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국립공원 탐방/경주권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너무 멋져

by 즐풍 2023. 5. 23.

2023_64 

 

 

2023.4.2. (수)  오후에 잠시 탐방

 

 

몇 년 전 동해안 양남 주상절리를 보고 다시 경주에 들어설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감은사지에 반했다.

그때 멀리서 보이던 감은사지의 동서 삼층석탑에 반했으나 차를 돌리기 귀찮아 그대로 갔다.

그런 다음부터 늘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보지 않은 걸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번 경주여행을 기획하며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필수 코스로 넣었다.

불국사와 석굴암 탐방을 마치고 양남 주상절리를 보러 가는 길목의 감은사지에 들린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가까이 다가서자 육중하고 단아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삼층석탑에 매료된다.

 

 

 

 

 

ㅁ 감은사지 感恩寺址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원

 

감은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건립된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창건한 연혁을 밝히고 있다.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開耀 2)에 끝마쳤다고 한다.

 

이때 건립된 금당 섬돌 아래에는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구멍 하나를 두었고,

사찰의 이름을 ‘感恩寺’, 문무왕의 유골을 간직한 곳을 ‘大王岩’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감은사의 창건은 682년에 이루어졌으나,

실제로는 문무왕대부터 불사가 계획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감은사의 명칭은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조의 대덕 법해가 신력으로 동해의 바닷물을 넘치게 하였다는 고사에는,

바닷물이 넘쳐 감은사의 불전 섬돌 앞까지 이르렀다가 저녁 무렵 물러났다고 전한다.

일연은 이 고사가 일어난 때를 754년(경덕왕 13)으로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766년(혜공왕 12) 혜공왕이 864년(경문왕 4)에 경문왕이  감은사에 행차하였다고 한다.

771년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지명」에는 감은사사각간 김양상이 주종에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해방 이후 1959년에는 국립박물관에 의해 감은사지 금당지를 중심으로 최초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가람 중심부의 당탑 배치와 규모를 대략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서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서탑 사리장엄구가 일괄 발견되었다.

감은사지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차 조사차조사 20년 후인 1979년에  2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1979~1980년 3차 조사에서 회랑지 및 건물지 전체의 윤곽과 가람 서편의 건물지 유구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1995~1996년에는 동탑 해체수리 및 복원작업을 할 때 1996년 동탑에서 사리장엄구 일괄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감은사지는 해방 이후 그 학술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꾸준한 조사와 함께 관리·보존되었고,

석탑 보존처리 및 주변 정비작업으로 2005~2008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동·서탑을 수리하였다.

감은사지의 금당 구조와 가람배치, 석탑, 사리장엄구 등에 대한 연구가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소재문화재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은 감은사지 금당 앞에 나란히 서 있으며,

높이는 동탑 13.3m, 서탑 13.7m이다.

이 탑은 감은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되어 폐사 후에도 제 위치에 서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에도 철제 찰주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서탑은 1959년 발굴조사 당시 해체수리 하였고, 이후 2007년 다시 해체하여 수리복원하였다.

동탑은 1996년 해체수리 하였으며, 이후 2008년 보존 처리하였다.

해체수리 시 두 탑 내에서는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두 탑은 일부 부재의 형태 차이 등을 제외하면 각 부의 수치와 결구방식까지 동일한 의장을 갖추고 있다.

우선 기단은 이중기단인데, 이는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방식이다.

하층기단의 면석과 갑석은 각각 12매씩의 부재를 조립하여 조성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각호형의 괴임이 있으며, 면석의 탱주는 3주이다.

서탑과 동탑의 기단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하층기단면석 모서리 우주 부분에 ‘ㄱ’ 자형으로

굴곡진 형태의 귀틀석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귀틀석은 백제 석탑, 혹은 백제계 석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상층기단 역시 면석, 갑석 각각 12매의 부재를 사용하였고, 갑석상면에는 각형의 2단 괴임이 있다.

탑신부의 각 층은 기단부와 같이 여러 매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옥개석은 모두 동일한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총 8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각부와 옥개받침이 각각 4매석이다.

탑신석은 상부로 올라가면서 높이가 줄어들며, 부재의 수도 줄어든다.

1층 탑신석은 총 8매의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우주와 면석이 각각 별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2층 탑신석은 우주 1주와 면석을 1매로 다듬은 부재 4매를 결구한 방식이다.

3층 탑신석은 1매의 석재로 조성되었는데, 상면에 남북 장방형의 사리공이 있다.

사리공 내부 바닥 북편에 원공이 뚫려 있는 것은 찰주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찰주공으로 판단된다.

상륜에는 노반이 남아 있으며, 철제 찰주가 꽂혀 있다.

                                                             (출처_「경주 남산의 불적, 어제와 오늘」에서 발췌)

 

 

 

 

 

 

 

 

ㅁ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 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부분 석재로 조립된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와 금동 사리외함(보물)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출처_문화재청)

 

 

서탑

 

동탑

 

동탑

 

동탑이나 서탑은 크기에서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 모양은 동일하다.

하여 쌍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래 사진은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이다.

이러한 사리장엄구가 1360여 년이 지나 현대 기술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출처_문화재청

 

출처_문화재청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感恩寺址 東 三層石塔 舍利莊嚴具)


경주시 문무대왕면 감은사 터에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의 동쪽에 있는 석탑을

1996년도에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일괄유물 중 사리 일괄품이다.

1959년에 발견된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내 유물(보물)인 청동제사리기와 구조가 비슷하며,

바깥을 감싸고 있는 외함과 안쪽의 사리기, 그리고 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함의 네 벽면에는 사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사천왕상의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겼고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긴 고리가 배치되어 있다.

사리를 모셔 둔 내함은 기단부, 몸체, 천개의 3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안상(眼象) 모양의 장식을 크게 투조하였다. 

투조된 내부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각각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몸체의 중앙에는 사리를 넣어둔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사천왕과 승상을 각 네 구씩 따로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는 난간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기둥을 세워 화려한 장식의 천개를 받치고 있다.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높이가 3.65cm이며, 정교하게 금알갱이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원판 수정제 받침,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사리기 세트는 제작기법이나 유물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불교조각사와 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_문화재청)

 

 

금당지는 대웅전이 있던 자리를 말한다.

 

금당지 

 

세로 방향으로 보는 금당지 

 

감은사지는 경주국립공원 대본지구에 속한다.

 

 

 

금당지 외에도 건물 주춧돌로 보이는 기초석이 한 군데 모여 있다.

 

 

 

 

 

 

꿈에 그리던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형님과 함께 보게 되어 원을 풀었다.

이 동·서 삼층석탑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 현실적이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석굴암 다보탑이 화려하고, 석가탑은 단순하면서 단아하다면 이곳은 두 탑이 갖는 균형미가 돋보인다.

주변을 지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은 반드시 들려 볼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