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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신라관 관람

by 즐풍 2023. 12. 3.

 

 

2023. 10. 8. 일요일에 관람

 

 

이번 편은 삼국 중에서 신라 편을 올린다.

통일 신라는 사진을 많이 못 찍어 열몇 개 정도밖에 안 되지만 별도로 포스팅할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워낙 전쟁이 많은 데다 외침도 잦아 문화재의 가치가 있는 유물이 전래되기 어려운 구조다.

옛날 사람들이야 역사의 유물보다 자신의 재산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잘 보관한다고 해도 지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의 대부분은 왕릉이나 고분, 읍성과 산성, 사찰 터 등에서 수습된 것들이다.

간혹 대규모 도시개발이나 아파트 단지를 지을 때도 왕왕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구릉지나 강, 해안에서는 신석기나 청동기, 초기 철기 등이 나올 때도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유물은 많아질 것이다.

개화기를 지나며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쓸어간 문화재와 프랑스, 미국 등이 강화도에서 가져간 유물도 적지 않다.

프랑스기 강화도에서 약탈한 문화재 일부는 영구 기증 방식을 통해 들어온 게 일부 있다.

미국에서 가져간 수자기 帥字旗기를 반환받은 걸 보면 우리나라는 그나마 국력 신장의 덕을 본 셈이다.

프랑스나 영국, 독일 등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약탈한 유물은 해당 국가의 반환 요구에도 요지부동이다.

우리도 힘을 키워 일본을 복속시키고 그들의 박물관을 털어올 날이 있으면 좋겠다.

(이번에도 모두 박물관의 안내문을 옮긴 것으로 별도 표시는 생략한다)

 

 

 

금관·금허리띠

국보, 경주황남대총 출토, 1973년 발굴

금관 높이  27.3cm, 무게 1.062g     허리띠 길이 120cm, 허리띠 무게 919g

 

 

금관은 머리띠에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세워진 형태이다. 초기에는 맞가지 세 개를 세웠고,

이후 사슴뿔 모양의 장식 두 개가 조합되어 곱은 옥과 달개가 달린 전형적인 신라 금관이 완성된다.

금관의 나뭇가지 도안에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는 최고 지배자 마립간과 그 일족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다. 즉 황금빛 나뭇가지 모양 대관은 신라 마립간의 신성한 왕권을 상징하는 관이었다.

금허리띠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허리띠 끝에 다는 띠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 허리띠의 겉면을 꾸몄던

띠꾸미개,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로 구성된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 모양, 손칼, 곱은 옥 등이

매달려 있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연모를 의미하는 것이다.

 

 

판갑옷 板甲

경북 경주 구정동, 1982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4세기

 

 오리모양 토기 鴨形土器

경북 경산 조영동, 1988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3-4세기

 

검의 종류

 

 

 

신라의 황금 문화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8세기)에는 신라가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는 기록이 있다. 966년 아랍 지리학자 알마크디시 (almagdisi)는 신라에 대해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집을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적었다.

신라 황금 문화의 전성기는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간이었다. 신라의 지배층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장식대도 등에 금을 사용하였다. 황금 제품들은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금 굽다리접시 金製高杯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5세기  

 

 

팔찌 금팔찌 金製釧

1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경북 경주 서봉총, 1926년 발굴      경북 경주 황오동,  1955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삼국시대(신라) 5세기 

 

금드리개

 4, 5 경북 경주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6 경북 경주노동동, 192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삼국시대(신라) 5세기 

 

 

금귀걸이 金製太環耳飾

 

1 경북 경주 서봉총, 1926년 발굴      경북 경주 보문동, 1915년 발굴     출토지 모름, 1981년 이홍근 기증

삼국시대(신라) 6세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삼국시대(신라) 5세기

  

4~5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6. 경북 경주 황오동, 1932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5세기                                           삼국시대(신라) 5세기  

 

위 3번 클로즈업

 

경주 황오동 52호분 출토품

경북 경주 황오동, 1949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1 금장식 작은칼     2 금도금 은팔찌    3 금귀걸이    4 금귀걸이 

 

목걸이 頸飾,  금귀걸이 金製太環耳飾 

1 , 2, 3, 4, 5  경북 경주 금령총, 192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금방울 

6 경북 경주 금령총, 1924년 발굴    7,8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경북 경주 식리총, 192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삼국시대(신라) 5세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금 새날개모양 관꾸미개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1975년 발굴, 보물, 삼국시대 (신라) 5세기

 

고깔모양 관 金製冠帽  

경북 경주 금관총, 1921년 발굴, 국보,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노서동 215번지 출토품

경북 경주 노서동, 1933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1 금목걸이, 보물    2 금귀걸이, 보물    3 금팔찌, 보물 

 

위 금목걸이 

 

금반지 

3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1975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금목걸이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신라 5세기 (위 사진 1번 확대)

 

금귀걸이, 금반지, 금팔찌 

1 경북 경주 호우총, 1946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2 경북 경주 호우총, 1946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3 경북 경주 호우총, 1946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금드리개 

4,5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위 사진 중 1, 4, 5 확대한 사진

 

 금동 장식 신발

경북 경주 식리총, 1924년 발굴, 삼국시대 6세기

 

금귀걸이

경북 경주 보문동, 1915년 발굴, 국보, 삼국시대 6세기

 

 

 

 

 

 

 

 

시간과 공간의 척도, 신라 토기 
신라 토기는 신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다양한 유적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신라 토기는 서서히 바뀌는데 같은 종류의 그릇을 변화 순서대로 배열하면 흐름이 보인다. 
주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인 굽다리 접시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토기이다. 뚜껑이 없는 것을 사용하다가 뚜껑이 있는 것으로 변화한다. 굽다리가 높다가 낮아지고 구멍이 4~5개에서 3개로 줄어든다. 이러한 특징들은 토기가 발견된 유적의 시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신라의 지방에서는 중앙의 그릇을 모방해 제사 그릇을 만들었다. 제작 기술이 같지 않아 지방마다 조금 다른 신라 토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차이는 어느 지역에서 제작된 신라 토기인지 알려주는 특징이 되었고, 지역 간 교류나 물류의 이동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로 활용된다. 이처럼 신라 토기에는 시간의 흐름과 지역의 개성이 담겨있어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말 탄 사람 토기 
1 경북 경주, 1934년 입수, 삼국시대 (신라) 5세기 

 

청동 말방울
3 경북 경주 호우총, 1946년 발굴              4 경북 경주 금령총, 192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삼국시대(신라) 6세기 

 

연꽃무늬 수막새 

경북 경주 월성, 1984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6세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다

 

527년 법흥왕(재위 514-540)이 불교를 공인한 뒤, 진흥왕(재위 540-576)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은 왕경 안에

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고자 하였다. 544년 진흥왕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10년 만에 완공하였다. 553년에는 황룡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566년에 완공하였다.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이라는 큰 불상을 봉안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자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다. 643년에는 왕의 위엄을 세우고 부처

님의 도움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에 9층 목탑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연꽃무늬 수막새 

왼쪽: 경북 경주 황룡사, 1976년 발굴                    오른쪽: 경북 경주 흥륜사, 1998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6세기                                           삼국시대 (신라) 6세기 

 

 

 

 

포항 냉수리 신라비 浦項冷水里新羅碑 

경북 포항 냉수리, 국보, 복제품, 삼국시대 (신라) 503년 

 

이 비는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 고구려비(국보),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 있다.

내용 중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 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써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출처_문화재청)

 

출토지 모름, 1913년 입수, 삼국시대(신라) 6-7세기  

 

경북 경주, 1914년 입수, 삼국시대 (신라) 6-7세기 

 

청동자루솥, 靑銅鑣斗

경북 경주 식리총, 192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굽다리접시

파주 성동리 고분군, 1991년 발굴, 삼국시대 (신라) 6세기  

 

용머리상, 石製龍頭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상경성 제1 궁전지, 1933.1934년 발굴, 일본 도쿄대학, 복제품

남북국시대(발해) 8-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