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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신창현 역사공원과 신창향교 둘러보기

by 즐풍 2024. 2. 5.

2024_25

 

 

 

2024. 1. 29. 월요일 오전

 

얼마 전 아산의 영인산성을 다녀올 때 그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신창학성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산성이나 읍성 등에 관심 많은 즐풍은 이를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 없어 들려보기로 한다.

신창학성 입구에 있는 신창현 역사공원과 신창향교부터 들리며 관심 있게 살펴본다.

처음에는 각각 작성하려다 편하게 묶어서 하나로 올리기로 한다.

 

 

 

 

신창현 역사공원 新昌縣 歷史公園

Sinchang-hyeon History Park

Исторический парк Синчангхён

 

본 공원은 온양군, 아산현과 더불어 아산의 역사적 근간을 이룬 신창현 읍치의 역사적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관아의 위치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 고증되었으며 본 대상지는 조선시대 신창현 동헌의 인접 부지이다.

공원에는 고증을 근거로 읍치시설邑治施設 및 전통시설을 도입하였으며, 신창현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였다. 이 사업은 지역주민과 아산시의 지속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본 공원이 지역 학생들의 향토사 교육 및 지역에 대한 애향심 배양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안내문)

아산지역의 안내문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던 러시아어 제목이 붙었다.

이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제법 거주하거나 관광을 다닌다는 걸까?

 

 

신창현 역사공원 안내도

 

 

신창현 관아 및 경관에 대한 기록 新昌縣 歷史

 

조선왕조실록    

 

成宗 139卷, 13年,  吏曹據新昌縣人表幹等上言曰: "新昌雖非中宮內外鄕, 然誕生之地新昌雖非中宮內外鄕, 請陞號爲郡" 從之

이조에서 신창현 사람 표한 등의 상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신창현이 비록 중궁의 내외향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중궁>*이 탄생한 곳입니다. 청컨대 군으로 승격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중궁(정현왕후)천순 임오년(1462, 세조 8) 6월 무자(戊子)에 신창현의 관사에서 태어남

 

中宗 66卷, 24年,  忠淸道尼山縣地震, 新昌縣雷, 溫陽郡有聲如雷, 或如地震, 人馬驚駭

충청도 이산현에서는 지진이 발생했고, 신창현에서는 우레가 울렸고, 온양군에서는 우레 같기도 하고 지진 같기도

한 소리가 나서 인마가 놀랐다.

 

肅宗 35卷, 27年,  忠淸道 新昌縣海溢

충청도 신창현에 해일이 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쪽으로는 온양군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 경계까지 21 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祈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 시켰다.

공양왕 3년에 본현 서쪽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서 당성溏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신창현 공북정에 관한 기문  新昌縣拱北亭記

 

무송茂松 윤상국尹相國이 거정에게 말하기를, “신창 수령 조군유趙君愉가 새로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을 걸고 기문을 청해 왔는데, 한마디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을 더듬어 보건대, 병자년 (1456, 세조 2) 여름에 서원西原에서 공성公城으로 가는 길에 이른바 신창이라는 곳을 들렀는데, 동년同年인 태수 김률金慄이 길에 마중을 나왔다. 마침 날이 매우 더워서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중에 고을을 다스리는 책략을 물었더니, 김률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생산이 적은데, 아전은 교활하고 완악하며 백성은 어리석고 분쟁이 심합니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니, 단지 소란스럽지 않게만 할 뿐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생선을 찌듯이 해야 한다.'라고.' 했으니, 그대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거의 핵심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의 후임자가 그대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대와 같은 정치를 한다면 대체 다스려지지 않을 고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갈 길이 바빠서 마침내 작별하고 떠났었다.

그 몇 해 뒤에 호남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태수 윤사문호尹斯文이 길에서 나를 맞아 술잔을 나누었다. 그 정치하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우리 김동년과 같았다. 또 내가 갈 길이 바빠 두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거정이 이 고을과는 천생의 인연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저번에 들으니, 조후趙侯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간소하고 요약되게 정치를 하고 번거롭게 명령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으며, 백성들에게 서둘지 말라고 했는데도 백성들이 즐거이 일터로 달려와 관청과 정자가 훌륭하게 일신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치를 사모하면서도 그 고을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김 동년과 윤사문과 예전에 상의했던 말들이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제 조후가 정자를 짓고 무송이 기문을 부탁하는데, 그 대상으로 유독 나를 선택하여 지으라 하니, 이는 이전에 하늘이 나에게 두 번이나 인색하게 굴었던 것이 바로 오늘을 기다리게 한 것이라 하겠다. 감히 즐거운 마음으로 기문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누각을 짓는 것은 그저 즐기며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가 보낸 사신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여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공북'이라 한 걸 보면, 단지 여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올라 조망하거나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자들이 멀리 대궐 쪽을 바라보면서 서울이 있는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밥 한 끼 먹는 사이에도 항시 임금을 잊지 않는다면, 왕실을 존숭 하는 《춘추》의 의리를 깊이 지니게 될 것이다. 대저 《춘추 》는 선을 포상하고 악을 폄하한 책이다. 왕실을 높였으면 기록했고 백성의 일을 중시했으면 기록했다. 조후의 이번 거조는, 일을 함에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도 않았고 시절에 비추어 호사스럽게 하지도 않았으며, 또 왕실을 존숭 한 것이 이와 같으니, 《춘추>의 사례로 볼 때에 마땅히 크게 특별히 적어서 찬미해야 할 일이다. 내가 외람되이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쓰고 싶지 않더라도 안 쓸 수가 있으랴.

산천과 고을의 형세와 경관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찌 꾸며 칭찬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척박한 밭 한 뙈기가 평택에 있으니, 뒷날 만일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서 노년을 보내게 된다면, 그 정자에 한번 가서 그에 대한 내 말을 마무리할 것이다.

 

 

新昌縣拱北亭記 신창현 공북정에 관한 기문

 

茂松尹相國。語居正曰。新昌守趙君愉。構新亭。扁曰拱北。索記。幸子有一言。予念丙子夏。自西原之公城。道所謂新昌。而過之。太守金同年慄。迓于道。時方酷熱。小坐樹陰叙酌。仍訪爲縣之略焉。金曰。縣地狹而人寡。土瘠而產少。吏黠以頑。民囂且訟。慄無盤錯之才。但勿擾而已。予曰。古人云治小邑。如烹鮮。君之爲縣。庶幾得體矣。使繼君者。心君之心。政君之政。夫焉有不理者乎。予因行迫。遂告別而去。

後數載。之湖南。道于是。太守尹斯文壕。邀于路觴之。訊其爲政。猶吾金同年也。又予行迫。未暇歷訪 。 心竊自怪居正之於此縣。無夙昔之緣者然也。向聞趙侯之爲政。勤而敏。簡而要。不好煩其令。而民安其業 。 勿亟民而民樂趨事。官廨亭榭。煥然一新。予思其人。慕其政。不親覩其邑。則與金同年, 尹斯文所曾商略者。未嘗不往來于懷矣。今趙侯之構亭。茂松之屬記。獨勤於予。是前日天之再靳於予者。正竣今日也。

敢不樂爲記。予惟臺榭之建。非所以事玩遊。乃尊王人。接賓客。導宣堙欝也。其曰拱北。則非但止於是。使登眺於是。觴詠於是者。瞻望魏闕。指長安於日下。未嘗一飯忘君。深得春秋尊王之義焉。夫春秋。褒善貶惡之書也。尊王室則書之。重民事則書之。趙侯此擧。役不煩民。時不擧嬴。而尊王又如是。在春秋之例。當大書特書而美之也。如予忝局文翰。雖欲不書。得乎。若山河邑居之形勝。未嘗一目。安能張皇乎哉。予有薄田一頃在平澤。他日。倘乞骸歸老。當一造其亭。以畢其說云。

                                「四佳文集卷之一」

                                                                            (안내문)

 

한자로 된 공북정에 관한 기문을 위에 풀어놓은 것이다. 한자를 앱을 이용해 다운로드하고 보니 두 글자가 비슷한 한자로 잘못 바뀌어 바른 한자로 변환했다. 혹여 관심 있는 분은 한글과 함께 검토하시라.

 

신창현 공북정

 

 

신창지역 비석 군 新昌地域 碑石群

 

아산시는 1583년에 세운 윤승훈 선정비를 비롯하여 여러 시기에 걸쳐 신창지역에 세운 총 20기의 비석을 한 군데 모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역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19년에 신창현 역사공원으로 모두 옮겨 놓았다.

비석의 종류는 벼슬아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와 영세불망비를 비롯하여 서양인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의미로 세운 척화비 등이 있고, 비를 세운 인물은 충청도관찰사, 암행어사, 신창현감 등 다양하다. 비석의 형태는 대부분 둥근 모양의 원수圓首이지만 네모난 모양의 방수方首도 있고, 기와지붕 모양의 와가이수瓦家螭首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용 모양의 비석 머릿돌을 사용한 귀부이수龜趺螭首 등이 있다.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비석은 건립 시기와 종류를 고려하여 배치하였다.

                                                             (안내문)

 

 

김육 비 金堉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

 

김육비는 김육(1580~1658)이 대동법을 주장하여 시행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비문에 '순치順治 17년' 17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660년 조선 현종 원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신창초등학교 입구에 있던 비석을 2019년 신창현 역사공원으로 옮겼다.

김육은 청풍 김씨이고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精堂이며,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3대손이다. 김육은 병조참판 · 이조참판 · 대사헌 · 예조판서 등 각종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와 유통, 수로의 제조와 보급, 시헌력時憲歷의 제정과 시행 등 실학적 성향을 지니고 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경제 정책에서 공물법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51년(효종 2) 1월 영의정에 임명되어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1657년 (효종 8)에는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 구성하여 전라도 해안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케 하였다.

                               (안내문)

 

 

명신 김육의 행적을 글로 기리다

 

김육金堉(1580-1658)은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소나무 아래 한가롭게 서 있는 김육의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위쪽 영조의 시는 이 그림이 그려지고 100여 년 뒤 적은 것입니다영조는 온천을 다녀오는 길에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김육 초상에 시를 내렸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자신의 글로 옛 신하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높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탕탕평평에서 가져온 그림

 

 

 

 

신창 척화비  新昌 斥和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6호

 

신창 척화비는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에 신미양요를 겪은 후,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 하나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1969년에 신창초등학교 운동장에 보관했다가 1987년에 신창면 읍내리 280-1번지로 옮겨 놓았고, 다시 2019년에 신창현 역사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척화비 앞면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옆면에는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당시의 대응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전국에 설치된 척화비는 임오군란 1882년 때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철거되었으며 미처 철거되지 않은 비 몇 개가 발견되어 현재 보존되고 있다.

                                                                                     (안내문)

 

지금 시각으로 보면 척화비를 세운다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청나라가 세상의 제일인 것으로 알았나 보다.

 

 

다시 보는 공북정

 

 

신창현 공북정을 불러보고, 인근에 있는 신창향교로 들어선다.

거대한 느티나무가 태풍에 45도 각도로 쓰러졌으나 비스듬히 누운 무게를 다 감당하며 끈질기게 살아간다.

거친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근근이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담았다.

 

 

45도 각도로 누운 느티나무는 작은 가지가 모두 본줄기를 대신해 하늘로 뻗고 있다.

 

 

느티나무를 지나자 신창향교가 눈에 들어온다.

 

 

정문은 반대편에 있다.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에 밖에 있는 건물에서 거주하며 이곳으로 드나드는 곳이다.

여느 지역의 향교는 코로나19 이후 대부분 문을 잠가버렸는데, 이곳은 관리자 있으니 이렇게 열렸다.

 

 

쪽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끝으로 명륜당이 있고 맞은편 앞뒤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다.

거의 서원과 비슷한 구조다.

 

 

내삼문 방향에서 바라보는 명륜당

 

신안 주희 글씨라고 적혔다.

 

동재는 서재와 달리 향교로 드나드는 출입구를 만들었기에 한 칸이 더 넓다.

 

 

대성전으로 드나드는 내삼문

 

 

 

 

왼쪽 동재와 오른쪽 서재, 가운데가 명륜당이다. 명륜당은 유생들의 학업 공간이다.

 

 

신창향교 新昌鄕校

Sincha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Местная конфуцианская школа Синчангхянгë  충청남도 기념물

 

신창향교는 조선 숙종 때 지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이 없고, 신창 현감 왕경열이 조선 고종 9년 1872에 관학 강화 정책에 따라 도고산에 있던 운주사雲主寺를 향교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향교는 조선 시대 관립 교육 기관으로 고을마다 세워졌다. 신창향교는 외삼문 없이 명륜당을 앞쪽에 배치하였고,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하였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가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내삼문 안쪽에 정면 5칸, 측면이 3칸인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 2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으며, 봄가을로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동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It is thought that Sincha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1661-1720) or, alternatively, that it was built by Wang Gyeong-yeol, a magistrate of Sinchang, using the structure of Unjusa Temple at nearby Dogosan Mountain, at its present location

in 1872 (the 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to educate young local people. The school consists of Daeseongjeon Shrine, which measures 5 kan by 3 kan, and Myeongnyundang Lecture Hall (5 kan by 2 kan), as well as a middle gate and two dormitories, Dongjae (6 kan by 2 kan) and Seojae (5 kan by 2 kan) located in the courtyard between the shrine and the lecture hall.

Daeseongjeon Shrine enshrines the mortuary tablets of eighteen local Confucian saints and five Chinese saints for whom a sacrificial rite is held there twice a year.

                                                                                     (안내문)

 

 

 

대성전 뒤뜰

 

대성전 앞뜰

 

 

 

 

 

 

안내문에도 있듯 동재가 한 칸 더 큰 건 이 출입문 때문이다.

출입문을 나서면 왼쪽으로 신창학성으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신창초등학교 교정과 만난다.

 

 

신창초등학교 교정에서 바라보는 신창향교

 

 

 

 

신창현 역사공원과 신창향교를 둘러보고 신창학성 탐방을 위해 산으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