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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 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탕탕평평 특별전

by 즐풍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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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18. 목요일

 

올해가 영조 즉위 300주년 되는 해라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이란 특별전이 열린다.

지난 12월에는 10일간 무료 전시가 열렸으나 이젠 입장료 5천 원을 내야 한다.

매번 무료로 입장했으니 특별전에 입장료를 지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영조와 정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에 휘말리며 신하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었는지 알게 되었다. 

정조가 내린 글과 초상화를 받은 신하는 감읍하며 가문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충성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권 초기의 왕권이 취약하던 시기를 지나며 탕평책과 글과 그림이란 당근책으로 문화의 융성기를 맞았다.

3월 10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전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누구든 시간을 내야 한다.

 

전문가가 작성한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 기간 : 2023. 12. 8.(금) ~ 2024. 3. 10.(일)

○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 전시품 : 《화성원행도 병풍》 등 54건 88점

 

2024년은 영조 즉위 3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별전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은 영조와 정조가 나라의 중심에 서서 ‘탕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과 그림의 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주목하는 전시입니다. 붕당이 극심해 신하들이 왕을 선택할 정도로 왕권이 흔들린 상황에서 영조는 탕평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글’로 방향을 설정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고자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며 규장각 신하 등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등 치밀하게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영조와 정조가 뜻을 전달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듯 전시는 ‘소통’의 산물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영조와 정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부, 탕평의 길로 나아가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지향점이 같아도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아도 의견이 달라 분쟁이 생깁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18세기 초,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대립했습니다. 숙종의 맏아들 경종景宗(재위 1720-1724)이 즉위한 뒤 노론의 후원으로 왕세제에 책봉된 영조는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영조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거진 정통성 문제나 붕당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높았습니다. 그는 치우치지 않고 여러 붕당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붕당으로 혼돈된 상황을 정리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 책이나 탕평의 뜻을 담은 글과 그림으로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탕평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재들의 지혜를 모아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영조는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듣고 실질적인 방안을 찾았습니다. 영조를 계승한 정조도 탕평 정치를 이어갔습니다.

 

 

황극탕평

 

영조와 정조는 여러 세력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습니다. 두 임금의 탕평책은 임금이 치우침 없는 도리를 세워야 한다는 '황극皇極'의 이념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임금의 역할은 북극성北極星에 비유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북극성 주위로 별이 회전하는 것처럼 임금이 인물을 고루 등용하면 나라가 자연스럽게 운영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탕평이란?

 

16세기 무렵 생겨난 붕당朋黨은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붕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 임금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을 강조합니다.

탕평은 유교의 핵심 경전 『서경書經』에 있는 말입니다. 임금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면 임금의 도가 넓어지고 평탄해져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까지 이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황명 순정 기원후 115년 되는 임술년(1742) 봄

 

3월 26일 직접 써서 반수교 옆에 세우라고 명하다. 위 여덟 글자는 성인의 가르침이요. 아래의 열두 글자는 지금 시대를 개탄하고 다음 세대가 노력하도록 만드는 뜻이다. 

                                                                       1742년 3월 26일 영조가 쓴 탕평비 글

 

 

백성을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

 

각각의 바위 위 글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고, 왼쪽은 백성이 미미해 보이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년의 영조가 백성을 생각하며 그린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 후 이 그림을 영조의 글과 함께 첩으로 제작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준천 사업

 

수문 위 왕의 자리가 보입니다. 청계천 바닥 흙을 걷어내는 준천 작업을 영조가 직접 보고 있습니다. 청계천 물이 매년 넘쳐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영조는 준천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관련 글과 그림으로 화첩을 제작했습니다. 이처럼 왕이 자신의 업적을 그리게 한 일은 조선시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애민 정책을 알리는 글

 

영조가 여자 종의 공역을 줄이고 느낀 바를 표현한 시입니다. 영조는 여자 종이 납부하는 공물을 줄이라고 명했습니다. “선왕의 뜻을 계승한 것으로 몇 백 년 만에 폐단을 바로 잡게 되어 기쁘다”라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영조는 백성을 향한 자신의 의지와 정책을 윤금이라는 문서로 많이 내렸습니다.

 

 

글과 그림으로 뜻을 전하는 영조의 전략

 

털이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습니다. 삽살개가 이토록 사납게 표현된 이유는 그림 위 영조가 직접 쓴 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때나 짖는 삽살개는 영조의 눈에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였던 듯합니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너의 일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낮에 이같이 짖고 있는 게냐

                                                          계해년(1743) 6월 초하루 다음날 김두량이 그리다

 

 

동쪽을 바라보는 왕의 자리

 

임금의 자리를 서쪽에 두어 동쪽을 향하게 하고, 관원들은 남북으로 나누어 앉아 있습니다. 본래 임금은 북쪽에 앉아 남향하는 것이 법도였고, 이 행사에서도 왕은 북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서쪽에서 동향하도록 표현되었고, 오히려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도록 그려졌습니다. 이는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당시 인사행정에 참여한 관원들로, 이들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수당에서 관리 임명 우연한 뜻이 아니라네 사사로운 내 마음 자제하고 공정한 도리를 앞세우라 

                                                                                              영조가 이조에 내린 시

 

무관의 붕당은 나라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동서로 갈라지지 말고 휩쓸리지 말라 

                                                                                              영조가 병조에 내린 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왕과 신하는 국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영조는 임금과 신하의 친밀함을 물과 물고기의 관계인 어수에 비유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임금과 신하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창덕궁 후원 주합루 뒤에 '어수당'이라는 전각이 있었습니다. 왕과 신하의 친밀함에 백성이 기뻐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전각에서 인사행정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남쪽을 향하는 왕의 자리

 

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 이전까지 조정 관리의 인사 평가하는 날 왕의 참여를 기념하는 그림인 친정도에서 왕은 동쪽이나 서쪽을 바라보도록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건물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왕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탕평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인사행정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 평가와 인사 발령을 결정하는 인사행정인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음력 6월과 12월에 시행되었습니다. 이조와 병조가 각각 문관과 무관 인사를 주관했습니다. 왕이 참석하면 친림 도목정사(친정)라 하는데, 영조는 이전과 달리 친정을 하며 인사의 공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조는 인사행정을 온전히 주도하며 인재를 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도목정사를 그린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이 중심인 인사행정

 

산봉우리 다섯 개가 그려진 오봉병풍 앞 왕의 의자가 있습니다. 왕의 자리 가까이에 내시와 사관이, 다음에 승지와 규장각 관원이 있습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관원들은 툇마루와 전각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규장각 관원은 정조의 친위세력입니다.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왕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을사친정계병 乙巳親政契屛 작가 모름 作家未詳 1785년(정조 9)

 

 

글로 깊어지는 신하들과의 유대 관계

 

영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비가 내리지 않자 백성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며칠 뒤 건강을 회복했고, 얼마 후 사흘에 걸쳐 비가 내렸습니다. 영조는 이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내려 운을 따라 시를 짓도록 했습니다. 신하들 입장에서 왕에게 보이는 시 짓기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왕의 시가 실린 첩에 자신의 시가 수록되는 일은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임금이 글로 병자호란 충신을 기리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 1637년 29세에 청나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705년 그의 꼿꼿한 기개와 어울리는 매화 그림 위에 그의 충심을 기리는 숙종의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영조도 병자호란 발발 120년이 되는 해 오달제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오달제 그림에 두 임금의 글이 더해지면서 그림의 가치와 그의 충성심이 더 높아졌습니다.

 

 

잠곡 김 문정공의 소상

                       어제찬

 

윤건 쓰고 학창의 입고 솔바람 의지하고 서있으니 이는 누구의 초상인가? 잡곡 김 공이로세, 과거 대신으로 나라 위해 충성하였고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 혼신으로 직분을 다하였네. 대동법을 도모하고 계획하니 신통하다 하겠다. 아, 후손들은 백 대가 지나도 공경하라.

                                                     신미(1751년) 2월

 

 

명신 김육의 행적을 글로 기리다

 

김육金堉(1580-1658)은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소나무 아래 한가롭게 서 있는 김육의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위쪽 영조의 시는 이 그림이 그려지고 100여 년 뒤 적은 것입니다. 영조는 온천을 다녀오는 길에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김육 초상에 시를 내렸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자신의 글로 옛 신하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높였습니다.

 

 

초상화로 정치하는 정조

 

정조는 남인 계열 영수 허목(1595-1682)의 82세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하여 당시 뛰어난 초상화가에게 그리도록 했습니다. 선대왕의 명신이었던 허목 초상화를 베껴 그림으로써 채제공(1720-1799) 및 남인의 지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허목 초상화가 도성으로 들어오고 떠나는 날 남인들이 모두 모였다고 합니다. 정조는 당색을 가리지 않고 옛 신하들의 초상화를 가져오라고 하여 조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보고 그 인물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내렸습니다.

 

 

아끼는 신하의 새로운 출발을 격려하며

 

정조는 신하에게 써준 시가 참 많습니다. 가까운 신하들이 지방에 부임할 때 시로 격려했습니다. 정조가 "정성을 다해 죽기로 맹세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평가한 정민시(1745-1800)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시를 짓고 손수 쓴 서예 작품입니다. 모란, 박쥐 등 문양이 있는 고운 분홍색 비단에 주저함 없이 유려하게 글씨를 썼습니다.

1790년대 정조의 필치는 이전과 다르게 안정되고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정조는 아끼는 신하들에게 시를 선물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했습니다.

 

 

시로 전하는 돈독한 마음

 

이 작품은 정조가 말년에 쓴 서예의 대표작으로 은은한 분홍색 종이 위에 진한 먹으로 굵고 묵직하게 쓴 글씨가 인상적입니다. '문상정사汶上精舍'라는 별장을 읊은 시인데, '문상'은 정조의 외숙 홍낙윤洪樂倫(1750-1813)의 호입니다.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한 박문수

 

영조가 왕세제 때 교육을 담당했던 박문수(1691-1756)는 균역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해결하는 묘책을 내는 등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했습니다. 무심란을 진압한 곳으로 그의 초상화를 제작할 때, 당대 최고 초상화가 진재해가 직접 그를 보면서 밑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갈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을 얇게 칠하고 음영은 좀 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하는 18세기 전반 초상화 표현 방식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소중히 전해진 초상화로 박문수를 기억하다

 

박문수의 건의로 분무공신상이 1750년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때 그려진 초상화는 상반신만 표현된 반신상입니다. 완성된 초상화 중 한 부는 첩으로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한 부는 다른 분무공신 반신상과 함께 첩으로 꾸며 충훈부에 보관했습니다. 박문수 38세 초상에 비해 60세 초상에서는 수염이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졌습니다. 소중히 보관된 두 초상화로 그의 달라진 모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표암 강공 칠십일세 진영

어제 제문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서화는 거친 자취일 뿐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판서 지냈으니 벼슬은 낮지 않은데 삼절은 당나라 정건鄭虔(705-764)의 수준일세.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기로소 서루西樓에 선배 뒤를 따라 들어갔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曹允亨(1725-1799)이 삼가 쓰다

 

초상화와 글로 깊어진 인연

 

정조는 초상화로 군신 관계를 돈독히 다진 영조처럼 빈번히 신하들의 초상화 제작을 지시했습니다. 1783년 강세황(1713-1791)이 70세 이상 고위직 관리의 모임인 기로소에 들어가자 정조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이명기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무수한 잔붓질과 깊이 있는 색감으로 강세황이 눈앞에 있는 듯 그려냈습니다. 강세황이 죽은 지 2년 뒤, 정조는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지어 내렸고, 이 글은 초상화에 적혀 있습니다.

 

 

 

2부.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다

 

인간은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영조와 정조 모두 왕위 계승에서 결함이 있었습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고, 정조는 세손 시절 죄인 사도세자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흉언에 마음 졸였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정국을 주도하려면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해야 했습니다. 영조는 '삼종혈맥三宗血脈'을 내세워 자신이 삼종, 즉 효종·현종·숙종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강조했습니다.

반차도와 행사도에서 자신과 숙종의 연결성을 드러냈습니다. 정조는 ‘효손孝孫’이라는 영조의 지지에 힘입어 등극한 뒤 '효孝'를 명분으로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승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을 벌하지 않고 글로 사도세자를 재평가했습니다. 오랜 시간 차근차근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며 결국 사도세자에게 임금에 버금가는 '여덟 자' 존호尊號를 올렸습니다. 이렇듯 영조와 정조는 글과 그림의 힘으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했습니다.

 

 

특별한 인장 함

효손 은인 인록 孝孫銀印印盝

1776년(영조 52, 정조 즉위년) 나무에 상어 가죽 국립고궁박물관

 

영조가 세손에게 내린 '효손' 은인을 보관한 함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세손을 위한 함은 검은 칠을 하는데 이 함은 붉게 칠해져 있습니다. 함 표면의 '어필은인御筆銀印'이라는 글씨가 돋보입니다. 영조의 글씨가 새겨진 인장인 만큼 임금을 존숭 하는 뜻에서 함에 붉은 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자리

 

영조는 기로소에 입사할 때 사도세자를 대동했습니다. 영조는 가까이에 사도세자 자리를 배치하고, 의식마다 세자와 동행했습니다. 오른쪽 그림의 영수각 앞뜰에 영조의 자리와 사도세자가 쉬는 천막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숙종의 존호가 적힌 어첩 봉안

 

숙종의 기로소 입사를 기념한 행사를 그린 그림입니다. 세자(훗날의 경종)가 태조의 묘호와 숙종의 존호를 적은 어첩을 기로소에 봉안하러 가는 행렬 그림이 첫 번째 그림입니다. 행렬은 모두 세 줄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행렬은 왕의 의장기를 앞세우고 있고, 가운데 행렬에 향로와 어첩을 실은 가마가 있습니다.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이 위·아래로 배치된 점이 특이합니다. 이전 궁중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모습입니다.

 

 

어첩에 휘호를 적는 행위의 의미

 

숙종의 존호가 적힌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에 영수각이 세워졌습니다. 그림 오른쪽 건물이 영수각입니다. 영수각 감실문이 열려 있고, 책상 위에 그 어첩이 놓여 있습니다. 기로소 입사에 성공한 영조가 이 어첩에 휘호를 남기며 자신이 태조와 숙종을 이은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도세자를 왕과 같이 높이기

장조 추상존호 금인 莊祖追上尊號金印, 1795년(정조 19), 구리 합금에 금도금 

국립고궁박물관, 보물·세계기록유산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세 번째 존호를 올리며 금으로 만든 인장입니다. 여덟 자 존호와 금으로 만들도록 했는데, 이는 임금의 인장에 맞는 격식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의 덕을 찬양하고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추진했습니다.

 

 

왕처럼 대우받은 사도세자

 

사도세자 무덤을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미입니다. 사도세자의 관을 임시로 안치하는 천궁 내부에 그린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수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왕과 왕비의 찬궁에만 자수도를 그리는데, 정조는 사도세자천궁에 사수도를 그리도록 하여 친아버지를 왕에 버금가도록 대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부. 질서와 화합의 탕평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점으로 꿈꾸는 이상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조와 정조는 왕이 중심에 서서 치우침 없이 행하면 모든 백성이 따른다는 황극탕평을 중시했습니다. 1795년 제작된 <화성원행도>의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질서를 이루고 백성은 편안한 모습이 영조와 정조가 꿈꾼 황극탕평의 세상일 것입니다.

1795년은 정조 즉위 20주년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인 해로, 정조는 화성에서 질서와 화합의 장을 만들고자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정조는 이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겨 자신의 이상을 시각화했습니다. 화성으로 가는 행렬을 그린 반차도, 화성에서 열린 행사를 기념한 그림,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꼼꼼하게 정리한 의궤에 정조가 이루고자 한 바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권도                                    외빈                                    선기 장용위 작대                             

왕족, 대신, 공신 등의              혜경궁 홍씨를 위한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위 중 잘 타는 자들을 

경호를 담당한 하급 관리         회갑연에 초대된 남자 손님        선발한 부대 대오를 이룬 것

 

 

 

 

 

 

 

 

자궁가교, 혜경궁 가마 행렬

 

혜경궁 홍씨가 탄 붉은색 가마 주변을 군인과 관원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탄 말 행렬과 함께 반차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승인마

임금이 탈 여분의 말

 

 

 

 

 

질서와 화합의 이상, 화성원행도

 

1795년 윤 2월 9일부터 7박 8일간의 행사를 마친 후 화성에서 있었던 행사를 여덟 폭으로 그린 그림을 <화성원행도> 8폭 병풍이라고 합니다. 정조가 꿈꾼 왕을 중심으로 인재들이 모여 질서를 이루고 백성들이 편안한 세상을 구현한 그림입니다. 화면 상단에 왕이나 왕실 인물이 있는 전각을 놓고 그 아래 문무 관리들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경 나온 백성들은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을 표현합니다. 문과 무를 숭상하고 효성을 드러내고, 백성을 보듬고 새로운 기술력을 선보이는 정조의 업적과 이상이 이 그림에 펼쳐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