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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경주권

경주 남산(금오산) 등산과 문화재

by 즐풍 2019. 6. 27.

 

 

 

 

2016.2.6. 토. 09:10~16:00(6시간 50분, 11.66km 이동),   날씨: 맑음

 

 

경주는 초기 신라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천년고도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나 지리, 언어에서 갖는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법률이야 어느 시대건 그 나라를 지배하는 근간이니 별론으로 한다 해도 언어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서울말이 표준어이듯 신라시대엔 경주의 말이 사실상 표준어였다.

고관대작이나 사회 지배층이 쓰는 말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고, 백제나 고구려 말은 점차 세력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경주 중심의 신라 언어는 고려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도 여전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만 바뀌었을 뿐 지배층이 속한 언어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여전히 우리 언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천년을 지탱하는 동안 생산된 수많은 유물들이 전란과 세월 속에 사라졌다.

하지만 산하에 남아있는 석물은 풍상에 깎이고 닳고 훼손되었어도 국보나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은 도처에 남아있다.

미국이 아무리 선진국이고 부강하다 해도 우리의 유구한 역사나 유적에 비한다면, 그들이 자랑하는 건 오직 현대 문명일 뿐이다.

이런 경주를 중학교 때인 1975년 수학여행으로 다녀왔으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늘 순위에서 밀렸다.

이제 설 연휴를 이용하여 4박 5일의 여행에 나서며 밀린 염원을 풀어본다.

 

설 연휴에 움직이면 당연히 길은 막힌다는 걸 알기에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2월 5일 연가를 내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런 연휴가 아니고서는 여러 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로는 크게 밀리지 않아 쉽게 경주에 도착했다.

어제 오후엔 경주박물관을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유적지를 탐방했다.

오늘은 금오산과 고위봉을 연결하는 소위 경주 남산을 돌며 주변에 산재한 문화유적을 답사하게 된다.

 

경주 남산 등산코스

 

 

 

경주 배동에 있는 삼릉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재위 시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섰다.

이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덕왕(재위 912-917)은 헌강왕의 사위로 효공왕이 자손 없이 죽자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는 견훤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했다. 가운데 있는 능으로 두 차례에 걸쳐 내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돌식돌방무덤으로 돌방 벽면 일부에 색칠이 되어 있는데,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새로운 양식이다.

경명왕(재위 917-924)은 신덕왕의 아들로 재위 기간 동안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을 물리치기도 했다.

 

능 앞의 안내문을 옮긴 것이다. 안내문이 전문적이고 객관성이 있어 이하 대부분의 설명도 안내문을 그대로 옮긴다.

 

 

경주 남산 일원(사적 제311호)

경주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있는 금오산과 고위봉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 부른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동서로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길이는 약 8km이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남산에는 불교 관련 유적 외에도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깃든 포석정 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전설과 설화가 곳곳에 깃들어 있다.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기도 한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옮김)

 

삼릉곡 제1 사지 탑재와 불상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아 정비하였다. 이하 내용은 생략한다.

 

 

 

삼릉곡 제2 사지 석조여래좌상

높이 1.6m, 너비 1.56m의 큰 불상이다.

옆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옮겨 놓은 것이다.

풍상에 마모가 없어 옷 주름이 생생히 남아 있다.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 매듭이 신라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와 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떤 불상인지 알 수 없다.

편안히 앉은 자세, 탄력 있는 가슴, 넓고 당당한 어깨 등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이 불상은 남산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썼다.

보관에는 작은 불상이 따로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 주위에는 주칠의 흔적이 남아있어 붉은빛을 띠고 있고, 작게 표현된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뚜렷하다.

관음보살은 연꽃으로 표현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얇게 조각된 옷자락은 아래까지 내려와 양다리에 U자형으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선으로 새긴 여섯 부처님)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 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 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하여 2007-2008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정비하여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 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화염문과 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아연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이다.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 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의 전체적인 모습은 복원하였지만, 머리 윗부분과 광배 뒤쪽의 무늬는 복원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 바위에 마애선각여래좌상이 그려져 있단 말씀...

 

 

상선암에서 바라보는 상사암과 암봉들

 

 

금송정으로 가며 바라보는 경주쪽 일대

 

 

저 암봉 맨 위엔 신라 경덕왕 때 음악가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며 즐기던 금송정이란 정자가 있던 곳이다.

금송정이 있던 냉골 바위산은 그 모습이 괴상하고 거대한 바위더미다.

 밑에서 보면 정상은 구름이 걸린 듯 드높아 보인다.

바위 아래쪽엔 노란 선으로 둥글게 표시한 곳에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거대한 바위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다.

얼굴의 앞면은 고부조로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바위를 투박하게 쪼아 내었다.

짧은 목에 삼도는 없고, 건장한 신체는 네모난 얼굴과 잘 어울린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을 짓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불상의 신체는 거칠고 억세게 선각하였고, 좌대는 부드러워지다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하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 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입체감 없는 신체표현, 거칠고 치졸한 옷 주름 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 양식을 반영하는 거대 불상이다.

 

 

상사암

 

 

상사암에서 다시 보는 마애석가여래좌상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고 했다.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해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란 뜻이다.

아침 해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사계절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남신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하고 외쳤다.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소리 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두 신은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다.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다.

여신은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금오산 정상 표지석

상사암에서 주능선을 따라 금오산 정상까지 눈이 얼어 길은 매우 미끄럽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젠을 착용하기도 했지만, 난 아이젠을 지참하지 않아 매우 조심스럽게 걸었다.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이 불상은 금오봉이 서쪽으로 뻗어 내린 중간 남면의 중턱에 위치한다.

거대한 사각기둥 모양의 바위 남면을 다듬어 조각하였고 다른 면은 자연 그대로다.

윗면에는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몸의 높이는 8.6m로 경주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이다.

몸의 오른쪽 바깥을 거칠게 다듬기만 하고 광배를 조각하였던 흔적은 없다.

겉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옷 주름이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옷은 반원으로 주름져 층층으로 내려가는데,

주름을 표현하는 기법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기법이다.

발은 따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중 하나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을 마애불 앞에 옮겨 놓았다.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왼손은 가슴을 들어 올려 엄지와 셋째, 넷째 손가락을 붙이고 있다.

바위 윗면에는 머리가 있던 곳에 3단으로 파인 홈이 있고 그 왼쪽에는 귀가 닿았던 부분이 파여 있다.

 

정상에 있는 안내지도에 약수 계곡으로 500m 내려가면 마애입불상이 있다기에 내려가 본 마애불상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선이 약하게 마멸된 데다 머리가 없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내려서니 어떤 노인 한 분이 빗자루로 주변을 쓸며 정리하고 계신다. 관리인은 아니지만 주변을 산책하며 이렇게 정리

하고 계시니 경주의 유적지가 지금까지 빛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마운 분이다.

 

 

약수계곡의 마애입불상을 보고 정상에 다시 올라와 인증샷을 남긴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 데 수리(頂)는 높은 곳을 의미한다.

남산에는 세 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고 불렀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 나를 다라 오라"며 남쪽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 주시오"라고 했다.

생의 스님이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 때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 구월 구일에 남산 삼하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는 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진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지름 2m의 연화좌대만 남아 있다.

진입도로 아래쪽에 절터가 남아 있는 데 그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옆에 서있는 비석에 있으련만 이제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 받침만이 역사의 궁금증을 더해 주고 있다.

 

 

 

금오산에서 고위봉까지는 거의 임도를 따라간다.

지루하게 긴 코스에 볼 거라곤 앞서 본 연화좌대와 이 삼층 모전탑이 전부다.

모전탑을 보고 약 200m 정도 올라가면 칠불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만난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국보 제312호)

이 불상들은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 불린다.

삼존불위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 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 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로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이 본전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뒤쪽의 삼존불과 앞쪽의 사방불의 거리는 불과 2m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출입금지 지역이라 삼존불을 가까이서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삼존불 앞에 있는 사방불은 네 면에 각각의 부처님이 조성돼 있다.

 

 

 

 

 

 

칠불암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이 불상은 칠불암 위의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인다.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다. 이처럼 유희좌(遊戱坐)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의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빗물이 떨어지지 않게 위쪽에 가로로 길게 선을 파 넣고 아래쪽으로 깊이 파고 보살님을 모셔 상태가 좋아 보인다.

 

 

도솔님이 남산 열곡암에 쓰러져있는 부처님을 꼭 보고 오라고 하여 칠불암에서 만난 지역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위치를 모른다.

웹 검색으로 열반암 위치를 알려주니 칠불암에서 한참 멀다고 한다.

결국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 아쉽게 발길을 돌린다.

 

고위봉이다.

이 고위봉에서 천룡사 삼층석탑을 볼 요량으로 하산하다 보니 건너편 이무기 능선의 암봉 군락이 제법 화려해 보인다.

결국 다시 올라와 이무기 능선을 타고 하산한다.

 

 

 

내려가며 보는 이무기능선

 

 

지나온 능선의 일부

 

 

 

 

 

건너편 봉우리

 

 

들판 건너 산들이 어깨를 맞대며 줄지어 늘어서 있다.

 

 

천우사의 5층 석탑

 

 

경주는 도시형 국립공원이다. 시내든 산이든 어디를 가도 문화재가 널려있다.

어제 국립박물관에 이어 오늘 탐방한 경주 남산에도 가는 곳곳에 불상이나 석탑이 즐비하다.

천천히 본다고 해도 위치를 몰라 지나친 곳도 많다.

언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근차근 잘 살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