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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천안독립기념관 1관 겨레의 뿌리 관람기

by 즐풍 2024. 1. 2.

2023_224

 

 

 

2023. 11. 21. 화요일 오전에 탐방

 

 

천안독립기념관 뒷산인 흑성산의 흑성산성을 볼 생각에 먼저 천안독립기념관부터 찾는다.

2021년 2월에 천안의 왕조산, 태조산, 흑성산 산행을 끝내고 천안독립기념관은 시간이 없어 들리지 않았다.

그해 10월 천안독립기념관의 단풍을 보러 오긴 했으나 들릴 데가 많아 미처 전시관을 들릴 시간이 없었다.

또한 흑성산을 지나왔으나 당시엔 흑성산의 존재를 몰라 그냥 내려왔다.

아침 10시부터 문을 열기에 시간이 남아 통일 염원의 동산을 먼저 둘러본다.

(안내문을 옮기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천안독립기념관 입구에 있는 「겨레의 탑」 가운데 공간에는 흑성산에 있는 통신탑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 염원의 탑 안쪽에 통일의 종을 설치한 지붕이 보인다.

 

 

 

 

통일의 종

 

다섯 개의 뿔이 중앙에서 모이도록 한 게 이채롭다.

 

 

독립기념관

 

 

강화도 고인돌

 

 

고인돌 왕국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만든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다. 제작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은 살아있을 당시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규모가 매우 작은 것도 다수 발견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주인공이 여성이나 유아인 경우도 있다. 유물로는 돌칼과 화살촉· 비파형 동검 · 세형동검붉은간토기 · 옥 등이 다수 출토된다.

 

 

우리나라에는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고인돌이 약 4만 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약 40%에 해당된다. 이에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그 형태에 따라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분류되며, 개석식이 가장 보편적이다.

 

 

 

우리겨레의 터전과 뿌리

 

동북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한반도는 5,000년 동안 우리 겨레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북방 유목민 계열과 남방 계열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성립되었는데, 이는 단군신화나 고대 삼국의 시조 설화에서 잘 나타난다. 다양한 세력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점차 동류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기후가 조화를 이루어 사계절이 뚜렷하며, 사람들이 생활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우리 겨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때로는 북으로 중국 대륙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바다를 통해 교류하면서 동북아시아 문화교류의 전달자로서 우리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리 민족의 기원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로, 우리나라의 구석기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인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뗀석기를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면서 짐승과 물고기를 잡거나 채집 생활을 하였다. 특히 경기도 연천 전곡리의 유적에서는 제작기법이 상당히 세련되고 우수한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매우 발달한 석기문화가 한반도에 있었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시대와 달리 용도에 맞게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를 잡거나 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후기에 이르러 가축도 기르고 농사도 짓기 시작하였다. 토기가 발견되어 식량을 저장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예술 활동을 한 모습도 살필 수 있다.

 

 

 

 

우리 겨레의 첫 나라

 

기원전 20세기 무렵 돌로 만든 도구를 대신하여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됨에 따라 많은 재산과 힘을 가진 권력자가 나타났다. 이는 곧 나라의 탄생으로 이어졌는데, 우리 민족의 첫 나라인 고조선도 이 무렵 건국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하여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은 대동강과 요하 부근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4~3세기경에는 중국의 나라와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다.

고조선은 중계무역을 통해 넓은 영토를 지닌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였지만 이를 두려워한 중국 한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고조선의 유민들은 남으로 이주하여 삼한사회와 고대 삼국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 국내성國城에 세운 높이 6.39m의 비석이다. 네 면에 1,802자를 새겨 고구려의 건국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과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제도,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유훈을 적고 있다.

가장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신묘년조 기사의 원문은 '倭以辛卯年來度破百殘ㅇㅇ羅羅以爲臣民이다. 이를 일본 학자들은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국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자료로 이용해 왔다. 이에 우리 학계는 일본의 비문 훼손 및 변조가능성, 해석상의 오류 등을 제기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고 있다.

 

천안독립기념관 입구 야외에 설치된 광개토대왕릉비 복제품

 

광개토대왕릉비 1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기록하였고, 다음으로 왕의 공훈에 대해 적고 있다.

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 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

 

(王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부유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2 면

1면에 이어 백제 정벌과 8년(398) 숙신정벌, 9년 신라의 구원 요청과 이를 수락하여 10년 5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

신라를 구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十年庚子教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 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3면

2면에 이어 신라의 조공과 14년(404) 백제와 왜 연합군의 침입과 격퇴, 17년 후연(혹은 백제)과 20년의 동부여 정벌,

묘를 지키는 수묘안의 연호를 기록하고 있다.

昔 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寐錦OO僕勾○○○○ 朝貢

 

옛적에는 신라 매금( 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請命)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4면

국연國烟 30가家와 간연看烟 300가 등 수묘인 연호를 열거하고, 법령을 위반한 자에 대한 규제를 제시하고 있다.

又制 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 其有 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기마무사상

 

전시된 기마인물상은 무용총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사냥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말 위에서 자유롭게 몸을 가누며 활을 당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야의 기마무사상

 

가야는 우수한 철제 갑옷과 무기 등을 생산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재현된 가야 무사는 판갑옷과 철제 투구를, 말 역시 철로 만든 갑옷과 머리가리개를 쓰고 있다.

 

 

무용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으로, 이웃하고 있는 각저총(씨름무덤)과 더불어 대략 5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에 처음 발굴 조사되었으며, 무덤칸 내부는 널길과 좌우로 긴 앞방 · 이음길 · 널방으로 구성되었다. 널방에는 수렵도 · 묘주접객도 · 가무배송도가 그려졌고, 무용총이란 이름은 가무배송도에서 비롯되었다.

 

 

 

 

철의 나라 가야

 

가야는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 중국의 군현을 비롯하여 남쪽의 왜와 교역을 하였다. 가야 지역에서는 좋은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철과 관련된 교역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제련기술이 없었던 일본 열도에서는 가야로부터의 철 수입이 매우 중요하였다.

일본 열도의 각 지역은 백제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이전에 가야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일본의 고대 유적에서 가야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사실은 이를 확인시켜 준다. 특히 빼어난 토기 제작기술은 일본 스에키토기의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수한 가야 문화는 신라로 흡수되어 우리 문화의 형성에 일조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우륵 가야금을 들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문화재청 사진 빌림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와 민족 기상

 

삼국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고구려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지속적인 긴장상황 속에서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문화는 힘이 있고, 역동적인 느낌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제는 상대적으로 지방 세력과 귀족의 힘이 강하였고, 적극적으로 선진문물과 제도를 수입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역시 백제문화의 진수는 불상과 토기 등에 보이는 소박함과 해학이 넘치는 여유에 있다.

신라는 가장 늦게 출발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삼국의 문화를 완성시킨 나라였다. 감은사지 석탑에 보이는 기술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의 사찰문화가 가미된 삼국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무령왕릉 武寧王陵

 

1971년 7월 5일 역사적인 발견이 이루어졌다. 송산리 6호분 뒤쪽 언덕의 배수로 공사 중에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무덤의 묘지석은 피장자가 무령왕임을 알려주었고, 이는 고대 무덤에 묻힌 주인공을 확인한 최초의

왕릉이 되었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백제 문화를 중시켰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베일에 싸여 있던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무덤 안에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화려한 무늬와 백제의 이상향을 담은 동탁은잔등 모두 108종 3,0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정교한 제작기술을 자랑하는 금속공예품들을 통해 백제가 문화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릉 내부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서산마애삼존불은 부처가 신으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같은 매우 인간적이며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백제의 미소'로 불리고 있다. 중앙의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이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었다. 6~7세기 백제의 문화가 꽃피는 시기에 제작되어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온화하면서도 소박하고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듯 하여 토착화된 백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있는 곳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만든 때 : 백제시대(7세기 전후)

현지에서 찍은 사진

 

 

 

얼굴무늬 막음기와

 

신라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얼굴무늬 막음기와는 선덕여왕 대에 창건된 경주 영묘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흔히 막음기와에는 연꽃무늬나 당초무늬가 일반적인데,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라인의 얼굴은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다. 뒷면에는 실제 건물에 사용된 흔적이 있다.

경주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황룡사 치미 皇龍寺 鴟尾

 

치미는 한국 고대 목조건물에서 지붕을 장식한 기와를 말한다.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치미를 세운 모습은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는 치미가 나쁜 것을 쫓고 좋은 기운을 불러들인다고 알려진 봉황에서 유래하였다는 점과 통한다.

황룡사의 치미는 높이가 182cm에 이르는데, 크기가 너무 커서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한 후 조립하였다. 치미의 양쪽 면과 뒷면에는 연꽃과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다른 치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라만의 특징이다. 거대하고 화려한 문화 속에 순박하게 웃는 신라인의 모습은 보다 인간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해상무역의 중심 신라방(新羅坊)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닷가, 한 눈에 보기에도 번성한 도시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커다란 배는 끊임없이 물건과 사람을 실어 나르고, 저잣거리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이네요. 이곳은 통일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의 해안가에 자리 잡은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신라방입니다.

8세기 중반 이후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펼쳤는데요, 이 과정에서 신라의 상인, 유학생, 승려 등이 자연스럽게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작은 신라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것이지요. 거주지역과 농경지가 만들어지고, 행정기구인 신라소, 사찰인 신라원 등이 들어섰습니다. 이 중국 속의 작은 신라는 남북국시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신라인들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문화국가 고려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를 수립하여 우리 겨레의 정치·사회·문화적 통합을 이루었다. 삼국의 각기 다른 문화를 융합하여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발전을 이루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수용하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는 불교의 힘을 빌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다. 1251년 완성된 팔만대장경판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완벽한 제작 솜씨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재현된 해인사 장경 스님들이 팔만대장경을 인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만든 대장경판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1270 년에 이르러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고려 정부가 몽고에 항복하자, 삼별초는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몽고에 대항하였다.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한 이들의 항쟁은 1273년 제주도가 함락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과 몽고에 대한 민중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고려의 금속활자

 

고려의 과학기술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인쇄술이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과 청동 주조기술의 발달, 금속활자에 적합한 먹과 종이의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13세기 초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간행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상정고금古今禮(1234년)으로 독일의 구텐베르크 Gutenberg가 금속활자를 만든 1450년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이지만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 청주 흥덕사 간행한 『직지直指』,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의 도시계획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은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한양을 조선의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여, 풍수지리에 의해 궁궐을 배치하고 유교적 원리에 따라 시가지를 계획하였다.

당시 한양의 중심은 지금의 종로구 일대로, 주산인 백악을 기점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따라 목멱산까지 성을 쌓아 도성의 규모를 정했다.

도성에는 큰 문과 작은 문을 각 4개씩 짓고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이름 지었다. 주산을 배경으로 경복궁을 앉히고 부주산격인 응봉을 배경으로 창덕궁 배치한 다음 좌묘우사와 전조후사의 원칙에 따라  사직과 종묘, 시전을 배치하였다. 조선은 계획도시 한양을 통해 풍수지리의 전통과 유교적 이상국가의 개념을 조화롭게 실현시켰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박물관에서 본 한성부지도 

 

 

조선의 기록문화

 

조선시대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사대부가 지배층을 이루어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관료와 학자들은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역사서 · 지리서·윤리서·법전 등 여러 종류의 기록물을 작성하고 편찬하였다.

대표적인 기록유산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등謄錄』 ·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ᆞ『여지도서輿地圖書』등의 인문지리서, 그리고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등의 법전류와 『농사직설農事直說』 ·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농사 및 의학 관련 서적들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에게 반포한 책. 세종이 지은 서문에 이어 한글의 해석과 쓰임법을 설명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세종이 지은 석가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용비어천가」와 함께 한글로 표기된 운문 중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조선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가 수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

 

 

조선의 과학기술

 

조선은 통치의 이념을 농사와 백성 중심으로 하였기에 이를 위한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測雨器,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 토지를 측량하는 인지의印地儀,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어 나갔고, 우리의 현실에 맞는 천문학 농학 · 의약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는 조선의 과학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구의 地球儀

 

지구를 본떠 만든 작은 모형으로, 조선 후기 중국으로부터 소개되어 최한기가 제작했다.

 

 

측우기

 

1440년을 전후하여 발명되어 1442년(세종 24)부터 20세기 초 일제의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우량 관측기구로 사용된 도구로, 현대의 우량계에 해당한다.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빗물을 받아 표준화된 눈금의 자로 그 깊이를 측정했으며, 같은 규격의 기구와

자를 서울의 천문관서와 지방의 관아에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우량 관측 및 보고 체계를 갖추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설)

 

 

앙부일구 仰釜日晷

 

해시계는 지구의 자전으로 생기는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의 변화를 이용하여 시간을 헤아리는 장치이다. 1434년에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만든 앙부일구가 대표적이다. 그림자를 받는 시계판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가마솥 모양이라 하여 앙부일구라고 한다.

오목한 시계판에 시각을 나타내는 7줄의 세로선과 계절을 나타내는 13줄의 가로선을 그어 시각은 물론 24절기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하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 지신의 그림을 그려서 누구나 시각을 알게 하였다.

 

 

 

 

4군 6진

 

조선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침입하여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이에 세종대왕은 압록강 방면에 최윤덕,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를 파견하여 여진족의 무리를 몰아내고 각기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다.

4군 6진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정에서는 이 지역의 확고한

관리를 위해 충청·전라·경상도의 백성을 대규모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대마도 정벌

 

고려 말 이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대마도 정벌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차 정벌 1389년 바위가 이끌었으며, 제2차 정벌은 1396년에 있었다. 제3차 정벌은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19년 이종무가 전함 227척과 병사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움으로써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간도 間島

 

간도는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간도를 포함한 만주지방에 사람을 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의 일부가 간도로 건너가 농경지를 개척하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어 조선과 청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白頭山 定界碑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 정계비에서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하여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청과 조선 사이에 간도 귀속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을사늑약(1905)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청과 불법적인 '간도협약間島協約(1909)'을 맺어 청에 넘겨주게 되었다.

 

 

거북선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전투용 배로, 바다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거북 모양의 전투선으로 앞에는 용머리를 붙이고 좌· 우에는 대포를 달았으며, 등에는 철판을 두르고 쇠못을 꽂아 적의 침입을 막았다. 이 모형은 조선 정조 때 사용했던 거북선을 기초로 전쟁 상황을 1/2.5로 축소한 것이다.

 

아하 여러 전투 준비 자염ㄴ

 

 

 

 

 

 

 

천안독립기념관은 1관인 겨레의 뿌리부터 7관인 특별기획전시실까지 있다.

1관은 전시물보다 안내문에 집중한 편이다.

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유물이나 안내문이 많아 사진의 양도 많아 2관부터는 내용을 줄이며 묶어서 편집할 생각이다.

2024년이 밝았으므로 천안독립기념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천천히 해야겠다.

 

지금까지 즐풍의 방을 찾아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내내 행복하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