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7.일
4박5일 일정으로 경주여행에 나섰지만, 일정을 짜기가 쉽지 않다. 등산을 좋아하니 경주 남산인 금오산과 고위봉,
토함산은 1~2 순위로 계획을 짰지만, 그 외 지역은 처음이라 어디가 좋은 지 알 수 없다.
도처에 산재한 역사유물 위주로 계획을 세우자니 한도 끝도 없다. 인터넷 검색으로 몇 군데 더 집어논다해도 여전
히 일정이 남는다. 결국 경주에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보니 멀지 않은 양산에 통도사를 품은 영축산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가을, 영남알프스를 태극종주하며 영축산 정상에서 통도사로 내려가는 암봉군락을 보며 언젠가 다시 오면
그 구간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축산과 도립공원인 가지산 중에서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경주에
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이 기회에 영축산을 이용하기로 한다. 해발 1,000m가 넘으니 어쩌면 서리꽃을 볼 수
있겠단 생각도 염두에 둔다.
아침을 먹으려고 시내를 돌아다니니 설 전날인데다 일요일이라 도도체 문 연데가 별로 없다. 혹여 문을 열었다면
내가 싫어하는 순대국과 함께 파는 음식이라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경주 중앙시장 안에 몇몇 음식점이 있지만
내 구미에 당기는 음식점이 아닌데다 비쥬얼이 영 아니니 입 짧고 비위 약한 나로선 엄두가 안 난다.
결국 한 시간 넘게 돌아다니다 어제 아침 먹은 그 콩나물국밥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 음식은 맛이
별로라는 소문은 경주 여행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 셈이다. 주방에 들어가본 적이 없는 내가 음식을 만들어도
이보단 맛있겠단 생각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늦었다. 경주에서 양산 통도사까지 대중교으로 검색했을 때 대략 두 시간 거리다.
결국 영축산은 포기하고 어제 남산을 주능선 위주로 탐방했으니 오늘은 남산의 동쪽의 산 아래 있는, 즉 동남산에
산재한 문화재를 탐방하기로 한다.
숙소에서 나와 식당을 찾기에 앞서 바로 앞에 있는 능을 산책한다. 드문드문 산책에 나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경주에는 100여 개가 넘는 능이 있다. 능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구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발굴 조사로 금관이 나온 것은 금관총, 천마의 그림이 있는 것은 천마총이라 하고, 왕릉의 이름을 알지 못한 것에
일련번호를 부여했다. 일련번호는 이미 일제시대에 붙여진 것을 그대로 따른다.
왕릉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가끔은 이렇게 나무가 자라기도 한다.
왕릉의 주인이 나무란 더듬이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나정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로, 오릉의 동남쪽에 있는 남산 식혜곡과 장창곡 사이의
완만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촌이 있었는데, 기원전 69년 어느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
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단지 큰 알만
있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와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박혁거세라 하였다.
박혁거세는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며 기량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박혁거세가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이르러 6부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받들었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신라 시조 임금의 내력을 새긴 유허비를 이곳에 세웠으며, 이후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002
년부터 200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하여 신라 시대의 팔각 건물지를 비롯한 유
구가 확인되었는데, 탄생 설화와 관련된 신궁 또는 국가적인 제의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남산과 마찬가지로 동남산의 문화재 역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안내문을 그대로 싣는다.
나정에서 마을을 지나 남산에 들어서니 일성왕릉이 보인다.
일성왕릉
이 능은 신라 제7대 일성왕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 서쪽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정이 있다.
일성왕의 성은 박씨이며,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다. 민간에서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일성왕릉이 시계자판의 6시 자리에 위치했다면 왕릉을 둘러 남산성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이 남산성을 둘러볼 생각에
일성왕릉을 찾았지만, 신라의 산성이란게 초기 시설은 별로 볼 게 없다는 생각에 동남산 부근의 유물을 찾아 나선다.
한참을 걸은 끝에 남산 불곡의 마애여래조상을 만난다.
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
이 불상은 남산 동쪽 기슭 한 바위에 자연암을 0.9m나 파 내어 감실을 만든 후 조각한 여래좌상이다.
경주에서는 "할매부처"로 불린다. 머리 부분은 깊게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고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귀 부분까지 덮여 있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둥글둥글하게 조각되고 눈은 은행알처럼 두툼하게 나타내었다.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하였다. 손은 옷 속에 넣어 표현되지 않
았고 옷이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발만을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대좌를 덮은 옷은 아랫단이 장막을 만들어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장창골 애기부처, 배동 삼존불과 함께 신라 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불산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 부르게 되었다.
경주 남산 일원(사적 제311호)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있는 금오산과 고위봉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털어 남산이라 부른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동서로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길이는 약 8km
이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 되어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남산에는 불교 관련 유적 외에도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깃든 포석정 터, 서라벌을 지
키는 중요한 산성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전설과 설화가
곳곳에 깃들어 있다.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한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탑곡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에 신인사란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에 3층 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부른다.
마애조상군이란 명칭은 높이 약 10m, 사방 둘레 약 30m의 바위와 주변의 바위면에 여러 상이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면에는 마주 선 9층 목탑과 7층 목탑 사이에 석가여래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탑 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동쪽면에는 가운데에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나무상 등이 새겨져 있다.
남쪽면에는 삼존불이 정답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여래상과 승려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면에는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에 여래조상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예는 보기 드문 일이며,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총 34점의 도상이 확인되고 있다.
북면 마애탑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분만 아니라 추녀 끝에 풍경까지 새겨놓은 이 탑은 신라 목탑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황룡사탑의 복원에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본존여래상과 협시보살 등이 새겨져 있다.
여래입상 남쪽에 단층 기단에 전체 높이가 4.5m나 되는 석탑이다.
넘어져 있던 탑을 1977년 다시 세워놓았다.
남면 바위 전경
낮은 감실 안에 삼존불이 있고, 그 옆으로 얼굴의 반 정도가 파괴되었으나
굳세고 풍성한 느낌을 주는 여래입상이 서 있다.
2.2m의 여래입상이다. 사각대석 위에 서 있는데, 대석에는 발만 새겨져 있고
몸체는 다른 돌로 만들어 세웠다. 이 여래입석은 조각도 우수하지만 부처바위
전체에 공간미를 주고 있다. (경주여행 답사의길잡이 참고)
서면 마애여래
서쪽은 바위면이 좁아 마애여래 한 분과 비천상 하나만 새겨 놓았다.
보리사 마애석불
이 마애불은 망덕사터를 비롯한 벌지지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있다.
앞으로 약간 기운 바위면에 광배 형태로 바위면을 파내고 불상을 조각하여 상당히 얕은 돋을새김이
되었다.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이 표현되고 얼굴은 도툼하고 세밀하게 하여 자비 넘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길게 표현하고 목에는 세 개의 선으로 나타나는 삼도(三道)를 두 선으로 표
현하였다.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슴을 일부 드러내고 속옷의 윗단만 경사지게 나타내었다.
양 손은 옷 속으로 숨겨서 표현하지 않았고, 발이 표현되지 않은 양 다리는 특이하게 가운데로 향하
는 옷선 몇 개로 처리하였다. 아래쪽에 흐릿하게 표현된 연꽃대좌는 앞 바위의 윗면에 가리어 생략
된 듯하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마애석불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간다.
이정표는 도로에 달랑 하나만 있고 길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애매하다.
보리사 경내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
이 불상은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있는 석불좌상이다.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이며,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다.
연꽃팔각대좌 위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이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 세상을 굽어보는 모습
이라든가 풍만한 얼굴의 표정이 자비로운면서도 거룩하게 보인다.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연꽃띠 바탕 사이사이에 작은 불상을, 그 옆에 불꽃무늬를 새겼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특히 배 모양의 광배(舟形光背)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좌상이
선각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이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불돌 하나씩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위의 빋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적인 형태로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신중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
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모전석탑 양식인 동탑
윗기단 몸체에 팔부신중을 돋을새김한 서탑
팔부신중은 모두 좌상으로 머리 셋, 팔이 여덟 개인 아수라상이라든지 뱀관을 쓰고 있는 마후라가상 등이다.
이들은 입에 염주를 물었거나 손에 여의주나 금강저를 든 모습 또는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을에 있는 소나무다. 소나무 가지가 생긴 맨 아래쪽에 겨우살이인듯 보이는 유난히 울창한 솔가지 더미가 있다.
유독 그곳에만 솔가지가 울창하게 자라는 이유가 신비롭다.
傳 염불사지 삼층석탑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유적이 계곡마다 조영된 경주 남산은 신라인들의 역사와 문화·신앙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영산으로써 2000.12.2.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일원에 위치한 傳 염불사지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
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다.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念佛寺라 불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避里寺를 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너져 있던 傳 염불사지 석탑 2기의 탑재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옥개석을 이용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2008년 1월 24일 복원을 위하여 해체하였다. 복원공사는 2007.6.13 착공하여
2009.1.15.까지 석탑 2기와 주변정리를 완료하였다.
서탑의 사리장엄구를 봉안하였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투공
된 점 등으로 보아 최초 탑 건립 시기를 7세기말에서 8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동남산 주변의 문화재를 탐방하고 어제 못 본 열곡암의 쓰러진 부처님을 볼 생각에 동네 주민들에게 위치를 확인
하니 시간상 갈 수 없는 거리다. 되돌아 오는 길에 무량사를 잠시 들려본다.
무량사내 포대화상
무량사내 달마대사?
독특한 탑신 위에 부처님을 모셨다.
'■ 국립공원 탐방 > 경주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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