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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고대 그리스·로마 유물전

by 즐풍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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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18. 목요일에 관람

 

박물관에서 외국의 국보급 유물을 본다는 건 그 나라로 나가는 왕복 항공요금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글로 된 안내문으로 저들의 역사를 읽으니 얼마나 편한가.

이번에 보게 될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물은 오스트리아의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780km 정도 떨어졌다.

국경을 맞대 나라이긴 하지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로마와 그리스 유물이 우리의 박물관에서 이 정도로 전시된다면

본국에 있는 유물은 박물관을 그득 채우고도 남아 수장고에도 진열되지 않은 유물은 넘쳐날  것이다.

유럽의 대리석은 신전이나 경기장부터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는 특성으로 지금껏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가공하기 어려운 화강암과 달리 매끈하게 빠진 이런 유물을 볼 때 그들의 대리석 문화가 부럽다.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전시를 열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넓고도 깊다. 민주정, 로마법, 철학 등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유산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컴퓨터 게임, 영화나 드라마, 브랜드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각각 역동적인 역사와 풍요로운 문화를 가졌음에도 두 나라를 이렇게 함께 묶어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신화의 세계, 인간의 세상, 그림자의 제국'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본다.

1부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래된 신화를 다루는데, 특히 그리스 신화와 전적으로 다른 로마만의 신화가 형성된 적이 없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2부 '인간의 세상'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독자적인 발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초상 미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3부 '그림자의 제국'에서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후관을 보고자 하였다. 신화를 공유한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특히 장례 문화에서 서로 가까웠다.

 

이 고대 그리스·로마실은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꾸몄다. 이번 전시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전시는 2027년 5월 30일까지 이어진다.

 

 

 

신화의 세계

 

그리스·로마신화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라틴어권에서 신화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뮈토스 mythos'에서 유래했는데,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연을 움직이는 막강한 힘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그리스 사람들은 신의 분노, 신들의 싸움, 영웅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물리적 세계와 사물의 기원을 파악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신화는 인간 나름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었다. 물론 신화의 바탕에는 역사적 사건, 고대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가치가 담겨 있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는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이나 인간인 라피타이족과 반은 인간, 반은 말인 켄타우로스의 싸움과 같은 이야기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함께 공유했던 지식과 이야기들은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응집력을 강화했다. 신전, 도서관, 체육관, 극장에서 신화의 내용을 시각화한 예술품이나 공연, 문학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과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신화에서 구했다. 이렇듯 신화는 그리스인과 로마인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신들의 왕 Father of the Gods

대리석 흉상, 로마, 1~2세기, 후대에 코와 가슴,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그리스·로마 신화도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초의 카오스 이후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태어나고 이후 수많은 신이 탄생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신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이는 신들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제우스와 형제, 자매들은 아버지 크로노스 세대에 도전하며 투쟁한 끝에 제우스가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제우스는 형제, 자매들과 권력을 나누고 자식들을 협력자로 삼아 올림포스 12 신 체제를 안착시켰다.

 

 

아테나의 탄생 Birth of Athena

적회식 펠리케, 아테네, 기원전 490년~기원전 480년, 이탈리아 남부 놀라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기원전 700년경 헤시오도스가 기록한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아테나의 탄생 과정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영리함을 상징한다. 이 펠리케의 그림도 아테나가 아버지 제우스의 무릎에 서 있는 모습으로 탄생 장면을 표현했다. 아테나는 갓 태어났지만 투구를 쓰고 창을 든 프로마코스(선봉장) 유형으로 그려졌다.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이아가 아테나와 마주 서 있다.

 

According to Hesiod's Theogony, written around 700 BCE, Athena was born fully formed from the head of Zeus. This unusual birth symbolizes Athena's status as the goddess of wisdom and ingenuity. The birth of Athena is depicted on the exterior of this vessel. Standing on her father Zeus's lap, the newly born Athena is portrayed in the style of a Promachos (a warrior from the front line of battle), wearing a helmet and holding a spear. Standing next to Athena and Zeus is Eileithyia, the goddess of childbirth.

 

 

디오니소스와 추종자들 Dionysus and His Followers

적회식 크라테르, 아테네기원전 430년~기원전 420년,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포도주와 물을 섞는 그릇인 크라테르의 겉면에 디오니소스 세계에 속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에 왕관을 쓴 디오니소스칸타로스잔과 포도나무 잎이 얽힌 지팡이를 들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디오니소스의 일정적인 추종자인 마이나스가 횃불과 술병을 들고 다가오고 있다. 그 뒤에는 반인반수의 늙은 세일레노스가 따르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포도주 부대를 들고 탐욕스럽게 마시는 반인반수의 젊은 사티로스가 있다.

 

 

술의 신 바쿠스 Bacchus

 

로마 신화에서 포도주와 연극, 초목의 신인 바쿠스는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와 짝을 이룬다. 바쿠스는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맨몸에 왕관을 쓰고 그를 상징하는 지팡이 티르소스와 술잔 칸타로스를 들고 서 있다. 왼쪽에는 표범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며 그 뒤로 포도나무가 있다.

 

 

사랑의 신 아모르 Amor, God of Love

토제 등잔, 로마, 1세기 후반, 이탈리아 에스테 출토 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로마의 신 아모르는 그리스의 에로스와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아모르는 사랑의 여신 베누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이다. 작은 날개가 달린 사랑의 신 아모르가 왼손에 조개껍데기를 들고 있다. 날개 달린 소년의 도상은 기독교 미술에서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목욕하는 베누스 Bathing Venus

청동상(준공식 주조), 로마, 2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사랑의 여신 베누스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케스투스'라는 허리띠를 포개어 오른손에 들고 있다. 케스투스는 고대에 여성의 가슴 아래를 묶어 의복을 잡아 주는 데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 인기 있는 주제였던 목욕하는 베누스를 묘사한 작품으로, 기원전 4세기 중반부터는 아프로디테(베누스)를 나체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상적인 여성의 몸을 잘 표현했으며, 에로티시즘의 요소도 엿보인다.

 

 

그리핀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

 

그리핀의 머리와 스핑크스의 몸이 결합한 혼종 동물의 상이다. 그리핀은 일반적으로 날개 달린 사자의 몸으로 묘사되는데, 이 상처럼 여성의 가슴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언제, 어떠한 이유로 두 동물이 결합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스핑크스와 그리핀은 모두 죽은 자를 수호하는 신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핀 머리 모양의 리톤 Rhyton Shaped Like a Griffin's Head

적회식 리튼, 이탈리아 남부, 기원전 4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뿔모양의 술잔인 리톤은 고대 서아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문화권으로 수입되었다. 주로 축제의 성격을 띤 연회인 심포시온과 종교 제의에서 사용되었다. 종종 동물의 머리 형태로 리톤을 만들었는데, 이 잔 역시 사자와 독수리가 결합한 신화 속 동물인 그리핀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A rhyton is a horn-shaped drinking vessel that originated in West Asia before being imported into Greek culture around the fifth century BCE. Commonly used in symposia (festive banquets or social gatherings) and religious ceremonies, rhytons were often sculpted in the shape of animal heads. For example, this one is shaped like the head of a griffin, a mythical creature combining the features of a lion and eagle.

 

 

포효하는 사자 Roaring Lion

대리석상, 로마, 2세기, 후대에 꼬리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입을 크게 벌리고 사납게 포효하는 사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상이다. 고대에 사자는 강인함과 용기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헤르쿨레스에게 제압되는 네메아의 사자처럼 신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사자는 수행 동물로서 신들과 함께하기도 했는데, 특히 바쿠스 신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한다. 사자들이 그리스에 실제로 서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자를 직접 보고 사자의 형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곤봉을 든 헤르쿨레스와 아들 텔레푸스 Hercules with His Son Telephus

대리석 전신상, 로마, 150~250년, 루마니아 메하디아 지구에서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에서 신과 영웅은 흔히 나체로 표현되었다. 이 헤르쿨레스 상도 나체에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자세로 서 있다. 왼팔로 아들 텔레푸스를 안고 오른손으로는 상징물인 곤봉을 잡고 있는데, 에 우리스테우스 왕이 내린 열두 과업 중 첫 번째 과업에서 이 곤봉을 사용했다. 헤르쿨레스는 이 곤봉으로 네메아의 사자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천하제일의 장사 헤르쿨레스 Hercules, the Strongest

 

이 상에서는 헤르쿨레스를 최고의 장사다운 근육질 몸으로 묘사했다.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상을 제작하는 데 이용된 준공식 주조법은 통주식 주조법과 함께 고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주조 기술이다. 기술적으로 복잡했지만 속이 비도록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값이 비쌌던 재료를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 Hercules Battling the Nemean Lion

흑회식 칼피스, 아테네, 기원전 5세기 초,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헤라클레스가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물항아리이다. 네메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가 사람들과 가축을 해쳐서 원성이 높았는데, 보통의 무기로는 사자의 가죽을 뚫을 수 없었다. 이 그림에서 헤라클레스는 몸을 던져 사자를 땅에 누르며 씨름하고 있다. 사자의 입은 벌어지고 혀는 늘어졌다. 이야기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기 위해 사자의 앞모습만 화면에 담았다.

 

This water jar is decorated with a scene of Hercules fighting the famed lion of Nemea. The lion terrorized the people and livestock of the Nemean Valley, and its hide was impenetrable to conventional weapons. Here, Hercules is shown wrestling with the mighty lion, just prior to pinning it to the ground with his body. The lion's tongue extends from its open mouth, and the lower half of its body has been omitted to emphasize the dramatic action.

 

 

아테나/미네르바

대리석 흉상, 로마, 기원전 430년 그리스 원작의 1~2세기 복제작, 

16~17세기에 가슴과 받침대 머리카락 끝, 코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상의 머리 부분은 머리카락이 길고 투구를 머리에 얹은 듯한 형태로, 이는 전략에 능한 전쟁의 여신을 나타낸다. 기원전 430년에 만든 그리스 원작을 로마 시대에 복제한 작품이다. 가슴 부분에는 후대에 덧붙인 아이기스가 있는데, 이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일종의 마법 방패 또는 흉갑을 뜻한다. 아테나는 아테네의 수호신이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도 기원전 5세기에 아테나를 위해 세워진 것이다. 

 

 

유피테르일까 바쿠스일까

대리석 두상, 로마, 1세기

 

굵은 곱슬머리와 수염으로 보아 유피테르로 추정되지만 바쿠스일 수도 있다. 그리스·로마시대에는 항상 신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여 얼굴만으로는 신의 이름을 명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연의 힘을 통제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번개 같은 상징물을 들고 있다면 유피테르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이러한 상이 성소에서 발견된 경우 어떤 신에게 바친 장소인지가 상의 주인공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유피테르의 변신 이야기

대리석상, 로마, 1~2세기, 16세기에 머리, 발톱, 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털을 곤두세우고 날개를 펼친 독수리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상이다. 독수리는 유피테르의 수행 동물인데,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유피테르는 자신이 탐내던 청년 가니메데스를 납치하기 위해 독수리로 변신한다. 이렇듯 신들은 종종 동물로 모습을 바꾸어 인간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독수리의 발을 감고 있는 뱀은 르네상스 시대에 추가되었으며, 악을 이기고 선이 승리한다는 의미를 더해 준다.

 

 

가니메데스 또는 파리스

대리석 전신상, 로마, 1~2세기, 18세기에 머리, 지팡이가 있는 오른팔 

오른쪽 다리와 왼손 손가락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신화에 등장하는 가니메데스또는 파리스로 추정되는 상이다. 유피테르는 목동이었던 가니메데스에게 반해 독수리로 변하여 그를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산으로 납치한 뒤 술을 따르는 시종으로 삼았다. 한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그리스 미녀 헬레네를 납치하여 그리스와 트로이의 신화적 전쟁이 일어나게 만든 인물이다. 이 내용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기록되었다.

 

 

봉헌 제의

적회식 암포라, 아테네, 기원전 450년경,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작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암포라의 양쪽 면에 묘사했다. 한쪽에는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술을 붓는 제의를 올리려는 소년과 소녀가 있다. 암포라의 다른 쪽에는 키톤과 히마티온 차림의 두 여성이 제물을 바치고 있다. 오른쪽 인물은 주전자와 꽃을, 왼쪽 인물은 헌주용 그릇인 피알레와 지팡이를 들고 있다. 두 장면 모두 제단의 윗부분을 고대 그리스에서 인기가 있었던 회오리 모양으로 장식했다.

 

 

취한 자들의 행렬

적회식 킬릭스, 아테네, 기원전 5세기 중엽,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납작한 접시 형태의 그리스 술잔이다. 바깥면에는 '코마스테스'라고 하는 술에 취해 알몸으로 춤을 추는 남성들이 그려있다. 포도주와 춤, 음악이 어우러지는 격정적인 축제 디오니시아에 참여한 자들이다. 축제는 인간들이 신화 속 주인 역할을 맡아 신성의 존재를 경험하는 기회였다. 그리스의 연회인 심포시온에서 이러한 술잔을 사용했으며 무덤 부장품으로 묻기도 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석고 두상, 근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원작의 1~2세기 대리석 복제작을 본뜬 석고상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그리스 미술에서는 작품에 인물의 내면 상태나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려고 했다. 현명한 철학자, 결단력 있는 사령관, 존경받는 정치인 등을 묘사하던 그리스 조각상은 후대로 갈수록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표현 방식이 변화했다. 그 초기의 사례로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표현한 이 두상이 있다. 푹 꺼진 뺨,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기민하고 에너지 있는 모습이 표현된 이 작품은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문으로 조각가 리시포스가 만든 조각상에 원형을 두고 있다.

 

 

 

로마의 초상 미술, 자기 표상에 대한 열망

 

로마 미술이 이룬 특별한 업적으로 사실적인 초상을 발전시킨 점을 꼽을 수 있다.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로 확장되면서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한 초상 조각이 만들어졌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노화를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나이 든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초상의 주인공을 성공적인 삶의 본보기로 여기고 칭송했다.

로마 제정이 시작되면서 황제들은 정치적 의도를 담은 초상 이미지를 제작했다. 중요한 전쟁에서의 승리나 작위 수여와 같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대량으로 만들었다. 가장 새로운 공식 초상이 탄생하면 그 이미지는 주화의 도안, 대리석 흉상과 전신상으로 복제되었다. 이런 과정으로 황실 초상의 앞선 양식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여기에는 환조의 석고 모델을 이용한 복제 방식이 큰 몫을 했다. 로마인들은 측정 기준점과 컴퍼스를 활용해 새로운 재료에 원본을 정확하고 빠르게 복제할 수 있었다.

 

 

 

황제의 초상 제작

 

로마 제국 모든 도시의 광장, 신전, 공공건물, 거리, 빌라에서 로마 황제들의 전신상과 흉상을 볼 수 있었다. 황제의 상은 황제가 스스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 관료, 시민 등 사회 전체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기 위해 건립했다. 물론 디자인에는 황제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었다. 두상과 흉상에서는 수염과 머리 모양, 표정이 황제의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시스 여신으로 표현된 클레오파트라 2세의 조각상  Cleopatra II as Isis

대리석 전신상,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대에 팔, 왼쪽 무릎, 왼발 받침대 앞 오른발의 발가락, 코, 턱, 머리카락 일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 상의 주인공은 기원전 2세기경 재위한 클레오파트라 2세로 추정된다. 그녀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이다. 바닥까지 내려오는 키톤 위에 히마티온을 걸쳤는데 가슴께에 이시스 여신상에 자주 보이는 독특한 매듭이 있다. 여신상과 같은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왕은 가장 위계가 높은 이집트 여신인 이시스와 동일시되었는데, 여기에는 통치권을 정당화하고 굳건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여왕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조각상의 형식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후대 로마 황제의 초상과 맥을 같이한다.

 

This statue is believed to depict Cleopatra II, who reigned around the second century BCE as a queen of the Ptolemaic Dynasty, which ruled Egypt after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She is wearing a cloak called a “himation" (tunic that fastens at the shoulder) over a chiton that extends to the floor. Notably, the himation is knotted at her chest, a detail that is often seen in statues of the goddess Isis. This iconography was probably intended to associate the queen with the most powerful Egyptian goddess, Isis, helping to justify and strengthen her rule. Such strategic use of portraiture, conveying the queen's desired image in sculptural form, was a defining characteristic of portrait sculptures of Roman emperors after the Hellenistic period, when this sculptures was produced.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 Portrait of Gaius Julius Caesar

대리석 흉상, 로마,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16세기에 코와 가슴,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bust Roman, 100 BCE-100 CE 16th-century additions: nose, upper torso,

and bas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로마 장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는 갈리아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정복 전쟁의 공적과 원로원에서 살해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로마 시대에 제작한 두상을 르네상스 시대에 고풍스러운 흉상으로 보완한 것이다. 두상은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만들어진 초상 유형이며 수척한 얼굴이 특징이다. 이 초상조각은 개인의 얼굴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은 신격화된 모습의 '디부스 율리우스(율리우스 신)' 상이다.

 

Perhaps the most renowned historical figure associated with ancient Rome is Gaius Julius Caesar (100–44 BCE), who is equally famous for his military achievements, including the Gallic Wars, and his assassination by the Senate. This work consists of a dignified head sculpture of Caesar from the Roman era, which was later expanded into a classical bust during the Renaissance. Based on the gaunt face, this bust likely represents a posthumous portrait of Caesar. The individual facial features are not rendered in detail, resulting in a deified image known as the “Divus Julius (divine Julius)”.

 

카이사르는 서양에서 가장 유명하고 천재적인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가 원하던 모든 목적을 달성한 후 황제의 권세를 부리자 당시 원로원에서 공화정시대가 끝나고 왕정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해 암살하기에 이른다. 후세 사가들은 이미 황제의 직분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가 보인 전쟁과 정치, 외교에서 보인 신적 능력을 흠모해 독일에서는 황제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둑일식 발음으로 카이저라고 하고, 러시아에선 차르라고 한 것만 봐도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가 암살당하는 걸 보면 2천 년 전 로마인들은 결코 독재로 가는 왕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비슷한 느낌을 받는 건 즐풍의 뜬금없는 생각일까?

 

 

하드리아누스의 초상 Portrait of Emperor Hadrian

대리석 흉상, 로마, 117~138년, 후대에 가슴과 둥근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bust Roman, 117-138 CE Later additions: upper torso, bas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년) 통치기는 대체로 평화로웠고 황제가 특히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초상조각은 수염이 있고 섬세하게 치장한 머리가 특징으로,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선보여 네로 시대(재위 54~68년)나 플라비우스 왕조(69~96년)의 화려한 머리 모양을 재유행시켰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로 남성 초상에서 수염이 빠지지 않는 표현 요소가 되었다. 이 상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사령관의 망토인 팔루다멘툼을 두른 뒤 화려하게 장식한 핀으로 오른쪽 어깨에 고정했다.

 

The reign of Hadrian (117-138 CE) was generally peaceful, and he is known to have had a particular affinity for Greek culture. His bust stands out for the thick beard and finely styled hair with waves of curled locks. Indeed, the depiction of beards became a consistent part of male portraits from the time of Hadrian, and he is also said to have popularized the elaborate hairstyles from the previous Nero (r. 54-68 CE) and Flavian eras (69-96CE). He is shown wearing armor with a commander's cloak, called a “paludamentum" fastened with an ornate brooch at his right shoulder.

 

그는 영국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하두리아누스 성벽을 쌓았는데, 현재 영국에서 가장 크고 긴 역사적 유물이다.

우리나라 휴전선처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대의 영국 휴전선인 셈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 Portrait of Emperor Marcus Aurelius

로마, 161~180년, 후대에 의복의 장식용 핀과 오른쪽 어깨, 원형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bust, Roman, 161-180 CE, Later additions: brooch, right shoulder,

and rounded bas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는 철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그리스어로 쓴 『명상록』 때문에 철인(哲人) 황제로 불렸다. 그의 초상은 굵고 곱슬곱슬한 머리 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수염, 튀어나온 큰 눈, 처진 눈꺼풀이 특징이다. 황제의 초상에는 특정한 가치를 전달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다. 이 초상은 성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강조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삶을 보면 결코 과장은 아니다. 

 

Marcus Aurelius (r. 161–180CE) was known as the “philosopher-emperor" for his interest in philosophy and his work Meditations, written in Greek. His portrait sculpture is characterized by his thick curly hair and beard, large bulging eyes, and drooping eyelids. This expression, which emphasizes the emperor's status as a contemplative intellectual, was carefully designed to convey his political intentions or desire for self-representation. Thus, while it may seem a bit cliché today, this design actually held great strategic meaning at the time.

 

황제라기보다는 철학자로 더 유명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 사고가 깊지 못했는지 멍청한 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면서 국고는 바닥이 나고 나라는 휘청거렸다. 전임 황제들이 능력 있는 양자들에게 황제를 물려준 것과 대조되는 혈족 우선주의가 빚은 참사다. 모두가 흥미롭게 봤을 "글레디에이터" 초반에 안락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는 황제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이고, 황제를 물려받은 폭군은 콤모두스 황제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 Portrait of Emperor Marcus Aurelius Marble head

대리석 두상, Roman, late 2nd century CE, 로마, 2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지금은 두상만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관례대로 흉상이나 전신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얼굴의 골상학적 특징이나 곱슬머리, 수염이 오른쪽에 놓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초상과 닮았다. 통치자의 특징을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해 일관된 모습으로 초상을 조각하던 관습을 이 두 개의 초상이 잘 보여준다. 눈동자의 자리를 파내 모양을 만들었고, 눈꺼풀은 살짝 처져 있다. 이러한 초상 조각에 채색을 하여 제국 전역 로마인들에게 황제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했을 것이다.

 

Originally, this head sculpture of Marcus Aurelius was probably part of a bust or statue. It closely resembles the adjacent bust of Marcus Aurelius in terms of the facial features, cranial structure, curly hair, and beard, although they are not perfectly identical. Thus, the two works show how the appearance of Roman rulers became known throughout the empire through the dissemination of portrait models. Portrait sculptures were also painted for added realism and vivacity. The pupils were carefully carved and the eyelids were slightly lowered.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초상 Portrait of Emperor Septimius Severus

대리석 흉상, 로마, 3세기 초, 후대에 코끝과 둥근 받침대와 가슴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bust Roman, early 3rd century CE, Later additions: nose tip, upper torso and rounded bas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년)는 아프리카의 로마 속주였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오늘날의 이란 지역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던 파르티아와 싸워 승리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개선문이 지금도 로마의 중앙광장인 포로 로마노에 남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초상은 풍성한 곱슬머리와 턱수염이 특징으로 곱슬머리 가닥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로마인의 시각으로 보면 지금의 프랑스나 독일, 심지어 영국도 야만인이라 부르던 시절인데 그보다 더한 아프리카인에게 대장의 지휘를 맡기고, 끝내 황제가 되었다. 이런 열린 사고방식이 로마를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초상이라 피부의 색상이 표시되지 않은 이점이 있다.

 

 

유리그릇 Glass Vessels

 

기원전 2000년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된 유리 생산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와 로마는 제조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유리 용기는 주로 식기로 사용되었고, 저장 용기와 부장품으로도 쓰였다. 유리병은 몸에 바르는 향유나 약품을 보관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다. 유리로 만든 그릇, 잔, 병, 주전자는 도기나 금속으로 만든 용기와 형태가 같았다.

 

Glassmaking, which originated in the Mesopotamian region around the third millennium BCE, was later adopted by Greece and Rome, both of whom developed their own advanced manufacturing techniques. Glass vessels were primarily used as tableware, but also served as storage containers or as grave goods. Glass bottles were preferred for storing perfumed oils or medicines. Glass bowls, cups, bottles, and jugs usually shared similar shapes with pottery or metal vessels.

 

 

모자이크 유리, 밀레피오리 유리, 마노 유리 파편 Mosaic Glass, milefiori Glass, mano Glass fragments

그리스로마, 18~19세기에 금색 띠 장식,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Greek and Rome Banded in gold in 18th-19th centur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심포시온과 심포지움

 

그리스어로 연회를 의미하는 심포시온은 그리스 남성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중요한 장이었다. 대화 주제, 행사 순서, 음식의 종류가 정교하게 연출되었고, 여성은 참석할 수 없었다. 연회참석자들은 '드론'이라 불리는 방에 모여 담쟁이넝쿨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디오니소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첫 잔으로 심포시온을 시작했다.

연회의 좌장은 그날 밤에 마실 포도주의 양과 희석 비율을 공표했는데, 물과 포도주의 비율은 3:1, 5:3, 3:2로 다양하게 정할 수 있었다. 하인들은 크라테르에 물과 와인을 섞은 뒤 주전자로 옮겨 손님들의 잔에 따라주었다. 음주와 대화에는 연주, 노래, 오락이 함께했다. 로마시대에도 '심포지움'이라는 이름으로 연회의 전통이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여성도 참석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심포지움이 학문적인 모임이나 대규모 사업을 위한 대중 토론을 일컫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크라테르 세 개의 술이 적당하다 The Wine in the Three Kraters Is Just Right

직화식 꽃받침형 크라테르, 아테네 기원전 5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포도주용 그릇에는 종종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인물과 상징들이 그려졌다. 이 크라테르에는 정욕에 찬 사티로스에게서 도망치는 마이나스가 있는가 하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티로스와 마이나스, 리라와 쌍피리를 연주하는 인물도 있다.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표현된 디오니소스가포도주를 따라주는 세일레노스를 돌아보고 있다. 심포시온에서도 과음하지 않는 절제의 미덕이 강조되었지만 참석자들은 종종 취기를 빌려 사회가 부과한 엄격한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모습이 되는 자유를 누렸다. 반쯤 짐승인 것은 세일레노스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에 사용한 암포라 Jar Used at Symposion

아테네지역제작, 기원전 5세기 전반년, 빈미술사박물관소장

Attic,  Early 5th century BCE,  Kunsthistorisches MuseumVienna

 

 

연회에 사용한 접시 Plate for Symposion

이탈리아 남부,  기원전 4세기, 빈미술사박물관소장   

Southern Italian, 4th century BC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7 장미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돌기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장미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로마, 1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로마, 1세기                                      로마, 1세기 

 

10 장미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11 월계관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12 상표가 있는 토제 등잔

    로마, 1세기 후반                                로마, 1세기 후반                                로마, 1세기 후반

 

13 게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14 말 모양 장식이 있는 토제 등잔           

    로마, 1세기 전반                                 로마, 1세기 후반

 

 

 

유행의 변화

 

황실 인물들의 초상은 로마 제국 전역의 취향을 바꾸어 놓았다. 민간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통치자 초상의 스타일을 따라 선조들의 초상 전시 공간이나 무덤에 놓을 기념상을 만들었다. 초상에서 노화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경향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나이가 든 남녀의 상에 성공, 성취라는 가치를 부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수염 난 남성의 초상 Portrait of a Bearded Man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head, Roman, 2nd century C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초상 조각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황실 일원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시민이었을 것이, 이 조각상에 보이는 풍성한 곱슬머리와 수염은 안토니누스 왕조(138~193년) 때 유행했던 것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기원전 27년~기원후 68년) 때 많이 보이는 단정하고 짧은 머리 모양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황제와 황실 초상에 보이는 특정한 표현 방식을 일반 시민들도 그대로 모방하곤 했다. 이러한 두상은 전신상이나 흉상의 일부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Although the exact identity of this man is not known, he must have been a member of the imperial family or a high-ranking citizen. The voluminous curly hair and beard in this sculpture show the style of the Antonine Dynasty (138-193 CE), in contrast to the neat and short hairstyles commonly seen during the Julio-Claudian Dynasty (27 BCE-68 CE). Portrait sculptures of private citizens often imitated the style and expression of portraits of the emperors and their family. Head sculptures such as this were commonly produced as part of statues or busts.

 

 

사제의 초상 Portrait of a Priest

대리석 두상, 로마, 2세기 후반,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head, Roman, late 2nd century C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남성의 초상은 가운데가 갈라진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과 짧고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담쟁이넝쿨 관을 썼다. 이마 위로 메달리온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달 모양의 부적이 있다. 남성의 외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192) 연상시키지만, 메달리온이나 담쟁이넝쿨 관은 황제 초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소재이다. 따라서 재현된 인물은 사제와 같이 종교제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This head sculpture stands out for the irregular beard of short curly hair, which has a distinct part in the middle. The man also wears a wreath of ivy with a moon-shaped amulet above his forehead, which seems to be part of a medallion. Although the man somewhat resembles Emperor Commodus (r. 180-192 CE), the son of Emperor Marcus Aurelius, ornaments like the medallion and wreath of ivy are not commonly seen in portrait sculptures of emperors. Thus, this man may have been someone related to religious rites, such as a priest.

 

 

토가를 입은 남성의 초상 Portrait of a Man Wearing a Toga

대리석 전신상, 로마 1~3세기, 후대에 왼손 오른 코 주름 일부 추가, 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statue, Roman, 1st-2nd century CE, Later additions: left hand, right arm,

nose, décolleté, partial folds of toga,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로마의 전신상에서 신체와 옷에는 일정한 유형이 있어 주인공의 신분과 상의 성격을 전달하는 기능을 했다. 후기 공화정기에 토가를 입은 모습의 상은 주인공이 로마의 시민이라는 뜻이다. 군장을 갖추거나 짧은 망토를 입으면 관료이거나 군인이다. 누드나 세미누드상은 초월적인 존재를 나타냈다.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제1시민'의 역할을 부각하고 싶었던 로마 황제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시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들은 극장이나 분수 등 공공건축을 짓는 데 기여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In full-body sculptures of the Roman era, both the body and clothing were carefully designed and chosen to express the subject's character and social status. In the late Republican era, for example, a man wearing a toga was immediately recognized as a citizen of Rome bestowed with civil rights. Similarly, figures in military attire were marked as soldiers, while those wearing a short cloak were government officials. Nude or semi-nude statues were meant to convey a transcendent existence. This particular man is likely either a Roman emperor who wished to humbly express his role as the "first citizen" or an actual citizen with elevated social status. Most such statues were placed in public spaces, often representing the donors of a building.

 

 

카라칼라 황제의 스타일로 묘사된 남성의 초상 Bust of a Man in the Style of Emperor Caracalla

대리석 흉상, 로마, 3세기, 후대에 코, 가슴 부분 받침대 추가,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반세기 이상 풍성한 수염과 머리 모양을 선보였던 황제의 초상은 카라칼라 황제(재위 211~217년) 때 그 양식이 급격히 달라진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아들인 카라칼라는 공동 통치자였던 남동생 게타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공식 초상은 이 남성상처럼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 촘촘하게 덮인 머리 모양과 짧은 수염,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눈썹과 미간을 찌푸린 표정을 특징으로 한다.

 

 

고위 관리 또는 시민의 초상 Portrait of an Official or Nobleman

청동상의 얼굴과 손, 로마, 2세기, 중공식 주조, 금도금,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Face and hand from a bronze statue, Roman, 2nd century CE, Hollow-casting. gilded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얼굴과 손은 로마제국의 고위 관리나 시민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금동 전신상의 일부이다. 손가락 가운데 검지, 중지, 약지와 육중한 크기의 반지가 남아 있다. 남성의 얼굴은 깊은 주름과 아래로 처진 입가가 특징이다. 눈의 윤곽선이 선명하고, 눈동자는 심지어 반짝거리는 효과를 내는 작은 부분까지 표현했다. 금도금이 된 전신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문헌 기록에는 남아 있다. 그중 상당수는 기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se fragments of a face and hand are all that remain of a gilt-bronze full-body statue of a man who was probably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or nobleman of the Roman Empire. The index, middle, and ring fingers of the hand are present, including a thick ring. The man's face shows deep wrinkles and a downturned mouth, and the eyes are sharply outlined and meticulously detailed down to the pupils, creating a sparkling effect. Very few gilt-bronze Roman statues have survived intact, but they are described in some written records. Evidence suggests that a significant number of them were equestrian statues.

 

 

그림자의 제국

 

고대 그리스·로마인은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이행하거나 전환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문헌에서 죽음을 변화, 여행, 잠, 이별 등의 단어로 표현했다. 무덤 조각에서도 문을 통해 저승으로 이동하거나 죽은 이가 가족과 악수를 나누는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저승을 '그림자의 제국'이라고 표현했는데, 저승에서 죽은 이의 영혼은 생명의 맥이 빠진 그림자로 자의식 없이 지낸다고 믿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만난 영웅 아킬레우스가 “저승의 모든 영혼을 다스리는 자가 되느니 이승에서 가난한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고 탄식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는 사후 세계를 어둡고 비참한 곳으로 이해하였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신과 구별되는 궁극적인 한계이다. 사람들은 이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무덤과 장례 의식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친족들은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이에 대한 애정과 석별의 고통을 어루만짐과 동시에 죽은 이에게 예를 다하지 않으면 그들이 부정적인 힘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해소했다.

 

 

안녕히! Farewell!

대리석묘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스 델로스섬 출토, 반미술사박물관 소장

 

아치형 건물 안에 키톤을 입은 망자가 친척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 아랫부분에 새겨진 그리스어명문에 그가 아스클레피아데스의 아들이며, 아테네 출신이고 이름이 '고르기아스'라고 쓰여 있다. 맞은편에는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애정을 표현하듯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고 있다. 손을 건네는 동작은 결속의 표현으로 고대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데, 묘비에서는 작별을 고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인들이 망자와의 이별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렇듯 침착하고 담담했다.

 

 

 

장례 문화

 

장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공간적·정서적으로 분리하는 의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깨끗하게 씻긴 뒤 향유를 바르고 옷을 입혀 집 안의 높은 침상에 안치했다. 이후 정화를 마친 가족과 지인들이 죽은 이를 애도했다. 그리스에서는 하루, 로마에서는 최대 7일이었던 조문 기간이 지나면 시신을 도시 밖의 공동묘지로 옮겼다. 대개 성문에서 도시 외곽으로 난 큰길을 따라 무덤을 조성했다.

그리스·로마의 장례의식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모두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는 지역에 따라 두 방식의 비율이 달랐으며, 화장 방식도 계속 변화했다. 로마에서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주로 화장을 했는데 2세기부터는 매장이 우세해지면서 유해를 담는 유골함이 점차 석관으로 바뀌었다.

 

 

율리아 베라의 유골함 Cremation Urn of lulia Vera

대리석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로마 출토추정,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urn, Roman, 1st-2nd century CE, Presumably from Rome, Ital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무덤 제단 모양을 한 로마 시대의 유골함이다. 뚜껑에 있는 장미 모양 장식 사이에 '타이니아'라는 끈 달린 화환이 있다. 실제로 천으로 타이니아를 만들어 무덤을 장식하기도 했다. 옆면에 새긴 단지와 접시는 모두 죽은 이를 기리는 의례에 사용하던 물품으로, 이 유골함에 경건함을 더한다. 라틴어 비문에 따르면 이 유골함은 19세에 사망한 율리아 베라를 위해 그녀의 부친이 마련한 것이다. 명문은 초상과 더불어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는 수단이었다.

 

This interesting urn of the Roman era is shaped like a grave altar. The lid features a floral decoration with two rosettes flanking a central wreath. Notably, the wreath is tied with a ribbon called a "tainia" imitating the actual cloth tainia ribbons that were typically hung on tombs. For added reverence, the sides of the urn are carved with images of a jug and bowl, both of which were ceremonial objects used for libation. According to the Latin inscription, the name of the deceased was lulia Vera, who died at the age of 19, and this urn was prepared by her father. Along with funerary portraits, inscriptions were an important way to evoke memories of the deceased.

 

 

남매의 무덤 부조 Tomb Relief with a Sister and Brother

석회암부조의 파편, 팔미라지역 제작, 2세기 전반, 시리아팔미라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Fragment of limestone relief, Palmyrene, early 2nd century CE, From Palmyra, Syria,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오늘날의 시리아 팔미라에서 출토된 무덤 부조이다. 1세기에 로마 제국에 편입된 팔미라는 동서 교역을 통해 번영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팔미라 사람들은 탑 또는 신전 형태의 구조를 갖춘 대형 무덤을 짓고 망자의 모습을 새긴 판으로 무덤 입구를 막았다. 명문에 따르면 이 부조 속 망자는 예디벨이라는 남자의 아들과 딸이다. 여성이찬 화려한 보석은 로마시대에 유행하던 형태이며 손에 든 실패와 물렛가락은 그녀가 덕망이 있는 정숙한 여성이었음을 드러낸다.

 

This funerary relief sculpture was unearthed in present-day Palmyra, Syria, which was once a prosperous oasis city thriving from East-West trade, 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Roman Empire in the first century CE. In Palmyrene tradition, extended families constructed large tombs and sealed the entrance of the tombs with carved panels depicting the deceased. According to the inscription on this sculpture, the two figures are the deceased daughter and son of a man named Yedibel. The ornate jewelry worn by the woman follows the fashion trends of the Roman period, while the objects in her hand, a bobbin and spindle, signify that she was a woman of great dignity and virtue.

 

 

기억에 대한 갈망

 

그리스·로마인들은 산 자가 계속 기억해 준다면 망자는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따라서 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오가는 도로에서 가깝고 눈에 잘 띄는 무덤 자리를 선호했고, 무덤이 도로를 향하도록 배치했다. 인물조각상, 묘비, 화병, 신전모형 등 다양한 표지물도 세웠다. 도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유력한 가문들이 경쟁적으로 무덤을 호화롭게 꾸미면서 거대한 봉분을 올리거나 건물 모양으로 무덤을 짓기도 했다. 무덤은 신성하게 여겨져 유족과 후손들이 계속 방문해 관리했고, 장례기간과 기일에는 공양물을 바쳤다. 유골함과 석관에 새긴 글과 이미지도 망자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로 망자와 가족의 이름과 관계,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새겨졌다.

 

 

보드게임의 고수, 편히 잠드소서 Rest in Peace, Master of a Board Game

석회암 유골함, 로마, 1~2세기, 이탈리아 북부 출토,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Limestone cremation urn, Roman, 1st-2nd century CE, From northern Ital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작은 신전 형태를 한 이 유골함은 화려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유골함의 한쪽 면에는 보드게임을 하는 망자가 조각되어 있고, 반대쪽에는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티르소스)를 든 바쿠스가 아내 아리아드네와 침상에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보드게임은 고대에 인기 있던 놀이로, 유골함에 이 장면을 새긴 것은 망자의 실력이 좋았음을 알려 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부조 속 건물과 옷, 각종 소품에는 원래 채색을 했을 것이다.

 

This cremation urn, designed in the form of a small temple, is elaborately decorated with fine relief sculptures. On one side is a scene of the deceased person playing a board game. On the opposite side is a design of Bacchus, recognizable by his thyrsus staff adorned with pinecones, along with his wife Ariadne, lying on a bed.

Board games were popular in ancient times, and the inclusion of this scene on the urn suggests that the deceased very skilled at such games. The buildings, clothing, and various objects depicted in the relief sculptures are estimated to have originally been painted with colors.

 

 

신과 함께 Sarcophagus with Amor

대리석 석관, 로마, 1~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Marble sarcophagus, Roman, 1st- 3rd century C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날개가 달린 사랑의 신 아모르가 '클리페우스'라고 부르는 크고 둥근 방패를 들고 있다. 여기에 본래 망자의 이름을 물감으로 적었을 것이다. 석관 앞면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도 아모르가 연인 프시케와 함께 나타난다. 아모르와 프시케의 이야기처럼 신에게 사랑받아 불멸의 삶을 얻는 인간을 주제로 한 장면은 장례 미술에서 행복한 사후 세계를 기원하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 밖에도 석관 앞면에 두 마리의 스핑크스를, 옆면에 두 마리의 그리핀을 장식했다.

 

In this relief sculpture from a sarcophagus, Amor, the winged god of love, holds a large round shield called a “clipeus" which was once painted with the name of the deceased. Amor appears again on the left and right sides of the front face of the sarcophagus, along with his lover Psyche. According to legend, Amor and Psyche were granted immortailty by the love of gods. As such, scenes of these two figures in funerary art likely represent wishes for love and joy in the afterlife. The front face also includes a pair of sphinxes, while two griffins appear on the sides of the sarcophagus.

 

 

 

어린 헤르쿨레스의 상 Statue of Young Hercules Marble statue

대리석상, 로마, 헬레니즘 시대 원작의 2세기 복제작,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땅에 닿는 긴 망토를 두르고 왼손으로 곤봉을 잡은 어린 소년의 상이다.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묶고 머리띠를 둘렀는데, 이는 로마 시대에 유행하던 아이들의 머리 모양이다. 이 조각상은 헬레니즘시대 원작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원작에는 곤봉이 없다. 로마 시대에 복제작을 만들면서 곤봉을 추가한 듯하다. 헤르쿨레스의 상징물인 곤봉 덕분에 이 소년은 '어린 헤르쿨레스'로 불렸다. 로마 시대에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조각상을 무덤에 두기도 했다.

 

 

 

로마에게 그리스가 없었다면, 그리스에게 로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흔히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를 함께 묶어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부르지만 둘은 별개였다. 다만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게 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로마가 그리스 신화를 수용하고 모방하며 두 나라의 신화가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되어 우리는 두 신화를 자연스럽게 묶어 부르게 되었다.

신화는 구술 문화의 시대에 한 공동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지식, 정보, 지혜를 모아 구성원들의 생존과 행복을 도모하며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신화에는 공동체의 역사와 함께 그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신화를 공유했기에 그리스와 로마라는 거대한 두 문화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이는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마에게 그리스라는 자양분이 없었다면, 서구의 철학과 예술, 문학이 지금처럼 꽃필 수 있었을까. 그리스에게 로마가 없었다면, 그리스의 문화가 지금처럼 우리에게 알려졌을까. 이 전시에서는 신화, 초상 미술, 장례 등의 주제를 통해 마치 이인삼각二人三脚처럼 얽혀 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함께 나누고 또 따로 이루었던 예술과 문화와 역사의 장면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