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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주말에 김중업 건축박물관은 어때?

by 즐풍 2023.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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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26. (토) 오후에 관람

 

 

일부러 삼성산 등산을 끝내고 들린 안양 박물관과 김중업 건축박물관이다

이곳 경내에 세운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유일하게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 당간지주 하나로 인해 안양 박물관과 김중업 건축박물관을 덤으로 보는 행운을 누린다.

꿩 먹고 알 먹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열을 얻게 되는 셈이다.

 

 

 

 

 

 

진해해군공관

Jinhae Navy Official Residence Building

 

진해해군공관은 김중업이 완공 후에도 찾아가 보고 싶은 귀한 작품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제주대학교 본관 다음으로 애착을 가진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이다. 

지붕에 원형 구멍을 뚫어 하늘을 보이게 하고, 

지붕 아래 연못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처마에 비치도록 설계하였다. (안내문)

 

 

 

안국빌딩

Anguk Buildin

 

김중업은 1967년부터 세 개의 오피스 빌딩을 설계했다. 

처음 설계된 것이 국제화재보험 사옥이고, 두 번째가 삼일빌딩, 

세 번째가 안국빌딩(현 갱생보호회관)이었다. 

그중 안국빌딩은 지상층 규모의 빌딩으로, 불규칙한 형태의 코어와 견고함, 수직성이 특징이다. 

사무공간은 박스형으로, 개방성과 수평성이 강조되었다.

1987년 건물 전체에 걸쳐 리노베이션이 이루어졌다.  (안내문)

 

 

 

석관동 'ㅅ'  주택

ㅅ-Shaped House in Seokwan-dong

 

석관동 '사자 주택은 한 작곡가의 의뢰로 지어진 단층구조의 주택으로, 'ㅅ' 자 형태의 지붕이 특징적이다.

설계 당시 김종업은 지봉의 조형적 의미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고, 

우리 전통의 정감어린선과 곡선미를 강조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ㅅ' 자 형태의 지봉을 올려 주택을 설계하였다.

 

 

03. 한국 건축예술을 대표하다

Represents Korean Architecture as Art

 

김중업은 귀국한 후 1956년 3월 5일 종로구 관훈동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고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한국건축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익힌 서구 근대 건축과 한국 전통 건축 및 예술을 재해석하여 

한국 현대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956년 경주국립공원계획안, 1957년 워싱턴 자유의 종각 계획안, 1962년 석굴암 전실조 계획,

1962년 주한 프랑스 대사관,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 한국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중 주한프랑스 대사관은 전통건축의 목구조와 지봉선을 현대적으로 추상화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안내문)

 

 

 

뉴욕 세계박람회 한국관

Korean Pavilion, 1964/1965, New Vork World's Fair

 

김종업이 설계한 뉴욕 세계박람회 한국관(1964~1965)은 한국 건축가가 건축을 통해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보여준 첫 사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관은 세 개의 건물군, 즉 전시관, 레스토랑(코리아 하우스), 그리고 불국사 다보탑 모형으로 구성되었다.

전시관은 현대적인 건물로 유기적인 곡선 형태의 외벽은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 핀란드관에서 알바 알토가 

재현한 물결치는 벽면과 공간을 연상시키며, 

출입구 벽면의 오프닝과 경사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통상성당과 건축적 산책로를 시사한다.

레스토랑은 한국 전통 지붕과 창호 문양의 모티브가 현대적으로 구현된 건물로 한국의 고전미를 대표하며 

전시관의 현대적인 디자인과 조화를 이룬다. (안내문)

 

뉴욕세계박람회 한국관

 

 

 

 

주한프랑스 대사관

The French Embassy in Korea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이 건물은 1959년 설계안이 당선된 후 1962년에 완공되었다. 

대사관저, 대사집무실, 영빈관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들은 한국 전통가옥의 배치에 따라 경사진 대지 위에 균형 있게 세워졌으며, 

브리지와 통로를 통해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사 집무실 건물의 지붕 처마선은 한옥 기와지붕의 곡선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찬디가르 주지사 관저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이 곡선미는 대사관저 지붕의 직선적 형태와 시각적 균형을 이룬다. 

대사관저 외벽 모자이크 벽화는 화가 윤명로와 김종학의 합작품이며, 

영빈관의 난간에는 전통 문양이 응용되었다. 

김중업은 이 건물로 한국전통건축을 재해석한 독창성을 인정받고 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안내문)

프랑스대사관, 5년 걸쳐 건축가의 원형 복원, 2023. 4. 17. 09:27 조선일보 사진

 

 

대사관저 외벽 모자이크 문양

 

 

메종자율 건축모형, Model: Maison Jaoul in Neuilly-sur-Seine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French Chevalier de l'Ordre National de Mérite

 

한국전통건축을 재해석한 독창성을 인정받아 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경주국립공원계획

Gyeongju National Park Project

 

김중업은 1957년부터 <경주국립공원 계획안>의 수정 계획에 참여하였다. 

경주국립공원 계획안은 반월성 알원과 불국사, 석굴암 주변 등 경주 일대를 공원화하는 계획으로, 

김중업은 주로 경주의 반월지구 부분에 참여하였다. 

공원 내 행정과 위락시설 건물은 한국 전통건축의 목구조를 재해석한 건물로 여러 개의 열주 위에 강건한 

형태의 지붕이 특징적이다. 

이 계획안은 당시 적은 예산으로 인해 충분히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이후 경주국립공원이 국립공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안내문)

 

 

석굴암 보수공사

Seokguram Grotto Repair Work

 

1959년 12월 석굴암 긴급보수 회의에 참석한 후 김중업은 1961년 2월 문교부로부터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되어 석굴암 보수공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보수공사 점검으로 유네스코 파리 본부에서 파견된 유네스코 문화재보존센터 소장 플랜덜 라이스 

(Dr. Harold J. Flanderleith)가 내한하였을 때, 김중업은 그와 공동으로 설계도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석굴암 보수 설계 및 환경정비계획에서 김중업이 작성한 「석굴암 공사사무소 기구표」,

석굴암 보수공사 명세서, 석굴암 보수공사 3개년 계획표」, 공사 추진 월별표」는 석굴암 보수공사 

집행지침의 기본이 되었다. 

김중업은 1962년 11월 위원직에서 물러났으나 이를 계기로 한국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탐구할 수 있었다.

                                                                                            (안내문)

 

 

현재 안양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유유제약

 

 

(구) 유유산업안양공장 Yuyu Industrial Co. Ltd. Bullding in Anyang

 

(구) 유유산업안양공장은 1959년~196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연구동(현 김중업건축박물관), 

작업장(현 안양박물관), 수위실(현 문화지킴소)로 이루어져 있다. 

연구동은 명료한 구조체계, 벽돌과 유리의 재료사용 비례에 따른 벽면 분할 등 김중업 초기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유리창의 분할 • 반복되는 모듈 패턴과 지금은 사라진 곡선형의 가로등은 르 코르뷔지에의 

메종자울을 연상시킨다. 

연구동의 돌출된 기둥열은 건물 구조 안쪽으로 후퇴한 작업장의 기둥열(필로티, pilotis)과 대비되도록

설계되었으나 작업장이 증축되면서 이러한 조형 의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정문에 위치한 수위실은 규모가 작은 원형의 건물로서 조형성이 더 부각된다. (안내문)

 

 

 

부산대학교&건국대학교 Pusan National University & Konkuk University

 

김중업은 1950년대에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등 3개의 대학건물을 설계하였다. 

부산대학교 본관은 그중 첫 번째로 설계된 건물로, 캠퍼스 전체 건물을 통합하는 구심점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계단이 조형적 요소로 강조되었는데, 계단의 전면은 유리로 처리되어 근대건축의 주요 요소인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건국대학교 도서관은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의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Y자형 건물로, 학교 전체를 상징하는 조형과 중앙의 둥근 지능이 특징이다. (안내문)

 

부산대학교 본관 모형, Model: Pusan National University's Main Building

 

부산대학교 곡선 통로의 전경

 

 

찬디가르(샹티갈) 행정청사 Chandigarh Project The Secretariat Building, Chandigarh

 

찬디가르는 인도 북부 펀잡(Punjab)주의 수도로 르 코르뷔지에가 새로운 도시 계획을 진행하였고, 

특히 도시 북쪽에 위치한 건물들 <의사당>, <행정청사>, <고등법원>, <주지사관저>를 설계하였다.

그중 김중업은 <행정청사> 평면도를 시작으로 찬디가르 프로젝트의 실시도면 작성에 참여하게 된다.

찬디가르 <행정청사>는 르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모듈러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었고, 

길이가 길고 강한 패턴의 입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브리즈 솔레이유(brise soleil, 차양장치)와 요소요소에 조각적 형태의 램프를 설치하여 건물의 

단조로움을 보완해주고 있다. 

건축가 김중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찬디가르의 엄청난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뼈를 가는 제작의 세계에 몰입한 체험이 나에게 건축에의 참눈을 뜨게 해 주었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김중업은 한국으로 돌아와 찬디가르 캐피를 건물들의 모티브들을 그의 건축 작품 곳곳에 

새롭게 재해석하여 표현하였다. (안내문)

 

 

 

02

건축가의 여정과 도약 Travels and Eary Projecus

 

김중업은 1952년 9월 베니스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 예술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면서 

르코르뷔지에를 처음 만났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파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후 김중업은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리로 가기 전에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여 서구 고전 건축물과 예술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김종업은 1955년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교류를 지속했다.

1962년 7월 시애틀에서 열린 유엔 주최 세계국립공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아시아 재단의 후원으로 필립 존슨, 루이스 칸, 아이엠 페이 등 여러 건축가들을 만났다. (안내문)

 

 

김중업은 1922년 3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연안 김씨 가문으로 부친이 군수를 지내 유복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평양 고등보통학교 시절 김중업은 말라르메, 보들레르의 시를 읽고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리는 등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예술 진로를 선택할 수 없어 대신 동경미술학교 출신이었던 미술교사의 

권유로 건축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중업은 회고록에서 “미술과 시와 가장 가까운 것이 건축"이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안내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서의 건축수업 (1939~41)

 

김중업은 1939년부터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요코하마 국립대학교) 건축과에서 3년간 건축을 공부했다. 

요코하마 고공은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를 중심으로 에콜 데 보자르의 전통을 따라 "건축가는 예술가”라고 

가르치며, 엄격한 드로잉 교육과 디자인을 강조했다. 

유럽 문화와 예술을 주제로 한 요코하마 고공의 축제 건축과 대행진은 유럽 지향적인 학풍을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김중업은 드로잉 실력, 유럽 문화에 대한 이해를 향상하고 건축을 예술로 보는 건축관을 다질 수 있었다.

 

 

마쓰다-히라타 사무실에서의 실무 (1942~44)

 

김중업이 요코하마 고공을 졸업하고 처음 건축 실무를 익힌 곳은 도쿄의 마쓰다 히라타 사무소였다. 

이 사무소는 미국 코넬대 출신의 두 건축가가 함께 운영했던 대형 설계 사무소로, 

주로 국제주의 모더니즘 경향의 설계를 선보인 곳이었다. 

김중업은 이곳에서 만주 미쓰이 백화점, 요코하마 가네보 백화점, 도쿄 미쓰이 선원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고 한다.  (안내문)

 

 

6.25 사변이 일어난 그날 나는 프로코피에프의 「세 개의 오렝지에의 사랑」을 듣다.

사연소식을 들고 같은 곳이 전해 달리 들려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1944년 한국에 돌아온 김중업은 국내 여러 분야의 문화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1948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조교수로 임명되어 건축과 도시계획을 가르쳤다.

1950년 6.25 전쟁발발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에도 그는 조병화 시인을 위한 

패각의 집(송도의원)을 건축하고 국전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예술가들과의 연대활동을 이어나갔다.

1952년, 부산 광복동 금강다방에서 열린 전국문화단체 총 연합회 결의로 김중업은 당대의 미술가, 

문인들과 함께 <제1회 국제 예술가대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안내문)

 

 

 

 

 

김중업 건축박물관의 복도

 

 

도면의 춤, 권민호 ⓒ Gallery Joeun 

 

도면은 입체 공간을 짓기 위한 실용 드로잉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래서 도면은 김중업의 건축 활동과 주변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드러내는 프로젝트에 적합한 

시작점이라 생각했다.

도면 위에 빛과 움직임으로 그 해당 건축물의 사회, 정치 지리적 맥락을 엮었고, 동시에 회화, 조각,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생각과 작업을 펼쳤다.

특정 건축물의 도면에서 예술적 영감의 기폭제로서 김중업의 도면을 다시 보이고 싶었다. (안내문)

 

 

 

건축, 살아 움직이는 선

The Vibrant Curves 

 

김중업 건축에서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은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힘 있는 곡선이다. 

그는 선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한국 전통예술의 멋을 선에서 찾아 자신의 건축에 적용시켰다.

김중업 건축 작품을 살펴보면 선을 통해 분절된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제주대학교 본관

Jeju National University Main Building, 제주 Jeju 1966 

 

제주대학교 본관은 김중업 스스로가 건축주와 의견이 일치하여 지어진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여겼다. 

또한 당시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던 작품이었다. 

이 건물은 바다 주변에 위치하였고 1층 식당과 학생회관, 2층 도서관, 3층 교수연구실, 

옥상에는 민속박물관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기능이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곡선의 경사로를 설치하여 다양한 접근로를 만들었다. 

당시의 기술로는 이러한 복합적인 조형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제주대학교 본관은 당시 바닷바람과 습도 등에 의한 건물 부식으로 인하여 아쉬움 속에 1995년 철거되었다.

                                                                                                          (안내문)

제주대학교 본관 모형

 

 

 

제주대학교 본관 내부 사진

 

 

서산부인과 Dr. Seo Women's Clinic

서울 Seoul 1965

 

서병준산부인과 병원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 구 동대문운동장) 향하는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대지 조건이 협소하고 세모난 대지 위에 위치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곡선을 사용하여 독특하면서도 기능적으로 설계되었다.

평면은 산부인과 성격에 맞게 아기를 담고 있는 자궁의 이미지와 함께 타원형의 방들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환자들을 빠르게 이송할  있도록 램프를 설계하여 기능적인 부분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건물 외관은 노출 콘크리트로  벽체를 세우고

램프 부분에 투명한 유리창으로 배치하여 조형성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예산과 기술적인 문제로 처음의 설계 의도와는 달리 시공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변형되었다.

                                                                                                              (안내문)

 

 

건축, 시대를 이끌다

High Rises and New Technologies

 

김중업은 1971년 해외로 추방되기 전까지 세 개의 고층 빌딩을 설계하였다. 

도큐호텔 (현 단암빌딩), 삼일빌딩, 갱생보호회관(포 안국빌딩)이다.

이들 고층 빌딩은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 개발을 상징하는 건물로 서울 도심에 우뚝 솟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안내문)

 

 

삼일빌딩 Samil Building

서울 Seoul 1969-1971

 

삼일빌딩은 1969년에 시작하여 1971년에 완공한 오피스 건물이다. 

무엇보다 김중업이 설계한 고층 오피스 건물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로 미스 반 데어 로어 

Mies van der Rohe가 뉴욕에 설계한 시그램빌딩 seagram Bulding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는 건축주의 강한 요구에 더하여 철물 재료의 수입과 철골구조의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은 지하 2층, 지상 31층이며 엄격한 비례와 높은 완성도 때문에 삼일로 고가와 더불어 

1970년대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였으며,

1980년대 고층빌딩이 다수 건립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안과 밖의 공간이어 어우러져 보일 수 있도록 커튼월을 설치하여 투명성을 강조하였다. 

이 건물은 2020년 리모델링되어 사용하고 있다. (안내문)

 

 

삼일빌딩 커튼월 Samil Building Curtain Walls

서울 Seoul 1969-1971

 

커튼월 구조는 건물 외부 벽면에 비교적 얇고 가벼운 판재를 설치하는 공법이다. 

삼일빌딩 커튼월은 코르텐 Coren재질로 USS (United States Steel)가

1933년에 개발한 내후성 강철(weathering steel)이다.

외벽 판유리는 아사히글라스 회사의 복층유리 페어글라스 Pair Glass를 수입하여 제작하였다. 

창문은 1:3 비례로 일본에서 조립해 본 후 해체해서 한국으로 운송되었고, 서울 현장에서 시공만 진행했다. 

시공을 하면서 맞지 않는 부분은 한국에서 마감 디테일을 새롭게 제작하여 완성하였다. (안내문)

 

삼일빌딩 축적:1/100

 

 

건축, 삶을 꿈꾸다

Villas: A New Way of Life

 

김중업 건축 이력에서 주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군사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공공건축물의 수주를 받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주택은 그의 건축언어를 펼칠 수 있는 최선의 매개체였다.

설계비에 대한 인식도 없었던 시절 설계비를 지불할 수 있었던 건축주의 의뢰는 주택 건축으로 연결되었고, 

김중업은 그들의 주택 설계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안내문)

 

 

건축, 세계로 나아가다

Global Projects : Challenges and Achievements

 

김중업은 1971년 11월 해외로 추방당했다. 

정부의 개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형식은 자진 출국이었으나 사실상 강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건축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 '페르 앙 타르드누아'에 정착하며 한국에 남아있던 김중업건축연구소를 통해 '니제르 도자기 공장',

'외환은행 본점 계획안' 성공회 회관' 등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렇지만 몇 개의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현되지 못하였고, 1975년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안내문)

 

 

 

외환은행 본점 계획안, 성공회 희관

Korea Exchange Bank headquarters (plan)

Anglican Church of Korea Hall

서울 Seoul 1974 서울 Seoul 1975

 

프랑스 '페르 앙 타르드누아'에서 설계하여 한국으로 보낸 작업으로

'외환은행 프랑스 본점 계획안 1974와 '성공회 회관 1975'가 있다.

'외환은행 본점 계획안'은 신축을 위한 지명설계 현상에 응모한 계획안이다. 

쌍둥이 원통형 탑을 세우고 앞쪽으로는 플라자를 두고 뒤에는 금고실과 강당을 배치했다.

'성공회 회관'은 성공회 대성당과 덕수궁 사이에서 조화롭게 자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성공회 회관'은 채택은 되었지만,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대응을 할 수 없어 원래의 설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세워졌다. (안내문)

 

 

 

 

민족대성전 계획안 Grand Church of the Nation (plan)

서울 Seoul 1979

 

민족대성전은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할 수 있고, 

남북이 통일을 맞았을 때 사용될 장소로 미국에 있는 한인 목사의 제안으로 계획되었다.

연건평 5만 평에 이르는 건물을 지을 장소로 북한산 등 세 군데 장소를 대상지로 물색하였다. 

김중업은 민족대성전의 공간이 단순 종교 위주 행사를 위한 용도가 아니라 한국을 상징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전당'이 되길 원했다. (안내문)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new building)

서울 Seoul 1979-1982

 

한국교육개발원 신관은 1979년 귀국 후 작업한 첫 작품이다. 

외부는 유리와 타일로 마감하였고, 경사진 유리 매스 내부에 계단실을 설치하여 각 층의 동선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하늘과 자연 풍광을 실내로 자연스럽게 끌어와 개방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경사면을 활용하여 당시 신기술인 태양열과 풍력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설계는 당시 고속도로가 바로보이는 언덕의 위치를 고려하여 연구기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안내문)

 

 

육군박물관 Korean Army Museum

서울 Seoul 1981

 

육군박물관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김중업에게 의뢰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 설계를 담당했던 김중업건축연구소 곽재환 실장은 "忠"을 생각하며 대한민국 안보, 

대한민국을 지키는 중심이 되고 또 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개념을 잡고 

그 안에 물을 담아 육사 생도들이 물에 자신을 투영하라는 의미에서 만들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이 시기 김중업은 자신이 스케치한 스테인드글라스를 건축물에 자주 등장 시키는데 

육군박물관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안내문)

 

 

서울올림픽 평화의   World Peace Gate

서울 Seoul 1985-1988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은 '서울올림픽 상징조형물' 현상설계에 참여한 프로젝트다. 

이 현상설계는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당시 김중업건축연구소 실장으로 있었던 

곽재환이 맡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이상을 향하여 비상하고픈 인간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부여하였고,

그가 중점을 두었던 한국의 지붕 선을 착안하여 형태를 구성하였다. 

백금남, 이승택 등 예술가들의 작품이 조화를 이루며 종합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다. 

평화의 문은 건축의 조형적 표현이 간결한 형식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안내문)

 

 

김중업, 한국현대건축에 새겨지다

Kim's Vision to Legacy

 

김중업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다 1979년에 귀국 후 1988년 작고에 이르기까지 해외 생활을 

경험으로 국내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나간다.

1984년 이후 건강이 약화되었지만, 뜻 맞는 김중업건축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이어 나갔다. 

결국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을 유작으로 남기고 한국 현대건축의 시작점으로 새겨졌다. (안내문)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23. 7. 7. 즐풍이 찍음

 

 

 

 

 

 

 

 

김중업 건축사는 1988. 5. 11. 향년 66세로 생을 마감했다.

군사정권과 사이가 안 좋아 잠시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던 그는 귀국한 후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태우 정부에서 문화훈장을 받음으로써 갈등을 끝냈지만, 사후의 일이다.

너무 이른 시기에 생을 마침으로써 그가 보여줄 많은 작품을 잃었다는 게 아쉽다

 

 

 

 

 

김중업 건축박물관은 그의 설계로 지어진 유유산업을 안양시에서 인수하여 전시되고 있다.

다른 건물은 안양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어쩌면 그가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우리의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고인의 업적을 잠시나마 조명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혹여 안양예술의 공원을 지날 일이 있다면 이곳에서 또 하나의 건축사를 알게 될 것이다.

고인을 추모하며 영면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