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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오산시 궐리사는 처음이지?

by 즐풍 2023. 9. 7.

2023_139

 

 

2023. 9. 1. (금) 오전에 탐방

 

 

오전에 오산 독산성 탐방에 나섰다가 해설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때 해설사님이 오산 궐리사 말씀을 하셔서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탐방하려던 곳이라 내침 김에 방문했다.

오산 궐리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공자 님을 모시는 사당이다.

논산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라고 하는 데, 논산보다 규모가 크다.

지닌 해 연말에 논산 노성산성을 탐방할 때 명재고택과 가까운 곳의 논산 권리사를 잠시 탐방했었다.

그러니 궐리사에 대하여 그 대강은 알고 있는 셈이니 생소한 느낌은 없다.

 

공자 님의 가르침은 중국을 넘어 한 때 우리나라에서 더 숭상되기도 했다.

중국은 1960년대 후반에 문화 대혁명을 거치며 공자의 사상이 부정되며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 당시의 중국을 닮아가며 제2의 문화 대혁명을 겪고 있다.

목하 육사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난리가 나 국론분열로 치닫고 있다.

이런 쓸데없는 발상의 근원은 어느 놈으로부터 시작됐을까?

주변머리 없이 영혼 없는 육사는 철거에 앞장서고 있으니 말 안 해도 누구의 지시인지 알겠다.

 

 

오산 궐리사: 오산시 궐동 147 

 

 

오산시 궐리사에 도착하면 먼저 공적비가 반겨준다.

공적비를 일일이 읽을 필요 없이 제목만 살펴본다.

화성궐리사재건공적비, 곡부공공휘재헌성적판각조성기, 화성군수섲겅전주이공재원공적비,

문재곡부공공휘상을공적비, 성균관전의곡부공공휘신택공적비

 

화성이 두 번이나 언급된 걸 보면 오산시는 예전에 화성의 일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계단을 통해 외삼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내문에 홍살문이 가려 절름발이처럼 보인다.

공간이 협소한 탓이겠지만 안내문이 옆으로 더 이동했으면 좋았겠단 생각이 든다.

 

궐리사의 외삼문이다.

 

 

 

 

오산시 궐리사(烏山市 闕里祠)     Gwollisa in Osan-si

종류: 경기도 기념물, 지정일: 1994. 4. 20

 

궐리사는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지도하였던 장소이다. 

공서린은 중종 때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에 정조가 이 장소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정조 16년(1792)에 '궐리사라는 현판을 내려 주었다. 

조선으로 이주한 공자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이곳에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둥성 곡부현의 

실제 지명을 붙인 것이다.

궐리사는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에 제단을 마련하여 다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고종 37년(1900)에 건물을 

갖추어 성적도를 모셨다.

현재 궐리사에는 외삼문에 '궐리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계단 입구에 하마비가 있다. 

경내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성적도를 모신 장각 (藏閣)이 있다. 

그 사이 공간에 1993년 7월 중국 산둥성 곡부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있다.

그 외에도 1996년 세운 강당인 행단(杏檀)과 '양현재(養賢齋)' 등이 있다.

오산시 궐리사는 논산에 있는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2대 궐리사로 꼽힌다. (안내문)

※ 안내문 중... 외삼문에 '성묘'라는 편액이... 는 '궐리사'를 잘못된 표기한 것이므로

     오산시청 담당공무원에게 시정을 요구하였다. ('성묘'는 내삼문의 편액이다)

 

 

Type: Gyeonggi-do Monument  / Designated Date 1994. 4. 20

 

Gwollisa in Osan-si was originally built by Kong Seo-rin, the 64th generation descendant of Confucius,

as a practical study exercise to help teach young students.

Kong Seo-rin was a scholar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Joseon Dynasty).

He was implicated in the massacre of scholars in the year Gimyo, and imprisoned.

King Jeongjo commissioned a shrine in its current location and bestowed a sign board displaying

'Gwollisa' in the 16th year of his reign (1792).

The location was particularly significant as it was a clan village for the descendants of Confucius

who migrated to Joseon.

The name of the shrine was a homage to an actual place in Qufu City in Shandong Province (China),

the birthplace of Confucius.

Gwollisa was dosed down in the 8th year of King Gojong's reign(1871) following

Heungseon Daewongun's decree to close all shrines and memorial halls.

However, in the 3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1894), an altar was re-established

and sacrificial rites were resumed.

In the 37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1900), a structure was built to house the Seongjeokdo.

A plaque that says 'Gwollisa' hangs on the outer three gates of Gwollisa,

and there is a Hamabi (stone tablet that instructs horse riders to dismount) at the foot of the stairs.

Inside, the Gwollisa features a shrine with the portrait of Confucius,

and a Janggak (storage structure) for the Seongjeokdo wood blocks.

In the middle, the is a 'Confucius Statue' donated by Qufu City in Shandong Province in July 1993.

Gwolisa also has Haengdan and Yanghyeonjae, halls that were built in 1996.

Gwollisa in Osan-si is one of only two Gwollisa shrines in Korea along with Noseong Gwollisa in Nonsan.

 

 

궐리사 외삼문에 들어서면 '성묘'란 편액이 걸린 내삼문을 거쳐 성묘로 들어서게 된다.

 

향교에서 흔히 보이는 성묘聖廟는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행사가 있을 때만 문을 열기에 내부는 촬영할 수 없다.

성묘로 들어오는 내삼문에도 성묘란 편액을 달았다.

보통 내삼문에는 편액을 달지 않는 게 통상적인데, 오버한 느낌이다.

 

멋진 자태의 은행나무가 눈에 띈다.

 

제사에 필요한 물품 보관소인 제기고(祭器庫)가 보인다.

 

성묘에서 바라보는 내삼문

 

성묘 뒷공간

 

 

공자의 석상이 있는 ‘성상전’(聖像殿)이다.

멀리서 공자의 석상을 보면서 중국풍이란 게 눈에 띄어 중국이 기증한 것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안내문 어디에도 중국에서 기증받았다는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성산전의 공자상과 네 분[안자·맹자·증자·자사]의 석조상까지 기증했는데도 일언반구가 없으니

중국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겠다.

 

중국은 한때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들이 공자를 없애기에 혈안이 됐으나 이젠 세계에 공자 알리기에 최선을 다한다.

 세계 각처에 '공자학원'을 설치해 공자 알리기에 적극적인 가운데, 공자학원은 친중파 양성은 물론 중국의

체제선전이나 정보수집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져 마찰을 빚기도 한다.

 

 

오산시의 아름다운 향나무

수령: 약 235년,  수고: 5.5m,  가슴높이 둘레: 1.8m,  지정일: 2021. 10. 28. 

 

정조 17년(1793) 궐리사 창건 당시 식재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수목이다.

1970년 태풍으로 가지가 소실되었으나 동쪽으로 뻗은 가지가 남아 부러진 채 자란 모습에서

예술적 조형미가 돋보인다.                                                                                         (안내문)

 

성상전으로 들어가는 운룡대석조 역시 스케일로 보아 중국에서 기증한 것이다.

중국 왕실의 계단을 보는 느낌이다.

 

성상전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데, 들어갈 땐 성묘에서 바로 옆으로 통하는 공간을 이용했다.

 

 

궐리사 성적도(聖蹟圖)

종류 : 경기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74. 9. 26

 

궐리사 성적도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의 생애를 그림과 글로 목판에 새긴 것이다. 

고종 41년(1904)에 공자의 76 세손인 한국인 공재현이 조병식, 송병선 등과 함께 

중국 산둥 성에서 성적도를 구해 와 이를 새겨 목판을 만들었다.

이 목판은 피나무로 되어 있으며 모두 60장이다. 

한 장의 크기는 세로 32cm, 가로가로 70cm, 두께두께 1.5~2cm 정도이다. 

목판에 새겨진 그림은 비교적 정교하나 글은 그렇지 못하다.

궐리사의 성적도 목판은 실제로 책을 찍는 데에 사용되었다. 

근대 국가로 이전하던 시기에 유림들은 유학의 명맥을 잇기 위해 공자를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궐리사의 성적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성적도로 그 가 치가 높다. (안내문)

 

성적도

 

궐리사 성적도 중 「성문사과(聖門四科)」

공자가 제자들의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네 전공으로 나누어 가르쳤던 내용을 담고 있다.

 

 

Type: Gyeonggi-do Tangible Cultural Asset

No: No.62 / Designated Date 1974.9.26

 

The wood printing blocks of Seongjeokdo in Gwollisa depict the life of Confucius,

a divine figure in Confucianism, with illustrations and texts carved onto wooden blocks.

In the 41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1904), the 76th generation descendant Kong Jae-heon (Korean national)

traveled to Shandong Province in China to acquire the Seongjeokdo illustrations with Cho Byeong-sik

and Song Byeong-seon. Upon returning to Korea, Kong carved the illustrations onto wooden printing blocks.

The blocks are made out of linden trees and in total, there are 60 blocks in the collection.

Each block is 32cm tall, 70cm wide, and 1.5-2cm thick.

Although the illustrations carved into the wooden blocks are fairly elaborate, the texts are not.

The wood printing blocks of Seongjeokdo in Gwollisa were actually used in the printing of books.

This was due to the fact that, during the early modern era when Korea was changing into a modern country,

Confucian scholars wanted to maintain Confucianism in Korea by using Confucius as a focal point.

Also, the wood printing blocks of Seongjeokdo in Gwollisa are one of a kind in Korea,

which adds to their value and importance.

 

 

 

공자문화전시관은 닫혀 있어서 어떤 게 전시되는지 알 수 없다.

 

 

 

공자의 64세손인 공서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발걸음을 행당으로 옮기면서 보는 화성궐리사강당이다.

지붕이 새는지 천막을 둘렀다.

오산시 재정이 충분치 않으면 문화재청에 자금을 요청해도 될 텐데...

 

 

 

행단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상징한다.

 

행단을 돌아가며 귀감을 삼을만한 구절들이 벽면에 쓰여있다.

 

 

오산시 궐리사 은행나무(烏山市 關里祠 銀杏木) Osan-si Gwollisa Shrine Ginkgo Tree

 

지정일자 : 1982.10.15

나무나이 : 236년(지정일 기준)

나무높이 : 22m,  나무둘레 : 4.8m,  관리자 : 오산시청

 

오산시 궐리사 은행나무는 공서린(孔瑞麟)이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재를 세우면서 심은 나무이다. 

공서린은 중중 2년(1507)에 생원이 되고 그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대사간·병조 참의 등을 지냈다. 좌승지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풀려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이 자리에 서재를 열고 은행나무를 심은 후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궐리지(闕里誌)에 따르면 공서린이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서 학업을 권고하는 신호로 사용했다고 한다.

공서린은 중종 33년(1538)에 다시 조정에 나갔으나 중종 36년(1541)에 별세하였는데,

은행나무도 이때 말라죽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약 이백 년 뒤에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가 이 장소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궐리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 은행나무는 궐리사를 상징하는 나무로,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식년 : 조선시대 과거제도로 정기시를 말하며, 과거 종류로는 문과(문관), 무과(무관), 잡과(기술직)로 크게 나뉜다.

                                                                                                                          (안내문)

 

논산 노성산자락에 있는 궐리사가 궁금하면...  

 

논산의 궐리사와 노성산의 노성산성 탐방

2022-222 2022.12.8. (목) 07:31~10:38(3시간 7분 산행, 6.61km 이동) 맑음 대중교통으로 가려던 논산 노성산을 자차로 다녀왔다. 노성산뿐만 아니라 인근의 향적산까지 탄 다음 시간이 나면 부여의 부소산성

electee.tistory.com

 

 

 

오산궐리사(烏山闕里祠) 은행(銀杏) 나무의 유래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의 역사를 상징하는 은행銀杏나무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약 490년 전 조선 중종 

14년(1519)으로 시작된다.
이때 은행나무를 손수 심은 사람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명현 문헌공文獻公 공서린孔瑞麟 선생이다.
공公은 문과에 급제, 대사헌大司憲과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투옥되어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당파黨派에 휩싸여 재난을 당하게 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서재書齋를 세우고
뜰아래 은행나무를 심은 후 그 위에 북을 달고 제자弟子들의 권학을 독려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중종 33년(1538) 공서린 선생이 다시 중종의 부름을 받아 경기京畿, 황해黃海 양도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발탁되었으나 3년 후인 중종 36년(1541) 별세하였고 은행나무도 이후 고사枯死하였다고 한다.
중국 곡부曲阜 공묘孔廟의 대성전大成殿과 행단杏壇 양편에 향이 특이하고 구불구불한 무늬가 마치

용龍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형상을 한 회檜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공자께서 손수 심은 회나무다.


그런데 이 회나무가 역대 국가의 성쇠盛衰에 따라 고사枯死와 회생回生을 반복하며 수 천년을 이어왔다.
이와 같이 은행나무도 고사한 지 200여 년이 지난 후 옛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1년에 수길씩 자라며 무성하자
촌로村老들이 이를 보고 장차 공문孔門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한다.
그 후 정조 16년(1792) 가을 정조께서 경기감사京畿監司 서정수徐鼎修에 명하여 공부자孔夫子의 성묘聖廟

창건을 지시하였으며 기백畿伯이 전교를 받들어 화사畫師를 보내 문헌공의 서재 유허遺墟와 유정遺井

은행나무 등을 그려 가므로 이때 궐리사闕里祠가 창건되고 은행나무가 오늘의 궐리사를 상징하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孔記 2561년(2010. 1) 화성궐리사

 

 

 

공자의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양현재(養賢齋)

 

양현재 편액

 

양현재 건물 뒤로 보이는 은행나무

 

궐리사로 드나드는 작은 문엔 숭인문이란 편액이 걸렸다.

공자의 사상이 인을 중시하는 모양이다.

 

밖에서 보는 양현재

 

은행나무의 위용

 

 

 

 

우리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자님을 모신 오산시 권리사를 탐방했다.

공자님은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데,

중국에 광란의 시대인 문화혁명 때 공자 묘역이 처참히 파괴되는 광기를 보여줬다.

그들은 이제 세계에 공작학원을 설치하며 표면적으로 중국 알리기를 하고 있으나 정보 수집 등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오산 궐리사는 순수 목적을 이어가겠으나 도처에 있는 공자학원의 사실관계는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