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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상도·부산·울산·대구

밀양 영남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야

by 즐풍 2023. 6. 11.

 

 

 

2023.5.9. (화)  해 질 녘 잠시 들림

 

 

산행을 마치고 밀양읍성으로 향했다. 

밀양읍성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성곽으로,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읍성을 구경한 후 밀양 영남루로 바로 내려갔으면 좋았을 걸 지리를 잘 몰라 차를 끌고 갔다. 

영남루는 밀양강 위에 있는 누각으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영남루의 작은 공간에서 풍경을 즐기며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ㅁ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밀양 영남루는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이다.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때 밀양부사 김주가 규모를 크게 중수하였다.

현재의 누각은 이인재 부사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며,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55년 영남루는 국보 제245호로 지정됐으나 1963년 보물 제147호로 변경되었다.

밀양시는 2014년과 2016년에 국보 신청에 있어 2023년 5월에 다시 국보 승격 신청서를 제출했다. 

밀양강변 절벽 위에 위치한 영남루는 깨끗한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는 외적인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도 수려하다.

특히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누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선생 등

당대의 명필가들의 시문 현판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부사의 아들 이증석 (11세)과 이현석 (7세) 형제가 쓴 영남 제일루와 영남루

현판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뿐만 아니라 서예가 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지칭되고 있다.

영남루 일원에는 단군을 비롯한 창국 8 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과 아랑낭자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사당, 

영남루 앞뜰에 꽃으로 피어난 석화군락, 530여 년을 이어온 밀양읍성, 옛 영남사의 부속 암자였던

천년 고찰 무봉사가 있어 영남루는 밀양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정보 수집 후 즐풍이 편집)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로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진 박시춘의 생가

 

박시춘 동상

 

 

 

ㅁ 밀양 천진궁 경남 유형문화재 제117호


천진궁은 단군과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이다. 

만덕문(萬德門)을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 얹힌 구조로,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가 있고,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 위패가,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의 시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진궁은 조선 현종 때인 1665년에 객사(客舍)인 공진관(拱辰館)의 부속 건물로 세워졌으나

경종 때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전패(殿牌)를 모시고 객사로 활용하였다.

영조 때에는 불에 타기도 했는데 그 뒤 다시 지어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위패를 땅에 묻고 헌병대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과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 등의 위패를 모시고 

이곳을 대덕전(大德殿)이라 하였다.

1957년에는 건물을 크게 수리하면서 이름을 천진궁으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매년 봄가을 어천대제(御天大祭)와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받들어 행하고 있다.


* 객사: 조선 시대에 왕의 위패를 모시고 공식 행사를 하던 건물로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버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
**전패: 조선시대 지방 관청 객사에 '전(殿)'자를 새겨 봉안하던 목패로 왕을 상징함.   (안내문)

 

 

천진궁 대문은 잠겨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실 천진궁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곳이다.

밖에 있는 석물을 간단히 둘러본다.

 

 

 

 

지금부터는 같은 공간에 있는 영남루를 둘러보게 된다.

안내도 4번은 천진궁이 천징궁으로 잘못 표기가 되었다. 밀양시 담당자와 통화해 오류를 알려줬더니 몇 시간 후 새로 인쇄하여 다음주에 교체하겠다고 피드백을 준다. 잘못을 알려주자 곧바로 시정에 나선 공무원이라 믿음직하다.

 

 

ㅁ 밀양 영남루 (密陽 嶺南樓)


밀양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뤄 전통 누각의 진수를 보여준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기둥 사이를 넓게 잡고 굵은 기둥으로 누마루를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이름에 걸맞다.
좌우 부속 건물로 능파각(凌波閣)과 침류각(枕流閣)을 날개처럼 거느리고 있다.

영남루라는 이름은 고려 말인 1365년 지밀성군사 김주(金湊)가 영남사에 있던 절터에 새 누각을 지으면서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객사(客舍) 부속 건물로 쓰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 밀양 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었다.

유명한 문인들의 시와 글을 새긴 현판이 한때 300개나 걸려 '시문詩文 현판 전시장'으로 불렸다.

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천진궁은 1665년 객사 부속 건물로 건립되었으나 곧 객사로 활용됐다.

영남루 앞과 천진궁 입구 땅바닥에는 마치 장미나 국화 꽃송이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듯한 돌꽃(석화)이 깔려 있다.


* 객사: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곳으로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됨.                   (안내문)

 

영남루 앞마당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출입문

 

침류각

 

침류각은 영남루의 우측에 있는 부속 건물로, 영남루와 층층각이라는 계단형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침류각은 밀양강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영남루와 함께 밀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침류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등 당대의 명필가들의 시문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루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층층이 지붕을 올린 특별한 건물이다.

이런 건물은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오르기 전 사자암의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대산 사자암이 궁금하면...  

 

설악산에 앞서 오대산 단풍부터 볼까?

2020_68 2020.10.17. (토) 07:30~13:13 (전체 거리 10.8km, 5시간 42분 산행, 53분 휴식, 평속 2.1km/h) 맑음 새벽, 아니 한밤중인 02:40에 일어나 샤워하고 밤참 먹고 03:40에 출발한다. 토요일인 오늘 설악산 울산바

electee.tistory.com

 


밀양 영남루는 조선 3대 명루에 속하며 한때 국보로 지정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시대 후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는 누각이다.

밀양강 절벽에 위치하여 밀양시의 장대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경승지이다.
주변으로 무봉사, 천진궁, 밀양시립박물관, 박시춘의 옛집, 아랑각, 밀양읍성 등 명소가 많다\.

이들을 한 번에 탐방하기 좋은 장소다. 

 

 

침류각은 들어갈 수 없으므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영남루를 살펴볼 차례다.

 

 

 

영남루는 왼쪽에 능파각과 지붕을 맞대고 있다.

 

 

ㅁ 능파각(凌波閣)

 

능파각은 영남루의 동쪽에 위치한 익루(翼廊)로, 영남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밀양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잡석 등으로 높게 쌓아 올린 기단 위에 건물이 있어 강 건너에서 봤을 때 더욱 우뚝 솟아있게 보인다.

능파각은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절벽 위에서 남천강과 아동산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능파각은 영남루와 함께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즐풍이 자료 수집 후 편집)

 

사실, 영남루는 능파각부터 올라가 신발장에 신발을 집어넣고 영남루로 이동하게 된다.

 

능파루에서 영남루로 이동하는 공간

 

현재 영남루에는 당시의 명필가들이 남긴 '강좌웅부(江左雄府)', '교남명루(嶠南名樓)', '운금루(運金樓)',

 '강성여화(江城如畵), '현창관(顯敞觀)' 등의 유명한 편액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계묘초하이증석(李憎石)십세서'라고 협서한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편액과, 

같은 협서로 '계하초하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李憎石十一歲書 )라고 한 '영남루(嶺南樓)' 편액은

이인재 부사의 11세와 7세 되는 아들 형제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이젠 거의 한자를 쓸 기회가 없어 작은 볼펜을 잡고도 한자를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일곱 살이면 이제 막 초등학교를 입학할 나이인데,

영남루(嶺南樓)라는 큰 편액을 쓸 정도면 굉장히 큰 붓으로 글씨를 썼을 것이다.

일곱 살 아이의 주먹손으로 잡기도 힘들 정도의 굵기일 텐데, 대단한 필력이다.

 

고건축물에 쓰인 재료의 대부분은 소나무다.

그중에서도 황금송이라는 소나무는 단단하기가 바위 같아 몇백 년을 지탱할 정도로 재질이 좋다.

그런 황금송의 구부러진 재료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건물에 녹아들게 완성시켰다.

 

영남루에서 침류각으로 이동하는 계단 위에 층층각으로 지붕을 얹어 눈비가 내려도 옷이 젖지 않게 이동하는 통로다.

 

영남루에서 조망하는 밀양강

 

고수부지를 정리해 수변공원으로 만들었다.

 

이번엔 이인재 부사의 열한 살 아들이 쓴 영남제일루 편액, 글자가 더 크다.

 

수십 번, 수백 법의 습자(習字)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낙점받은 글자일 것이다.

다소 미비한 점은 그간 많은 작품을 감상해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살 아이면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에 불과할 나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필력이다.

 

운금루, 運 자를 바로 알아낼 정도라면 제법 한자를 아는 사람이다.

운금루는 운수와 부를 가져다주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좀 세속적이란 생각이 들지만, 뜻을 확대하면 밀양 지역이 풍족한 곳이 되길 염원하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글자 역시 이증석의 글자라고 한다.

 

강성여화(江城如畵)라는 글은 '밀양강과 밀양읍성이 그림과 같다’라는 의미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찬한 말이다.

누가 쓴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창관(顯敞觀)이라는 현판은 '영남루에 오르니 사방이 높고 넓게 나타난다’는 뜻으로,

영남루의 웅장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영남루에서 바라보는 천진궁

 

영남루에서 보는 능파각의 밀양강변 방향 

 

이번엔 영남루를 강변 쪽으로 쭈욱 이동해 능파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영남루 앞마당

 

능파각에서 바라본 양남루 강변 방향 

 

 

영남루 주변에는 아랑각, 무봉사, 밀양읍성 등 화재가 산재한다.

한 군데 몰려 있으므로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이미 날이 어둡다.

영남루를 둘러본 후 바로 월연정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