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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선사-고대관·고조선·부여-삼한 유물

by 즐풍 2023. 11. 30.

 

 

 

2023. 10. 8. 일요일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다녀오면 정리하고 포스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와 상관없이 산행기나 여행기도 작성해야 하니 박물관 작성은 50여 일 뒤로 밀렸다.

이 것 저 것 손댈 게 많다 보니 가을 단풍 여행조차 뒤로 밀린 경우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가끔은 작성하기 싫지만 즐풍의 개인 역사를 아주 없앨 수는 없다.

즐풍이 지나온 삶의 궤적은 오직 즐풍만이 작성하니까.

그나마 박물관이나 전시관 관람은 안내문이 많아 대부분은 옮기는 데 주력한다.

즐풍은 전문가가 아니니 차라리 그 편이 간결하고 전문성이 있다.

이젠 시대가 좋아져 긴 안내문 사진이라 해도 복사가 가능하니 자판을 두드릴 필요도 없다.

시대가 더 발전하면 눈으로 읽는 대로 복사가 될 날도 오지 않을까?

이제부터 지루하고 지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포스팅을 남발할 차례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박물관도 시대순으로 전시되었으니 먼저 선사·고대관부터 시작한다.

(이후 내용은 전술했듯이 모두 안내문을 옮긴 것으로 별도 표시는 생략한다)

 

 

 

ㅁ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 낸 최초의 문화 단계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플라이스토세 중기(약 78~13만 년 전)로 추정된다. 그들은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를 위해 동굴이나 강가에 머무르면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고 발달시켰다.

 

 

 

 

ㅁ 도구의 제작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 나무, 동물의 뼈와 뿔 등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석기시대 도구의 대부분은 돌을 가공하여 만든 뗀석기이다. 나무나 뼈는 땅 속에서 오랫동안 보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뼈 도구는 드물지만 석회암 지대의 동굴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ㅁ 사냥과 채집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사냥을 통해 다양한 자원을 얻었다. 그러나 식물 채집 역시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이른 시기 대형석기들은 주로 규암이나 석영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냥과 채집 활동 시 상황에 따라 찌르고 자르거나, 파고 긁어내고 빻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ㅁ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구식기시대의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석기이다. 삼각형이나 타원형을 기본형으로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날카로운 날을 만들었다. 석기의 표면에는 자연면이 많이 남아 있으며 두께는 두꺼운 편이다. 사냥, 동물의 해체, 가죽 • 나무• 뼈의 가공 등 다양한 작업에 쓰였다. 1940년대 미국의 고고학자 모비우스는 세계의 구석기 문화를 서양은 주먹도끼 문화권,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전곡리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주먹도끼가 빈번히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통용되어 온 모비우스의 이론을 폐기해야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홈날 凹刃

7 강원 홍천 하화계리, 1991년 발굴   8 강원 동해 망상, 2001-2003년 발굴   9 강원 동해 노봉, 2001년 발굴 

10경기 연천 전곡리, 2008-2009년 발굴   11 강원 양구 상무룡리, 1987-1988년 발굴

12 경기 김포 신곡리, 2007-2008년 발굴 

 

 

ㅁ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었던 시기이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며 고기잡이, 사냥, 식물 채집을 통해 먹을거리를 얻었다.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농사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주변 지역과 정보, 자원을 공유하였다.

 

 

돌작살 石銛

1 경남 통영 욕지도, 1988-1989년 발굴   2 함북 웅기 송평, 1929-1930년 발굴   3 부산 동삼동 숲, 1969년 발굴

 

그물추 漁網錘

14 강원 양양 오산리, 1981-1983년 발굴

 

갈판· 갈돌 碾石•碾石棒

부산 가덕도, 2010-2011년 발굴

 

 

 

 

 

 

ㅁ 무덤

 

무덤은 죽음에 대한 신석기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경우가 많으나 동굴을 무덤으로 이용하거나 뼈만 추려 토기 등에 넣기도 하였다. 신석기인들은 꾸미개로 죽은 이를 치장하고 토기, 석기 등 필요한 물건을 무덤 안에 넣었다.

 

 

꾸미개(돌)石製裝身具

경북 울진 후포리, 1993년 발굴

 

꾸미개(돌)石製裝身具

경북 울진 죽변,  2009-2010년 발굴 

 

 

ㅁ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에는 토기 겉면에 무늬가 거의 없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사용했다.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어 다소 거친 진흙으로 빚어 한뎃가마에서 구웠으며 바닥이 납작하고 적갈색을 띤다. 민무늬토기 아가리에는 간단한 선무늬나 구멍무늬, 점토띠 등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토기 겉면을 잘 문질러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낸 것도 있다. 민무늬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특징을 보이며 꾸준히 사용되었다.

 

 

 

ㅁ 돌칼의 상징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돌칼은 규모가 큰 주거지나 일부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소유하였을 것이다. 길이 40cm가 넘는 대형인 것, 손잡이 부분이 과장되어 실용성이 없거나 장식된 돌칼은 신분을 상징하는 일종으로 단순 한 칼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알려 준다.

 

 

농경문 청동기는 앞면에 솟대, 뒷면에 농경 의례農耕 儀禮를 표현하여 생산과 풍요를 비는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갈래의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는 마을에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솟대를 표현한 것이다. 뒷면에는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벌거벗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그 아래에 괭이를 들고 있는 사람,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를 시작하여 수확하기까지의 모습을 순서대로 표현한 것이다.

 

 

고조선 古朝鮮 · 청동기 靑銅器

 

ㅁ 고조선 古朝鮮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 이후 발달된 철기 문화를 꽃피우며 중국 랴오닝 (遼寧) 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역을 주요 무대로 중국 연燕, 진秦, 한漢 과 대등하게 겨루었다. 특히, 고조선은 중계 무역 문제로 일어난 한과의 전쟁에서 1년여에 걸쳐 맞설 만큼 강성한 국가였으나 오랜 전쟁으로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할 무렵, 각 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일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ㅁ 한국식 동검 문화의 성립


기원전 5세기 무렵 청천강 이남을 중심으로 한국식 동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한국식 동검은 요령식 동검과 같이 검몸(劍身)과 자루를 따로 만들었으나, 검몸이 직선화하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抉入部)과 마디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 청동 유물로는 한국식 동검을 비롯하여 공구工具, 거울 등의 의기儀器들이 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돌무지 널 무덤(積石木棺墓), 움무덤(土壙墓) 등에서 검은간토기, 덧띠 토기, 옥, 돌화살촉과 함께 출토된다.

 

 

충남 대전 괴정동 청동 제품

 

거친무늬 청동거울

 

 

ㅁ 철기의 등장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는 한국식 동검 문화가 성숙하여 투겁창, 창 등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고, 청동기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정교한 잔무늬 거울도 제작된다. 고조선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들 중 하나인 연燕 나라와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은 철기 사용을 통해 더욱 발전하였다. 철기 문화는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어 점차 남부 지역으로 퍼졌다.

 

 

ㅁ 명도전 明刀錢

 

손칼 모양 동전 앞면에 '명明' 자가 새겨져 있어 명도전明刀錢이라고 부른다. 대개 수십 매에서 수천 매에 이르기까지 나무 상자, 단지나 항아리에 담겨 구덩이에 묻힌 채로 발견된다. 

 

 

고조선의 수레 부속

 

고조선 이래로 무덤 속에 수레 부속품이 많이 부장 되었다. 고조선에서 유행하였던 권총 모양 동기, 삿갓 모양 동기. 을자 모양 동기 등은 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부속구들이다. 마차는 통상 하나의 끌채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전북 완주 갈동
16,17 덧띠 토기    18 항아리 

 

방울

전남 함평 초포리 출토

 

 

부여 夫餘 · 삼한 三韓

 

ㅁ 철기 문화의 발전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 사용으로 향상된 생산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로 만든 농 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중국 한漢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부여. 삼한


고조선 멸망 전후, 중국 동북 지역에는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한반도 동북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馬韓 • 진한辰韓 •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마한 • 진한 • 변한 은 이후 백제百濟터, 신라新羅, 가야加耶로 발전하였다.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 설치된 낙랑은 동북아시아 교역 및 교류의 창구였으며, 주변 국가들이 고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특징은 철기의 생산과 사용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이면서 일어난 다양한 문화 변동은 고대국가로 전환의 토대가 되었다.

 

 

한경 漢鏡 

평남 대동 대동강면, 1927년 구입 

 

목걸이 1,2,3

경남 김해 양동리, 1990년 발굴

 

말갖춤 馬具
1 청동 마면, 대구 명리동, 1974년 입수    2 청동재갈, 대구 평리동 , 1974년 입수
3 쇠재갈, 창원시   4 쇠재갈 경주 조양동, 1979년 발굴   5 쇠재갈 경주 탑동, 2010년 발굴 

 

말과 수레 장식

9 청동 종방울, 평양 석암리 219호   10 은제 말띠드리개 평양 석암리 219호 

 

 

허리띠 고리

국보,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1916년 발굴 

 

금판 위에 수천 개의 금 알갱이들을 붙여 만들었다. 큰 용 1마리가 중앙에서 꿈틀거리고, 그 주위에 6마리의 작은 용이 있다. 53.9g(14. 3돈)의 순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이다.

This belt buckle is made of 53.9 grams of pure gold. The elaborate central design, formed by thousands of gold granules and threads, shows a large twisting dragon, surrounded by six smaller ones.

 

 

청동 그릇

 

석암리 9호 무덤은 가장 풍부한 청동 그릇의 조합상을 보이는데, 술을 담거나 데우는 그릇인 동준銅罇, 동종銅鐘, 동형銅鋞과, 음식 물을 끓이거나 데우는 그릇인 동정銅鼎, 동부銅釜 등의 기형이 출토되었다. 청동 그릇의 부장은 기원 1세기대 일부 무덤에서 확인되며, 이후 벽돌무덤 단계에이르면 흙으로 만든 명기가 부장 된다. 

 

 

청동그릇

청동솥,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술을 데우는 그릇,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1 화분모양 그릇                      2~3 둥근바닥 항아리                    4 화분모양 그릇

  평남 용장군 감성리 감분              평남 용장군 감성리 감분          평양 석암리 99호 무덤

 

곰 모양 상다리 장식

평양 석암리 9호 무덤 

 

청동거울과 비녀 

 

장신구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   

 

새 모양 뚜껑이 있는 토기

울산 하대, 1991년 발굴

 

세발솥

울산 하대, 1991년 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