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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안양 박물관의 유물은 뭐가 있을까?

by 즐풍 2023. 8. 31.

2023_137A

 

 

2023. 8. 26. (토) 오후에 관람

 

 

며칠 전 경기도 박물관에서 안양에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란 걸 알았다.

위치를 검색해 보니 안양박물관 경내에 있다.

산행을 끝내고 귀로에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 중초사지 당간지주를 함께 살펴본다.

 

 

주소: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예술공원로103번길 4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시대별 요약이 되어 전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안양, 역사의 시작

 

구석기시대 안양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는 평촌동과 관양동 일대에서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가 

수습된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석기의 형태나 제작방법을 고려할 때 후기 구석기시대 (약 3만 년 전후)부터 안양천 및 학의천에 인접한 

유적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안양에서 신석기 유적은 아직 조사된 바가 없으나 주변지역에서 다수의 주거 및 패총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안양 지역 내에서의 신석기시대 취락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안양에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집자리가 조사된 마을 유적(聚落)과 고인돌(支石墓)이 조사된 무덤(埋葬) 유적 등이

안양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마을 유적은 안양 관양동 유적이 대표적이며, 무덤 유적은 고인돌로서 평촌 신도시개발 과정에서 조사되었다.

이처럼 신도시 개발과 함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안양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안내문)

 

 

안양 관양동 청동기 주거유적

 

안양 관양동 유적은 수도권 광역 상수도 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2000년~2002년)를 통하여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집터, 석곽묘, 토광묘 등 유구 18기가 확인되었고,

이 중 청동기시대 유구는 집자리 8기와 구덩이유구(竪穴遺構) 4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현재 인덕원 사거리의 북서쪽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관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된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 또는 네모꼴 등이며 장축은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다.

내부시설은 화덕자리, 기둥구멍, 저장구덩이, 벽도랑 등이 확인되었다.

화덕자리는 네모꼴 집터에서 1기, 긴네모꼴 집터에서는 2~3기씩 보이며 기둥 구멍은 바닥 중앙의

장축선상에 위치하고, 2·8호 집자리에서는 북쪽 장벽에서 확인되었다.
바닥은 생토면 또는 점토를 제거한 후 불다짐을 한 경우도 있다. 


유물은 집자리에서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 <구멍무늬가 새겨진 깊은 바리모양토기>와 <붉은간토기>,

 <돌창>, <돌화살촉>,  <반달모양돌칼>, <양날돌도끼>, <가락바퀴>, <갈돌>, <갈판> 등 청동기시대의

문화상 및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구석기시대의 몸돌, 찍개, 긁개, 격자, 홈날 등의 뗀석기가 수습되었다.
관양동 유적은 집터의 평면형태 및 구조, 출토유물의 형식학적 분석 결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청동기시대 전기 말엽에서 중기(기원전 1000년~700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구멍무늬토기바라

 

관양동 청동기 주거지에서 출토된 구멍무늬토기로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토기 중 하나이며 공렬토기라고도 한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달리 토기 표면에 문양을 거의 새기지 않고 구연부에 원형의 구멍을 연속적으로

 뚫었으며 납작한 바닥을 가지고 있다.   (안내문)

 

망치돌, 긁개, 홈날석기(복제품)
6.7×6.6×6.8

 

갈돌과 갈판

 

 

토기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무문토기> 혹은 <민무늬 토기>라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무늬가 없는 편이지만, 이종구연문, 돌대문, 공렬문, 사선문 등 

여러 가지 문양이 나타난다. 

무문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에 비해 손잡이나 굽다리가 붙기도 하는 등 크기와 형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토기는 크게 일상용 토기와 제사용 토기로 나누어진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토기는 주로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생활용 토기로서 굽다리가 붙은 토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토기가 해당되며, 식기는 물론 취사와 저장에도 사용되었다.
제사에 사용되는 토기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붉은간토기>, <가지무늬 토기> 및 <급다리가 붙은 토기>

등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일제강점기 안양의 문화재 조사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위원회는 경술국치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재 현황을 파악하여

「등록원고」를 작성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고적조사위원회에 의해 1916년 중초사지 당간지주 주변의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안양 지역의 문화재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사보고 문건이다.

이후 작성된 자료를 살펴보면 1925년 11월 24일에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있는 경작자의

소유주가 마음대로 발굴하여 초석 및 전돌을 다수수습하면서 직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5년 12월 8일 문서를 기안하여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비롯한 중앙의

탑지와 석등대석 등을 보존하기 위한 토지 매입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조사와 도면 첨부를 의뢰한다.

당시 작성된 도면을 살펴보면 중초사지 일대는 212번지로 밭으로 경작되었으며,

212번지 좌측 편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우측 편에는 삼층석탑이 있으며,

가운데 부분에 탑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전탑지로 보인다.

안양사지 일원에 남은 문화재의 원위치를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안내문)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명문 해석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中初寺址 幢竿支柱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중요 사찰들의 당간지주와 양식적으로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신라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황룡사의 소속되어 있던 승려들이 관여하였고, 

826년 8월에 채석하여 7개월 정도 지난 827년 2월에 완공되었다. 

두 개의 지주는 동·서를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 지주 바깥면에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명문은 6~7cm의 크기로 6행 12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당간지주 중에서 지주 표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유일하게 건립 시기와 기간, 

제작과정과 작업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평면이 사각형인 기둥 형태로 치석 되었으며, 

지주의 표면에 명문을 새긴 것 이외에 특별한 장식이 없지만 바깥면 상부를 일정한 높이까지 

한단 낮게 깎고, 지주 중간에 2개의 관통된 간공을 마련하였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전체적인 지주의 형태와 다듬은 수법 등이 경주 사천왕사지, 

경주 남간사지,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 등과 유사하다. (안내문)

 

 

 

연봉형장식(蓮峰形裝飾)

 

연봉형장식은 연꽃이 피기 전의 모습을 보주 형태로 제작한 것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목조건축물의 

지붕 위에 올린 장식물이다. 

이는 수키와에 구멍을 뚫고 서까래에 쇠못으로 고정할 때 쇠못이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한 기능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외관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장식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안양사에서도 전탑지 주변에서 연봉 장식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안양사 전탑의 윗면이 기와로 덮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난간이나 계단, 벽면에도 사용되었는데, 안양사지 출토 연봉형 장식도 

전탑 하부 난간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전돌
29.0×14.6×5.2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안양사 칠층전탑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금주안양사탑중신기」에는 안양사 7층 전탑은 

태조 왕건에 의해 세워졌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문하시중 최영崔瑩(1316-1388)과 혜겸惠謙대사와 더불어 개수하여 새롭게 하였다고 한다.
"개수 낙성식에는 왕이 향을 내리고, 승려 1천 명이 불사에 참석했다. 

탑 속에는 사리 12개, 불아 1개를 안치했고, 시주자는 3천 명이었다. 

탑에 단청을 장식하고 상을 그렸다. 

탑 안 동서남북과 각 4면과 회랑 12칸에는 벽마다 상 하나씩을 그리니 곧 십이행년불이다. 일꾼은 4백 명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안양사 7층 전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안양사'가 새겨진 명문기와

 

'다정 4년(1327)'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안양사' 깃발(打捺) 암키와는 있어야 하는 문양 없이 

명문만 간단하게 배치하여 통일신라시대 타날판의 문자배치를 표시합니다. (안내문)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국사나 왕사 승려의 승탑과 탑비를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50년대에 새롭게 건립된 안양사에는 고려시대 귀부가 남아있다. 

1960년대에 귀부 근처에서 2점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1점은 안양사 7층탑명의 탁본 일부와 글씨체가 다르다. 

이는 귀부가 고려시대 안양사의 탑비전 탑비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영향력 있는 승려가 머물렀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안양의 진산인 삼성산은 원효, 의상, 윤필 등의 대사가 수행한 산이다.

안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불교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고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삼성산의 험한 지세는 왕실이 삼성산 일대에 사찰을 지원하게 만드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중 삼막사는 한양 남쪽을 수호하기 위한 비보사찰 격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안내문)

 

분청자 편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토기 편 
통일신라-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양사지 출토 도자

 

안양사가 창건된 9세기 중엽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주름문병 편을 중심으로 소량의 도기 편이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들이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분청자와 백자 편들도 일부 포함된다. 

특히 오대십국(907-960)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분류 가능한 중국 청자편도 3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소조불 머리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제나발 편과 건물 지붕 외관을 장식하기 위해 올린

백자연봉형 장식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금동용두편 金銅龍頭片
34. x7.2,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안양사지 출토 금속공예품


주로발, 국자 등 실용적인 청동그릇류가 출토되었다.

안양사가 조성되었던 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 모두 청동그릇을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금속공예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출토된 청동발 가운데 중앙에 구멍이 있는 것은 불구인 바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불구의 장식용으로 추정되는 동물상도 일부 발견되었다. (안내문)

 

 

청자상감 잔과 잔받침

고려시대 많이 제작되었던 금속제 탁잔의 형태를 본떠 만든 기형이다. 

안양박물관 소장품은 고려시대 유행한 기형 중 하나로 상감기법의 국화절지문과 복련의 연판문이 

겹쳐 양각으로 시문 된 청자의 잔과 잔받침이다.  (안내문)

 

청자철화 국화·당초무늬 매병
고려

 

 

청자, 아름다운 우리 도자


우리나라는 고려 초 중국 월주요로부터 청자기술이 전해지면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려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2세기에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다. 

특히 유약이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청자'와 도자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연 '상감청자'가 유명하다.
                                                                                                                                     (안내문)

 

청자상감 기름병
고려

 

 

청자양각 당초무늬 대접                                                                    청자상감 여지무늬 발
고려                                                                                                   고려

 

 

청자, 아름다운 우리 도자


우리나라는 고려 초 중국 월주요로부터 청자기술이 전해지면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려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2세기에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다. 

특히 유약이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청자'와 도자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연 '상감청자'가 유명하다.
                                                                                                                                     (안내문)

 

백자 항아리 
조선

 

 

분청자 모란무늬 병
조선

 

 

 

분청자(粉靑瓷)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어 조선 전기인 15-1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다. 

귀족적인 고려청자와는 달리 생동감 있고 자유분방한 특징이 있다.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힌 후 상감, 인화, 박지, 철화, 귀얄, 덤벙 등 다양한 기법을 이용하여 장식하였다.

                                                                                                                                            (안내문)

 

 

 

 

 

 

만안교 답교놀이

 

만안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가기 위해 정조 19년(1795)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3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해 9월에 완성한 돌다리이다. 

구조는 아치형의 홍예석교로 수문은 7개에 홍예석이 11개의 반원형으로 치석 되어 조립되었다. 

교량의 총길이는 35.55m 너비는 8m 높이는 4.61m이며 만안교 옆에는 보호각 안에 정조가 

‘萬安橋’라는 이름을 하사 했다는 내용의 만안교비가 세워져 있다. (안내문)

 

전체 작품 중 일부만 찍었다.

 

 

                                          뒤꽂이                                                           떨잠
                                          조선                                                               조선

 

은장도

 

유리와 뿔로 만든 안경

 

안경집

 

 

망건은 상투를 틀고 머리를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남성의 머리 장식 중 하나이며 이를 보관하는 통과 솔이다. 

망건통은 소뿔牛角로 만들었으며 상단에 끈을 연결하여 뚜껑을 달았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활동이 보인다.

 

 

이재현(李在現), (1917-1997)

 

이재천 선생의 동생인 이재현 선생은 석수동에서 태어나 2살 때 아버지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4년 임시정부의 특별훈련반에 입대하였고, 1939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대원들과 함께 정보 수집, 유격전 등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에는 광복군 국내 정진군 낙하산부대 제2조장을 맡아 국내 침투공작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안내문)

 

밖에서 보는 안양박물관 전경이다.

김중업 건축사가 이 건물을 설계할 때 양쪽 모서리에 작품을 설치할 수 있게 했다.

 

작품을 당겨 본 사진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땅을 파헤칠 때 유물이 쏟아져 나와도 공기가 늦어질 것을 염려해 쉬쉬하며 서둘러 공사한 곳이 많겠다.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옛것은 소중하니 이제부터라도 잘 다루어 후손에게 잘 물려줘야 한다.

조그만 유물 하나라도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