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37C
2023. 8. 26. (토) 오후에 탐방
오늘 일정의 백미랄 것도 없지만, 최종 목표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다.
그것도 흔하디 흔한 석재 당간지주가 뭐 볼 게 있겠냐마는 신라시대 당간지주 중에서 지주 표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유일하게 건립 시기와 기간, 제작과정과 작업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이 하나를 보기 위해 집에 나서기는 너무 가성비가 떨어지므로 삼성산 등산 후 안양박물관과
김중업 건축박물관 탐방 후 보게 되니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실감 난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양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바로 보인다.
주소: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 길 4(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4)
안양박물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김중업 건출박물관이 보이고, 오른쪽에 안양박물관이 보인다.
두 건물 모두 김중업 건축사가 설계한 건물로 유유산업 안양공장이었는데,
안양시에서 인수하여 두 개의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김중업 건축사가 이 건물을 설계할 때 사후 자신의 박물관으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겠지만
생전에 그의 성과를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흡족할 것이다.
중초사의 건립
삼국시대 한강 하류 지역을 둘러싸고 삼국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오늘날 경기도 지역은 통일신라의 9주 중 한주의 영역으로 편성되었다.
한주의 중심지는 남한산성과 가까운 오늘날 하남시 일대였지만 여전히 변방지대였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한주의 변방지역에 대한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특히 서해안 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져 중국과의 왕래를 위해 중요한 항구인 당성은
928년 당성진으로 개편되어 군사 거점으로 성장했다.
특히 장제군은 혈구진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수성군은 당성진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따라서 한강 하류 남쪽 지역에서는 장제군長堤郡(지금의 인천 부평)과 수성군(화성시 동부와 수원시)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관악산과 삼성산은 광주와 수성, 장제 세 거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한강은 물론, 한강 북쪽 지역까지도 멀리 조망할 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한주 주치 방면, 서쪽으로는 장제 방면, 남쪽으로는 수성 방면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한주의 서해안 지역의 개척이 진행됨에 따라 관악산 일원의 지역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아울러 안양천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너면 고봉과 행주, 교하, 봉성 등
오늘날 고양시 파주시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였다.
그러한 시기에 관악산 일대에 대찰인 중초사中初寺가 건립되었다.
안양사의 전신인 중초사의 당간지주는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완성하였다.
그 시점은 당성진과 혈구진이 설치되면서 경기도 서해안 지역의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와 일치한다.
오늘날 안양지역은 한주 주치와 수성, 장제의 세 거점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다.
(출처_안양박물관 홈피)
사실 유유산업 안양공장이 있던 부지는 신라시대에 제법 거창한 중추사란 절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퇴락해 사찰은 폐허가 되고 남은 건 삼층석탑과 석당간뿐이었다.
그에 더해 석당간 앞에는 남회랑지로 여겨지는 건물의 주춧돌 몇 개가 그날의 영화를 말한다.
아래 설명의 안내문 오른쪽 그림에서 둥근 동그라미가 남은 주춧돌로 제법 큰 회랑란 걸 유추했다.
이렇게 역사는 남아있는 유물 몇 개로 그 단초를 하나씩 꿰어가는 과정이다.
안양 중초사지 삼층석탑 (安養 中初寺址 三層石塔)
원래 당간지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60m 떨어진 지점의 사역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무너져 있었는데,
1960년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기단은 단층으로 지대석은 판석형 석재를 여러 매 결구하여 마련하였다.
그 위에 각형 2단의 별석(別石) 받침을 높게 두었는데, 고려 시대 석탑에서 채용된 수법을 보인다.
면석(面石)은 4매의 석재를 결구하였고, 우주(隅柱)는 좁고 낮게 모각(模刻)하였다.
갑석(甲石)은 2매의 석재를 결구하였는데, 하부에 갑석 높이보다 낮은 부연을 마련하고,
상면에도 낮게 탑신받침을 두었다.
단층기단이면서 면석이나 갑석 부연 등에서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고려 시대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성행한 석탑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탑신석은 1층만 남아있는데, 기단부나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의
너비에 비하여 좁게 치석 했고, 양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2층까지 남아있는데 전체적으로 비례가 우수하다.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은 규모가 축소되면서 3단으로 치석 하였다.
처마부는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전각부가 파손됐지만 반전(反轉)을 확인할 수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수평으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탑신석 규모가 옥개석과 기단에 비해 소형이며,
옥개석 낙수면의 형식화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중초사지 삼층석탑 中初寺址 三層石塔
Three storied stone pagoda of Jungchosa site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여러 자료에 의하면 현재의 위치에서 약 80m 정도 떨어진 지점,
옛 유유산업 생산동 뒤편에 붕괴한 상태로 있었는데, 생산동 건물을 건축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2층과 3층의 탑신석 등 여러 부재가 없어진 상태이며, 3층 옥개석 상면에는 상륜부를 고정했던 작은 구멍이 있다.
넓은 지대석 위에 2단의 면석 괴임을 마련하여 기단부를 구성하였으며, 그 위에 총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기단부가 신라시대 석탑에 비하여 간략하고, 탑신부도 옥개석에 비하여 탑신석의 좌우 너비가 좁은 편이라서
다소 불안정한 모습이다.
이와 같은 비례의 석탑은 고려시대에 많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양식의 석탑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 수도가 있었던 개경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지다가
서서히 지방으로 확산하여 전국 각지에 건립된 대표적인 유형이었다. (안내문)
드디어 궁금했던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사진에 잡힌다.
사찰의 당간지주는 사찰의 기를 게양하는 깃대와 같은 존재다.
깃대를 거는 목재나 대나무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졌고 지금은 석재만 남았다.
왼쪽 석당간 아래쪽 구멍 주변에 세 개의 가로로 파인 홈이 보인다.
당간지주로 채취하기 전 다른 용도로 쓰려고 채석을 시도한 흔적으로 보인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중초사지 당간지주(안양사지) 유적 발굴조사는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종합정비계획 (2020)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주변을 15년간 8 구역으로 나누어 단계별로 추진될 예정이다.
안양시에서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안양사'명 기와를 발견하고,
고려시대 '안양사'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안양사'의 역사성을 살펴보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안양사'는 현재 이 땅의 지명인 '안양'의 유래이자,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며,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귀부 등 다양한 문화유산과 연결된다.
2010년대 이후 안양사지 주변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 '안양사' 관련 건물지가 일부 확인되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중초사지 당간지주(안양사지)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극락정토 '안양'의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고장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중초사지 당간지주, 안양사지 등의 역사적 가치를 재확인할 것으로 기대된다.
(안내문)
중초사지 당간의 명문을 해석한 내용
[명문 및 명문해석]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는 827년 2월 30일에 준공하였고, 건립공사는 약 7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중초사도 이 시기를 전후로 창건되었고,
당간지주 건립은 사찰 가람의 창건 시에 이미 설계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의 건립은 불교 신앙을 확대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신라 변방 지역에 대한 집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신라 황룡사의 항창화상 등이 직접 관여하여 당간지주 건립 등 창건 불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건국되어 안양사로 새롭게 중창될 때까지 중초사는 한강 이남의 중심 사찰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출처_안양박물관)
당간지주 비명을 확대한 모습에서 어느 정도 한자를 알 수 있지만 세월의 흔적을 없앨 수 없다.
결국 탁본을 떠야 좀 더 글자를 선명한 글자로 파악한 내용이 바로 위 사진에 소개되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명 (幢竿支柱銘)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 길 4(석수동)
보력(寶歷) 2년(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 중초사와 가까운 현재의
관악산을 승악으로 부른 듯함)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때의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 아래의 주릉과 군통이 있다)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이며 정좌(貞座, 승직으로 원주라고도 부름)는 의성법사이고 상좌(上佐,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관장하는 승직)는 연승법사이다.
사사(史師, 승려들의 교육을 담당)는 들인데 모범법사와 칙명법사이다.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으로 전좌 또는 유나라고도 부른다)는 들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徒上)은 들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作上, 도상과 함께 승직으로 추정되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안내문)
당간지주 사이로 보이는 중초사지 삼층석탑
안양 당초사지 당간지주 비명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양박물관 정문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 당간지주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통하여 중초사의 창건 배경과 연혁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시기와 통일신라 시대에 서울 경기 지역은 변방지역으로,
신라 왕실이나 중앙정부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은 지리적인 조건은 좋았지만 북한산의 장의사 이외에는 신라 왕실이나
중앙 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찰이 창건되지 않았다.
그런데 826년 8월 당시 절주통節州統이었던 황룡사皇龍寺 항창화상恒昌和上 등이 관여하여
안양 지역의 중초사에 당간 지를 세웠다.
신라 불교계의 중시이었던 황룡사 항창화상이 여러 승려들과 함께 안양 지역까지 파견되어
직접 공사를 시행한 것은 신라 왕실이나 중앙정부가 직접 관여하여 창건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황룡사는 교종 중심의 사찰이었고 신라시대 당간지주가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들도
교종 계열이었음을 감안하였을 때, 중초사도 왕실이나 중앙 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교종 계열의
사찰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_ 안양박물관 홈피)
당간지는 좌우로 완전한 대칭으로 구멍 위치는 물론 크기까지 같다.
신라시대에 드릴을 이용하지 않고도 둥근 구멍을 양쪽 똑같이 파 한쪽에서
다른 한쪽 구멍까지 관통하도록 보이는 재주는 신기에 가깝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 사이를 지나는 나무 사이로 고정하는 물체를 관통시켜 고정핀 역할을 할 것이다.
상단에도 한쌍이 더 있어 완벽하게 고정할 수 있다.
명문이 새겨진 서쪽 당간의 안쪽 상단은 온전한 편이나 동쪽은 일부 떨어져 나간 게 보인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구) 유유산업 정문 북쪽에 위치해 있다.
길이 6.75m, 너비 6.2m 규모 석축기단 위에 동·서로 마주 서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상단에 竿溝를 새겼으며, 竿孔은 지름 15cm의 크기로 위·아래에 뚫려 있다.
당간지주 하부에는 장대석의 기단부를 지주 사이와 바깥쪽에 마련하여 지탱하였다.
당간이 안치되는 주좌는 지름 35cm 깊이 15cm이다.
서쪽 지주 외면에 길이 146cm, 너비 45cm의 방형 이마를 마련하여 中初寺址 幢竿支柱銘을 각자 하였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당간지주 북쪽에 서 있으며, 높이는 3.65m이다.
하부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6매의 석재를 사용하여 기단하대석을 마련하였다.
하대석은 2 단괴임으로 중간 부분을 별석으로 끼어 넣었다.
기단면석은 4매로 구성되었으며, 모서리에만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갑석은 2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연을 마련하였고, 상면에는 얕은 1단의 탑신 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탑신은 1층만 남아 있으며, 모서리에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매우 두꺼우며, 1층과 2층의 층급받침은 4단임에 비해 3층은 3단으로 통일성을 잃고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2단의 탑신괴임을 마련하였고, 상륜부는 소실되었다.
탑은 원래 부지 내 노동조합사무실에 위치해 있었으며, 196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탑의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_한국의 사지 사지(폐사지) 현황보고서 下 발췌)
동쪽 당간지주의 상단이 깨진 것은 8·15 해방 후 인근의 석수들이 석수로 반출하기 위한 흔적이라고 한다.
문화재의 가치도 모르는 몹쓸 사람들 때문에 괜한 상처만 남았다.
안양박물과 홈피에서 가져온 사진
안양사 남회랑지가 있는 지역은 이렇게 휀스를 쳐 들어갈 수 없다.
묘지의 문인석으로 보이는 석물이 보초를 서듯 이곳을 지키고 잇다.
유유산업 공장이 잘 돌아갈 때 이곳은 지키던 정문 안내실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 안내 지킴이가 근무를 서고 계신다.
이 석당간에 관심을 갖기 전 우리나라에 세 개 밖에 없다는 철당간을 찾아다녔다.
보은 법주사의 철당간은 2000년에 새로 올린 것이라고 하니 숫자에서 제외한 것이다.
글을 마치며 우리나라의 철당간 세 개를 소개한다.
공주 갑사 철당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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