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93 A
2023. 10. 27. (금) 08:45~17:27, 8시간 43분 탐방, 휴식 1시간 48분 포함, 14.6km 이동
2009년 산행을 처음 시작할 땐 언제나 북한산과 도봉산, 좀 더 넓히면 수락산과 사패산, 관악산에 들었다.
주말에 한 번 가던 산행을 이틀로 바꾸면서 한때의 젊음을 야무지게 활용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북한산과 도봉산을 뱅뱅 돌 땐 애석하게도 블로그를 작성하지 않던 야만적인 시절이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닌다는 자체가 불편하다는 생각에 산행 코스만 수첩에 그려 넣었다.
즐풍 인생에서 가장 넓은 놀이터였던 북한산 등 수도권의 산은 2010년 10월 평택으로 이사 온 후 잊고 지냈다.
대중교통으로 다녀오기에는 평택 이남의 산이 더 새롭고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수 돌산도에서 6개월, 울릉도 1달, 태안 안면도 2달, 고창 1달 등 2년간 10개월을 방랑생활했다.
이런 방랑 시절의 여행기 작성에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3대 읍성인 순천 낙안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서산의 해미읍성은 많게는 몇 번씩 다녀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이나 남한산성, 공주 공산성, 부소산성 등도 탐방했다.
북한산성도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의 가치를 갖기에 충분하다.
주말의 번잡스러움을 피하고 단풍까지 즐기며 북한산성도 새롭게 바라보려고 모처럼 북한산을 오른다.
북한산성 종주 코스
북한산성 성벽 北漢山城 城壁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지정일 : 1968. 12. 5
소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임)
북한산성은 임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전후사회 혼란을 수습해 영 • 정조 시대의 문예부흥기로
나아가려는 힘찬 기상과 자신감을 담은 방위시설이다.
숙종(재위 1674~1720) 즉위 초부터 북한산성 축성을 둘러싼 논의가 거듭되었고 1711년(숙종 37) 공사에 착수해
6개월 만에 전체 길이 11.6km에 달하는 산성을 축조했다. 성벽은 평지와 산지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고축高築 •
반축半築 • 반반축半半築으로 쌓았다. 성벽 없이 여장女裝만 쌓은 곳도 있으며, 봉우리 정상부에는 여장마저
쌓지 않은 곳이 있다. 성벽은 무게 300~500kg의 화강암 석재를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가공하여 축조했다.
또한 접촉면의 형태에 따라 가공하는 그랭이 기법으로 접촉면을 극대화하고 마찰력을 높여 성벽의 견고함을
더했다. 축성에는 군인 • 승군 • 축성 장인 • 도성 주민 • 임금 노동자 등 모두 3~4만 명의 인부가 공정과 기능에
따라 체계적으로 동원되었다. 성벽과 여장, 수문과 수구, 석재 운반, 공사용 도로 등의 공정에 따라 감독관을 두었
으며, 흙 공사, 철물제작, 석물 제작, 건물 축조 기능별 조직의 책임자를 임명해 효율성을 높였다.
축성 공사 전체 구간을 삼분해 훈련도감 • 금위영• 어영청의 각 군문이 책임을 지고 시공하도록 했으며, 공사 실명제
를 적용해 부실 공사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아울러 축성과 건축 전문가를 보유한 승군을 동원해 북한산성
축조를 돕고 산성 내에 승영 사찰을 짓도록 했다.
성을 쌓는 데 다량의 물자가 소요되었으며, 34,799냥이 투입됐다. 북한산성의 축조는 숙종대의 경제력과 수준
높은 축성 기술, 촉성 전문 인력과 체계적인 축성 조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산성의 축성 기술과
인력 운영 방식은 이후 정조 대에 이뤄진 화성 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Walls of Bukhansanseong Fortress
Bukhansanseong may be regarded as a symbol of the Renaissance Period that occurred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 and King Jeongjo of the Joseon Dynasty,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Manchu Invasion of 1636. At the beginning of King Sukjong's reign (1674-1720), a political dispute broke out over the construction of Bukhansanseong.
However, construction work began in 1711 (the 3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the fortress, with its 11.6km of walls, was completed six months later.
Bukhansanseong was built to exploit the topology of the mountain. It features three different types of wall structures: gochuk (a wall of full height), banchuk (a wall of half height), and banbanchuk (a wall of quarter height). On some parts of the mountain only yeojang, or relatively low walls used by defending soldiers to keep lookout for the enemy, were built, and on some of the higher mountainous areas no walls were built at all. A skillful mason would oversee the production of square/rectangular 300-500kg granite bricks for the wall. The traditional geuraengi technique of preparing stone was used to increase the frictional force between the bricks to make the wall stronger.
Some 30,000-40,000 people were mobilized as labor, including soldiers of the Three Military Commands, monk- soldiers, local inhabitants, and waged workers. During the construction of Bukhansanseong, skilled specialists such as stonemasons, blacksmiths, and architects were assigned to each facility, including the fortress walls, pathways, earthworks, water gates, and flood gates. The overall site was divided into three areas, and each section was placed under the control of the Three Military Commands (Hullyeondogam, Geumwiyeong, Eoyeongcheong). In addition, skilled monk specialists supervised and participated in the building of the main structures and military temples at Bukhansanseong.
Written records show that the diverse supplies required for the construction work cost as much as 34,799 nyang (a unit of old Korean coinage). At that time, the construction of Bukhansanseong required relatively advanced technology, skilled specialists, and a highly organized socio-political system as well. The experience accumulated in building Bukhansanseong served as a model for the construction of Hwaseong Fortress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1752-1800).
(안내문)
대서문에서 연결되는 이 성벽은 북한산 계곡을 지나며 수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수문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고 한다.
을축년보다 10년 앞선 1915년 7월, 이틀간에 걸친 폭우에 임금의 보장처로 지어졌던 행궁은
약 200년의 영욕을 뒤로한 채 무너졌다고 한다.
수문 水門
이곳은 북한산성에 설치한 2개의 수문 중 한 곳이다. 다른 수문은 중성中城 지역 계곡에 있다.
수문水門은 성벽 하단에 문을 내어 성 안의 물을 외부로 흘려보내는 배수 시설이다. 대개는 적의 침투에 대비한
철책 시설을 마련해 방어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며 수문의 규모가 작을 경우는 수구水口라 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 패장牌將이라는 기능별 감독관을 두었는데, 성벽 축조를 담당한 '축성 패장'과 수문과
수구의 공사를 지휘한 '수구 패장”도 별도로 두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수문 축조에 고도의 건축 기술이 필요
했다고 보인다.
Water Gate
This water gate is one of two at Bukhansanseong Fortress, the other being located near Jungseongmun Gate.
In general, a water gate was built under a fortress wall, and was installed with an iron fence to prevent enemy attacks. During the construction of Bukhansanseong, paejang (supervisor) was appointed to oversee each facility.
The construction of a small water gate (sugu) required relatively advanced technology, and a supervisor known as sugu paejang.
(안내문)
이 사진의 왼쪽 암벽과 오른쪽의 큰 바위에 기둥을 세울 수 있는 홈이 파인 걸 볼 수 있다.
그곳에 기둥을 세우고 누각을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데, 어디까지나 즐풍의 추측이다.
북한산 서암사 문화재 복원 北漢山 西巖寺 文化財 復元
북한산 서암사는 조선숙종 37년(1711년)에 북한산성 축성 이후 한양 북쪽 수구문 일대 산성의 수비를 위해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규모는 133칸으로 팔도 도충섭 광헌(승려)가 창건하였다.
서암사는 승려들이 수행하며 훈련을 하던 호국승병 사찰이었지만 혼돈기인 19세기말 을축년 (1925년 7월)
대홍수로 매몰되었다.
고려 충숙왕 때 첨의 정승을 지냈던 문인공 민지(1248~1326년)의 유지가 있던 곳에 창건되어 민지사라 불렸으나
나중에 사찰 이름을 서쪽에 있다 하여 서암사로 부르게 되었다.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2006년부터 현 서암사 주지 헤안스님이 발굴 및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안내문)
서암사는 지금도 여전히 복원 중이다.
아래 북한도 지도를 보면 수문 왼쪽에 작은 건물 지붕만 보인다.
북한도를 참고하면 안전하게 암벽 위로 수문을 관리하는 건물을 세웠을 거 같다.
북한산성 北漢山城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1.6km이며 내부 면적은 5.3㎢로
160만 평에 달한다.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의 배후에 산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축성은 1711년 (숙종 37)에야 이루어졌다. 이렇듯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는 데에는 단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아서 당시 축성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성벽은 평지 • 산지 • 봉우리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다.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혹은 1/4만 쌓거나 여장만 올린 곳도 있다. 봉우리 정상부는 성벽을 아예 쌓지 않았는데,
그 길이는 3km이다.
성벽에는 주 출입시설로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로 암문 8곳, 수문 2곳을 두었고, 성벽 바로 옆에는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량 143곳이 있었다.
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이 머무는 행궁,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던 삼군문(혼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의
주둔부대인 유영留營 3곳, 이들 유영의 군사지휘소인 장대 3곳을 두었다. 또한 군량을 비축하였던 창고 7곳,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僧營寺刹) 13곳이 분산 • 배치되어 있었다.
성벽의 높이를 지형에 따라 달리 한 점, 성문의 여장을 한 매의 돌로 만든 점, 옹성과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이중성으로 촉성한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산성의 특징이다.
(안내문)
The Bukhansanseong is a walled mountain fortress built by connecting the peaks of Mt. Bukhan. It is 11.6km in length and 5.3㎢ in area.
The Bukhansanseong has never experienced a war since its completion to today. After the Imjin wa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Manchu war (1636), there was a discussion to build a fortress on Bukhan Mountain to provide against a national crisis. However, the fortress was built in 1711 under the reign of King Sukong. Contrary to the long discussion, it took only 6 months to complete the entire fortress due to the advanced construction technology at that time. There were 6 great gates, 8 secret gates, 2 water gates and 143 seong-rang where soldiers were stationed near the fortress. Also, there were Haeng-gung for the king, and three Yu-young for the stationed troops of the Sam-gun-mun (Hun-ryeon-do-gam, Geum-wei-young and Eo-young-cheong) which guarded the Bukhansanseong. There were also three Jang-dae which is command posts for the Yu-young in the fortress. In addition, 7 storages for munitions and 13 militarv Buddhist temples where monk soldiers were stationed were set un all around the fortress.
(안내문)
시구문인 서암문이나 북문을 생략하며 원효봉을 오르지 않았다.
서암문에서 원효봉까지 오르는 구간의 계단을 밟고 오르는 게 워낙 싫어 생략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4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이 모인 ‘한양의 수도성곽’과 ‘반구천 일원의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고창읍성, 서산의 해미읍성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노력을 한다고 하니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북한산성 순성이 이번 산행의 목적이므로 백운봉암문을 거쳐 백운대까지 오르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백운대는커녕 백운봉암문도 생략하고 만경대 허릿길을 거쳐 용암문으로 가는 길에 백운대를
조망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조금 더 이동하자 백운대에 걸린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게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은 등산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북한산은 지금 단풍이 절정이다. 원효봉 북문 아래 상운사 주변으로 단풍이 보기 좋다.
원경으로 잡아 본 원효봉
가까이서 보는 노적동봉이다.
잠깐 노적 동봉에서 만경봉과 백운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까지 올라왔다.
백운봉위문이 있는 사거리는 고양시와 서울시로 넘어가는 고개이자 백운대과 만경대로 올라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위문으로 격하시켰는데, 습관을 못 버리고 아직도 위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백운봉위문으로 월래의 이름대로 바르게 불러야 할 곳이다.
백운대와 만경대, 그 사이로 위문이 보이니 북한산의 세 봉우리가 모두 보인다.
이 세 봉우리를 함께 불러 삼각산이라고도 하지만 북한산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젠 정상을 연결하는 능선보다 한 발아래에 있는 계곡이 단풍의 절정을 보인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다 보니 붉은 단풍이 피기도 전에 노란 상태로 끝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해 눈으로만 보게 되는 염초봉이다.
염초봉능선이 궁금하면...
노적동봉을 끝까지 다 오르지 않고 전망이 터진 곳에서 잠깐 만경대와 백운대를 조망하고 내려가는 길에 보는 단풍이다.
온 산이 만산홍엽이니 주말인 내일은 북한산의 마지막 단풍을 보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겠다.
북한산성 용암문 방향에서 바라보는 용암봉이다.
용암문 龍岩門
용암문은 북한산성의 대동문 북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용암봉 아래에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암문은 일반 성문과 달리 은밀한 곳에 만들어 전쟁 때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다. 암문은 그 모양이 홍예가
아닌 방형이라는 것이 특징이며 상부에 문루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용암문은 동암문인 보국문과 달리 성
내부 쪽을 홍예형으로 만들었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A postern located in the northern section of Daedongmun in Bukhansanseong (Fortress), Yongammun
(literally "Dragon Rock Gate") was built in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en the construction of Bukhansanseong (Fortress) was completed.
Also called Yongambongammun, as it is located under, Yongambong (Peak), it provided a passage to Ui-dong. Ammun (literally "dark gate" and also a postern), unlike ordinary fortress gates, was built in a secret location and used as a secret passage during times of war. Posterns are characterized by their rectangular entrance a nd lack of a gatehouse.
However, Yongammun features an arched entrance on the inner side of the fortress, unlike the other postern, Bogungmun. The parapets crowning the gate were restored in 1996.
龙岩门是位于北汉山城大东门北部的暗门, 建于山城修筑完成的1711年。暗门不同于一般的城门, 建在极为隐秘的地方, 以便战争时用做秘密通道。它最突出的特点是门形并非是彩虹北, 而是方形, 且上方还没有门楼。1996年, 对龙岩门上方塌陷的余墙进行了复原。
(안내문)
북한산성 北漢山城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 시대 : 1711년(숙종 37),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은평구 • 성북구 • 강북구 일원
이 산성은 1711년(숙종 37)에 북한산에 쌓은 것으로, 임진외란과 병자호란을 격은 뒤 유사시에 대비해 한양
외곽에 성을 쌓자는 논의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산성이다. 당시 완성한 성곽의 길이는 7,620보, 즉 21리
60 보이며,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축성방식을 달리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곽시설로는 군사 지휘소인 장대(將臺)를 세 곳(동장대 남장대 • 북장대)에 만들었고, 성문 6개소(북문 • 대동문
• 보국문 • 대성문 • 대남문 • 대서문), 암문(暗門) 6개소, 수문 1개소를 두었다.
성을 쌓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문제로 삼았던 식수 문제는 99개소의 우물을 파서 해결했다. 저수지도
26개나 만들고, 8개소의 창고를 두었다. 성 안에는 승군 (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을 여러 곳에 두었는데,
승군 총섭이 머물던 중흥사는 규모가 136칸에 달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 규모의 행궁과
140칸에 이르는 군창(軍倉)을 지었다. 근래 훼손되었던 대서문 • 대남문을 보수하였고, 대성문 • 대동문 • 보국문•
등장대 등은 다시 지었으며, 성곽과 여장 등도 보수 • 정비하였다.
(안내문)
Designation: Historic Site No. 162 / Period: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Location : Area covering Jongno-gu, Eupyeong-gu, Seongbuk-gu and Gangbuk-gu, Seoul The fortress on Bukhansan (Mt.) was built in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t was established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from 1592 to 1598 and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in 1636 in order to prepare Hanyang for such future emergencies.
The fortress was 7,620 bo (roughly 8.4 km) when it was completed and various construction methods were employed to accommodate the topography of the region. The fortress is equipped with three command posts (Dongjangdae, Namjangdae and Bukjangdae), six gates (Bungmun, Daedongmun, Bogungmun, Daeseongmun, Daenammun and Daeseomun), six ammun (literally " dark gate" and also a postern) and one floodgate.
The problem of securing drinking water, which provoked opposition to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was solved by having 99 wells dug. In addition to the wells, 26 reservoirs and eight warehouses were constructed. Several Buddhist temples were built inside the fortress for use by the Buddhist monk army. Among these, Jungheungsa (Temple), where the commander of the Buddhist monk army stayed, was as large as 130 kan. In 1712 (the 38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a 130 kan temporary palace and a 140 kan military warehouse were completed at the foot of Sangwonbong (Peak). Daeseomun and Daenammun have been repaired and Daeseongmun, Daedongmun, Bogungmun and Dongjangdae have recently been rebuilt. The fortress wall and parapets have also been refurbished and repaired.
指定编号:史迹第162号 / 年代:1711年(肃家37年
所 在 地:首尔特别市钟路区, 恩平区, 城北区, 江北区 一带
北汉山城是防卫首都的古城。经过壬辰倭乱和丙子胡乱后, 因在汉阳外围构筑防御城的呼声越来越高, 并于1711年(肃宗37年) 在北汉山修建了该山城。当时修筑的城郭周长为7, 620步, 即21里60步。根据地形分别构筑了整个城墙。城墙上设有用于军事指挥所的将合3处, 城门6处, 暗门6处和水门1处。为了解决反对建城的人提出的饮水问题, 开凿了99处水井。此外, 这里还有驻扎僧军的寺院12处, 于1712年(肃宗38年)又建造了行宫与军仓。最近, 对已被损毁的大西门, 大南门进行了修缮, 而大城门、大东门、辅国门, 东将合等都进行了重建, 同时还对城墙与余墙等处进行了大整修。
(안내문)
만경대 동쪽 방향은 앞서 노적동봉에서 보던 풍경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북한산성은 왕궁이 있는 서울 방향에 짓지 않고 반대편인 고양시계에 지었다.
북한산에서 가장 암릉이 많아 염초봉이나 백운대, 만경대, 의상능선 등이 훌륭한 자연적인 성벽 역할을 한다.
이런 만경대는 자연적인 성벽으로는 최상급이다.
백운대에서 염초봉으로 이어지는 구간과 의상능선의 대부분이 그렇다.
멀리서 보는 노적봉
북한산성 어느 곡성에서 다시 보는 노적봉과 만경대
동장대 東將臺
동장대는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장대로 1712년(숙종 38년)에 지어졌다. 장대는 장군의 지휘소로 북한산성에는 동장대 외에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는 등장대만 남아 있다.
동장대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하던 곳으로 장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었다. 장대의 평면은 정방형이며, 증층 구조로 아래층은 벽 없이 트여 있어서 지휘하기에 편리하도록 했으며, 위층은 창으로 막아 방을 만들어 사용했다. 장대의 구성이나 모습은 수원 화성의 서장대와 거의 같다. 이 장대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Dongjangdae
Located in the eastern section of Bukhansanseong (Fortress), Dongjangdae (literally "East Command Post") was built in 1712 (the 38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There were in Bukhansanseong (Fortress) originally three command posts, including Namjangdae ("South Command Post") and Bukjangdae ("North Command Post"), in addition to Dongjangdae. However, only Dongjangdae remains to this day. Dongjangdae was regarded as being more important than the other two as it was positioned by the commander-in-chief. This particular command post features a double-story building with a square floor plan. The lower floor has no walls, which allowed the commander to better control and organize his forces, and the upper floor contains a room with windows.
The form and structure of Dongjangdae are very similar to those of Seojangdae ("West Command Post") in Hwaseong (Fortress) in Suwon, Korea. The original building was destroyed by a fire, and the current structure was restored in 1996.
东将台是位于北汉山城东侧的将台, 建于1712年。将合是将军的指挥所, 北汉山城除了东将台以外, 曾经还有南将台和北将台, 但现在仅存东将台。原有的将台已经不复存在, 现在的将台于1996年重新修复完成。
(안내문)
북한산성에서 성벽을 온전히 들어낸 곳은 칼바위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다른 곳은 대부분 암문을 통해 북한산으로 드나들 수 있는데 이곳은 암문을 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라
성벽을 복원할 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성벽을 세우지 않았다.
그곳과 가까운 곳에 이런 작은 치성이 있다.
치성에서 바라보는 칼바위 구간이다.
보국문 輔国門
보국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보국문은 소동문 또는 동암문이라고도 한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쟁 때에는
비밀동료로 사용되었다. 안문은 플로 만들었지만 용에 형 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993년에 보국문 상부의 여장을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Bogungmun
Bogungmun (literally "Patriots' Gate"), a postern located in the southeast part of Bukhansanseong (Fortress), was built in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en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was completed.
Also called Sodongmun ("Small East Gate"), or Dongammun ("East Postern"), Bogungmun allowed for the passage of ordinary people but was also used as a secret passage during times of war. The gate was built from stone and is marked by its rectangular, rather than arched, entrance and its lack of a gatehouse. The gate's upper structure, including its parapets, was restored in 1993.
辅国门是位于北汉山城东南侧的暗门, 建于山城修筑完成的1711年。暗门平时用于百姓的出入门, 战时用于秘密通道。暗门设有方形进出口门, 没有门楼均为特点。辅国门上方的余墙, 于1993年重新修复完成。
(안내문)
대동문은 복원공사 중이라 사진을 찍지 않고 지나왔다.
그 이후에 보국문을 만났고 , 이곳의 성벽도 복원 공사 중이다.
모처럼 능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단풍나무다.
북한산(北漢山)
고려시대부터 불려 내려온 삼각산이라 함은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인수봉(仁壽峰) 세 개의 봉우리를 말하며,
백운대(836.5m)는 북한산 제일봉이다. 또한 만경대(799.5m)는 조선조 태조가 왕사(王師) 무학대사와 올라 도움을 정했다 하여 국망봉(國望峰)이란 별명이 있다. 인수봉(810.5m)은 암벽등반장비를 갖추어야만 오를 수 있는 국내 제일의 암봉이며 "등에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하여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칭하였다. 노적봉(716m)은 높고 웅장한 바위산으로 노적가리 모양과 같다 하여 노적봉으로 불린다. 북한산(北漢山)의 명칭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고, 조선조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한 이후 한강 이북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불려지고 있으며 한강 이남에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Samgaksan Mountain, a name that can be traced back to the Goryeo period, refers to three peaks:
Baegundae Peak, Mangyeongdae Peak, and Insubong Peak. Baegundae Peak is the tallest part of Bukhansan Mountain. Mangyeongdae Peak (799.5 m) is also called Gungmangbong Peak (meaning "a peak embodying the hopes of the dynasty") as it was the place where King Taejo decided on a new capital, along with Buddhist monk Muhak who was his teacher. Insubong Peak (810.5 m) is one of Korea's most rugged peaks, and you can only visit it when equipped with rock climbing gear.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it was called "Buaak" to signify a "mountain carrying a baby on its back." Nojeokbong Peak (716 m) is a tall and magnificent, rocky peak. It derives its name from the shape of nojeokgari meaning "haystack." Furthermore, the name of Bukhansan Mountain can also be traced back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After Bukhansanseong Fortress was built during King Sukjong's reign in the Joseon Dynasty, the term "Bukhansan Mountain" began to mean "a mountain north of Hangang River" On the other hand, Nanhansanseong Fortress is located south of Hangang River.
(안내문)
북한산에서 강북구로 내려가는 칼바위다. 좀 전에 어느 치성에서 보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성덕봉에 있는 작은 곡성
문수봉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하면서 보는 성덕봉의 곡성
이곳은 경사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만큼 성벽의 여장도 높은 층을 이루며 올라간다.
다시 보는 성덕봉은 조망이 좋아 아는 사람은 자주 찾는다.
대성문에서 일선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구간의 단풍이다.
대성문 大城門 Daeseongmun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37년)에 지어졌다.
문의 형식과 규모는 대남문과 같다. 대성문은 형제봉 능선을 타고 서울의 북쪽 평창동과 정릉동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 단층 문루는 우진각 지붕 형태인데, 이는 지붕 네 면 모두에서 불화살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Located in the southeastern section of Bukhansanseong (Fortress), Daeseongmun (literally "Great Fortress Gate") was built in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en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was completed. Daeseongmun is a gateway that is linked to Pyongchang-dong and Jeongneung-dong in Seoul, along the ridge of Hyeongjebong (Peak). It features an arched entrance containing a pair of large doors in the lower part of the building and a single-story gatehouse on top marked by a hipped roof. This particular roof type was adopted to defend against flaming arrow attack on all four side of the roof. The original gatehouse was destroyed by a fire, and the current building was restored in 1992.
大城门是位于北汉山城东南侧的城门, 建于山城修筑完成的1711年。它是连接首尔北部平仓洞和贞陵洞的重要关门。虹霓门上方, 建有类似大南门的单层门楼。原有的门楼己被火烧毁, 现在的门楼于1992年重新复修完成。
(안내문)
보현봉 방향은 역광이라 산세를 알아보기도 힘들다.
대남문은 산성과 이어진 누각을 통해 내려간 후 밑으로 내려가 대남문을 바라보게 된다.
대남문 大南門 Daenammun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산성이 축성된 1711년(숙종 이년)에 지어졌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단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이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Located in the southernmost section of Bukhansanseong (Fortress), Daenammun (literally "Great South Gate was built in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en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had been completed. It was once known as Sonammun (literally "Small South Gate") and was a strategically important fortress gate linked to the fortification of Seoul and Tangchundaeseong (Fortress Wall) via the Bibong Ridge.
The gate features an arched entrance with a pair of doors and a single-story gate house built for command of the army and the protection of the gate. The original gatehouse was destroyed by a fire and the current one was restored in 1991.
大南门是位于北汉山城最南端的城门, 建于山城修筑完成的1711年。它是连接都城荡春台城的战略要门。在虹霓门上方, 建有指挥士兵, 守护城门的单层门楼。原有的门楼已被火烧毁, 现在的门楼于1991年重新复修完成。
(안내문)
대남문에서 문수봉은 잠깐이면 오른다. 문수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연화봉 방향
오늘은 갈길이 머니 저 문수봉을 오르는 것도 생략한다.
지금부터 꼭 312년 전인 1711년에 11.6km나 되는 북한산성을 단 6개월 만에 완성했다.
축성 공사 전체 구간을 삼분해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이 각각 구간을 정해 경쟁하듯 쌓았을 것이다.
염초봉과 백운대, 만경대, 의상능선의 일부 구간등은 암릉을 자연적 성벽으로 활용한 구간도 많다.
그렇다고 해도 바위를 자르고 다듬어 성벽까지 옮기고 쌓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오늘날 현대 장비를 이용해 성벽이나 문루를 복원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당시엔 변변한 장비도 없이 큰 성을 쌓을 때 그들이 노고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2부로 작성한 의상능선의 북한산성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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