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93 B
2023. 10. 27. (금) 08:45~17:27, 8시간 43분 탐방, 휴식 1시간 48분 포함, 14.6km 이동
북한산의 북한산성을 순성 하겠다고 왔지만 원효봉이 품고 있는 서암문과 북문을 생략했다.
정상인 백운대를 코앞에 두고 백운봉암문도 생략했으니 혼산이 갖는 장점이다.
이렇게 서암문과 북문, 백운봉암문에 이어 하산할 때는 중성문까지 생략하며 거리 부담을 줄였다.
맑고 끝 간 데 없이 공활한 가을하늘을 기대했지만 원하던 날씨가 아닌 게 다소 아쉽다.
추분을 지나며 해 짧은 계절을 핑계로 하산한 의상능선을 마지막에 담아본다.
북한산성 종주 코스
북한산성 행궁지 (北漢山城 行宮址)
북한산성행궁은 도성 외곽의 전략적인 요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한 행궁으로서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이며, 도성 방어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다른 행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후기 집권층의 국가의식과 애민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현재는
행궁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1999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노출되고 지하에도 유구가 매장되어 있는 중요 유적이다.
(출처_문화재청)
사실, 북한산성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 이틀은 걸린다.
첫날은 북한산성을 온전히 돌고, 두 번째 날은 북한산성 행궁과 여기저기 흩어진 관방유적을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산성 행궁과 나머지 관방유적 모두 흔적만 남아 있으니 의미가 없기도 한다.
산성을 짓고 유지관리하던 중흥사는 터만 남았던 걸 최근에 복원하며 근사하게 들어섰다.
대성문 아래에 있는 대성암은 어영청 유영지가 있던 곳이라 지금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청수동암문 淸水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청수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Cheong-su Dong-'am-mun
The Cheong-su Dong-'am-mun is located on the path between the Na-wol-bong Peak and the Mun-su-bong Peak of Bukhan Mountain. It is one of eight secret gates built with the walls of the Bukhansanseong in 1711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t was designed to control the road from Tang-chun-dae-seong and Bi-bong toward the fortress. This secret gate was used as access to bring in weapons, munitions and injured soldiers during emergencies.
(안내문)
암문 밖에서 보면 문을 닫았을 때 문을 당겨도 밖으로 딸려 나오지 못하게 가운데 돌을 돌출시켰다.
이 바위는 하나의 바위로 가로지른 것이다.
위 안내문에도 있듯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에도 남한산성처럼 성랑지가 많이 남아 있다. 성랑은 작은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단순한 건물이다.
북한산성 행궁
ㅇ 북한산성 행궁은 숙종 37년 8월부터 38년 5월에 걸쳐 건립되었다. 당시 행궁의 규모에 대해서는 성능이
지은『북한지』궁전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전 28칸 외전 28칸을 비롯해 그에 따른 부속건물도 있었다.
ㅇ 내전은 좌우상방이 각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 퇴가 18칸으로 모두 28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좌우
행각방 9칸, 청 5칸, 중문 1칸과 대문 3칸, 수자소 5칸, 중문 1칸, 측소 2칸 등이 갖추어져 있다.
ㅇ 외전도 내전과 마찬가지로 28칸으로 되어 있고, 모든 체제도 내전과 같았다. 다만 대 문 3칸, 북협문 1칸,
외북장중문 1칸, 외행각방 12칸, 루 4칸, 청 4칸, 허간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외대문 1칸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ㅇ 그런데 이보다 뒤에 기록된『동국여지비고』한성부 궁실조에는 북한 행궁의 내정전과 외정전이 각각 28칸
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나, 행각, 월랑 등 73칸을 지어 도합 1백29칸이라고 하고
있어 칸수에 있어서『북한지』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ㅇ 북한산성 행궁은 숙종의 지대한 관심 속에 이룩되었다. 행궁의 축조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에도 북한산에
거동하고자 하였다. 행궁이 완공된 이후, 1717년(숙종 43)에 북한산성 행궁에 직접 행행 하여 유숙하였다.
이처럼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북한산성 행궁이 새로이 마련된 것에 의의가 크다. 전쟁 시 도성을
버리던 과거의 사안으로부터 탈피하여 도성 수비에 대한 강력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ㅇ 이후 영조도 1760년 8월(영조 36년)과 1772년 8월(영조 48)에 걸쳐 거동하였고, 대대적인 수리도 있었다.
1877년(고종 16)에 큰 홍수로 행궁이 훼손된 뒤 총융사 조의복의 보고에 따라 다시 고쳐 지은적도 있다.
1891년(고종 30)에도 행궁을 중수하였다. 이같이 영조대에서부터 구한말까지 비교적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ㅇ 그러나 1904년 행궁지를 조사한 관야정은 “수리를 게을리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고 무너져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1891년의 보수를 마지막으로 거의 방치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와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더 이상 행궁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그 후 1915년 8월의 대홍수로 행궁지 전역이
파괴되어 폐허화되었다.
ㅇ 행궁지는 뒤쪽 상원봉을 주봉으로 하여 동 서쪽으로 내려오는 계곡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구축한 후 계단식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주변에는 석축으로 담장을 쌓았다.
담장 안의 면적은 동서 98m, 남북 127m로 약 4,136평 정도이다.
(출처_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 Ⅱ에서 일부 발췌)
나한봉 정상에 쌓은 치성
내려갈 구간의 의상능선이다.
나한봉 치성
치성은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밖으로 내어 쌓은 구조물로, 적군의 접근을 초기에 관측하고, 전투할 때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하기 위해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지성'의 '치'는 꿩이라는 뜻인데, 성곽
구조물의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며, 성곽의 역할이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꿩의 습성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해발 688m에 조성된 나한봉 치성은 성곽의 남서쪽을 관측하기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양을 비롯한 한강 유역
을 한눈에 관측할 수 있으며, 서쪽의 한강하구와 멀리 강화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나한봉 치성의 구조는 3~4단의
성벽이 있고,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자연 절벽으로 이어진다. 북서쪽은 30cm 내외로 흙을 사용해 바닥을 평편하게
했으며, 외성벽 아래쪽은 계단식으로 만들어 성벽을 보강했다. 치성의 길이는 10m, 너비 4.4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m 내외다. 내부에서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초석 1기와 초석을 받친 적심 1기, 유구 2기가 발견
되었는데, 130㎝ 내외로 간격이 일정하다. 지붕을 만든 재료로 보이는 기와도 발견되었다.
This defensive structure projecting outward from the curtain wall of Nahanbong Peak was built to observe enemies' movements and defend the city walls from their attacks. The Korean name of the structure chiseong ("pheasant wall") is known to have originated either from its supposed similarity to the way the bird's head protrudes from its body or from the bird's behavior of hiding its body to observe its surroundings.
The Nahanbong Peak Outwork, built 688m above sea level, provided a fine vantage point over the southwestern section of Bukhansanseong Fortress. The outwork also overlooked the middle reaches of the Han River, including the fortified city of Hanyang (present-day Seoul) and as far west as the river estuary and Ganghwado Island.
The Nahanbong Peak Outwork was built by laying three to four layers of stones on a ledge of steep cliffs on three sides, smoothing and leveling the earthen floor, and adding stairs to the retaining wall. At the outwork, which measures 10m long, 4.4m wide and 1m high, archaeologists also discovered a foundation stone, two piles of filler stones (with a regular space of about 130cm between them) and some roof tiles, suggesting that it once had a building.
(안내문)
나한성 치성을 높지 않게 쌓은 것은 서남방향으로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바위는 언제부터인지 출입금지로 묶어 놓았다.
북한산 정상부 일대 조망
북한산 계곡의 중심에 있는 중흥사는 북한산성을 쌓을 당시 가장 큰 사찰이었다.
폐사지로 남아 있던 사찰을 최근 거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성을 내려오는 데 헬기가 오후 내내 여장을 복원할 돌을 나른다.
한 번에 네댓 개의 자루를 묶어 공사할 구간에 정확히 투하한다.
현장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 자루에 대략 700~1,000kg의 돌이 들어 있다고 하니 약 5톤 정도를 실어 나르는 셈이다.
동영상을 찍었는데 실수로 삭제하여 생생한 화면을 제공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이곳 여장은 숙종 때 만든 상태가 많이 훼손되어 새로 설치할 예정이다.
부왕동암문 扶旺洞暗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성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쪽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부왕동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출입구의 모양은 암문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각 형태가 아니라 외관상 무지개 모양의 홍예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부왕동암문 아래에는 원각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원각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
하였던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 수축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까닭에 부왕동암문은 원각문으로도 불린다.
Bu-wang Dong-'am-mun
The Bu-wang Dong-'am-mun is located on the pass between the Na-wol-bong Peak and Jeung-chwi-beng Peak.
It is one of eight secret gates built with the walls of the Bukhansanseong in 1711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t was designed to control the road from the Sam-cheon-sa outside the fortress to the Jung-heung-sa inside the fortress. This secret gate was used as access to bring in weapons, munitions and injured soldiers during emergencies.
The Won-gak-sa was located right under the gate. It was a military Buddhist temple and monk soldiers were
stationed in the temple to maintain, defend and superintend the Bukhansanseong.
The Won-gak-sa was in charge of defending and maintaining the Bu-wang Dong-'am-mun. For this reason,
this secret gate is also called 'Won-gak-mun'.
(안내문)
증취봉甑炊峰이다.
북한산성을 지을 때 붙였는지 아니면 그전부터 있던 이름인지 모르겠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가정에서 시루떡을 할 때 이렇게 생긴 시루에 쌀가루를 넣고 시루떡을 해 먹었다.
배고프던 시절이라 시루에 불을 지펴 시루떡을 해 먹자는 의미를 담았겠단 생각이 든다.
사실 북한산성을 돌며 성벽 위주로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 데, 찍고 보니 성문 위주로 찍었다.
성벽보다 성문이 더 특이하고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북한산성의 대부분은 조선조 숙종 때 쌓은 것이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현대에 복원한 구간이 더 많다.
조선의 것이라고 하나 현대의 기계로 돌을 자르고 가다듬어 자로 잰 듯 빈틈없는 성벽을 만들었다.
몸은 300년이 넘었는데, 옷은 현대식 양복을 입은 꼴이니 너무 시대착오적인 셈이다.
의상능선의 대부분은 이런 암릉 구간이 많아 산상은 간간이 보이는 구간이다.
강아지바위
다시 보게 되는 북한산 정상 일대
의상능선의 마지막 구간인 용출봉과 의상봉이다.
산성 위주로 산행할 생각이므로 의상봉은 밟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용출봉만 잡아보기
자명해인대가 새겨진 바위
자명해인대(紫明海印臺)는 산자수명(山紫水明)과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따온 말이다.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고 고요한 바다가 삼라만상을 비추듯이 번뇌를 없애고
우주의 모든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풍광을 지녔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즈음 북한산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으니 산자수명하지 않은 곳이 없다.
막 내려온 용혈봉 방향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의상봉에 그림자가 질리 없으니 하늘의 구름이 햇빛을 가렸나 보다.
가사당암문 架娑堂暗門
북한산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 중 하나로, 현재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 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
가사당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양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
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돌과 일반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가사당암문 아래에는 국녕사가 자리 잡고 있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수비·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이었는데, 가사당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암문은 국녕문으로도 불린다.
Ga-sa Dang-'am-mun
The Ga-sa Dang-'am-mun is located on the pass between the Ui-sang-bong Peak and the Yong-chul-bong
Peak of Bukhan Mountain. It is one of eight secret gates built with the walls of the Bukhansanseong in 1711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it was designed to control the road from the Ui-sang-bong-ro to
Bukhansanseong.
This secret gate was used to bring in weapons, munitions and injured soldiers during emergencies.
It was an emergency exit, but also it was installed on a hill or a mountain ridge that was hard accessible
by enemies in order to protect the fortress from them. The Guk-nyeong-sa which is located right under
the gate was a military Buddhist temple that played a crucial role in maintaining, defending and superintending
the Ga-sa Dang-'am-mun. For this reason, this secret gate is also called 'Guk-nyeong-mun'.
(안내문)
헬기로 여장을 복원할 돌을 실어 나르던 구간의 오래된 여장과 복원한 구간의 여장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복원해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옛것이 사라지니 안타까울 뿐이다.
새로 복원한 여장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또 과거의 것으로 조명받을 것이다.
아침에 오르지 않았던 건너편 원효봉이다.
이 바위는 사진으로 보면 평탄해 보이지만, 실제 올라가려면 경사가 심해 오르기 어렵다.
용출봉을 넘어와 대서문으로 연결되는 성벽길로 접어든다.
처음에 맞는 길로 접어들었으나 이젠 사용하지 않는 길이다 보니 잘못 들었나 싶어 다른 곳으로 가 보기도 했다.
결국 처음 길로 접어들며 이 와이어로프 구간이 보이자 제대로 길을 찾았단 생각에 안심한다.
고도를 조금 낮추자 붉게 물든 단풍이 오지게 반겨준다.
올해 마지막으로 보는 단풍인가 싶었는데, 이틀 후 남한산성을 다녀오며 또 한 번 단풍을 감상했다.
급경사 구간을 지나며 대서문이 가까워지자 성벽은 또 거창하게 나타난다.
이 성벽은 대서문을 거치며 처음 올라올 때 보던 수구문의 성벽과 만나게 된다.
대서문 大西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성문 16곳 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 1712년(숙종 38)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
했을 때, 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에 마을이 있었을 당시엔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던 성문
이기도 하다.
지금의 문루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문루의 형식은 우진각지붕으로
문루의 일반적인 지붕 형태를 따르고 있다. 관영 건물이므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강회로 마감하였다.
누각에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 준다. 문루의 배수시설로 용머리 모양의 누혈
(漏穴해:물이 흘러내리도록 구멍을 뚫은 돌)을 성문 앞뒤로 두었다.
성 밖을 바라보는 용은 입을 벌려 누혈의 구실을 제대로 하게 하였으나, 성문 안쪽에 있는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장식용으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문루 정면에는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한 장의 화강암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북한산성의 대문 6곳 모두에는 이런 독특한 형식의 여장이 올려져 있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 이 대문 3곳을
맡아서 수비 관리하였던 군부대는 어영청 유영이었다.
Dae-seo-mun (Great West Gate)
Dae-seo-mun is the main gate of the Bukhansanseong and is located on the lowest spot among total 16 fortress gates.
In 1712 King Sukjong (the 19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entered this fortress through the Dae-seo -mun, and when there was a village in the fortress, the village people used this gate for generations. The present gate tower was restored in 1958. The road from the Dae-seo-mun through Jung-seong-mun to the Dae-nam-mun was the main road of the Bukhansanseong. These gates had been guarded and superintended by the troops of Eo-young-choeong Yu-young.
(안내문)
대서문을 나서며 사실산 북한산성 탐방을 마친다.
300여 회 정도 북한산을 다니며 산성의 한 귀퉁이라도 보기 마련이지만, 오랜만이라 새롭다.
원효봉과 백운대를 생략함으로써 부족한 느낌이지만 즐풍으로선 자주 다녔기에 미련은 없다.
다음 기회가 되면 탕춘대능선에서 흥지문을 거쳐 인왕산까지 연결할 생각이다.
그날은 아무래도 내년 이후로 미루어야겠다.
이렇게 미약하나마 북한산성 종주기를 마친다.
먼저 작성한 북한산성 1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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