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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유물을 전시한 국립고궁박물관 B

by 즐풍 2024. 1. 24.

2024_02

 

 

 

2024.1.2. 화요일 오전

 

 

박물관에 다니면 전시물과 함께 안내문을 읽게 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실과 유물을 나눈 셈이다.

중앙박물관이 유물에 집중한 편이라면 고궁박물관은 유물뿐 아니라 제도, 궁궐, 의례, 복제 등

궁중 생활에 관련된 전반적인 유물과 안내문이 많다.

그런 안내에서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왕의 덕목을 기르기 위해 왕가의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나 병자호란을 만난 인조는 공교롭게도 왕가의 수업을 받지 못했다.

선조는 왕의 직계자손이 없어 궁 밖에서 들어와 왕이 되었기 때문인지 임진왜란이 나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이 되었으나 훈구세력에 밀려 대신들의 의견을 쫓아가기에 급급했으니

막을 수 있던 병자호란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굴종을 당해야 했다.

두 군주가 왕실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았으면 전쟁이 닥쳤어도 국난을 해결하는 능력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해설은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순정효황후 어차 純貞孝皇后御車

1914년경, 등록문화재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년)가 탔던 어차로 영국의 다임러 Daimler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4기통 엔진,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경으로 추정된다. 순종황제 어차와 같이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마감했다.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동차로 순종황제 어차와 함께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황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1층 전시실을 둘러보고 지하 1층 로비로 내려오니 순종황제와 순종효황후의 차량이 각각 전시되어 있다.

먼저 본 게 순종효황후의 차량인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길래 영국차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일제 차량도 영국에서 기술을 배웠는지 오른쪽에 있지만, 당시 일제차를 탔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본 순종어차는 미국 GM에서 만든 차인데도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아니 미국차인데도 어떻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을까 궁금해 마침 근거리에 있던 여직원께 물어봤다.

영국에서 들여온 효황후 차량 운전석이 오른쪽이었기에 순종이 타고 다닐 차도 오른쪽에 운전석을 만들어 달라고

특별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오래된 차량은 아주 클래식하게 만든 차량으로 최근 생산되는 날렵한 스타일과 전혀 다르다.

마차를 타던 시기에서 자동차로 넘어온 초창기라 마차의 느낌도 그대로 남아 있다.

 

 

순종황제 어차 純宗皇帝御車

1918년경 등록문화재

 

순종황제純宗皇帝(재위 1907~1910년)가 탔던 어차로 미국의 지엠 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 31.25마력, 8 기통 엔진, 배기량 5,153cc로 연식은 1918년경으로 추정된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漆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20대만 남아 있다.

 

뒷좌석 유리창문 바로 밑에 들어간 황실문양인 오얏꽃 문양

 

 

고려의 나전칠기 螺鈿漆器

 

나전칠기는 자개로 무늬를 장식하고 옻칠을 한 공예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옻칠은 기원전 3세기경부터 사용되었으며, 이후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옻칠기법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고려 고유의 미감을 잘 담아낸 나전칠기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북사신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에서 고려 나전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기록을 통해 당시 고려 나전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대모(거북 등껍질)와 나전(전복, 소라껍데기)을 함께 사용하다가 점차 나전 위주로 제작되었다.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서 만든 자개 판을 작게 오려 붙여 꽃송이나 넝쿨 등을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최고의 장식 기법을 보여준다. 고려 나전칠기는 주로 불교경전을 보관하는 경험상자 그리고 원형 또는 화형 합 등으로 제작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0여 점만이 전하고 있다.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 螺鈿菊花唐草文箱子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는 전형적인 고려 나전칠기 제작기법인 목심저피법木心紵皮法으로 만들어졌다. 목심저피법은 나무판으로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베나 모시 등의 직물을 붙이고 작은 자개 조각과 금속선 등을 장식하는 기법이다. 뚜껑 윗면과 몸체 각 네 면에 자개와 금속선으로 반복되는 국화꽃과 넝쿨무늬를 빽빽하고 섬세하게 장식했다. 옻칠 솜씨 또한 빼어나 고려 나전공예 전성기 작품으로 부족함이 없다.

이 상자는 고려 나전경함류보다 전체적인 크기가 작고 뚜껑이 완전히 분리되는 구조이다. 기존에 알려진 고려 나전공예품과는 다른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사람들의 다양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는 문화재청의 면밀한 조사를 거쳐 2023년 환수되어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대한제국 大韓帝國

 

1897년 조선 제26대 왕 고종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경운궁慶運宮(현덕수궁)을 제국의 궁궐로 삼고 황제국에 걸맞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과 정책을 추진하였다. 행정·군사·재정 등 각 분야의 국가운영체제를 개편하였고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기·전차·철도 등 서구 근대시설을 도입하고, 시민공원도 조성하는 등 근대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는 전통 건축과 함께 서양식 건물을 건립하고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황궁으로의 위엄을 더하면서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한제국은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그 역사가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국가이자 황제국이었다는 점에서 짧지만 큰 발자취를 남겼다.

 

 

 

자주 외교의 상징,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조선은 1889년 주미공관을 시작으로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청 등 각국에 해외공관을 설치하여 자주독립국가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의 외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미국 워싱턴에 있었던 최초의 해외 공사관으로, 현존하는 대한제국 외교공관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한 건물이다. 주미공사관은 처음에는 셋집에서 업무를 시작하였으나 1891년 11월에 워싱턴의 건물을 구입하여 14년간 사용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폐쇄되었고, 한일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 일본에게 5달러에 강탈된 뒤 미국인에게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이후 공사관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의 휴양시설과 개인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신탁을 통해 2012년 10월 공사관 건물을 매입하여 보수·복원공사를 마친 후 2018년 5월, 113년 만에 전시관으로 공개하였다.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19세기 세계는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격변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국외 사절단을 파견하고, 박람회를 통해 서양에 조선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더불어 외국 선진제도와 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여 교통, 통신,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서구 근대 문물의 도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대한제국은 점점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개항 이전의 조선

 

1863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는 60여 년 간 지속된 세도정치가 야기한 부정부패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 상태였다. 게다가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이 가중되어 나라 안팎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한 흥선대원군은 강경한 쇄국정책을 취하여 어려운 시국을 이겨나가고자 하였으나 급변하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고종은 1873년 비로소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달리 개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단행했다. 고종의 친정 이래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새로운 조선의 모습은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종황제 어진 高宗皇帝御眞

대한제국大韓帝國, 20세기 초, 복제, 국립중앙박물관

 

고종황제의 초상화로,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 왕은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지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황제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곤룡포를 입었다. 화가 채용신龍臣(1850~1941년)이 그린 것으로 전한다.

 

 

고종과 순종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재위 1863~1907년)은 황실의 권위를 높여 황제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기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을사늑약 반대(1905년), 헤이그 특사 사건(1907년)* 등을 구실로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했다. 순종(재위 1907~1910년)은 일제의 간섭이 심해진 시기에 즉위하여 황제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할 수 없었다.

일제가 계획한 순종의 전국 순행은 거꾸로 백성들이 애국심을 표출하고 단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종과 순종의 죽음은 각기 3·1 운동 (1919년)과 6·10 만세운동(1926년)의 기폭제가 되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 :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 호소한 사건

 

 

고종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천지天地에 고제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원년으로 삼으며..…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대례의궤』 「조칙」 1897년 9월 18일​

 

순종

 

지난날의 병합 [한일병합늑약]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나는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이 조칙을 나라 안팎에 선포하여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병합인준과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융희황제[순종]의 유조遺詔,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

 

 

 

명성황후 책봉 시 올린 금보 明成皇后金寶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 보물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인면에는 '황후지보 皇后之寶'라고 새겼다. 이전에는 거북이 모양의 옥보였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의 형상을 한 금보로 제작하였다.

 

 

국가운영체제의 정비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위해 국가운영체제 정비에 힘썼다. 특히 왕실 사무기구인 궁내부를 국가개혁을 이끌어갈 핵심 조직으로 삼아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의 근대화를 꾀하고,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또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를 공포하고, 『형법대전』을 반포하여 근대적인 법체계를 수립하는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취해진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변화상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한 이후 고종은 각종 국가 의례와 상징물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정비하였다. 어보와 궁궐처럼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과 공간에는 거북이나 봉황대신 용 문양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의복과 의례용품으로는 황색이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 국기로 제정된 태극기를 각종 행사 때 황실의 상징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祭壇이다. 고종은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남별궁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천제를 지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여겨 세조 대 이후 중단되었던 환구제도 대한제국기에 다시 시행되었다. 이곳에서 황제는 동지冬至와 정월 첫 신일에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하늘 신[황천상제皇天上帝], 땅 신[황지기黃地祇], 그리고 왕조의 시조인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등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환구단 건설과 환구제의 시행은 독립된 황제국의 수립을 상징했다. 그러나 1913년 일본이 환구단 자리에 호텔을 지으면서, 현재는 신위를 보관하던 건물인 황궁우 등 일부 시설만 남아 있다.

 

 

신위를 모시는 용무늬 장식 의자 神位龍床

대한제국

 

환구단에서 제향을 지낼 때 신위를 모시는 데 사용한 의자이다. 각 모서리마다 도금한 용머리로 장식했으며, 의자의 등받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하여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냈다.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法宮이자 도시 근대화 사업의 중심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을 신축하였으며 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경운궁 선황제先皇帝가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이름도 고종의 궁호에 따라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근대기 황실 궁궐 내부 모습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하여 궁궐에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서양식 가구와 장식용품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구와 생활용품 대부분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전기 시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덕수궁, 창덕궁의 생활공간은 점차 서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

 

서양문물이 수용되면서 궁궐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서양식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하였다. 특히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은 궁궐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7년(고종 24) 경복궁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켜지며 전기시설이 궁궐에 도입되었으며, 침대와 의자가 배치되거나 샹들리에와 커튼 박스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궁궐에 근대 수도시설이 갖추어진 다음에는 서양식 요리를 만드는 서양식 주방에 수도를 연결하고,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하였다.

 

 

대리석 책상

 

상단을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으로, 손잡이가 있는 두 개의 서랍이 달려있다.

 

 

황실에서 사용한 여러 생활용품

 

개항과 함께 각종 서양 물품들이 대한제국에 소개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프랑스·영국·독일 등지에서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의 자기를 수입하여 화병이나 세면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또 서구식 식생활의 유입으로 서양식 식기류와 조리 용구를 이용하였다. 이들 생활용품의 대부분에는 이를 생산한 외국 회사 명칭이 찍혀있거나 오얏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미술품제작소

 

대한제국 황실은 사라져 가는 전통기술의 보존과 부흥, 그리고 민간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한성미술품제작소漢城美術品製作所(1908~1913년)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는 직조, 염색, 금·은·백·동 및 보석 세공, 목공, 자수 등을 취급하였고 점차 도기, 석공까지 다루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이후 운영주체의 변화에 따라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1913~1922년)로, 1922년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朝鮮美術品 製作所로 명칭이 바뀌어 1936년까지 운영되었다.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은 공예품에는 제작소와 재질을 알려주는 각인刻印이 있었다.

주로 사용된 각인으로는 미술품제작소를 의미하는 '미'와 재질을 뜻하는 '순은 純銀'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공예품임을 나타냈다.

 

 

 

 

 

 

 

근대식 연회와 황실 식기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서양의 외교관 등과 교류하기 위한 서양식 궁정연회가 도입되었다. 식탁과 의자 같은 서양식 가구들이 식당에 갖춰졌고 양식기洋式器가 유입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근대기 수입 도자기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자기 회사의 제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금색 오얏꽃 무늬로 장식한 것들이 많아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찬장에는 주로 서양식 요리가 준비되었고 조선음식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트뤼플 Truffle, 조선의 애저탕哀猪湯 요리가 나오는 등 동서양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성대한 만찬이었으며 전통술, 샴페인, 맥주 등의 주류와 담배 같은 기호식품도 마련되었다.

 

 

 

서양식 관복장 도입

 

대한제국 황실은 중요한 행사에 황제국 격식에 맞춘 전통 관복을 착용하여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서양식 복식을 도입하였다. 서양식 관복을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한 시기는 1895년 을미개혁 때였다. 우선 군의 근대화에 발맞춰 무관복부터 서양식이 도입되었고, 1900년 에는 문관복도 서양식을 채택하였다. 서양식 관복은 신분에 따라 문양의 종류와 개수에 차등을 두었다. 군복의 표장으로는 오얏꽃[이화]을 채택하였다. 문관 복장의 주문량으로는 무궁화[근화]를 택하였는데, 궁내부 관원의 경우는 오얏꽃을 주문량으로 활용하였다.

 

 

 

궁중서화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궁중회화가 국가 통치에 활용되었다. 궁중회화는 주로 국가의 예를 담당했던 예조의 감독에 따라 회화 전담부서였던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궁중회화는 특정한 쓰임새와 형식을 가졌으며, 창조적 예술성보다는 사실성 기록성·상징성·장식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은 유교 정치에 입각한 문화적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을 숭상하고 배움을 글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왕이나 종친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글짓기와 서예를 수련하였으며 서화의 제작과 감상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였다.

 

 

모란 그림 병풍 牡丹圖屏風

19~20세기 초

 

화려하고 탐스러운 모란으로 가득 찬 그림이다. 각 폭마다 도안화된 모란꽃과 줄기, 괴석의 모습이 반복되며 정형화된 구도를 보인다. 예부터 모란은 크고 화려한 모양으로 인해 부귀와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꽃 중의 왕花王'이라 일컬어졌다. 왕실에서는 모란을 주로 4폭·6폭·8폭의 병풍으로 제작하여 국가의례에 두루 활용하였는데, 가례嘉禮, 길례禮뿐 아니라 흉례 때에도 모란도 병풍을 설치해 왕실의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갈대와 기러기 그림병풍 蘆雁圖二幅屏

강필주 1917년

 

갈대와 기러기를 함께 그린 2폭 가리개이다. 두 화폭이 하나의 장면처럼 구성되어 갈대가 우거진 강변을 자유롭게 노니는 기러기들의 모습이 한층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곧게 뻗은 갈대와 머리 부분이 강조된 기러기의 묘사에서는 부드러운 수묵 표현이 강조되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장승업張承業(1843-1897)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대로 계승된 노안도의 특징이다.

 

 

새와 꽃 그림 병풍 花鳥圖二幅屏

양기훈 20세기 초

 

제1폭에는 갈대꽃이 있는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네 마리의 기러기를 그렸다. 갈대와 기러기를 뜻하는 '노안'은 한자의 음이 노후의 평안을 바라는 '노안老安'과 같아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많이 제작되었다. 제2폭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바위와 국화를 층층이 그려 익수 의미를 더하였다. 바위 위로 산초나무와 한 쌍의 새를 그렸는데 산초열매는 다산多産, 백두조白頭鳥 한 쌍은 부부의 백년해로를 상징한다.

 

 

궁궐의 장식그림

 

조선 왕실에서는 궁궐 공간의 성격에 맞는 그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그려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진전眞殿에 모셔 제향을 올렸다. 왕의 자리 뒤편이나 어진을 모시는 진전에 <일월오봉도>를 세웠고 국가에서 행하는 경사스러운 잔치에는 <모란도 병풍>이나 <십장생도〉를 설치하여 왕실의 위용과 번창을 드러냈다. 내전에는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화조도花鳥圖, 영모도翎毛圖, 문자도文字圖 등이 주로 장식되었다. 궁궐의 장식그림은 화려한 채색화 기법을 특징으로 하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림의 내용과 화풍이 크게 변하지 않고 전통성을 유지하였다.

 

 

수묵 난초 그림 병풍 墨蘭圖二幅屏

김응원, 19세기말~20세기 초

 

조선 후기 서화가 김응원(1855~1921)이 수묵으로 그린 난 그림이다. 화면의 한쪽 끝에 바위를 치우치도록 배치하고 그 위와 아래에 난 포기를 그려 두 폭이 마주 보는 구도를 이루었다. 길고 유연하게 뻗은 난잎과 꽃의 표현에서 김응원만의 기품 있는 난蘭 표현법을 확인할 수 있다.

 

제1폭                                                                                  제2폭

此是幽貞一種華 그윽하고 곧은 꽃                                      擷得孤芳到處栽 홀로 핀 난을 가져다가 도처에 심어

不求聞達只煙霞 알려지길 원하지 않고 산노을과 짝할 뿐  寫生還向筆端開 그림을 그리니 오히려 붓끝에서 피네

採樵或恐通來徑 나무꾼이 오는 길 알려질까 두려워          有聲詩句無聲畵 소리 있는 시구에 소리 없는 그림은

更寫高山幾片遮 높은 산을 그려 막아놓았네                      都是心花結撰來 모두 마음에서 그려낸 것이네

 

 

술을 경계하라는 당부를 담은 영조의 글 모음

조선朝鮮

 

1757년 영조(재위 1724~1776) 관료들에게 술을 "조심하라는 내용을 담아 만든 책이다. 앞부분에는 한문에 한글로 음과 토를 달았고, 뒷부분에는 앞 내용을 한글로 풀이하였다. 영조는 이 글에서 관료가 모범이 되도록 술을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다. 대신과 경재와 그 아래 백관들에게 깨우치는 윤음이다.

오호라, 나의 대신과 경제와 나의 모든 신료들은 모두 나의 깨우침을 들어라. 오호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궁중에서 머리장식이 유행하자, 사방에서 부녀자들의 머리장식 높이가 1척(약 30cm)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지난날 뭇 신하들이 술을 조심하지 않았던 것은 실로 나의 허물에서 나왔고, 지금 서민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음도 내가 성실치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하여 오르내리시는 선조의 영령을 저버리게 되었고, 아래로 조정의 성대한 은혜를 막아버리게 되었으니, 실로 나의 허물이고, 실로 나의 허물이로다 (하략)

 

 

심성 수양을 권하는 영조의 교훈모음 御製訓書

조선朝鮮

 

1756년 영조(재위 1724~1776)가 후대 사람들에게 심성을 수양하길 권장하며 간행한 책이다. 도입부 에는 성性, 도교 세 글자를 크게 썼고, 본문은 예산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조의 정치사상과 국정 운영 철학을 담고 있다.

性: 予之受天 내가 하늘에서 받은 것, 天之授予 하늘이 나에게 준 것

 

 

종사연 13, 해태모양 연적 14, 국화무늬 연적 1,5 산수무늬 연적 16

사자모양 연적 17, 태극무늬 연적 18, 물고기모양 연적 19 

 

 

주칠 경상 주칠 서안 등잔

 

 

'ㅁ'자 모양 벼루 1, 분홍 빛 벼루 2, 옥으로 만든 벼루 3, 수정으로 만든 벼루 4, 닭무늬장식 필통과 붓 5

매화무늬 필통 6, 납으로 만든 필통 7, 옥으로 만든 필통과 붓 8

 

 

 

왕실의례, 예치국가 조선

 

유학儒學을 통치철학으로 한 조선은 '예'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지키고 백성과 화합하고자 하였다. 국왕은 길례吉禮, 흉례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다섯 가지로 예제를 정비해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더불어 일생 동안 단계에 맞는 예를 행하고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 의례를 치를 때는 절차마다 연주되는 음악부터 기물, 음식, 복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식을 제도에 맞춰 행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왕의 삶과 함께한 의례

 

조선의 국왕은 일생에 걸쳐 관례冠禮, 입학례入學禮, 혼례婚禮 등 다양한 의례를 경험하고 주관하며 예를 몸소 익히고 실천하였다. 왕의 모든 생활은 예에 기반을 둔 절차와 의식을 따랐다. 또한 조회朝會, 대사례大射禮, 잔치[연향宴享] 등 국가 통치의 수단이기도 한 각종 의례를 통해 상하 간의 질서를 확립하고 신하, 백성들과 서로 소통하며 국가적 화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왕실의 잔치

 

조선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의 생일, 세자의 탄생이나 책봉 등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에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잔치는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한편 왕실 가족, 왕과 신하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잔치 뒤에는 전국의 노인이나 빈민들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거나 세금을 줄여주는 등 백성을 구휼하는 활동을 하였다. 노인들을 위해 양로연養老宴을 열어 귀천을 따지지 않고 효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잔치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왕과 백성이 서로 화합하고 함께 즐기기 위한 자리였다.

 

 

원행정리의궤도』에 수록된 <신풍루사미도>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신풍루 앞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죽을 끓여 먹이는 행사를 그린 그림 ​

 

 

국왕의 통과의례

 

왕위를 계승할 맏아들인 원자元子가 태어나면 의례에 맞게 탄생을 축하하고 땅의 기운이 가장 좋은 곳에 태胎를 봉안했다. 원자는 대체로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성균관 입학례入學, 성인식인 관례冠禮, 혼례婚禮 등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유교국가의 수장으로서 위치를 다졌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 거친 통과의례

 

탄생 1661년: 원자로 태어나다

"원자가 태어났다. 예조禮曹가 날짜를 택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고 진하陳賀하며 반사頒赦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간략하게 행하도록 명하였다.”        『현종실록』 권 4, 1661년(현종 2) 8월 15일

 

책 7세 1667년: 세자로 책봉되다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는데 의례대로 하였다. 세자의 나이 겨우 7세였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현종실록』 권 13, 1667년(현종 8) 1월 22일

 

입학례 9세 1669년: 성균관 유생이 되어 스승에게 예를 다하다.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 이하에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학하는 예가 있습니다."

                                                                                  『현종실록』 권 14, 1668년(현종 9) 2월 2일

 

관례 10세 1670년: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배우다.

"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요, 관례는 예를 행하는 제도이고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은 관례의 의식이다."

                                                                                 『현종실록』 권 18, 1670(현종 11) 3월 9일

 

시초이다. 하늘을 본뜬 것이 관의 『 현종실록』 권 18, 1670년(현종 11) 3월 9일 혼례 11세 1671년 예우를 다해 동반자를 맞이하다.

"혼인은 만복의 근원이므로 인륜의 시작이다. 덕이 있는 자를 선택하는 것은 예절에 있어 당연하다. 누가 세자를 도울 것인가. 고요하고 그윽한 아름다운 짝이어야 한다.”                 『현종실록』 권 19, 1671년(현종 12) 3월 22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일월오봉도

 

태종 태항아리 太宗陶器胎壺

고려 말 高麗末

 

태종(재세 1367~1422년, 재위 1400~1418)년의 태를 담았던 내 항아리와 외항아리이다.

내항아리는 단지 모양을 한 단단한 재질의 회청색 도기이다. 외항아리는 단단한 흑회색 도기로 뚜껑과 몸체 겉면에 태항아리를 밀봉할 때 사용한 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왕과 신하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모여 성균관에서 활을 쏘는 의례이다.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예禮와 악樂을 연마하는 방도이자 정신수양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 매우 중시되었다. 왕은 신하와 함께 활쏘기 대회를 치르며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화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례 외에도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의례인 조회朝會, 매일 아침 행하는 약식 조회 상참常參 등 다양한 의례를 거행해 군신 간의 질서와 화합을 다지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기린기 麒麟旗

조선朝鮮

 

상상의 동물인 푸른 기린麒麟을 그린 깃발로, 왕세자와 왕세손의 의장에 사용되었다. 기린은 용의 머리에 긴 뿔이 하나 달려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으며 발굽이 있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성군聖君이 태어날 때 미리 그 조짐을 알리기 위해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조선朝鮮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장에 사용된 의장기로, 거북 위에 올라탄 선인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장수의 상징인 거북을 통해 무병장생에 대한 기원을 담은 도상으로 해석된다.

 

 

황룡기 黃龍旗

조선朝鮮

 

조선시대 왕의 의장에 사용되던 오방기五方旗 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동·서·남·북 · 중앙, 즉 오방을 지키는 신비로운 동물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중 황룡은 중앙을 지키고 상징했다.

조선 전기에는 행렬에서 중앙 가장 앞에, 조선 후기에는 소의 꼬리 등을 달아 만든 깃발인 둑과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교룡기交龍旗 다음에 배치되었다.

 

 

조선의 과학

 

조선시대에 과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보이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국왕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천문, 농업, 의학, 무기제조 등 과학기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늘의 여러 현상을 살펴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는 천문학을 통해 백성이 때에 맞춰 농사를 짓고 생업에 힘쓰게 했으며, 국왕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국왕은 중국의 천문과학기구와 역법曆法을 연구하고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쓸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앙부일구나 자격루 같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등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과학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이어 갔습니다.

 

 

앙부일구

 

해 그림자를 통해 낮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해시계입니다. 대접처럼 오목한 그릇 안쪽에는 가로와 세로로 선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선들은 그릇 모양의 테두리까지 이어져 있는데, 선 끝에 시각과 절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릇 안쪽에는 삼각뿔 모양의 바늘이 고정되어 있는데, 이 바늘 그림자가 생기는 위치로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 끝에서 가로선을 따라가면 절기를, 세로선을 따라가면 시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격루 수수호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들시계인 자격루의 구성품 중 하나입니다. 자격루는 그릇에 일정한 속도로 흘러드는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입니다. 수수호에 들어 일정하게 차오르면 그 높이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수호 겉면은 물을 상징하는 용을 조각해 장식했습니다.

 

 

조선 왕실의 천문 사업

 

조선은 건국 초부터 천문학 정비를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재위 1392~1398년)는 돌에 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만들어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서운관書雲觀(후에 관상감觀象監)을 설치해 천문 현상을 관측하고 역법 및 시간 측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삼았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기반이 다져진 세종(재위 1418~1450년) 대에는 천문학에서도 눈에 띄는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천문 의기天文儀器가 제작되었고 천문 연구를 바탕으로 여러 서적을 간행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중국과 이슬람의 역법을 한양을 기준으로 수정해 조선에서 적용할 수 있는 역법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일본, 중국과의 전쟁 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천문학 정비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란으로 소실된 천문 의기들을 다시 만들고, 서양의 천문학과 시헌력時憲曆을 수용하면서 천문학 지식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역법曆法과 역서曆書

 

하늘의 여러 현상, 특히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것은 연, 월, 일, 절기 등 시간의 질서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날짜를 정하는 수학적 이론이 역법, 역법을 적용해 해마다 만드는 달력이 역서입니다.

역법을 연구하고 역서를 편찬하는 것은 백성에게 하늘의 뜻을 펼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는 때에 맞춰 농사를 짓는 것이 중요하였으므로, 국왕은 천체의 움직임을 통해 절기를 파악하고 백성에게 이를 알려 농업에 힘쓰도록 힘을 기울였습니다.

관상감에서는 매년 역서를 편찬해 국왕에게 올리고, 관료들과 각 관청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정한 역법을 따랐지만, 『칠정산七政算』의 편찬 등 자체적으로 역을 계산하고 역서를 편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또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천체 관측 값에 따른 시각의 차이를 보정해 실제 생활에서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시헌칠정서 時憲七政書

조선 朝鮮, 1874년

 

시헌력을 적용하여 날마다 해와 달, 토성, 목성, 화성, 금성, 수성의 위치를 계산하고 표로 정리한 책이다

 

 

조선시대 시간 체계

 

조선시대에는 현재와는 다른 시간 체계를 썼습니다. 하루를 24시 대신 12시로 나누고, 매시를 다시 둘로 나눠 초初와 정正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밤 11시에서 1시는 자시에 해당하는데, 자시는 다시 자초子初, 자정子正으로 나뉩니다. 시보다 더 작은 시간 단위는 각刻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12시를 100각으로 나누었고, 시헌력을 적용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96각으로 나누었습니다.

낮과 밤 시간을 균일하게 파악하는 현재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밤 시간을 파악하는 데 별도의 체계를 사용했습니다. 해가 질 때부터 다시 뜰 때까지의 밤 시간은 5경 5점으로 나누었는데, 계절마다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실제 밤의 길이를 반영해 경과 점의 길이가 절기마다 달라졌습니다. ​

 

 

하루를 12시로 나누면 지금 시간으로 120분이다. 120분 동안 8각이니 하나의 시각 당 15분이다.

1각이 여삼추如三秋라는 말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삼국지나 초한지, 무협지를 읽을 때 '일각이나 흘렀을까..'. 하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오는데, 지금 시간으로 15분 전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창경궁 자격루 항아리 昌慶宮 自擊漏 漏器

조선朝鮮, 1536년, 국보

 

중종中宗(재위 1506~1544년) 대인 1536년에 제작된 자동 물시계 자격루의 일부이다. 물을 채워 흘려보내는 청동 항아리인 파수호 3점과 물을 받는 원통형 항아리인 수수호 2점이다. 크기가 가장 큰 파수호에 새겨진 ‘嘉靖丙申六月日造가정병신육월일조'를 통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수수호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자격루 제작에 참여한 12명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격루 종 自擊漏鍾

조선 朝鮮, 1535년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리던 종으로 추정된다. ‘嘉靖十四季乙未四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 새겨진 파편을 통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상단에 종을 고정하는 부분에는 용무늬가, 하단에는 잔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2021년 인사동에서 자격루 주전과 함께 출토되었다.

 

 

평혼의 平渾儀

조선 朝鮮, 19세기

 

별자리를 평면에 새긴 천문 기구다. 황동판 양면에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보이는 별들을 새기고 해가 지나가는 길인 황도를 그렸다. 판둘레에는 360도 눈금과 조선 후기 시각법인 12시 96각을 새겼고, 황도선을 따라 24 절기와 12궁 별자리를 표시하였다. 원판을 회전하면서 절기와 시간에 따른 하늘의 영역과 별자리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운데 위치한 계형을 돌려서 해나 별의 위치를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다. '桓堂刱製환당창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학자 환당桓堂 박규수朴珪壽(1807~1877년)가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하늘 -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은 하늘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배열해 놓은 천문도로 돌에 새겨 만들었습니다. 태조 즉위 초인 1395년(태조 4)에 조선 건국 이전부터 전해지던 천문도 각석의 탁본을 구해 별자리 위치를 보정한 후 완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천문을 살피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해 백성에게 알리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의무를 실현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천문도에는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중심원에는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바깥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고 별의 크기와 깊이를 다르게 표현해 밝기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천문도와 더불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해와 달, 별에 대한 이론 등이 적혀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표면이 닳아 1687년(숙종 13)에 다른 돌에 옮겨 새겼으며, 각석 두 점이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측우기

 

 

측우대에 새긴 글

 

“빗물의 양을 측정하는 전통은 세종 24년(1442) 제작한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의 구리 측우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운관과 각도의 군·현에서는 비가 올 때마다 빗물의 양을 측정하고 보고했습니다.

영조 46년(1770)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 경희궁 두 궁궐과 팔도, 양도(강화·개성)에 설치했습니다. 그 그릇은 비록 작으나 두 성군께서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고자 힘쓴 뜻이 담겨 있으니 어찌 소중치 아니합니까.... 이 측우기는 임금과 백성의 걱정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으니 신들이 감히 공경히 지키고 부지런히 살피지 않겠습니까."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500여 년이란 긴 세월을 지켜낸 조선 왕실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성군인 세종대왕은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백성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셨고, 신하 중에 영·정조대왕만큼 학식이 높은 사람도 없을 만큼 학업에 매진하신 분이다.

이렇게 훌륭한 왕 밑에는 현명한 재상도 많으니, 백성도 좋은 세상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나고 역병이 들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망할 듯 위태로운 시기도 많았다.

그렇게 흘러간 조선은 끝나고,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을까.

 

 

전편이 궁금하면... 

 

조선왕조의 유물을 전시한 국립고궁박물관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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