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41
023.3.31. (금) 오후에 잠시 탐방
경주 월성의 산책로는 계림과 이어진다.
월성의 서벽 사이로 생긴 산책로를 나서면 최근에 생긴 해자를 지나 바로 계림으로 들어선다.
ㅁ 경주 계림 (慶州 鷄林)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雞林)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출처_문화재청)
계림에는 거의 활엽수 일색이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 화화나무가 많은 이곳의 숲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서산에 해가 걸릴 시기인 데다 나무가 많아 숲은 벌써 어둑어둑하다.
계림비각은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육각형의 비각으로 계림의 내력과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새긴
'경주 김알지 탄생기록비(慶州 金閼智 誕生記錄碑)'가 내부에 자리한다.
대석, 비신, 개석으로 이뤄진 이 비석은 영의정 남공철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경주부윤 최헌중이 썼다고 알려졌다.
계림과 내물왕릉을 가로지르는 펜스 너머로 첨성대가 보인다.
나무는 바람에 스러지듯 기울다가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일어섰다.
그 무게를 등에 짊어진다고 허리는 더 낮게 구부리며 안간힘을 쓴다.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내물왕릉
ㅁ 경주 내물왕릉 (慶州 奈勿王陵)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_문화재청)
보이는 게 다 내물왕릉은 아니다.
카맵으로 보면 이 경계 안에 모두 5개의 왕릉이 보인다.
앞에 있는 이 내물왕릉만 확인되었을 뿐 나머지 왕릉은 이름 없이 몇 호 고분으로 불린다.
언젠가 발굴되어 주인을 알면 그때 제 이름을 찾고, 없으면 그 특징에 따라 각기 이름이 붙을 것이다.
천마 그림이 있다고 하여 천마총, 금관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왔을 땐 이곳을 임의대로 걸어 다녔던 거 같은 데 이젠 울타리가 있어 다닐 수 없다.
계림에서 내물왕릉과 주변의 고분은 멀리서 지켜만 보았고, 이내 첨성대로 들어왔다.
ㅁ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 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 자 모양으로 맞물린 기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첨성대가 생기고 난 뒤 1,400여 년 동안 더러 지진이 나고 강한 태풍도 지나갔다.
2016년의 경주 지진만 해도 규모 5.8의 제법 강진이 지나갔다.
그런저런 위기를 견뎠음인지 틈새가 많이 벌어진 곳도 있다.
어쩌면 복원공사로 더 튼튼하게 다시 쌓아야 할 날도 있겠다.
이번엔 첨성대를 나오며 내물왕릉 방향을 조망한다.
계림에 볼 때와 달리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다섯 개 모두 살필 수 있다.
이번엔 계림 방향이다.
동궁 주차장으로 가며 보는 월성 서성벽
월성과 해자
부지런해야 일출을 볼 수 있는 반면 일몰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시각에 야외에 있어야 좀 더 쉽에 낙조를 보게 된다.
경주 월성을 탐방하며 이웃에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첨성대까지 한 번에 끝냈다.
동궁과 월지를 포함해 신라시대엔 이 모든 것이 왕궁의 범위 안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사이사이로 길이 생기며 경계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저녁 먹고 경주읍성의 야간 풍경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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