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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근현대 작품이 전시된 서울공예박물관 1부

by 즐풍 2024. 1. 7.

2023_226 A

 

 

2023. 12. 23. 토요일 오후

 

 

입사동기 딸내미 결혼식을 끝내고 우정총국 박물관과 조계사에 이어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들어섰다.

길 하나 사이라 멀지 않지만 공예박물관에 들어설 때 이미 16:17분이라 마감시간인 17:00까지 빠듯하다.

볼 수 있는 데까지만 보기로 하지만 워낙 전시물이 많아 서두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다음에 다시 들릴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 국가와 국가,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질서로 작용하는 오례(五禮)를 법으로 정비하고, 그 실현을 위해 숙련된 장인들을 중앙과 지방 관부에 속하도록 해 외교, 군사, 왕실의례와 일상생활 등에서 요구되는 물품들을 제작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중앙 관부에 129개 분야, 총 2841명의 경공장이, 지방 관부에 27개 분야, 총 3,656명의 외공장이 속하도록 규정했다. 장인들은 전문성에 기반한 분업과 협업 체계를 형성하고, 국가가 정한 제작기준에 따라 물품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장제(工匠制)는 16~17세기 일본·중국과의 전쟁을 겪으며 느슨해졌고, 19세기말에 이르면 해체되기에 이른다. 자유롭게 물품을 제작, 판매하는 사장(私匠)이 늘어나고 지역 특성, 개인의 신분·재력·개성 등이 반영된 다양한 일상기물들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장인들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기술과 도구들을 개량하고, 새로운 양식과 문양, 유행을 만들었다. 조선의 국제관계와 사람들의 일상생활 기저에는 무수히 많은 장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활동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비·왕세자 왕세손 등을 책봉하거나 왕·왕비·세자·후궁 등에게 특별한 이름(존호나 시호)을 올릴 때 그 사실이 담긴 기록물, 즉 어책(御册)이 제작되었다. 왕·왕비의 경우는 옥(玉)으로 제작되어 옥책(玉册), 왕세자·후궁의 경우는 대나무로 만들어져 죽책(竹册)이라고 했다.

어책은 그 시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남녀 장인들 100명 이상이 최고의 재료를 국가로부터 제공받아 재료의 가공부터 마지막 기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제작하는 최고 수준의 왕실 공예품이기도 했다.

 

 

화각함 華角函

 

소뿔을 아주 얇게 저며 네모난 각지를 만들고, 그 뒷면에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나무로 만든 함 표면에 붙여 장식한 것이다. 화각 기법으로 제작된 목가구들은 소재 자체가 희귀하고 가공도 까다로워 주로 왕실이나 상류층이 사용했다.

이 화각함에는 기린, 학, 사슴, 거북, 소나무, 영지, 모란, 바위 등 불로장생과 부귀 등을 상징하는 각종 동식물과 자연물이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지와 각지 사이 이음새에는 가늘게 깎은 동물 뼈를 끼워 넣어 완성도를 높였다. 함 앞바탕의 장석 등에 조이질로 문양을 표현한 금속 장식기법은 왕실에서 제작된 작품들에서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백자

 

15세기 중반 조선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1460년대 후반 국영 자기 생산기지라고 할 수 있는 '분원(分院)’이 광주(廣州)에 처음 설립되었다. 분원은 1883년까지 400년 이상 유지되었다. 분원은 왕실 요리와 왕실용 자기의 제작을 담당하던 관청인 사옹원(司院)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지는, 조선만의 특징적인 백자와 청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왕실과 관부에 납품되었다.

조선은 자기 생산을 다른 어떤 분야보다 중요하게 여겨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사옹원에 속하는 사기장(沙器匠) 인원만 총 380명으로 규정하였다. 국가 의례와 왕실생활에 필요한 자기들을 생산했던 사기장들은 다른 국가사업에 동원되지 않았고, 제작 기술은 세습할 수 있었다.

 

 

유교가 일상을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정하고, 가구·도자기·복식 등 다양한 소재의 공예 장식에 대해 규제를 했으며, 사치를 경계하였다. 사대부들은 여러 제한 속에서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주 안에서 드러나지 않게 은근한 멋을 추구했다.

그들은 집과 방의 크기, 각자의 취향을 반영해 다양한 물품들을 주문 제작해 사용했다. 민간에서는 견양에 맞게 만든 고급 왕실 기물들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민간에서 따라한 궁중 양식을 '궁(宮樣)'이라고 한다.

조선 중 후기에 들어와 왕실 공예를 의식하면서도 그 정형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목가구, 문방사우 등을 통해 궁궐 밖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과 이를 반영해 제작한 조선 장인의 솜씨를 살펴볼 수 있다.

 

 

왕실에서 제작한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제작된 자기이다. 흙에 백토를 발라 문양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등장해 세종 연간(1418~1449년)에 절정을 이룬 후 15세기 후반부터 쇠퇴했다. 분청사기는 지방 관부가 전국에 산재한 자기소(磁器所)를 통해 제작해 왕실에 바쳤다.

분청사기들은 그 바닥면에 내섬시(內贍寺)·장흥고(長興庫) 등 공납받는 관청 이름과 제작된 지역 이름 등이 새겨졌는데, 그릇의 형태, 문양의 구도·종류·표현기법 등은 관청이나 제작된 지역에 관계없이 거의 동일했다. 이는 중앙에서 내려보낸 그림과 견본을 토대로 분청사기가 제작된 사실을 보여준다.

낱개의 도장으로 찍은 인화문이 그릇 전체를 채우는 기법이나, 직사각형 속에 여러 꽃이나 점을 새겨 이를 다시 한 단위씩 찍는 기법 등이 그 예이다.

 

 

분청사기상감용 무늬 매병 粉青沙器象嵌龍文梅瓶

H 28cm, W 4.9cm(지름), 조선 초기, 15세기

 

 

분청사기 음각 물고기 무늬 병 粉青沙器陰刻魚文瓶

H 31.7cm, W 6.6cm, 조선 전기, 15세기

 

 

기이한 것을 다투어 가지고 예쁜 것을 과시하는 자들은 꼭 '궁중 양식(宮樣)'이라고 합니다. (중략)

이리하여 아래로 고위관료, 선비, 서민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서로 모방해 극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만을 힘쓰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 법률로만 금지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중종실록(中宗實錄)』58권, 1527년(중종 22년) 2월 18일

 

사대부의 공간과 가구

 

조선시대에는 가구 하나를 제작함에 있어서도 소목장을 집으로 불러 가옥과 방의 규모, 재력, 용도, 주인의 취향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만들도록 하는 주문제작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풍조는 주로 사대부 집안에서 나타났다.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이문건(1494~1567년)이 지방 관청에 속해 기물을 제작하는 외공장(工匠)을 집으로 불러 가구, 생활용품, 기호품 등을 제작하게 하고 그 대가로 쌀이 나 장(醬)·소금·면포 등을 지급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각종 노리개와 패물함 등

 

 

 

 

백자청화철화 금강산 모양 연적 白磁青畫鐵畫金剛山形硯滴

백자에 청화와 철화로 금강산 문양을 장식

H 22.2cm, W 11.5cm,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다향실 편액이다.

김정희의 자는 원춘(元春)·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 · 예당(禮堂) · 시암(詩庵) · 과파(果坡) · 노과(老果) · 농장인(農丈人) · 보담재(寶覃齋) · 담연재(覃硏齋) ·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있다.

 

 

이런 장농은 1905년생인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게 있는데, 지금은 형님 댁에 있다.

 

 

왕실을 벗어난 나전칠기

 

나전칠기는 조선 전기까지 중앙 관청인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에 속한 극소수의 나전장(螺鈿匠)이 중국으로의 외교 선물이나 왕실에서 사용될 의례용 기물에 한해 제작하였다. 재료와 장인을 국가에서 관리했으므로 한양에서 제작되고, 지방이나 민간에서는 제작되기 어려웠다.

조선 전기까지는 용, 봉황, 모란, 연꽃 등의 문양을 주로 줄음질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나전칠기 제작 환경과 양식은 크게 변화한다. 왕실 차원에서 사치가 금기시되면서 나전장의 활동지는 통영이나 전주 등 지방으로 옮겨지고, 그 신분도 개인 제작자인 사장(私匠)으로 바뀐다. 문양도 민간에서 선호하던 십장생, 산수, 수복(壽福) 무늬 등이 새롭게 나타나고, 기법도 끊음질 사용이 두드러진다. 줄음질을 사용하더라도 모조법으로 문양의 세부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백자청화 모란무늬 합 白磁靑畵牧丹文飯盒

H 17.9cm, W 24.6cm, 조선,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시장으로 나간 도자기

 

조선 후기 여러 나라의 문물들이 흘러 들어오면서 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다양해졌다. 『하재일기』에 기록된 '계영배'와 같이 과학적 원리를 응용한 공예품도 만들어졌다. 반면 값싼 외국산 산업 도자기가 국내에 유통되면서 분원공소(分院貢所, 1883

~1896)의 도자기는 경쟁에서 밀리면서 경영난이 심화되었다. 이에 활로를 찾기 위해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분원번자회사(分院燔磁會社, 1897~1910), 분원자기주식회사(汾院磁器株式會社, 1910~1916) 체제로 바꾸고 판매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사기장들은 각지로 흩어져 향토색 강한 일상용기를 생산하였다.

 

 

백자청화 다채풍속무늬 접시  白磁青書多彩風俗文楪匙

박순, 청송가마

백자에 청화, 채색, H 5.5cm, W 20.5cm, 대한제국 1907~1910년

 

 

백자 해치모양 ‘계영배’ 받침  白磁獅蔘形戒盈杯臺

백자에 상형, 양각, H 6.9cm, W 13.5cm, 조선, 19세기말~20세기 초반

 

시험 삼아 계영배를 만들고 시를 지어 보았다

 

"세상 사람이 술을 탐하여 빈번히 실수를 범하니 마땅히 잔의 표면을 따라 채우고 비워짐이 보이게 만들었네

가득 차면 이내 비워질 것이니 잔의 중간을 넘어 바닥까지 탐하지 말게나"

『하재일기』 1904년 12월 10일

 

 

청자상감 국화무늬 대접 靑磁象嵌菊花文大楪

관립공업전습소, 청자상감

H5.5cm, W 21.5cm, 20세기 초반, 개인 소장,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의 공예

 

고종황제는 자주적인 강대국을 만들기 위해 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견학하게 하였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독립관을 설치하여 도자기 나전칠기·비금속공예품 등을 출품하였다. 특히 파리박람회는 산업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화를 촉진하는 수단으로써의 공예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 공예의 가치를 재인식함으로써 전통 공예를 부흥시키고 공예의 산업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근대적 교육기관과 미술공장을 설치하였다.

 

 

나전칠 달 매화 학무늬(배설) 사각반 錄語潭月梅捕文長城括盤

나무에 옷칠 후 나전, H1.8cm, W31cm, D 24.5cm, 1900년대 초

 

聲聞于天 裵說先生 叱存 梧村山人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는구나. 부족하지만 간직해 주십시오. 오촌산인"

배설(裵說)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의 조선 침약을 막고자 노력했던 영국인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 1872~1909)로, 이 사각반은 그가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1904년 이후에 오촌산인이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델은 옥고로 인한 병환으로 37세에 요절하였는데, 양기탁(1871~1938)에게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글이 각지에서 모여 『만사집(輓詞集)』이 엮어졌다.

이 책은 박은식(1859-1925)과 양기탁 등 독립운동에 힘썼던 각계의 인사 251명이 찬술 하여 우리나라 언론사, 독립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82호로 등록되었다. 베델은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검  

니켈에 음각, L76cm, 19세기말~20세기 초반

 

 

 

대한민국 황실의 상징이 된 오얏꽃 [李花文]

 

신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태조실록』 4권, 1393년(태조 2년) 9월 18일

 

경운궁의 신축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중앙의 국왕 처소에서 국왕을 알현했다. 이 처소(함녕전)는 조선 최고의 도목수가

지은 독채 건물로서, (중략) 그 끝은 왕실의 상징인 다섯 잎의 오얏꽃이 새겨 있었다.

                                             이사벨라 비숍, 1896년 서울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년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라 문양에서 취한 것이다.

                                                 「조서를 내려 각 훈장의 이름과 뜻을 밝히도록 하다」

                                                              『고종실록』 40권, 1900년(고종 37년) 4월 17일

 

 

은제 오얏꽃무늬 발 銀製李花文鉢 

한성미술품제작소, 은에 음각, 금도금, H 12.4cm, W 18.2cm, 1908-1913

 

국가등록문화재 제822호

한성미술품제작소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전통적인 요소에 근대적인 제작기술을 적용한 사례로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물은 금형( Press) 기법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각종 문양을 음각하여금으로 도금했다. 바닥에는 '漢城美術(한성미술)'이라고 새겨 제작처를 표시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용 기물들을 제작한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3년)의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가 들어간 접시

 

오얏나무 李의 오얏이 뭔지 궁금할 사람이 많겠다.

李氏조차 오얏이 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오얏나무라고 성씨를 말한다.

오얏나무는 자두나무를 말하는 데, 이젠 사어가 되어 뜻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기회에 알아두는 것도 좋다.

 

 

황실의 상징을 담은 공예품

 

 

고종황제 탄신 50주년 기념장 증서 (복제) 皇帝聖壽五十周年記念章證書 (複製)

종이에 필사, H 22.9, W 31.8cm, 1901년, (원본) 개인 소장

 

 

공예, 시대를 비추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전통 공예가 위축되고 산업 공예가 일상에 파고들었다. 공예품이 관광상품이나 기념품으로 주목받으면서 자본가들이 공예품 제작과 판매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생산된 공예품들은 백화점이나 공예 상점을 통해 유통되었다. 판매 경쟁이 심해지면서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한 광고가 시작되고 공예품의 상표나 고유 마크가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공예는 본격적인 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에서 공예는 미술의 한 분야로 편입되고, 선진 교육을 경험한 공예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배출되어 미술로서의 공예의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앞 시대와는 다른 근대적 요소가 담긴 공예품이 등장하였다.

20세기 전반의 공예품은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쇠퇴해 가는 전통 공예품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만들어졌다. 기계화에 의한 대량 생산과 규격화된 도안의 범람으로 진정한 창작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공예품은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와 전통을 계승한 솜씨로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며, 이 시기 장인들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전통 공예 기술을 현대로 전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미술품제작소의 변화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13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이름을 바꾸고, 제묵부(製墨部), 도자부 등을 신설하였다. 또한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을 상표로 만들어 미술품제작소 작품을 차별화하였다. 이후 재정 악화로 1922년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 1859~1930] 등에게 매각되어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 체제로 1936년까지 운영되었다. 이 시기 미술품제작소의 변화는 단순한 상호의 변경에서 그치지 않고 조직과 운영주체 등의 총체적인 성격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청자 세 발 향로  靑磁三足香爐

한양고려소, H 10.7cm W7.2cm, 1912-1924년

 

 

석제 거북이모양 붓 받침 石製龜形筆臺

20세기 초반, 예용해 컬렉션, 예종희 기탁 

 

 

동제 봉황무늬 화병  銅製鳳凰文花瓶

조선미술품제작소, H 34cm, W 15cm, 1922~1936년

 

봉황무늬 확대

 

 

서울공예박물관은 대한제국 무렵부터 광복이 되기 전까지 근현대시기의 궁중 유물이 대부분이다.

예전의 투박했던 문양을 일본 등에서 배워 온 기술로 한층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변모했다.

궁중에서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왕조만이 갖는 문양으로 조선을 상징하는 오얏꽃이 들던 시기다.

오얏꽃은 간결한 무늬가 돋보이고, 봉황은 보다 더 세련된 조각이 화려하다.

 

 

서울공예박물관 2부가 궁금하면... 

 

근현대 작품이 전시된 서울공예박물관 2부

2023_226 B 2023. 12. 23. 토요일 오후 전시된 유물의 양이 많아 두 파트로 나누어 올린다. 제목에 있듯이 일제강점기인 근현대 시기에 만든 도자기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전시되었다. 조선시대의 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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