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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조선왕조의 유물을 전시한 국립고궁박물관 A

by 즐풍 2024. 1. 24.

2024_01

 

 

 

2024. 1. 2. 화요일 오전

 

대부분의 박물관은 매년 새해 첫날은 문을 닫는다.

박물관 직원들도 새해 첫날은 가족과 함께하며 새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월요일인 오늘은 문을 열기에 국립고궁박물관 개방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조선왕조의 궁궐인 경복궁 옆에 조선왕조의 유물박물관을 세워 조선시대의 유물과 궁궐 생활상을 보여준다.

 

(전시된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광화문역에서 하차하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동하는 길에 보는 세종대왕상이다.

 

 

 

 

조선 왕조

 

조선朝鮮은 1392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건국한 이래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이으며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高麗 말기인 14세기 후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민족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394년 개성開城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국가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표방하였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통해 지방 행정조직에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양반관료제를 채택하여 개인의 소양에 따라 관료로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산업은 농업이었으며, 주로 상민常民 계층이 경작한 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산업구조가 다양화되고 신분제도의 예속성이 약해지는 등 점차 근대국가로의 길을 걸었다.

 

 

조선의 국왕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1910년 일본에 강점당하기까지 519 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며 지속되었다. 왕은 강력한 지배 체제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어야 했으며 배우자인 왕비도 이에 걸맞게 덕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왕실 자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이에 부응하는 교육을 받아 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소양을 쌓았다.

 

 

 

국왕의 존엄과 일생

 

'왕'이라는 글자는 천天·지地·인人을 나타내는 3개의 '일(一)'이 '뚫을 곤(丨)'으로 연결된 형상이다. 즉, 국왕이란 덕으로써 우주(천·지·인)를 관통하는 존재이자 하늘의 명[천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였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은 어좌와 당가, 어보, 복식, 어진 등 각종 상징물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초월성을 나타내면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선의 국왕은 유교적인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세자시절부터 재위 이후까지 평생 동안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국정 운영의 소양을 쌓음과 동시에 고대의 이상적 군주상인 학자 군주[군사君師]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신성한 왕의 공간

 

궁궐의 정전正殿은 국가의 중요의식을 행한 장소로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정전 중앙에 임금의 의자인 어좌御座가 놓이는데, 왕의 권위와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당가唐家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가의 상부는 보개寶蓋를 덮고,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한 쌍의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다.

높다란 단의 중심부에 어좌와 이를 감싸듯 펼쳐진 곡병曲屛을 함께 두고 뒤편으로 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묘사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설치하여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였다.

어좌는 전면에 구름 속을 나는 용 문양을 금으로 그려 넣고, 모서리에는 황금색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여 최고 지존의 자리다운 위엄과 격식을 갖추었다.

일월오봉도 병풍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을 비롯하여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산봉우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 다섯 개의 사물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 '천보天保'라는 시에 등장한다.

 

 

왕권의 상징물, 어보·어책·교명

 

어보御寶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일반적으로 왕의 인장을 뜻하나 왕비, 왕세자 등의 의례용 인장까지 통칭한다. 왕실 인사를 책봉하거나 덕을 기리며 특별한 이름을 올리는 의식을 할 때 지위와 이름을 어보에 새겼다.

어책御冊은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서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나 국왕의 훈유訓諭를 새겼다.

교명敎命은 왕비·왕세자·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문서로 왕의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왕과 왕비의 어보·어책·교명은 주인공의 사후에 종묘 신실에 봉안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했다.

조선왕실의 어보·어책·교명은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의 시대적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는 기록 문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왕의 호칭과 어보

 

조선의 국왕은 일생을 통해 다양한 호칭을 부여받았다. 태어나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아명兒名·명名·자字·호號를 받았고, 왕으로서는 존호尊號·시호諡號·묘호廟號·능호陵號 등을 받았다. 국왕의 다양한 호칭 가운데 어보에 새기는 것은 존호, 시호, 모호, 추상존호追上尊號 등이다.

존호는 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이고, 추상존호는 세월이 흐르면서 돌아가신 국왕에게 새로운 평가를 부여하여 지어 올린 이름이다. 시호는 왕의 사후 생전의 공덕을 참조하여 짓는데 신하들이 지어 올리는 것과 중국으로부터 받는 호칭 두 가지가 있다. 묘호는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호칭으로 왕의 공이 크면 '조祖', 덕이 크면 '종宗‘을 붙였다.

 

 

문조 추상시호 금보 文祖追上諡號金寶

조선朝鮮, 1835년(헌종 1),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현종(재위 1834~1849)이 즉위한 후, 세자 시절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효명세자孝世子(1809~1830)를 왕으로 추존하며 올린 금보다. 묘호는 '익종翼宗'으로 시호는 ‘돈문현무敦文顯武 인의효명仁懿孝明'이라 하고 금보에는 시호만 새겼다.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황제로 추존하며 묘호를 '문조文祖'라 했다.

 

 

경종계비 선의왕후 책봉 금보 景宗繼妃王后王妃冊封金寶

조선朝鮮. 1722년(경종 2) |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금보를 포장하는 물품 英祖繼妃定順王后 金實封裏物品

조선朝鮮 1759년, 定順王后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順王后(1745~1805) 가 왕비로 책봉될 때 만든 금보, 금보를 싼 보자기와 금보를 넣은 함, 그 힘을 보관한 상자 등으로 구성된 포장 물품이다.

 

 

성군聖君을 향한 평생교육

 

조선의 임금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할 성군聖君이 되기 위해 평생토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왕위를 계승할 원자의 교육과 양육은 보양청輔養廳이 담당하였다. 이후 원자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강학청 講學廳에서 교육을 진행하였는데 주로 생활예절을 중요시하였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서연書筵이라는 교육 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왕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춘방春坊]이 전담하였다. 교육은 장차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바른 역사관, 넓은 식견 등 뛰어난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경연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경연은 각종 현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로서 정치적인 기능도 가졌다.

 

 

고종이 왕세자의 서연을 보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 臨觀胄筵識喜詩懸板

조선朝鮮 1886년(고종 23)

 

1886년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세자이던 순종(재위 1907~1910)이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받는 모습을 보고 쓴 시를 새긴 현판이다. 공부 중인 세자의 모습을 보고 느낀 기쁨이 잘 나타나 있다.

 

 

국왕이 왕세자에게 당부한 글 [훈유訓論]

중종이 원자 인종에게 지어준훈계의 글

 

1. [早起暮寢 勤學不捲] 일찍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을자되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

2. [尊師樂道 好善務仁]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즐기며 선을 좋아하고 인仁에 힘쓰라.

3. [不邇聲色 不殖貨利] 성색을 가까이 하지 말고 재물을 늘리려 하지 말라.

4.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5. [勿押群小 勿喜雜戱] 소인의 무리와 가깝게 지내지 말고 난잡한 놀이를 좋아하지 말라.

6. [立志高遠 堅如石金] 뜻을 고상하고 원대하게 세우되 금석처럼 굳게 하라.

7. [忠君孝親 友愛兄弟 日日問安 時時視膳]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되 날마다 문안하고 수시로 음식을 보살펴라.

8. [務去邪僻 勿崇異端] 간사한 행동을 버리기에 힘쓰고 이단을 숭상하지 말라.

9. [勿薇私欲 存善公心] 사사로운 욕심에 가려지지 말고 착하고 공정한 마음을 보존하라.

10. [勿聽婦言 恐懼終始] 궁녀와 내시들의 말을 듣지 말고 행동의 처음과 끝을 조심하라.

                                                                            『중종실록』 권 27, 중종 12년(1517) 4월 13일 

 

 

왕세자입학도첩 王世子入學圖帖

조선朝鮮, 1817년(순조 17), 복제

 

효명세자孝明世子(추존문조文祖, 1809~1830)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의 의식을 기록한 화첩이다. 성균관 입학은 왕세자가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임을 알리는 상징적이고 국가적인 행사였다. 의식을 치른 후에도 왕세자의 교육은 시강원에서 이루어졌다.

 

 

국왕의 즉위

 

왕위에 오르는 방식은 크게 양위 사정으로 구분된다. 양위는 왕이 직접 왕위를 넘기는 것이고, 사위는 왕이 죽은 뒤 후계자가 그 뒤를 잇는 방식이며, 반정은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방식이다.

어떤 방식이든 새로운 왕은 즉위식이라는 장엄한 행사를 통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일반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사위였기 때문에 즉위식은 국상의 한 과정이었다. 새로운 왕은 입고 있던 상복喪服을 잠시 벗고, 대례복인 면복冕服을 입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먼저 선왕을 모신 빈전에서 왕의 상징인 대보를 받고, 정전의 정문에 설치한 어좌에 앉아 신하들의 축하인사인 하례를 받은 후 정전에 올랐다. 이로써 즉위식은 마무리되었다.

 

 

면류관 冕旒冠

복원

 

구장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격식의 모자이다.

앞뒤로 옥과 구슬이 늘어뜨려져 있어서 시야를 가리고, 좌우에도 작은 솜뭉치가 늘어뜨려져 있다.

여기에는 '악은 보지 말고 나쁜 말은 듣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

 

 

옥대 玉帶

20세기 초, 복제

 

옥 장식을 붙여 만든 허리띠이다. 왕과 왕세자 등이 조복朝服·상복常服·제복祭服을 입을 때 둘렀다.

 

 

 

 

왕의 초상, 어진 国王的肖像, 御眞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眞殿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 [도사圖寫], 국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 [추사追寫] 했다. 또한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은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따라 그리기도 [모사模寫)했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어진은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순종 황제 초상 모사

純宗御眞 순종 어진, 권오창 제작 기증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재위 1907~1910)의 전신상을 현대에 그린 작품이다.

순종 얼굴은 군복차림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으며, 면류관과 면복을 착용한 차림을 하고 있다.

면은 황제국의 예에 따라 12 류관 12 장복을 갖추었다. ​

 

 

조선왕조의 기록과 계승

 

유교에서는 덕치德治를 행한 선왕先王의 업적을 본받는 것을 이상적인 덕목德目으로 여겼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의 계승과 정책의 운영, 그리고 각종 의례의 준비와 진행과정 등을 철저하게 기록하고 후대에 참고하는 '기록정치'를 행했다. 왕조를 개창하면서 태조의 선조부터 그 후손들의 계보를 정리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했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통치에 대한 기록을 남겨 후대 왕들의 모범으로 삼았으며 각종 의례에 대한 기록인 『의궤儀軌』를 통해 왕조의 전통을 계승시켰다. 이러한 기록들은 국왕이 선정을 펼치는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표방하고 왕의 통치이념을 드러내는 기능도 하였다.

 

 

임금님의 글씨, 어필각석御筆刻石

 

각석은 문자나 그림을 돌에 새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 문장가, 명필가의 글과 글씨를 각석으로 만들어 길이 전해지도록 했다. 특히 왕의 글과 글씨는 후대에 전할 본보기로서 귀하게 여겨졌고, 나무 판이나 돌에 모각하여 종이에 찍어내거나 탁본하여 보관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글씨를 새긴 어필각석御筆刻石은 시와 편지글, 훈계의 글, 유명한 문구 등 왕실의 문예를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원본을 보존하여 왕의 글과 글씨가 영원히 전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기록 문화의 정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제1 대 태조부터 제25 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들의 행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700여 권에 달한다. 국왕이 승하하면 역사 편찬기관인 춘추관에서 임시 기구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사관이 평소에 기록해 둔 사초史와 각종 자료를 모아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매일매일 국왕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한 것으로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였으며, 사관은 기록에 공정성을 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초초初草·중초中草.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된 실록은 중앙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각각 봉안하였고, 이후 정기적으로 바람을 쏘여[포쇄曝曬 ] 관리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조선국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조선은 화재나 전쟁 등에 대비해 실록, 의궤, 선원록과 같은 중요한 국가기록물을 여러 부 편찬해서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의 사고에 나니 보관했다.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되자 1603년부터 1606년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간행하고 서울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태백산, 평안도 묘향산, 강원도 오대산의 사고에 나눠 보관했다. 이 중 오대산사고본은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수정·삭제한 교정 부호가 남아 있는 교정본을 포함하고 있어, 실록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중요 기록물은 중앙과 지방에 분산되어 보관되었지만 관리는 철저히 중앙의 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사고에 봉안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파견된 사관이 아니면 함부로 열어볼 수 없었고, 벌레나 습기로 인해 손상되지 않도록 엄중히 관리하였다.

 

 

 

오대산사고본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오기까지

 

오대산사고에는 조선 제1대 왕 태조(재위 1392~1398)부터 제25대 왕 철종(재위 1849~1863)까지의 실록 총 788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실록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후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관리하다가 1913년 일본에 반출되어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 화재로 실록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당시 대출 중이던 74 책은 다행히 보존되었다. 이 중 27 책은 1932년 서울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으로 이관되었다. 나머지 47 책은 그대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각계각층의 노력을 통해 2006년 7월 국내로 환수되었다. 2012년 문화재청은 오대산사고본 실록 총 74 책의 관리 단체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지정하여,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기록물이 왕실의 문화를 담은 전문 박물관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수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행차를 통해 왕권을 견고히 하고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음력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화성 행차는 반차도, 그림 병풍, 의궤 등 다양한 기록물로 전한다.

반차도는 행렬의 대열과 순서를 빠짐없이 그린 것으로 사전에 왕의 검토를 거치게 하였다. 주요 행사를 그린 기록화 8첩 병풍은 여러 벌 제작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상으로 내렸으며, 의궤청을 설치하여 화성 행차의 전말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필사본인 기존 의궤와는 달리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로 글씨를 찍고, 목판으로 그림을 찍어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의 왕도정치

 

왕도정치王道政治란인과 덕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유교의 이상적인 정치형태를 말한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왕조 역시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법전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지며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으며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를 설립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다. 또한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물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시행하여 관료를 선발했으며 관료를 교육하고 연구를 행하는 집현전集賢殿이나 규장각奎章閣 등을 운영하였다

 

 

조선의 중앙관청

 

조선시대의 중앙관청으로는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승정원承政院, 삼사三司 등이 있었다. 의정부는 최고의 기관으로 주요 사안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육조는 실무를 담당하던 6개 관청으로, 이조吏曹는 문관의 인사人事, 호조戶曹는 인구조사와 세금, 예조禮曹는 국가의 의례와 교육, 병조兵曹는 무관의 인사와 국방, 형조刑曹는 형벌과 소송 관련 업무, 공조工曹는 산림·건설 · 수공업 등을 담당하였다.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왕명의 출납을 관장한 곳이다. 삼사三司는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을 일컫는 것으로 각각 관료의 규찰·간쟁諫諍·왕의 자문을 담당했는데, 행정기관을 견제하면서 권력의 편중을 막았다.

 

 

조선의 관직체계

 

조선시대의 관제官制는 크게 문반文班 [동반東班]과 무반武班 [서반西班]으로 나누어지고, 문무반은 다시 중앙과 지방의 직職으로 구분되었다. 관료는 음서陰敍로 임명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과거科擧를 통해 선발했고, 모든 관리는 관리의 위계인 관품官品에 의해 정1품에서 종 9품의 18 품계品階로 구분되었다. 각 관아도 최고위 직임자의 품계에 따라 높고 낮음이 있었다.

18개의 품계 중 종 6품 이상은 각각 상하上下로 나뉘었다. 특히 정1품에서 정 3품 상上 사이의 관원은 당상관堂上官이라고 하여 국정을 입안·집행하는 최고급 관료였다. 정3품 하下에서 종 6품까지는 참상관參上官이라 하여 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관료였고, 정 7품 이하 참하관은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료였다.​

 

 

 

문흥정책의 노력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선택하면서 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였다. 건국 초부터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등 국가 통치를 목적으로 다양한 도서들을 편찬하고 수집하였다.

조선에서는 왕을 도와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集賢殿·홍문관弘文館·규장각奎章閣 등의 학술 연구기관을 운영하였다.

세종 대에는 새로운 유교국가의 틀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집현전을 확대하여 연구기관으로 개편하였는데, 연구와 토론을 통해 정책 고문 기능을 수행하였다. 세조 대에는 홍문관이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하였으며, 정조 대에는 규장각이 설립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문화 중흥을 이끌었다.

 

 

관리의 등용문, 과거科擧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관을 뽑는 문과, 무관을 뽑는 무과, 전문기술관을 뽑는 잡과雜科가 있었고, 문과는 생원生員 ·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와 고급 문관을 뽑는 대과로 구분되었다. 과거의 시행은 정기시와 비정기로 나뉘었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러진 정기시였다. 비정기시는 비정규적으로 행해진 특별 시험으로 별시別試라고 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를 비롯하여 필요에 의해 시행되어 선발 인원과 지역, 형식이 일정하지 않았고 특정 지방의 유생들을 위해 시행하거나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는 관료들을 독려하기 위해 치러졌다.

 

 

이제부터는 조선의 궁궐에 대한 안내가 시작된다.

 

 

조선의 궁궐

 

궁궐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했다. 조선은 풍수지리 사상에 기반하여 북쪽 백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 남쪽), 타락산(낙산, 동쪽), 인왕산(서쪽)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수도로 정했고 백악산을 뒤로하여 법궁法宮인 경복궁慶福宮을 세웠다. 이후 조선은 상황에 따라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덕궁慶德宮(경희궁慶熙宮), 경운궁慶運宮(덕수궁德壽宮) 등 다른 궁궐들을 건립해 조선의 궁궐은 모두 5곳이 되었다.

각 궁궐들은 조선 600여 년간 여러 역사적 사건 속에서 영건과 중건, 수리가 거듭되었는데,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왕도정치 및 효와 예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인 이상사회 구현의 철학을 담아 당대 최고의 기술로 궁궐을 조성했다.

 

 

궁궐지 宮闕志

조선朝鮮

 

궁궐지는 조선시대 궁궐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이다. 숙종의 명으로 편찬된 것으로 현재는 헌종 대의 증보판과 순종 대 편찬본이 전한다. 헌종 대의 증보판은 숙종 대에 편찬된 원본 1권과 헌종 대에 증보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4권을 하나로 하는 5 책 한 질과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4권은 그대로 하되 숙종대의 원본을 도성지 1권으로 대체하여 5 책을 한 질로 하는 2가지 종류로 편찬되었다.

헌종 대 증보판은 각 궁궐별로 전각의 위치와 그곳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 문화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순종 대 편찬본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시작한 공사가 끝난 뒤 편찬한 것으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만을 대상으로 해 각 궁의 전각 및 모든 건물의 칸수와 척량, 구조형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잡상 雜像

 

잡상이란 기와지붕 위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올린 작은 장식 기와이다. 궁궐의 재앙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주로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과 토신들을 형상화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액운을 막아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경회루 연못 출토 청동용 靑銅龍

조선朝鮮, 1865년

 

경회루慶會樓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국의 사신이 방문했을 때 연회를 열기 위해 사용하던 장소이다.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의하면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주역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고 한다.

1997년 11월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중 경회루 북쪽 하향정 앞 연못 바닥에서 청동용이 발견되었다.

 

 

세자와 세자빈의 공간, 동궁

 

동궁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궁궐 내 동쪽에 별도로 위치한다. 동궁은 단순한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세자가 제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왕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 교육을 받던 세자시강원[춘방], 서연 장소, 경호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 [계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동궁은 세자가 책봉되어 즉위할 때까지만 사용하던 공간으로 세자가 책봉되지 않은 경우에는 왕의 정치공간인 편전으로 사용되는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장조 왕세자 책봉 옥인과 죽책

조선朝鮮 1736년(영조 12)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영조가 사도세자(장조)를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옥인과 죽책이다. 장조는 생후 백일 만에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의 저승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책봉식은 두 살이 되던 해에 거행되었다.

 

 

서시춘방관 현판 書示春坊官懸板

조선朝鮮, 1747년(영조 23)

 

영조가 세자시강원[춘방]의 관원들에게 전하기 위해 쓴 시를 새긴 현판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왕세자를 바르게 보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야간순찰

조선朝鮮

 

조선시대 궁궐 및 도성의 야간순찰을 책임지는 순장이 지니고 있던 표신이다. 이 순장패의 한 면에는 '순패巡牌'가 다른 면에는 '신信'자가 양각되었다.

 

 

 

시와 학문이 어우러진 공간, 후원

 

후원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인 동시에 왕이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며 신하들과 시를 나누어 지으며 문예활동을 펼친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왕은 농사를, 왕비는 양잠을 실행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창덕궁은 주요 전각 뒤쪽 깊숙이 자연 그대로의 언덕과 수림樹林에 연못과 정자 등이 잘 어우러지도록 조성한 아름다운 후원이 펼쳐져 있다. 후원 전각에 남아있는 현판과 주련에는 뜻깊은 건물 명칭이나 시구가 적혀 있어 당대 왕실의 여가문화와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칠언시 <증점曾點>을 새긴 현판

조선朝鮮

 

창덕궁 후원 청의정淸漪亭에 걸었던 현판이다. 송나라 학자 주희가 지은 칠언시 <증점>을 쓴 선조의 어필을 옮겨 새겼다.

 

春服初成麗景遲 봄옷이 처음 이루어지고 고운 해는 더디 가니

步隨流水玩晴漪 흐르는 냇물 따라 거닐며 맑은 물결 구경하네

 

 

조선왕실의 복식

 

왕실의 복식은 의례복과 일상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의례 시 착용하는 복식은 유교의 예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 등 의례의 격식에 맞는 복식을 갖추었다. 의례복 안에 받쳐 입는 속옷이나 일상복은 이전부터 계승되어 온 전통복식으로 일반 사대부 양반의 차림새와 같았다.

 

 

영친왕 곤룡포 英親王袞龍袍

대한제국大韓帝國, 20세기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년)의 곤룡포를 복제한 것이다. 곤룡포는 왕과 황태자가 집무할 때 입었던 평상복으로 가슴과 등, 양 어깨에 오조룡보五爪龍補를 달았다.

 

 

 

영친왕비 당의와 남색스란치마 英親王妃唐衣·藍色膝欄裳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조선시대 여성들이 예복으로 착용하였던 당의와 남색 스란치마이다. 당의는 궁중에서 왕실 여성의 소례복으로서 크고 작은 예식과 명절, 사시사철 문안례으로써 복식으로 착용했다. 왕비나 빈의 당의에는 꽃무늬와 박쥐무늬, 수壽·복福 등의 글자를 민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금직이나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스란치마는 왕실 여성이 예복 차림을 할 때 하의로 갖추어 입는 치마이다. 스란은 각종 무늬를 금직 또는 금박으로 장식한 단으로, 스란을 한 단 더한 것은 스란치마, 두 단 더한 것은 대란치마라고 한다. 스란치마 안에는 무지기치마와 대슘치마 등의 속치마를 착용하여 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려 입었다. 전시품은 영친왕비英親王妃(1901∼1989년)가 착용하였던 당의와 스란치마의 복제품이다.

 

 

영친왕비 적의 英親王妃翟衣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적의는 조선시대 여성 최고 신분의 복식으로 조선말까지 왕비와 왕세자비의 궁중 대례복으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붉은색 비단으로 지었으나 1897년(광무 원년)에 왕과 왕비가 각각 황제와 황후로 승격되면서 짙은 청색으로 바뀌었다.

영친왕비가 입었던 이 적의는 친애親愛와 해로偕老를 상징하는 꿩과 오얏꽃 무늬로 천을 직조해 장식했다. 앞뒤에는 금실로 수놓은 용무늬 보를 덧붙였다.

안에는 중단을 입었으며, 청말淸襪이라는 청색 버선을 신었다. 적의 위에는 무릎을 가리기 위해 앞에 늘어뜨리는 폐슬, 뒤에 달아 늘어뜨리는 후수, 허리에 매는 대대와 옥대를 착용하고 좌우에는 옥을 엮어 만든 패옥을 늘어뜨렸다. 또한 어깨에 걸어 내리는 장식품인 하피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예복을 갖춰 입었을 때는 옥으로 만든 규를 양손으로 잡았다.

 

 

왕실 법랑기 王室珐琅器

 

 

백옥봉황꽂이 白玉立鳳簪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진주비녀 (위), 용머리장식비녀 (아래)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백옥나비떨비녀 泥絲裝玉蝶板子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니사봉황 앞꽂이 泥絲鳳凰앞꽂이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조선시대 여성들의 화장 문화

 

왕실 여성들에게는 화장도구들을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매달 지급했다. 비누를 만들기 위한 팥[소두] 비누인 분강갱미가 진상되었고, 영양 공급을 위한 꿀[황밀]이 올려졌다.

머리에 바르는 참기름인 진유 중궁전, 빈궁 등 왕실 여성에 매달 진상되었다. 절일에는 각각 머리와 관계된 장신구와 빗을 올렸는데 대전과 각 전, 궁 등 종 4품 이상의 내명부 여성에게는 빗을 넣어 두는 화소첩도 올렸다.

 

원수무늬 두루주머니 (왼쪽)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붉은 비단 중앙에 금실로 목숨 수자를 수놓고 주변으로 금실과 은실을 사용하여 불로초, 박쥐, 석류, 대나무, 난초, 전보 등을 수놓은 둥근 모양의 주머니이다.

 

귀주머니 (가운데)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영친왕비親王紀(1901~1989년)의 귀주머니로 양쪽 귀가 각이 진 형태이다. 장수와 복·안녕을 바라는 글자와 함께 불로초 · 파도 · 봉황 등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모란불수무늬 향주머니 (오른쪽)

20세기 초, 국가민속문화재

 

주머니 한쪽은 붉은색, 다른 한쪽은 황색 비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로, 금실과 은실을 사용하여 모란과 불수감 등을 수놓았다. 남색 끈목에는 연한 자색 구슬을 연결했다. 주머니 안에는 고급 향이 담겨 있었으며, 영친왕의 것으로 추정된다.

 

 

노리개

 

노리개는 치마허리나 저고리 고름에 차는 장신구이다.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던 장신구로 신분과 지위에 따라 사용하던 재료가 달랐다. 궁중에서는 계절에 따라 노리개의 종류를 달리했는데, 봄·여름·가을에는 구슬과 옥 노리개를 차고 겨울에는 마노와 향노리개를 찼다.

 

영친왕비 대삼작노리개 (왼쪽)

1922년경, 국가민속문화재, 복제

 

산호, 쌍나비, 불수를 주제로 해서 만든 노리개 세 개를 하나로 꿰어 옷 위에 착용하는 노리개이다. 가장 크고 화려한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에서 대례복에 착용했다.

 

서각향낭 노리개 (가운데)

조선, 국가민속문화재

 

다복多福 · 다수多壽 · 다남多男 등을 상징하는 여덟 가지 상서로운 문양(팔보문八寶文) 중 하나인 무소뿔을 두 개 포개어 놓은 모양의 노리개이다.

 

 

연화향낭 노리개 (오른쪽)

조선, 국가민속문화재

 

연꽃과 나비로 장식한 향주머니를 달아 만든 노리개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살면서도 항상 깨끗하게 자라 청결과 고귀함을 상징하며, 나비는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궁궐 침전 내부공간

 

조선시대 궁궐의 왕과 왕비의 침전은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배치되고, 그 주변으로는 퇴가 둘러싸고 있다. 내부의 방들은 장지문으로 연결해 공간의 면적과 형태를 가변적으로 사용했다.

 

이 방 창문을 열면 바깥 풍경이 한 장의 근사한 사진처럼 보인다계절이 가는 걸 지켜볼 수 있다.

 

 

수라상 水剌床(御膳)

 

조선시대 왕의 밥상인 수라상은 각 지방에서 올라온 좋은 재료를 사용해 최고의 맛과 모양을 낸 음식들로 차려졌다. 수라상 상차림은 밥과 탕을 포함한 기본 음식과 12가지 반찬으로 구성된 12첩 반상으로 이루어졌다. 12첩 반상은 왕실만을 위한 것으로 일반 반가에서는 차릴 수 없었다.

 

왕의 수라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상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왕의 앞에 놓이는 대형의 둥근 밥상[대원반大圓盤]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검사하는 기미상궁氣味尙宮 앞에 놓이는 소형의 둥근 밥상[소원반小圓盤]이며, 나머지 하나는 왕의 식사를 시중드는 수라상궁水剌尙宮 앞에 놓이는 네모난 책상반冊床盤이다.

 

 

기미상궁은 황송하게도 임금님과 같은 음식을 먼저 먹는 영광을 차지하지만 독이 들었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독을 넣을 결심을 하면 기미상궁의 소원반에 놓지 않고 수라상에 살짝 넣었을 테니 죽을 일도 없다. 은수저는 독성에 약해 독이 묻은 음식들 잡으면 금방 변색된다. 다만, 계란국이나 계란찜에는 독이 없어도 변색된다. 왕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독살한 임금이나 황제도 많다.

 

 

궁중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그릇

 

왕실에서는 일상생활에서나 잔치, 제사 등의 행사에 다양한 재질로 만든 고급 식기를 사용했다. 도자는 왕실의 검소한 기풍에 따라 일찍부터 선호되었으며 15세기 후반부터는 경기도 광주 지역에 관영 도자기 제작서인 사옹원 분원을 설치해 잔치용 예기, 제기, 생활 용기를 제작했다. 그릇 표면에 코발트 계열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려 구워낸 청화백자는 궁중 도화서 소속의 화원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은제 그릇은 왕실 가족의 주발이나 술잔 등 식사 용도로 쓰이기도 했으나, 계속된 금과 은의 절용 정책으로 인하여 주로 행사용으로 제작되었다. 광물을 원료로 해서 만든 유리질의 유약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한 법랑 그릇들은 청나라로부터 들여와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백자청화 수복무늬 사발 白磁靑畫壽福文鉢 (아래 가운데 그릇)

조선朝鮮, 19세기

 

뚜껑과 몸체에 청화로 '수壽'자와 '복福'자를 써서 장식한 사발이다. 전서체 한자를 그대로 문양으로 사용한 것으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백자청화 용무늬 병 白磁靑畫雲龍文瓶 (아래 오른쪽 그릇)

조선, 19세기 후반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을 그린 병이다. 굽바닥에 청화로 '운현雲峴'이라고 쓰여 있어 운현궁에서 사용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실 분청사기 王室粉青瓷器

 

 

국립고궁박물관의 많은 작품 중에서 1부를 끝낸다.

조선시대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나누어 전시한다.

중요성이나 적합성에 따라 나누어지거나 설명이 보완되었을 것이다.

이번 포스팅을 작성하며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던 궁궐의 한 단면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후편이 궁금하면...

 

조선왕조의 유물을 전시한 국립고궁박물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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