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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천안독립기념관 마지막 편

by 즐풍 2024. 1. 5.

 

 

 

2023. 11. 21. 화요일 오전에 탐방

 

 

한 달 보름을 지나 이제야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마무리한다.

드디어 2023년도의 밀린 포스팅을 끝내는 셈이다.

그렇다고 아주 끝난 건 아니다.

늘 해 오던 대로 '반기별 산행과 여행의 진수'까지 마쳐야 끝난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포스팅은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든다.

카메라를 찍을 때 화면에 표시된 수직·수평계로 수평을 맞춘다고 하지만 결과물은 다르다.

수평은 포토스케이프로 잡을 수 있지만 앞뒤로 밀고 당기는 기능은 아이패드로 잡아야 한다.

이런 건 바닥에 눕힌 책 같은 걸 일으켜 세울 때 요긴하다.

 

(내용은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나라 되찾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후 우리 민족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다양한 이념과 방략으로 투쟁했다. 그중의 하나가 일제를 상대로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은 세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서북간도 등 만주지역을 근거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의 활동, 개인 또는 단체를 이루어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주요 인물을 처단한 의열투쟁,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활동이 그것이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북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고 항일무장 투쟁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기반을 토대로 양성된 수많은 독립군들은 국내진공 유격전을 펼쳤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의열사들은 뜻이 맞는 동지들과 힘을 합하거나 개인적인 의지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파괴하거나 상하이의 훙커우공원에서 일제의 수뇌부를 처단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항전에 뛰어들어 광복을 맞은 그날까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수행한 독립전쟁은 조국 광복의 근본바탕이었다.

 

 

 

독립군기지 개척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운동가들은 중국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지역 등으로 이주해 독립군기지를 개척했다. 서간도의 유하 · 통화현 등과 북간도의 용정촌 및 연길현 국자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이 대표적인 초기 독립군기지였다.

민족운동가들은 이들 지역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자치기관을 세우고 민족학교와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간도에서는 1911년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부민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신흥무관학교 및 백서농장을 설립해 독립군요원을 육성했다. 북간도에서는 1910년대 초, 간민회라는 자치기관을 조직해 한인사회를 관할하며 동림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북만주 독립군기지에서는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들을 배출했다. 연해주에서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유인석 · 이범윤 등이 13도의군을 창설해 무장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1903년 하와이이민 이후 형성된 미주한인사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단체로 활동했고, 1914년에는 박용만 주도로 대조선국민군단이 조직되어 많은 독립군을 배출했다.

 

 

 

간도의 한인 이주지역

 

한인의 서북간도 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증가하던 서북간도의 한인은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급증했다.

이들 이주한인은 척박한 만주벌판에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고, 독립군기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모았다. 이들이 형성한 한인사회는 일제하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물줄기이자 조국광복의 원동력이었다.

 

대한 독립군을 섬멸하려 이동하는 일본군

 

 

독립전쟁 선포

 

1919년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조국광복에 대한 의지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서북간도 및 연해주의 민족운동가들은 항일독립투쟁의 전개를 위하여 무장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일제를 향해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독립군의 무장활동은 독립군단의 근거지가 있는 만주나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으나 국내진입 유격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2, 3명 또는 많게는 10명 이상으로 편성된 유격대는 압록강 ·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침략자들을 처단했다. 유격전의 주요 무대는 함경도 및 평안도 지역이었으나 특수임무를 띠고 서울 및 그 이남지역까지 진입한 경우도 있었다.

 

우수한 무기를 갖춘 일본군

 

 

봉오봉전투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6월 4일 약 3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유격대는 종성種城 북방의 강양동으로 진입해 일제의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만주로 귀대했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2개 중대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했으나 독립군들은 이들 일본군 병력을 또다시 만주의 삼둔자에서 대파했다.

일본군은 다시 약 250명의 병력으로 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해 왔다. 일본군의 추격을 사전에 알게 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군 등은 서로 연합해 전투를 벌일 준비를 갖추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지형의 골짜기였다. 이곳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독립군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총공격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봉오동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여 명이었고,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 2명뿐이었다.

 

이에 비해 변변한 장비가 없는 독립군

 

 

청산리대첩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 봉오동전투 등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일제는 서북간도의 독립군 활동을 저지하지 않고서는 한국을 완전하게 지배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이 지역에 대규모의 일본군을 침입시켜 독립군을 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0월 초 일제는 중국마적을 매수해 북간도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토록 했다.

일제는 중국인들에 의해 일본영사관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일본군을 중국영토인 서북간도로 침입시키고자 함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켜 이곳의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런 일제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일본군이 독립군기지에 도착하기 전에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산리대첩은 이동 중이던 여러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이 청산리계곡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이 공격해 와 일어났다. 10월 21일부터 약 10여 일 동안 청산리계곡 일대의 백운평 완루구 · 어랑촌 · 천수평 · 맹개골 등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전투가 전개되었다.

김좌진 · 홍범도 · 지청천 안무 · 이범석 등 뛰어난 독립군 지휘관들의 작전아래 독립군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청산리대첩 결과,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이며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다. 독립군 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00여 명뿐이었다.

 

 

 

독립군단의 편성과 활동

 

3·1 운동으로 민족의 독립의지를 확인한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축적된 역량을 결집해 독립군단을 편성했다. 서간도지역에서는 1919년 4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박장호 · 전덕원 · 조맹선 등이 이 지역의 의병들을 모집해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이희삼 · 이동백 등은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을, 김승만 · 안병찬 등은 안동과 관전현을 기반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했다. 1919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서간도지역 군정인 서로군정서가 탄생했다. 이밖에도 태극단 · 광복단 · 대진단 ·  흥업단 · 백산무사단 등의 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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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지역에서도 서간도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독립군단들이 편성되었다. 북간도 왕청현에서는 1940년 12월 서일 ·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가 탄생했다. 북로군정서는 서로군정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정부로 결성된 독립군단이었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홍범도는 연길현 명월구에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1920년에는 북간도 한인사회를 총괄해 이끌던 대한국민회가 산하에 대한국민회군을 조직했다. 결성 초부터 활발한 국내진입 전을 전개한 최진동이 이끈 대한군무도독부는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이외에도 대한의군부 · 훈춘한민회 · 대한신민단 · 의민단 등의 독립군단이 결성되어 항일무장활동을 이끌어 갔다.

 

 

독립군단 주요 인물

 

상단 왼쪽부터 안무, 최해, 지청천, 이회영, 양기하 

가운데 줄 서일, 전덕원, 김좌진, 김동상, 이상룡

마지막 줄 홍범도, 오동진, 신팔균, 이범석, 편강렬

 

 

독립군 복장, 무기 및 장비

 

독립군이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전쟁 초기 독립군들이 사용한 무기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해주에 주둔하던 체코군에게 구입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철수하던 체코군은 여비 마련을 위해 무기를 판매했고, 이를 독립군들이 한인동포들로부터 모금한 군자금으로 구입했다. 독립군의 군복 등은 한인사회 동포들이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

 

겨울에 방수도 안 되는 발싸개를 신고 이동하는 보잘것없는 신발 보조제품

 

 

억울하게 죽어간 간도의 한인들

 

서북간도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한인대학살은 지극히 잔인하였다. 1920년 10월 말 장암동 獐巖洞에서는 마을주민 전체를 교회건물 앞마당에 모아 놓고 그중 한인 남성 33명을 교회건물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모두 죽였다. 살아남은 아낙네들은 숯덩이로 변한 시체를 찾아 장사 지냈다. 하지만 5일 후 일본군들은 마을에 다시 나타나 무덤을 파 시체를 한 곳에 모으게 한 후 석유를 뿌려 뼈만 남을 때까지 완전히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들의 잔 인한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삶기도 했다. 일본군은 서북간도에서 인간이하의 한인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자유시참변

 

청산리대첩 후 독립군들은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하며 1921년 초 이만에 도착했다. 이만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일부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북만주로 돌아왔다. 반면 홍범도 · 지청천 · 안무 ·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들은 그 해 3월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들은 자유시의 독립군단인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세력다툼의 와중에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측은 독립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무장해제를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지역 독립군이 가담한 대한 의용군과 고려혁명군 간에 대충돌이 일어났다. 이 '자유시참변'으로 수백 명의 독립군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420여 명의 독립군들이 러시아군에 붙잡혀 수감되거나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독립군들은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에 일제는 중국 측의 힘을 빌어 만주의 독립군 및 배일한인들을 탄압하고자 1925년 6월 11일 중국과 '미츠야협정矢協定’을 체결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宮松와 봉천전성奉天省 경무국장 우진 사이에 체결된 이 협정은 중국이 반일감정을 표출하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일제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협정체결 후 수많은 독립군과 만주 거주 한인들이 중국 군경에 살해되거나 붙잡히고, 추방당했다.

 

 

1930 년 대 독 립 군단 활동

 

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 결과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체로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탄생되었다. 남만주의 대표단체로 성립한 국민부는 이당치국을 목표로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소속 무장단체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했다. 북만주의 혁신의회 또한 같은 목표를 내세워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소속 무장단체인 한국독립군을 편성했다.

한편 1930년대 중반에는 만주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계열의 항일유격대들이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의해 항일민족통일전선 성격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했다. 이 중 남만주와 북간도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 1월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되었고 그 산하에 한인유격대를 편성해 국내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의열투쟁

 

'의열투쟁'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의거로써 일제 침략자를 응징하거나 목숨을 끊는 순절로써 독립의지를 보여준 독립운동의 한 형태이다. '의사(義士)'란 성패와 관계없이 목숨을 내걸고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람을 말하고, '열사(烈士)'란 강력한 항의의 뜻으로 자결 및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칭한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의열투쟁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타격을 입혔고, 전 세계를 향해 우리 민족의 강력한 독립 의지를 알리며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영남지방을 무대로 한 의열단의거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는 부산경찰서 서장실을 방문해 그 앞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로 경찰서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에 사망했고, 의사는 붙잡혀 옥중에서 2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20년 12월 27일에는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에 2개의 폭탄을 투척했다. 경찰서장의 훈시 중에 터진 이 폭탄은 성능이 좋지 못해 큰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일경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의거 후 붙잡힌 의사는 사형되어 순국했다.

의열단 부단장인 이종암의사는 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 고인덕 · 배중세 · 한봉인 등과 경북지역을 무대로 군자금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의사들의 활동은 경북 경찰부에 포착되어 전원 붙잡히게 되었다. 고인덕의사는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고, 이종암의사는 폐결핵으로 가출옥했으나 곧 순국했다.

 

 

대한국인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의사는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의병부대를 이끌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2월에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다짐했다. 의거 후 곧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법정에서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알렸으며, 옥중에서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진정한 세계 평화를 모색한 그의 사상을 담았다.

 

단지(斷指)한 안중근

 

 

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1920년대 가장 활발한 의열투쟁을 전개한 단체였다. 단장은 김원봉이었으며, 강세우 · 곽재기 · 권준 · 김상윤 · 배중세 · 서상락 · 신철휴 · 윤세주 · 이성우 · 이종암 · 한봉근 · 한봉인 등이 창립단원이었다.

의열단은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 원흉 응징 등을 활동 목표로 설정하였고, 구축왜노 · 광복조국 · 타파계급 · 평균지권을 주요 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 등을 처단대상으로 정하고, 조선총독부 ·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정하였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는 중추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들을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의열단 단원들은 이 활동 목표달성을 위해 국내와 일본 등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거를 일으켰다.

 

 

의열단의 폭탄반입의거

 

의열단은 일제의 침략기관 및 수뇌들을 파괴하고 처단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다. 곽재기와 이성우의사는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권총· 탄환을 구입, 국내로 반입해 밀양, 창원의 동지들 집에 숨겨 놓았다. 십수 차례에 걸쳐 침략자들을 응징할 대량의 무기였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의사들은 붙잡히고 무기는 압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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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에는 김시현 · 유석현 · 남영득의사 등이 다량의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다. 의사들은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옥의 협조를 받아 이 의거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반입 후 황옥의 배신으로 의사들은 붙잡히고 무기는 압수되었다.

 

 

서울을 무대로 한 의열단의거

 

일제의 침략기관이 가장 많은 서울은 의열단의 주요 의거 대상지였다.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는 한국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거 후 의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2년 3월 다시 상하이의 황포탄에서 동지 오성윤과 함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하는 의거를 벌였다. 하지만 의사들은 다나카를 처단하지 못하고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3년 1월 12일에는 김상옥의사가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종로경찰서는 크게 폭파되었고, 의사는 추격하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발 남은 탄알로 자결, 순국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온 나석주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의사가 던진 폭탄은 안타깝게 모두 불발되었고, 의사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 순국했다.

 

 

 

의열투쟁 단체들의 활동

 

조국의 국권이 상실된 직후 의열사들은 의열단체를 조직해 투쟁했다. 국내에서는 1915년 대구에서 대한광복회가, 광복직전인 1945년 5월에는 서울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이 조직되었다.

국외에서는 1918년 만주의 선양에서 27 결사대, 연해주 수청에서 철혈광복단, 1926년 중국 상하이에서 병인의용대, 1927년 중국 산시성에서 공명단 등이 조직되었다. 또 서간도 유하현에 본부를 둔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은 구월산대를 관전현에 근거지를 가진 광복군총영은 결사단 및 암살단과 같은 특파대를 의열단체로 조직해 국내에 파견했다.

대한광복회는 침략자 일제에 아부해 권력과 재산을 불린 친일파들을 처단했고, 27 결사대는 조국을 팔아먹은 을사5적과 정미적을 처단하는 것이 활동의 주목표였다. 만주에서 파견된 구월산대와 결사단 및 암살단은 일정한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그 일대의 친일파 및 일제의 수괴를 처단하거나 평안남도 도청, 경찰서, 선천군청 등을 폭파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또 철혈광복단과 공명단은 독립군 무기자금과 비행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군자금 모금 의거를 일으켰다. 병인의용대는 상하이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했고, 대한애국청년당은 1945년 7월 서울 한복판의 부민관을 폭파했다. 이 같은 의거에는 많은 여성 의열사들도 가담해 활동했다.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상하이 上海 홍커우虹口공원에서 거행한 일왕 생일 및 상하이사변 승전기념식장에서 일제의 침략 수뇌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한국광복군

 

1919년 4월 정부 수립 직후부터 산하에 국군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 후반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미주동포들의 성금으로 재정을 마련하고 중국 군관학교 출신 한국청년들과 만주독립군 출신들로 인적자원을 마련해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과 중국 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의 시안西安에 총사령부를 두고 충칭 · 라오허커우 老河口. 진화金華, 푸양 등에 지대를 설치하여 항일무장활동을 펼쳤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후 광복군은 미군 전략첩보국(OSS)과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인도 · 버마(현 미얀마) 등에 파견되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조국의 자주독립군으로 활동했다.

 

 

한국광복군 편제

 

창설 당시 한국광복군의 편제는 총사령부뿐이었다. 총사령부 내에는 총사령과 참모장을 중심으로 비서·참모·부관처 등 10개 처의 부서와 특무대 및 헌병대가 있었다. 총사령부는 성립직후 한인청년들에 대한 모집과 선전활동 등을 위해 시안으로 이동했고, 예하에 제1, 제2, 제3지대를 편성했다.

1941년 1월에는 독자적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편입시켜 4개 지대를 만들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개편되었다. 조선의 용대를 제1지대로, 기존의 1 · 2 · 5 지대를 합쳐 제2지대로 편성했고, 기존 3 지대 겸 징모 6분 처를 승격시켜 3 지대로 편성했다. 이외에도 한국광복군에는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와 일종의 보충대 성격의 토교대 등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중국 충칭의 자링빈관에서 거행되는 모습이다.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金九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 김학규 등을 위시하여 임시정부요인 및 광복군 사령부 간부 전원이 참석하였고, 내빈으로는 각 기관을 대표하는 인사들과 충칭에 있던 외교사절 및 신문사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尹奉吉 1908-1932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밝혔다. 김구는 윤봉길에게 일본군의 상하이 전투 승리와 일본 천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계획의 실행을 부탁하였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되고 있는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단상의 위에 있었던 일제의 군부와 정계요인 7명이 죽기나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은 1932년 12월 19일 일본의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운다."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안중근은 1907년 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 부대를 이끌었던 안중근은 1909년 뜻이 맞는 동지 12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기회를 기다렸다. 안중근은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그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권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조국을 향해 진군하라" 向祖國軍향조국진군 김좌진 金佐鎭

1889-1930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은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여 만주로 파견하였다. 당시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이었던 김좌진은 군대를 청산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청산리 부근에서 약 10여 차례 벌어진 전투는 독립군의 압도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김좌진은 독립군을 규합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중국 하이린의 정미소에서 한인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저격으로 순국하였다.

 

왼쪽부터 윤봉길, 안중근, 김좌진 장군 동상

 

 

새로운 나라

 

1919년 3월 1 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4월 11일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였고,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와 정부로 역할하면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발전시켰고 독립운동 최고 기관으로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재건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은 군주가 나라의 주인이었다. 1910년 8월 멸망한 대한제국도 군주의 나라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군주가 주인이었던 역사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역사로 바뀌었다. 1919년 4월 11일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민주공화제 정부인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3·1 운동이 일어난 지 40여 일 만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 독립선언을 통해 독립국임을 천명하였고,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상하이는 지나支那(중국) 문화의 중심으로 볼 수 있다.

상하이는 지나와 구주歐洲(유럽), 미국, 호주, 인도 등 모든 대륙, 모든 지방을 결부한 중심지로 교통기관은 다만 물질뿐만 아니라 지식, 감정, 사상 및 정치적 영향, 문화적 세력 등을 운반하는 중요처였다

                                                                               - 상해우객, 「상해의 해부」, 『개벽』(1920) -

 

본래 상하이는 세계인의 도시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여름날 저녁의 만국공원은 그야말로 공원 이름 그대로 만국인의 집합처가 된다.

천평 내외되는 상하이로서도 아주 좁은 이 만국공원 안에서 우리는 세계 각국 사람을 다 볼 수 있고

세계 각국 방언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제각기 제 나라 의복 혹은 제 나라식의 양복을 입고 가지각색의 방언을 주절거리면서 형형색색의

걸음걸이로 공원 안이 떠들썩해진다.

                                                       - 김성, 「상해의 여름」, 『개벽』(1923) -

 

 

 

군사활동과 의열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방략을 정하였다. 1919년 12월 국무회의에서 군대 편성과 병력 모집, 장교 양성을 위한 법규를 마련하고 육군무관학교와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운영하였다.

한편 의열투쟁을 위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한인 애국단은 일제 침략기관 및 침략자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며 임시 정부의 존재를 알렸다.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피치 가족

 

미국인 피치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모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아버지인 미국 장로교 선교사 조지 필드 피치 George Field Fitch는 상하이 인성학교의 설립을 돕고, 대한적십자사의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한인 구제를 위한 모금활동에 참여했던 아들 조지 애쉬모어 피치 George Ashmore Fitch는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과 함께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직후 김구의 피신을 도왔다. 1940년대에는 미국 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촉구를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추푸청 가족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에서 추푸청褚補成과 그의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 생활을 하였다. 자싱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등 요인들과 엄항섭, 김의한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김구는 추푸청의 수양아들인 천퉁성陣桐生의 집에 머물렀다.

일제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추푸청의 며느리 주자루이朱佳蕊의 친정인 하이옌海鹽 재청별장에서 잠시 지내기도 하였다.

 

 

상하이를 떠나 충칭까지 이동하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일본군 수뇌 처단의거 결행 후 일제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 들어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요인들은 급하게 몸을 피했고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갔다.

중국 동북 지역을 점령한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전쟁을 피해 또다시 중국 대륙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녀야만 하였다. 8년여 동안 이동하던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였다.

 

 

 

충칭을 떠날 때까지 네 번 옮겨 다녔으니 그 고해파란苦海波瀾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제4차 정청을 연화지에 70여 칸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였으니, 세금이 1년에 40만 원이나 되었다. 

장 주석이 특별히 보조해 주어 충칭 정부가 충칭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사용하였다.

                                                                                                                        - 김구, 『백범일지』 -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

 

 

 

 

 

 

일제의 패망과 광복

 

1945년 8월 10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통보하면서 일제의 패망소식이 알려졌다. 일왕은 8월 15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다. 9월 2일 연합국은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항복 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일제의 항복은 일제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이 함께 싸워 거둔 성과였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오랫동안 일제와 싸웠다. 광복은 독립운동을 통해 그리고 연합국과 함께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과도정권 수립 추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외에서 27년여 동안 유지해 왔던 정권을 국민들에게 봉환하고자 하였다. 방법은 국내의 각계 인사들과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이 주도하여 정식정권을 수립하면 수립된 정식정권에 임시정부를 인계한다는 것이었다.

1946년 2월 국내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이어 1947년 2월 비상국민회의 명칭을 국민의회로 바꾸어 정식 정부를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조소앙 3·1절 기념사(1946. 3. 1.)

 

얼마나 속을 태우며 원통한 세월을 참고 지내셨습니까. 위로할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결심하기는 나의 독립군을 앞세우고 보무당당하게 한성을 환국하여 일본 총독의 머리를 베어서 남산 위의 소나무에 걸고 300년 원수를 갚고 30여 년 동안의 분노를 풀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슴이 터집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산천초목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스코에서 상해에서 남경, 파리, 사천, 광동, 광서에서 삼일절을 맞을 때마다 결심하기를 명년에는 한성에서 이날을 맞이하자 하였소이다.

지금은 소원성취는 하였읍니다마는 내 흙을 밟고 서게 되었읍니다마는, 눈앞에 어린아이들을 보며 여러분과 함께 이날을 맞게 되었읍니다마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소이다. 여러분 삼천만 동포여 힘껏 띕시다. 마음대로 울읍시다. 힘을 다하여 축수합시다.

나 조소앙은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하오리다. 우리 동포로 하여금 자유민이 되게 하오리다.

불우한 한 동포는 여러분의 형제, 친구, 부형, 이들은 독립국과 자유민을 만들기 위하여 악독한 왜놈의 감옥에서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원혼과 충혼을 위하야 나는 여러분 선열의 아내와 어버이와 언니와 아우에게 위로하며 사죄합니다.

이렇게 환국할 줄을 몰랐소.

그러나 다시 우리 산천초목, 금수어절에까지 고하고 맹세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독립을 성공하리다. 아이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여 정치성 권리를 갖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우리 조국을 광복하오리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나의 몸을 불에 태워 죽여주시오.

대한독립 만세! 임시정부 만세!

 

 

 

 

 

전시를 열며

 

올해(2023년)는 한국과 영국이 수교를 맺은 지 1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계 문호 개방의 물결 속에 1883년 정식 교류를 시작한 한국과 영국은 서로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며 역사의 부침을 함께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망국의 위기에 놓이게 되자,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영국인들이 있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원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준 영국인들도 있었습니다.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침략전선을 확대한 후, 한국과 영국은 일제에 맞서 함께 싸웠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에 파견된 인면전구공작대는 주요 전투에서 성과를 올리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140여 년 전 낯선 동·서양의 국가로 만났던 한국과 영국의 관계는 공동의 적 일제에 맞선 항일투쟁의 역사를 거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지난 기간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 새겨진 영국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연합국과 함께하였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선, 영국과 만나다

 

19세기말 점차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 조선은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영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서울에는 영국공사관이 문을 열었고 그 주변으로는 영국 성공회 계열의 장림성당과 성베드로병원 등이 들어서서

민간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런던에는 대한제국공사관이 설치되어 외교 활동이 펼쳐졌다. 조선과 그 뒤를 이은 대한

제국은 영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치열한 국제 관계 속에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하였다.

 

 

조영수교

 

1883년 조선은 영국과 정식 조약을 맺었다. 이 시기 주변 강대국의 위협에 직면한 조선은 서구와의 관계를 통해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편 인도, 호주 등을 경영하며 제국을 확장해 나가던 영국은 조선과의 수교를 통해 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위협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국가 간 세력 싸움이 더욱 확대되어 가는 격동의 시기, 조선과 영국은 각자의 길을 구상하며 첫 만남을 시작하였다.

 

 

 

 

국제평화모색을 위한 국제회의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다

 

대한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등 세계 각국과 국교를 맺고 외교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둘러싼 일제의 침략은 거세졌고 결국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광무황제는 대한제국 특사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문제를 호소하고자 하였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를 파견하다

 

광무황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대한제국 특사로 임명하고 미국인 헐버트 Homer B. Hulbert에게 한국특사를 돕도록 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언론인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무효조약임을 알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의 꿈을 펼쳐 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타고 온 C-47 수송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은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C-47 미군 수송기 편으로 중국 상하이를 출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7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탑승한 제1진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엄항섭 선전부장 등 15명이었다.

그리고 제2진 19명은 1945년 12월 1일 환국하였다.

 

 

 

서두에 실수가 있었다.

12월 23일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조계사와 서울공예박물관을 다녀오며 사진을 저장했는데, 찾아도 안 보인다.

사진을 폴더에 저장하지 않고 카메라에서 바로 삭제했다고 자책한 후 엊그제 고궁박물관과 국립현대박물관을 다녀오며

공예박물관을 다시 들렸다.

지금 폴더를 확인하다 보니 이름을 잘못 지정해 1228을 1128로 한 달이나 앞에 저장하는 바람에 못 찾은 것이다.

또 한 번 기억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책한다.

이러다 현관의 비밀번호도 잊어버리고 고아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