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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사찰 탐방

강화도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

by 즐풍 2023. 11. 18.

 

 

 

2023. 10. 13. 금요일 오전

 

 

오전에 삼랑성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전등사를 들린다.

전등사는 이미 여러 차례 들리긴 했어도 오래전의 일이다.

사찰은 전국 어딜 가나 대개 비슷한 모양에 건물이 오래되거나 짧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전등사는 역사가 깊어 6개의 보물이 있는 1640여 년 된 고찰이다.

삼랑성 탐방을 끝내고 동문으로 들어선 후 남문으로 나가려다 오랜만이라 둘러보기로 한다.

먼저 발을 디딘 곳은 무설전 앞에서 전시되는 "우리나라 불탑 사진전"을 관람한다.

 

 

 

 

 

무설전無說殿의 부처님

 

불상 작품은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적 감각 특히 인체 비례를 반영시켰다. 주불 석가모니불 좌상은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을 연상시킬 만큼 당당한 대장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주불의 늠름한 기상은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엄미와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는 인도자로서의 원만함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반면에 협시보살은 현대인의 인체 

비례 감각을 감안하여 제작된 바, 지장보살 좌상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관음보살 좌상은 이웃집 보살님처럼 

친근미와 더불어 품격 있는 원만상이다. 

이들 다섯 분의 불보살상은 비슷한 것 같지만 相好와 옷매무새 등을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르다. 

주불을 비롯해 협시보살상과 1천 불 원불은 모두 청동주물 작업에 백색 도료를 입힌 작품들이다.

                                                                                                            (안내문)

무설전無說殿 내부의 모습

 

 

사찰에서도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놓여 있다.

 

 

이곳에선 탄주스님께서 만드신 천연염색 실크스카프를 판매 중이다.

 

 

왼쪽 건물 안에서는 조선의 군사깃발 전시 중이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마당을 가득 메운 느티나무 고목의 오래된 사찰임을 증명한다.

 

 

 

 

전등사 철종

 

보물 제393호전등사 철종은 중국 송나라 때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 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겼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 두 마리로 만든 종 고리가 있다. 종의 몸통 윗부분에는 팔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정사각형 여덟 개를 새겼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 1097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This iron bell was made in 1097 at Chongming Temple (崇明寺) on Baiyun Mountain in Henan Province,

China. It came to Korea as a part of the forced exploitation of metal resources among the colonies of the

Japanese empire in the early 20th century.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colonial rule in 1945,

the bell was discovered in a military equipment warehouse in Bupyeong and moved to Jeondeungsa

Temple to be preserved.

The cannon at the top of this bell, by which it is hung, is decorated with twin dragon heads.

The top of the bell's body is decorated with the eight diagrams of Daoist cosmology, below which are

two rows of eight squares with inscriptions written inside of them. Among the inscriptions are records

of the year and location in which the bell was made.

                                                                 (안내문)

 

무쇠로 만든 종이라 지금까지 봐 왔던 청동 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우리나라 종은 대부분 비천상을 조각했는데, 무늬가 단순한 편이다.

사진을 찍은 게 균형을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기울어져 철종만 따로 뽑아냈다.

위에 거는 종 고리는 그림자가 져 뽑아낼 수 없었다.

 

 

철종이 보관된 범종각

 

 

 

명부전

 

 

 

 

마애불 / Rock-carved Buddhas 이영섭 작

 

세계 최초 ‘발굴 기법' 작가인 이영섭은 땅을 거꾸로(음각으로) 조각해 거푸집으로 삼고,

그 안에 혼합재료를 부은 후 굳으면 이를 캐낸다. 그리곤 최소한만 매만져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같은 작업방식은 작가만의 독자적인 창작 방법으로, '발굴 작가'로 불린다.

출토된 작품은 표면에 풍화된 흔적이 남으며 오래된 시간성과 현대적 세련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Yeoungsup Lee, the world's first 'excavation technique' artist, sculpts the

ground upside down (intaglio) to use it as a mold, pours mixed materials

into it, and digs it out when it hardens. He finishes the work with minimal

touches. This type of work is the artist's own creative method and is called

'excavation artist'. The excavated works leave traces of weathering on the

surface, and have aspects of both old time and modern sophistication.

                                                                                                                (안내문)

 

작품을 보면 부처님 얼굴을 중심으로 손과 몸을 가린 가사는 고운 모래로 틀을 만들어 곱고

그 외 구간은 투박하게 처리함으로써 부처님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이용했다.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江華 傳燈寺 木造 地藏菩薩 三尊像, 十王像 一括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은 전등사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한

총 31구의 불상을 말한다. 지장보살은 저승 세계인 명부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며, 시왕은 저승 세계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이다.

이 불상은 조선 인조 14년 1636에 수연을 포함한 12 명의 승려 조각가와 신도 4명이 함께 제작하였다고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불단 가운데에는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가 뛰어난 민머리의 지장보살이 앉아 있다.

지장보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 준다는 귀신의 왕인 무독귀왕이 서 있고,

왼쪽에는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이승에 돌아와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렸다는 도명존자가 젊은 승려의

모습으로 서 있다. 양쪽 시왕상 옆으로는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상, 귀왕상, 녹사상, 동자상,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 등 여러 권속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2010년과 2011년에는

지장보살 좌상과 시왕상에서 불교 경전과 복장 발원문, 후령통*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수연의 석가여래 삼불

좌상보물 제1785호보다 10여 년 늦게 제작된 불상으로, 수연 작품의 완숙된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17세기 전반의 불상과 승려 조각가의 유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강화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

(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 되어 있다.

                                                                                                    (안내문)

 

 

전등사 약사전 후불탱|傳燈寺 藥師殿 後佛幀

 

후불탱은 불상 뒤에 봉안하는 불화를 말하며,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다. 이 불화는 고종 21년(1884)에

제작된 것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폭 중앙에 약사삼존불을 배치하고, 화면의 네 모서리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네 명의 수호신장인 사천왕을 그렸다. 약사여래의 광배光: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원광 양옆에는 부처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을

그렸다. 약사여래는 왼손에 금빛의 약함을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를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안내문)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 藥師殿 現王幀

 

현왕탱은 사람이 죽은 지 3일이 된 망자를 심판하는 현왕과 권속 부처님이나 보살을 따르며 불법을 닦는

대중을 그린 불화이다.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은 약사전 불단 왼쪽에 자리한 영단壇: 영혼의 위패를 두는

단에 걸려 있다. 화면 하단에는 '고종 21년 1884에 승려 화가인 진철과 긍법이 그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관음전

 

 

 

 

 

 

 

 

 

 

 

 

 


나부상 (裸婦像)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유추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 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소. 찾을 생각일랑 마시오.”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나부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부상 전설이 사실이라면 도편수는 왜 나부상을 조성했으며, 스님들은 왜 처마 밑에 나부상을 조성하는 

것을 용인했을까?
단순히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떠난 욕심에 눈먼 여인을 단죄하고자 하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나부상들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계에서는 대웅보전 처마 밑의 조각상들이 나부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상들이 나찰(羅刹) 내지는 야차(夜叉)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상징 연구가인 허균에 따르면 

이 조각상들은 “불교 외호 신중인 나찰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하며 불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한다. 

반면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조각을 연구한 신은미는 “불법을 수호하는 야차”라고 해석했다. 나찰은 주로 동남

아시아에서 사찰의 수호신으로 조각되고, 야차는 인도 초기 석굴과 석탑의 출입문에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조각되었다.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를 받치는 조각상의 역할은 불법과 불전, 불자를 수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의 연원을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장을 받치는 역사상’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일부 학자들은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 조각상들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원숭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나부상이 원나라 제국대장 공주라고 주장한다. 그려 충렬왕의 첫 부인인 정화궁주가 

자신을 괴롭히는 두 번째 부인인 제국대장 공주를 조각으로 형상화하여 지붕을 받치는 벌을 줬다는 것이다.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태자 시절 1남 2녀를 낳고 14년간 부부로 지냈다. 그런데 남편이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 공주와 정략결혼하자 후궁으로 전락해 전국대장 공주로부터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충렬왕과의 만남이 금지되고 별궁으로 쫓겨났다. 고난의 시기에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옥등과 대장경을 전하였다.

 전등사(傳燈寺)라는 사명(寺名)도 정화궁주가 전한 옥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출처_전등사 홈피)

 

 

강화 전등사 대웅전 江華傳燈寺 大雄殿

 

대웅보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다.

대웅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보살은 석가모니불과 같지만 중생교화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은 화려한 내부 장식과

능숙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건축물이다.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지붕

처마 무게를 받치는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짜여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다.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에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절을 짓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막 여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쁜 짓을 꾸짖어 하루 세 번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죄를 씻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추녀 밑에 새겨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부처를 모신 불단과 불상 머리 위의 닫집 * 장식이 화려하다.

* 닫집 : 법당 안 불단 위를 덮도록 만든 집의 모형. 부처님이 설법할 때 사용한 햇볕 가리개를 표현한 것.

                                                                                                                              (안내문)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전등사 대조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전등사 시'에서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안내문)

 

다시 보는 대웅보전 

 

범종각

 

 

 

명부전

 

 

 

 

계단을 통해 들어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해태상은 불조심하라는 경계의 눈빛처럼 보인다.

 

 

 

 

 

강화도에 있는 많은 사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외침을 많이 받아 대부분 호국불교로 탄생한 느낌이다.

전등사만 해도 삼랑성 안에 있으면서 승려들이 승군 역할을 하며 성을 유지·보수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은행알 열 가마를 수확하는 전등사에 스무 가마를 올려보네라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조시시대를 관통하며 불교를 억압하던 때라 스님들의 지위는 상놈과 다를 바 없이 부려먹던 시대이다.

그래도 전쟁이 나면 승군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지켰으니 아이러니한 시대였다.

삼랑성은 물론 정족사고까지 지켜야 했던 그들의 노고가 깃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