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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천안독립기념관 2관부터 4관까지 한 번에 올림

by 즐풍 2024. 1. 3.

 

 

 

2023. 11. 21. 화요일 오전에 탐방

 

1관에 이어 이번 편에서는 2관부터 4관까지 한 번에 올린다.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 박은식, 한국통사 중에서 -

 

동아시아의 개항

 

산업 혁명 이후 서양 열강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 확보를 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고 동아시아에 진출하여 개항을 요구하였다.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개항하였고, 일본도 미국 페리 함대의 강압에 굴복하여 1854년 개항을 결정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개항 과정에서 나타난 군사력 동원과 불평등한 조약 체결 강요는 이후 조선의 개항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일본은 조선과의 외교 교섭이 어려워지자 무력시위를 통한 강제적 개항을 계획하였다.

1875년 9월 강화도에 접근한 일본 군함 운요호는 조선군의 포격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 초지진과 향산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이용하여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관세 및 사법 자주권 등을 침해하는 불평등한 내용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

 

서양을 통한 근대 물문이 들어오며 양장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전화교환원은 남성 전유물이었다.

 

 

 

 

보국안민을 내세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19세기 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시달리던 농민들 사이에서 동학은 큰 호응을 얻으면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94년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하여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각지에 자치기구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여 나갔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은 커다란 바위벽에 새긴 불상으로, 신체 높이가 약 15.7m, 무릎 너비는 약 8.5m이며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마애불의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성 시기는 신라 말기,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고 백제 위덕왕 때 검단 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에 목재가 박혀 있는 것도 있다. 이것들은 마애불의 장엄함을 위해 설치한 닫집(법당의 부처를 모신 자리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있었던 흔적이다.

가슴 아래 새겨진 복장 <불상(佛像)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은·칠보(七寶)와 같은 보화 (寶貨)나 서책(書冊) 따위를 넣음>에는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내용은 복장 안에 보관된 비기가 알려지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것이다.

18세기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기록을 꺼내 보려다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한다.

100여 년 후 동학 농민혁명이 움트던 1892년에 동학 접주 손화중이 그 기록을 무사히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전설이기도 하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여래좌상의 안내문)

 

안내문을 보면 복장에 보관된 비기가 열리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말에 즐풍은 더 주목한다.

내용이야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당시 피폐하고 농민만 죽어나는 세상이 망하길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소망하던 천지개벽은 오지 않고 결국 일본군까지 등에 없고 동학군은 궤멸되었다.

 

 

 

도솔암 마애여래좌상

 

 

전봉준의 도피생활 逃避生活 

 

매서운 바람이 살을 파고드는 11월 공주전투에서 패하고 내려온 전봉준은 수하 몇 명만 데리고 몸을 숨겼다. 호남일대에서는 좌선봉장 이규태와 우선봉장 이두황이 거느리는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무고한 양민까지 강탈과 능욕을 자행하여 1894년 삼남지방 농민들은 더욱 혹독한 겨울을 나야만 했다.

11월 29일 입암산성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은 전봉준은 이규태와 일본군 부대가 추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30일 백양사로 몸을 감추었다. 다시 한번 서울에 올라가 기회를 노리고자 했던 전봉준은 순창에 들러 상황을 정리하려 하였다.

전봉준은 부하들과 함께 12월 2일 김개남을 만나고자 순창으로 향했다.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집에 들러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포상에 마음이 현혹된 김경천은 한신현 등과 함께 전봉준을 생포했다. 1894년 농민혁명의 최고지도자가 순창 쌍치면 피노리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 서울에 도착되었는데 동학군들을 경계하여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 해 2월 9일, 2월 11일, 2월 19일, 3월 9일, 3월 10일 등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출처_순창의 녹두장군 전봉준관 안내문)

 

재판을 위해 이송되는 전봉준

 

 

전봉준 체포 첩보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알리는 첩보이다. 1894년 12월 6일 호남 소모관湖南 召募官이 순무선봉巡撫先鋒에 보낸 이 첩보에는 전봉준을 선조 때의 반란주모자인 이몽학 李夢鶴과 중국 한나라 때의 황건적에 비견될 '거괴巨魁'로 표현하고 있다. 전봉준체포 과정 보고와 함께 이후 처분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체포된 동학농민들

 

 

동학농민군 참수 작두

 

동학농민군을 참수할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작두이다. 작두를 고정하는 나무받침은 없어지고

고정고리와 작두날만 남아있다. 1894년 10월 충청남도 태안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선 단두대로 황제와 정적을 제거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작두로 동학군을 살육했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자로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다.

 

 

갑오개혁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국가에 대한 개혁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1894년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개혁으로 과거제와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재정기관을 탁지아문으로 통일하여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1896년까지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은 추진 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기도 하였지만 개화파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자주적인 개혁을 지향하였고 이를 통해 점차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은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 독립 국가로서 위상을 높이고자 1897년 황제 즉위식을 통해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광무光武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으로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토지 대장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는 한편, 실업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교육과 상공업 분야의 발전이 있었고 근대 시설을 확충하는 성과도 함께 거둘 수 있었다.

 

 

 

대한제국 군인들

 

 

강화 담판도

 

1895년 4월 청일강화조약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이다. 조약 체결 당시 청일 양국의 대표로 참여했던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그려져 있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랴오둥 반도 및 타이완의 할양, 2억 량의 배상금을 획득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9세기 후반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청과 일본의 경쟁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해체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게 되었다.

1904년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면서 침략을 묵인하였다.

 

 

한규설 관복

 

대한제국의 관료 한규설의 관복이다. 한규설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무관으로 그의 관복에는 무

관을 상징하는 호랑이 문양이 자수되어 있다. 한규설은 참정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을사늑약

 

러일전쟁 중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방침을 세운 일제는 조약 체결을 위해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조약안에 대해 반대 여론이 강하자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대신을 협박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렇게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겼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조약의 체결 절차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 원천 무효였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각국에 친서를 보내는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제 사회에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하였다.

 

 

 

을사늑약문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스케사이에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전문이다.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대외관계 및 그 사무를 감독 지휘하고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등 총 5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약 체결은 군대를 동원한 강압과 협박에 의해 이루어졌고 양국의 최고통수권자의 전권 위임장과 비준서가 없는 등 국제법적 절차와 형식마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무효였다.

 

 

 

왼쪽부터 을사오적인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재순, 학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농성부대신 권중연

 

민영환 

 

 

빼앗긴 권리

 

일제는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국 안의 군사 시설을 자유롭게 사용하였고, 이어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재정과 외교 고문을 두어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1907년 정미조약과 1909년 기유각서를 통해 행정권과

사법권도 차례로 빼앗겼다. 이처럼 외교권을 비롯하여 행정·사법권 등 독립 국가로서 한국이 행사해 온 기본적인 권리는 일제의 강압과 친일 세력의 협조가 더해져 차츰 일제로 넘어갔다.

 

 

가혹한 식민지배가 시작되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겉으로는 '동화'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민족 차별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무력을 동원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정책으로 교묘하게 민족 분열을 획책하고 통제와 수탈을 강화하였다.

1930년대 들어 침략 전쟁을 확대한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한국을 병참 기지로 삼아 물자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경술년의 치욕

 

1909년 7월 한국 강점에 대한 방침을 결정한 일제는 조약 체결에 앞서 군대를 집결시켜 집회를 금지하고 신문·잡지 등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른바 '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서 체결되었고, 29일 관보와 순종황제의 서명이 없는 조서를 통해 공포되었다. 무력을 앞세워 이루어진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대한제국은 국권 상실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감옥의 고통은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이 더욱 심하니, 여름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이 증기가 발하여 서로 얼굴을 분간 못하게 된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이 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 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 김구 -

 

 

등 뒤로 두 손을 묶고서 뺨과 얼굴을 때리는가 하면, 야구방망이처럼 생긴 몽둥이로 온몸을 팼다.

그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긴 의자에 나를 반듯이 눕혀놓고 얼굴에 물을 퍼붓는 고문이었다.

                                                                                                                                  -우찬구-

 

 

고문이 시작되면 일단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리기 시작한다. 불로 담금질 하기를 8시간 동안이나 지속하고

자백을 하지 않자 산에 끌고 가 소나무에 매어놓고 칼로 위협하기도 하였다.

                                                                                                                           -최제규-

 

 

수탈 체제 구축

 

일제는 식민 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식민지 수탈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 근대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된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이 증가하였고 민족 자본의 성장을 막는 회사령이 공포되면서 한국인의 회사 설립도 제한되었다. 또한 어업령·삼림령·광업령 등을 통해 각종 자원을 독점하면서 식민지 수탈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수탈의 확대

 

일제는 자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일본으로 반출할 쌀 생산을 늘려서 한국을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과도한 쌀 반출, 높은 소작료와 지세로 한국 농민의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거나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일제의 수탈은 경제 방면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재 조사라는 명분으로 불상·탑·도자기·고서 등 한국의 문화재를 불법 도굴하여 일본으로 대량 약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강제동원

 

일제는 침략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고자 본격적으로 인력 수탈에 나섰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 1939년 국민징용령, 1944년 조선인 징병제, 여자정신근로령 등을 차례로 실시하여 전쟁에 필요한 군인·군무원·노무자 등을 강제 동원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한국인이 군인으로 끌려가거나 탄광이나 군수 공장등의 노동자로 강제 징용되었다. 또한 한국인 여성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반인륜적인 만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잠시 4관으로 이동하며 보는 바깥 풍경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3·1 독립선언서 중에서 -

 

겨레의 함성

 

일제 식민지배 아래에서 일어난 우리 겨레의 1919년 3·1 운동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외침이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외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국내를 넘어 국외 한인사회까지 울려 퍼졌다. 역사적 순간을 함께 했던 민중은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자 독립운동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고, 3·1 운동은 이후 대중투쟁과 같은 다양한 모습의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국 독립은 물론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향했던 3·1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통합과 세계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다

 

1910년대 우리 겨레는 일제의 탄압 속에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 이후, 국내와 중국·러시아 연해주·미국 등 국외에서는 새로운 독립운동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국권운동과 1910년대 독립운동

 

1910년대 독립운동은 총과 칼을 앞세운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맞서 추진되었다.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단체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직되어 군자금 모금, 무기 조달 등을 통해 만주 등지에서 추진된 독립전쟁을 지원하였다. 이와 더불어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운동도 계속되었다. 국외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병과 계몽운동 계열의 합류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추진된 한인단체 조직, 교육기관 운영, 독립군 기지 개척은 이후 국외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국제정세 변화와 독립을 위한 노력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발표한 14개 조 평화원칙, 파리강화회의 개최 등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이던 일제의 식민지, 즉 우리나라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1919년 1월 전승국들을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시작되자 일본과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비밀리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드디어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우리 겨레 최대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다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우리 겨레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庚戌國恥 이후 무단통치로 고통받고 있던 민족의 울분이 3·1 운동으로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대한독립만세'의 물결과 함성이 삼천리를 뒤덮고 국외 한인사회까지 퍼져 나갈수록, 우리 겨레의 독립에 대한 희망은 강해졌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은 소수의 지도자 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3·1 운동에 대해 역사학자 박은식이 '혁명'으로 평가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에 '대혁명'으로 표현했듯이, 3·1 운동은 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었다.

 

 

3.1 운동의 시작

 

중국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新韓青年黨과 재일한인 유학생들의 활동은 3·1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밀리에 국외 독립운동 소식을 접한 국내 종교계 지도자들은 종파를 초월한 민족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원칙 아래 전국적인 만세시위로 발전시키기 위해 학생단과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계획 단계부터 이루어진 민족통합의 노력들은 3·1 운동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스코필드가 목격한 제암리 사건

 

장로교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스코필드(F. W.Schofield)는 수원지역 일제의 한국인 학살 소식을 전해 듣고 사건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하였다.

 

"그 마을을 방문해서 그 비극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마을 외관은 너무나 황량했다. 집이라고는 8호 정도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31호 정도) 집과 교회건물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장독뿐이었다."...

    - 스코필드(F. W. Schofield)의 「제암리 학살사건 일본군이 자행한 잔혹행위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

 

 

제암리 사건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폭압적인 진압과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제암리 사건은 일본군이 발안리, 화수리 등 당시 수원지역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한 학살 사건이다.

1919년 4월 15일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가 지휘하는 부대는 경기도 수원(현 화성시)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학살하였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를 불태우고 여성, 어린아이까지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제암리 사건 직후 현장을 방문한 외신기자, 선교사 등을 통해 일제 탄압의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