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국립공원 탐방/경주권

경주 불국사와 다보탑 석가탑 둘러보기

by 즐풍 2023. 5. 29.

2023_70

 

 

 

2023.4.2. (일)  오전에 잠시 탐방

 

 

경주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 중 하나가 토함산 자락의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어제저녁에 불국사에 들어와 숙박을 하고 느지막이 숙소를 나서 불국사부터 탐방한다.

아침부터 불국사에 들어서지만, 벌써부터 많은 사람이 북적인다.

그만큼 불국사는 경주여행에서 필수코스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번 경주여행은 나흘 일정으로 왔으나 나이가 들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형님이 걱정돼 3일로 끝냈다.

3일이라고 하지만 중요성에 비추어 볼 수 있는 건 대부분 다 봤다.

경주 여행의 불국사나 석굴암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 지금까지 미루었다.

그러다간 영영 손을 대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어 문화재청 자료로 도배하며 끝내기로 한다.

 

 

불국사 안내도

불국사 홈피

 

 

ㅁ 경주 불국사 (慶州 佛國寺)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 창건

5천 년 장구한 세월 동안 발전해 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

(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751년 당시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 두 번째 중창이 시작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대성효 2세 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출처_불국사 홈피)

 

 

 

ㅁ 자하문(紫霞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大雄殿)으로 통하는 중문(中門). 백운교와 청운교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부처님의 나라가 전개된다. 

자하문은 부처님의 몸에서 비추는 자금광(紫金光)이 안개처럼 서린문이라는 뜻이다. 

건립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기단의 주춧돌과 신방석(信防石). 문지방돌 등이 통일신라시대(676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문도 그 무렵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 후 1436년에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1593년) 불타 버린 것을 1628년에 재건하였으며, 

1630년에 중창하고, 1781년에 중건하여, 1966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넓은 석조(石造)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세워진 지금의 이 문은,

 다포계(多包系)의 공포(栱包)를 짜 올린 팔각(八角) 지붕을 하고 있으며, 건축 양식은 조선 후기에 속한다. 

                                                                                                                              (출처_불국사)

 

 

ㅁ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솟을대문처럼 보이는 전각은 대웅전을 둘러싸고 사각 형태의 회랑처럼 생긴 건물이다.

아래 보이는 석축은 현대에 들어서며 전각을 세울 때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대부분의 석축은 옛날 그대로이다.

 

 

 

 

ㅁ 안양문(安養門)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전으로 통하는 중문(中門)이다. 

연화교, 칠보교(국보 제22호)를 올라오면 이 문으로부터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정토가 전개된다. 

‘안양’이라는 이름은 ‘극락’을 뜻한다.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이 문은 1593년 임진왜란 때 타 버린 것을

1626년과 1737년에 중건했다.

현재 안양문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1964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서 고려 건축양식을 채택하였고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한 것이라 하겠다.

                                                                                                                                 (출처_불국사)     

 

 

 

ㅁ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안양문으로 올라가는 석교에도 자하문처럼 위아래 이름이 다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ㅁ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 (慶州 佛國寺 架構式 石築)

□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 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가 있어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대웅전 서편에 한 단 낮은 사역에는 회랑을 둘러 별도로 구획한 공간의 중심에 극락전이 배치되어 있고, 

남측에 있는 연화·칠보교와 안양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극락전 동북측에 있는 석축에는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하는 16 계단 3열로 조영 되어 있는 

석계를 통하여 대웅전과 연결된다.

□ 연혁 및 건축적 특징

○ 연 혁

불국사는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 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불국사는 아홉 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되어 석조물만 남았다. 

창건기의 석조물로는 사찰 앞 석축과 연화·칠보교, 청운·백운교, 석탑 2기, 석등, 사리석탑, 당간지주, 

석조, 각 건물의 기단과 초석 등이 있다.
불국사 대웅전 석축은 조선후기를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크게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석축과 석조물을 보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복원공사를 위하여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1970년에 중창되었다.

○ 건 축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축조된 가구식 석축과 조화를 이룬 청운·백운교가 놓였고, 

그 앞에는 평지를 이루며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구품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있다. 

가람서쪽에 있는 극락전 중심의 구역은 대웅전구역보다 한 단 낮추어 배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정면에 안양문을 세우고, 그 앞에는 연화·칠보교의 계단을 축조하였다. 극락전 주위에는 

안양문과 연결하여 회랑이 둘러졌는데 동쪽에는 대웅전 회랑과 연결되어 별도의 회랑을 두지 않았다.

안양문과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구식 석축이 동서로 놓였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구역의 서측회랑 하부 석축이 포함되는데,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 지정 가치

신청 가구식 석축과 연결되어 있는 청운·백운교 및 연화·칠보교는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번에 신청된 가구식 석축 또한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건축으로 

건축적 조형미는 물론 그 기법이 매우 독특하여 신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석축 기둥 사이에 든 석재를 가지런히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쌓아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 맛지게 보인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공간도 ㅁ자의 회랑으로 짜임새 있게 복원했다.

 

 

 

 

ㅁ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 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인 석가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떠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추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의 머리장식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출처_문화재청)

 

 

실물을 그대로 복제한 국립경주박물관의 석가탑이다.

 

 

ㅁ 경주 불국사 대웅전 (慶州 佛國寺 大雄殿)

□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경주 불국사는 신라의 동악(東岳)인 토함산(土含山) 서측 기슭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지형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북고남저(北高南低)와 동측이 높고 

서측이 낮은 동고서저(東高西低)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가구식으로 조화롭게 쌓았으며, 

동측 사역에는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을 남북 축선에 배치하면서 회랑을 둘러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의 동·서측면에는 익랑(翼廊)이 놓여 동·서 회랑과 연결되고 남회랑의 동측 모서리에는 

좌경루(左經樓)가 있고, 서측 모서리에는 범영루(泛影樓)가 배치되어 있다. 

자하문 남측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석계를 마련하여 대웅전으로 진·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

□ 연혁 및 건축적 특징

○ 연 혁

불국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대웅전 중창 단확기(大雄殿重創丹雘記)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 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 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 歷惠恭世, 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日大城卒, 國家及畢成...)’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외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Ο 특징

불국사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배치되어 있고,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 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장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 지정 가치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중창기록과 단청에 대한 기록이 함께 

보존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다.

                                                                                                 (출처_문화재청)

 

 

 

 

 

 

ㅁ 경주 불국사 다보탑 (慶州 佛國寺 多寶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 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 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 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출처_문화재청)

 

 

임진왜란과 근세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문호하재가 불에 타거나 사라졌다.

서양이나 동야 모두 인접국으로 좋은 나라는 없다.

그러나 일본은 유독 악질적인 나라라는 걸 여행을 통해 사무치게 느낀다.

 

다보탑을 돌 때마다 정말 신라 예술의 결정체란 느낌이 든다.

화강암의 특성은 잘 깨지기에 다루기 어려운 데도 점토흙을 다룬 것처럼 곡선이 매끄럽다.

층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새롭게 만들었으나 균형의 예술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구조다.

 

 

 

 

 

 

ㅁ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조선 초기(1400년경) 건축양식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이승에서 고난 받는 중생의 소리를 눈으로 보고, 그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의 신앙은 대표적인 민간신앙의 하나다.

원래 992년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1674년과 1701년 그리고 1796년에 각각 개금(改金)을 하였기에 이로써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관음전이 불에 탈 때도 관음상은 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출처_불국사)

 

 

 

멀리서 본 관음전

 

 

ㅁ 사리탑舍利塔(보물  제61호)

 

불국사 비로전 좌측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 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뉜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 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 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 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 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불국사 경내에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한 번에 여유있게 잡을 방법은

이렇게 전각 모서리에서 찍는 방법 밖에 없다.

 

연화문 전각으로 올라가 청운교와 백운교를 내려다 본다.

불국사 경내에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정토불국이다.

 

 

 

이번엔 다른 방향에서 다보탑과 석가탑을 본다.

 

불국사를 보고 밖으로 나와 들어갈 때와 달리 청운교 백운교를 살펴본다.

형님은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며 연신 감탄하신다.

 

 

 

반야연지를 마지막으로 보며 불국사를 나선다.

 

 

오래 미루어 두었던 불국사를 포스팅을 끝낸다.

아직 석굴암과 양남 주상절리가 남아 있으니 후딱 끝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문화재청과 불국사 홈페이지를 이용해 간단하게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