸쳐 장식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두 팔의 좌우로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천의 자락과 통통한 얼굴 표현, 신체 구조의 뛰어난 조형성에서 

조선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상으로 추측된다.

 

부처 金銅佛立像 금동불 입상

통일신라, 8세기, 1911년 구입 

 

부처 金銅佛坐像 금동불좌상
통일신라, 8-9세기, 1911년 구입 

 

약사불 金銅 藥師佛立像 금동약사불 입상 
통일신라, 8세기, 1916년 입수

 

 

보살 金銅 菩薩 坐像 금동보살좌상 
고려, 14세기, 1912년 구입


고려 불상의 전통적인 요소와 티베트-몽골 불상의 이국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 고려 후기 보살상이다. 

긴 눈매에 살며시 다문 입술, 단순한 목걸이나 보살상의 자세 등은 전통적인 요소인 반면, 연꽃잎이 위아래로 
맞닿은 타원형 대좌, 커다란 원형 귀걸이, 팔에 감긴 천의 형태 등은 새롭게 등장한 형식이다.

 

 

보살 金銅菩薩坐像 금동보살좌상
고려, 14세기, 1981년 이홍근 기증

 

 

조선시대 불상 朝鮮時代 佛像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주도의 불교문화 융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1천 년 넘게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역사를 바탕으로 그 전통을 면면이 이어갔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세조와 같은 군왕을 비롯한 왕실의 후원 아래 수준 높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큰 활약을 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전쟁에서 훼손된 많은 절과 불상을 새로 짓고 
만들었다. 지방에 있던 승려 장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기 불상은 대부분 조선 초기에 비해 형태가 단순하고 

세부 묘사가 적은 소박한 모습을 띤다.

 

 

부처와 아미타불

황복사로 전해오는 절터의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692년 아들 효소왕은 어머니 신목태후와 함께 석탑을 세웠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이 금제 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에 안치하였다.
불입상은 얼굴 이목구비의 경계와 윤곽이 부드럽고, 두툼한 옷주름에 가려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등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 남아있어 692년 석탑을 세울 당시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얇은 옷주름으로 강조된 불좌상의 풍만한 신체는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706년 봉안한 아미타상으로 추정된다.

 

 

 

 

부처 蠟石製 佛坐像 납석제 불좌상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백제) 6세기, 1936년 발굴, 보물 329호


1936년 부여 군수리 절터의 목탑 자리에서 보살상, 광배 파편, 각종 옥, 토기 편과 함께 발굴된

백제 불상이다. 탑을 세우거나 사리기를 넣을 때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는 백제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돋보이며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주름선도 

부드럽고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