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국립공원 탐방/경주권

경주 포석정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조상군) 탐방

by 즐풍 2023. 5. 4.

2023_49

 

 

2023.4.1. (토) 오전에 잠시 탐방

 

경주에서 형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던 건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과 선도산 용작골 주상절리,

칠불암 마애불상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선도산 용작골 주상절리는 이미 포스팅을 했고, 탑곡 마애불상군 가는 길에 포석정부터 들른다.

칠불암과 신선암의 형님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결국 취소했다.

 

 

 

ㅁ 경주 포석정지 (慶州 鮑石亭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5) 때로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본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출처_문화재청)

 

 

매표소 실내에 복원한 포석정

 

 

 

포석정의 물길은 저 참나무 숲 아래에 있다.

 

포석정 물길이다.

예전엔 이곳에 물이 지나가는 흐름이 있었겠으나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높낮이 차이가 5.9cm라고 하니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중국과 일본에도 이런 시설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유독 우리나라에만 이 시설이 남았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ㅁ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릿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출처_문화재청)

 

 

장소를 옮겨 탑곡 마애불상군으로 이동했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뒤 언덕 위에 있는 바위에도 조각이 가득하다.

해설사가 계시면 이곳 해설에 30여 분 소요될 정도로 작품이 풍부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조사하며 스케치한 그림이다.

왼쪽에 9층석탑, 오른쪽에 7층석탑을 새겼다.

그 중간에 대좌에 앉은 여래좌성이 보이고, 아래쪽엔 암수 사자 한쌍이 있다.

사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데, 이렇게 그림 그린 걸 보면 외국과 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과 삼층석탑, 석등재, 기단면석, 초석, 석탑재, 치석재 등이 있다.

1940년과 1942년 자료에 의하면 마애불상군에 포함된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은 도괴되었으나,

그중 삼층석탑은 1977년 복원되었다.

또한 2006년 「연보」에는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암반에서 비천상과 승상이 1구씩 추가되었다.

마애불상군은 높이 9m의 암반 4면에 불상, 보살상, 비천상, 금강역사상, 승상, 목탑, 사자상 등

총 37구의 조각이 저부조로 새겨졌고, 남쪽에는 석조여래입상 1구가 있다.

마애불상군과 석조여래입상은 전체가 마모되거나 훼손되었다.

 

남면에는

얕게 감실을 파서 삼존불을 새겼다.

가운데 여래좌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고, 손은 대의자락에 가려져 있다.

좌·우협시보살상은 여래좌상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삼존불에는 각각 원 형의 두광이 있다.

좌협시보살상의 옆에는 보리수나무가 있으며, 나무 전면에 있는 별도의 암반에는 상반신만 드러난 승상이 있다.

우협시보살상 옆에는 결가부좌한 승상이 있다.

승상의 전면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석조여래입상은 두광과 불상이 1석이며, 별석재인 대좌에는 양 발이 새겨져 있다.

두부는 훼손되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착의법은 통견이며, 신체의 볼륨감이 드러난다.

옷주름은 양다리에서 각각 ‘U’ 자형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왼손은 복부에 두고, 오른손은 내려뜨려 허벅지에 붙였다.

대좌는 방형이며 상부는 경사지게 표현하였다.

 

북면

면적이 가장 넓고 중앙에는 두광이 있는 여래 좌상이 연화대좌에 앉아 있으며, 위로는 천개가 새겨져 있다.

여래좌상의 좌·우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있는데, 목탑을 형상화한 것이다.

탑은 약식화된 기단에 탑신부가 있고, 전각 끝에는 풍탁이 달려있다.

그리고 상륜부에 는 노반부터 복발, 보개, 수연, 보주까지 조각하였다.

9층·7층탑의 아래에는 암·수사자가 1구씩 새겨져 있다.

좌측 9층탑의 찰주 끝에는 비천상 2구가 여래좌상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다.

 

동면에는

가장 많은 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에 앉아있는 여래좌상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여래좌상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보살상이 있다.

그 둘레에는 7구의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보살상의 좌측 아래에는 무릎을 꿇은 승상이 공양하고 있다.

우측 갈라진 틈 옆에는 두 나무 사이에 결가부좌한 보살상이 있으며, 2006년 발견된 비천상과 승상이 이곳에 있다.

비천상은 우측 나무 위에 있고, 나무 옆에는 승상이 있다.

그 옆으로는 갑옷을 입고 금강저를 든 금강역사상이 있다.

 

서면에는

가장 적은 수의 조각이 있다.

보주형의 두광을 갖추고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여래좌상의 좌우에는 보리수나무와 세모진 잎의 나무가 있고,

좌측과 위에 비천상이 1구씩 새겨져 있다.

마애불상군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각 도상별로 연구되거나, 사방불로 해석된 경우가 있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觀佛三昧海經』을 통해 도상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마애불상군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근래까지 지속되는 연구를 통해 7세기부터 9세기까지

다양한 편년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마애불상군의 남면에는 원형과 방형의 결구홈으로 추정되는 치석 흔히 있어 목구조물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삼층석탑은 마애불상군의 남쪽 끝에 위치하며, 기단부재 일부와 2층 탑신석은 신재이다.

석탑은 현재 높이 4.4m이며, 단층기단에 3층 탑신부를 갖추고 있다.

지대석은 2단이고, 기단면석에는 우주가 있다.

기단갑석은 편평하며, 하부에 부연이 있다.

상부에는 각형 2단의 별석괴임이 있다.

탑신석에는 우주가 있으며, 2층 탑신석부터는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1층 탑신석의 남면에는 5개의 장방형 치석흔이 세로로 일정하게 새겨졌는데,

이는 후대에 새겨진 쐐기흔이라 판단된다.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3단이며, 1단의 괴임이 있다.

옥개석의 모서리에는 내림마루와 풍탁공이 있다.

석탑은 전반적인 비례와 옥개석의 조성기법을 통해 통일신라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재는 마애조상군과 삼층석탑 사이에 있으며,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석등의 지대석이며, 지대석의 크기는 170×150×35㎝이고, 상면에 직경 24㎝, 깊이 12㎝의 결구홈이 있다.

석등재 서쪽의 평탄지에는 기단면석이 지표에 매몰되어 있다.

기단면석의 길이는 약 130㎝이고, 끝부분에 우주가 있다.

초석은 전각에 재사용되었으며, 일부는 매립되어 있다.

초석은 소림정사에 6매, 칠성각에 4매가 있다.

크기는 53 ×40㎝ 내외이며 고맥이, 방형, 원형으로 다양하다.

석탑재는 옥룡암 마당에 있으며, 총 4 매이다. 현재 임의로 쌓아 놓았다.

1992년 조사 당시 연화문 치석재와 팔각형 치석재가 사이에 끼워져 있었으나, 현재 연화문 치석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석탑재 아래에는 4매의 장대석 위에 방형석재를 두었다.

방형석재의 크기는 56×56×56.5㎝이며, 우주가 조각되지 않고 면이 거칠어 석탑재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 위로 석탑재 4매가 있다.

석탑재 1은 크기 97×97×29㎝의 옥개석이며 옥개받침 3단과 2단의 괴임이 있다.

석탑재 2는 크기 38.5×38.5×32㎝의 탑신석이며, 우주가 있다.

석탑재 3은 옥개석과 탑신 석이 1석이다.

각각의 크기는 57×57×21.5㎝, 24×24×9㎝이며,

옥개석에는 3단의 옥개받침과 1단의 괴임이 있고, 전각부에 풍탁공이 있다.

석탑재 4는 크기 48×48×19.5㎝의 옥개석이다.

옥개받침 3단과 1단의 괴임이 있으며, 상면에 찰주공이 있다.

석탑재는 크기가 맞지 않아 2기 이상의 석탑재가 혼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석탑재 주변에는 1992년 석탑재에 포함되어 있던 팔각형 치석재를 포함해 총 5매의 치석재가 있다.

해당 치석 재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으며, 용도는 불명확하다.

                                                                 (출처_「2015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 보고서 上」에서 발췌)

 

 

 

 

 

 

 

 

 

커다란 바위 3면에 많은 작품이 조각되어 있고, 상단에 있는 바위도 역시 그렇다.

같은 구역에는 삼층석탑도 있다.

탑곡 마애조상군은 경주 남산에서도 신라의 문화재가 가장 밀집한 곳이다.

 

큰 바위 위에 있는 바위에도 삼존불은 물론 마애불상까지 있다.

 

이 바위에도 오래된 이끼가 끼었지만 부처님의 얼굴 옆모습이 보인다.

 

안타깝게 이마가 훼손된 마애여래불상

 

 

 

 

 

 

 

탑곡마애조상군에 있는 삼층석탑은 일부 복원된 듯 보이는 석물도 있다.

다른 사찰에서 오신 불자들이 탑돌이를 하고 계신다/

 

 

 

탑곡마애조산군을 모두 둘러보고 하산길에 만나는 제일 큰 바위의 남면에 그려진 작품이다.

상단의 쪼개진 바위면에 불상의 얼굴을 만들다 만 것 같은 조각이 있다.

아래쪽엔 가부좌를 튼 부처님의 모습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탑곡마애조상군을 간단하게 둘러만 보고 내려온다.

이곳은 해설사와 함께 동행해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겠다.

 

탑곡마애조상군을 찾아가려면 내비에 경주 옥룡암을 찍고 가면 된다.

도로에서 내려오면 바로 있는 마을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

 

옥룡암 한쪽에 모아진 석물 부재들

 

기단과 1층 몸통이 사라진 3층 석탑

 

옥룡암을 빠져나오며 탑곡마애조상군 탐방을 마친다.

이곳을 탐방할 땐 사진만 찍고 사진을 정리하며 여러 자료를 찾아봤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이런 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설명은 못 들었어도 보는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란 걸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