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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신재효 고택과 고창 판소리 박물관 탐방

by 즐풍 2023. 8. 8.

2023_121

 

 

 

2023.8.2. (수)  오전에 탐방

 

 

고창읍성 순성을 끝내면 으레 신재효 고택을 가기 마련이다.

고택이라고 해 봐야 신재효가 살 때의 집에 비해 궁색할 만큼 규모가 축소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많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재효 고택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남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신재효 고가를 둘러보고 나서 바로 옆에 있는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들린다.

고창읍성을 들린 후 신재효 고택엔 여러 번 다녔으나 판소리 박물관은 처음 들리게 된다.

지금까지는 너무 늦게 와 문을 닫았거나 문을 열지 않는 월요일에 다녀갔기에 기회가 없었다.

푹푹 찌는 열기를 견디며 고창읍성 순성을 끝내고 들린 박물관은 너무 시원해 에어컨 피서를 즐긴 셈이다.

 

 

 

 

고창 신재효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

 

이 집은 신재효의 대저택인 동리정사의 사랑채로 조선 철종 때인 1850년에 처음 지었고 1899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래 동리정사는 13,000여 ㎡의 대지에 안채와 14칸 줄행랑채 등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마당으로 수로가 흘렀고 거대한 석가산이 있어 운치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이 집은 특이하게 원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건축 당시에는 모두 원기둥이었는데, 신분에 맞게 법을 지키기를 요청한 암행어사의 체면을 살려주고자 집을 낮추고 

뒷기둥을 격이 낮은 사각기둥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재효(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 타령)>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였다. 

일정한 체계나 순서 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모아 사설의 체계를 잡아 개작하고 통일한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요,

연출가로서 판소리 사설(타령)을 창작하고 집대성한 인물이다.

신재효는 향리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천대받던 판소리꾼을 교육하고 예술 활동을 후원하여 판소리를

국문학의 정수로 끌어올렸다.  (안내문)

 

우물은 더 이상 쓰지 않아 말라버렸지만, 우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체 높은 집안이란 걸 암시한다.

 

 

 

부엌엔 장작이 쌓여 있었을 테고, 부뚜막 위로는 작은 다락이 지나간다.

다락 옆 쪽문으로 상차림이 들어갔겠다.

 

양쪽 방 사이에 마루가 생겨 두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눈다.

 

함께 둘러보던 목우가 이 밀랍인형을 보고 사람이 진짜 있는 것으로 오인해 깜짝 놀란다.

 

 

고창읍성을 몇 번 다녀가면서 신재효 고택도 함께 들렸으나 고창 판소리박물관은 처음이다.

어떤 때는 너무 늦어서 문을 닫았거나 월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은 때도 있었다.

판소리박물관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

1층과 2층으로 된 박물관은 판소리에 대한 정보와 자료가 많아 판소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세계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세계적 가치

 

판소리는

조선 후기(18C) 근대의식의 발아와 발전 속에서 당대 인간의 욕망을 발판으로  우리 민족의 창조성과 정서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하며 끊임없이 성장·발전하여 온 향토적인 민족 공연예술입니다.

 

판소리는

설화, 무가, 광대놀음, 판놀음, 시나위, 민요, 정악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녹아들어 가 있으며 이들이 성악의 극한적인

추구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온 우리 전통 무형문화유산의 집합체입니다.

 

판소리는

역사적, 예술적, 민족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관점 등 어느 면에서나 고급예술과 서민예술이 만나고

상하계층을 아울러 언어문화가 종합되고, 뛰어난 예술성과 함께 대중성을 겸비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증명해 주고 실현해 준

전통적인 문화예술입니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창조적 재능에 관한 걸작으로서의 기능과 기술의 적용에 있어 그 어느 나라의 전통문화와도 견줄만한 우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세계무형문화유산 "판소리"

 

• 명칭 |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 판소리"

 

• 판소리의 특징과 선정 이유 

   판소리는 북의 반주에 맞추어 소리꾼이 노래하듯 이야기를 하는 형태로 표현이 넘치는 노래, 양식화된 말투, 다양한 레퍼토리,

   모방하는 몸짓으로 되어있으며, 한국의 풍부한 행위예술 전통의 대표로 양반과 평민 문화를 모두 아울렀던 대표적인 전통예술임.

 

• 세계무형문화유산제도의 의의

   세계무형문화유산제도는 거대한 신전, 보물과 왕관, 아름다운 자연경관 등의 물질적인 유형문화중심의 가치편향을 깨고,

   무형의 유산 또한 유형의 유산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라는 자각에서 나온 제도이다.

   무형문화유산에는 공동체, 집단, 개인이 그들의 문화유산의 일부라고 인정하며, 역사와 자연, 환경 속에서 창조되어 계승되고

   있는 연행, 표상, 지식, 그리고 기술 등의 무형의 유산을 말하며, 이와 관련된 기구, 물건, 공예품, 공간까지 포함한다. (안내문)

 

 

잔칫날 초청된 판소리꾼

 

판소리 12마당은 판소리 형성 초기에 이루어졌으며 이미 서민과 양반계층에 두루 사랑받던 판소리는 과거급제 등의 

경사스러운 집에 초청, 연창 되었다. (안내문)

 

 

신재효본 판소리 여섯마당

고창에서 출생하여 판소리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호( 1812- 1884) 선생은 판소리를 지극히 사랑했던 평범한

아전 출신 지식인이었고, 판소리 애호가였으며, 이론가였고, 판소리 창자들을 후원하면서 가단(歌壇)을 이끌었던

판소리 지도자였다.

신재효  문하에는 당대의 8 명창으로 꼽히는 박만순(동편). 이날치(서편) 등의 명창들이 있었는데,
이들 명창들은 하나같이 판소리 이론에 밝고 조리광대로서 법통을 알고 지켜나가는 소리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재효의 지침이 당대의 판소리광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명창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지침이

탁월한 판소리적 식견과 실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8 명창이라고 하면, 오음을 분별하는 음악적 재능과 소리를 마음대로 농락할 정도로 작창, 작사 능력을 인정

받은 사람들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신재효의 지침을 받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명창들은 대부분 손문난 소리가문이거나 법통 있는 소리를 이어반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법통 있는 소리라 할지라도 전해지는 과정에서 광대들이 문자를 깨지지 못해 문리가 통하지 않거나 문자와

뜻이 와전되는 경우가 있었고, 또한 빠르게 발전해 가는 소리판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바탕과 소리를 짜나가고

귀명창을 휘어잡을 새로운 소리를 창조해 나가야 했다.

이때 신재효 선생이 제시한 판소리 이론과 실천은 관소리광대들에게 매우 좋은 귀감이 되었다.
신재효 선생은 스스로가 판소리바탕 사설을, 스스로 산정(刪定) 해 나갔는데, 이것은 최고의 판소리 바탕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작가적 노력이었다.
예술적 영감을 주는 잘 다듬어진 사설을 문장가나 지식인에 의존했던 것은 관소리사에서 실제로 있어왔던 일이고

작사가와 작곡가의 분화와 맥을 같이 하는 선생은 1864년 토별가의 정리를 시작으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주옥

같은 판소리여섯 마당을 완성해 냈다.

 

자신이 직접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판소리 여섯 마당은 지속적으로 판소리의 작창과 작사에 영향을 미쳤다.

신재효본의 높은 문학성과 압축성의 사설들은 후대 명창들에게 광범위하게 수용되었고, 소리꾼들을 사설의 일부

또는 한 대목을 차용하거나 변용하여 사용하였다.

신재효본은 후학들이 판소리를 집대성하거나 바탕을 짜나갈 때,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사설본이었던 것이다.
현재 신재효본은 읍내본(신씨가장본), 성두본, 고수분, 가람본, 새터본 등의 필사본이 있으며,

각 마당별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춘향가)
가) 성두본(A) : 순한글본. 일명 신씨가장본. 1차본.

나) 성두본(B) : 국한문제본, 2차본

다) 새터본 : 정미2월일성두등.본을 대본으로 필사한 것

라) 가람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 중 [신오위장본집1]에 수록.

마) 일사본 : 순한글본, 표지에 "동리신재효작 춘향가 남창"

 

(심청가)
가) 읍내본 : 일명 신씨가장본, 한지에 순한글본. 등서일은 갑신(1904년)
나) 새터본 : 읍내본과 동일
다) 가람본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 문고로 보존 중, 국한문체

<변강쇠가>
가) 성두분 : 46장. 국한문체 등본년기없음.

나) 고수본 : 고창군 고수면 와촌리 정씨가에서 보관, 순한글본, 본문 27장. 표지에

                    "정유사월 횡부가"(1927년)

다) 가람본(A)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분. 45장

라) 가람본(B) : 고수본과 동일    라) 새터본 :  순한글본, 고수본과 동일

 

<박타령〉

가) 신씨가장본(일명 읍내본), 74장 단권.
나) 상두본 : “세저 계묘 납월하한의 성두 등서" (계묘는 1903년)
다) 가람본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 중 보존본, 74장, 단권

 

<적벽가)
가) 성두본(A) : 일명 신씨가장본, 순한글본, "갑진 정월회일조

                        세저갑진중추 삼일 성두 등서 종

나) 성두본(B) : 국한문치본, 한지 40장, 박홍보가와 동체제본

다) 가람본(B) : 신오위장본집2에 수록, 국한문제본, 45장

라) 새터본 : 성두본과 동일    

 

<토별가)
가) 읍내본 : 일명 신씨가장본, 순한글본. 42장. 등서일자 없음
다) 가람본(A)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본, 42장
다) 가람본(B) : 가람본(A) 신오위장본에 퇴별가와 같이 제책.
라) 새터본 : 성두본을 대본으로 한 필사본

 

 

판소리를 통한 예술적 교감  
도리화가에 얽힌 사랑이야기

"스물네 번 바람 불어 / 만화방창 봄이 드니 / 구경 가세 구경 가세 / 도리화 구경 가세 "
우리나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나이 쉰아홉에 지어 불렀다는 '도리화가'의 한 구절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 고을 광대를 불러 모아 판소리 이론을 세우고, 판소리 사설을 완성한 신재효는 진채선이라는 최초의

여류명창을 탄생시킴으로써 판소리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판소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진채선은 신재효와 소리선생이었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아 풍류, 가곡, 무용에도 능했고 특히 판소리를 잘했는데,

미려하면서도 웅장한 성음과 다양한 기량으로 남자명창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고 한다.
고종 4년에 경복궁이 세워지자 경회루에서 축하 잔치가 벌어졌는데 신재효는 진채선에게 소리를 가르쳐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보냈다.

그 자리에서 남장을 하고 방아타령을 불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채선은, 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고

말았다.
신재호는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끝내 돌아오지를 않자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변하여 그 정을

(도리화가)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에 신재효의 나이는 쉰아홉이었고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바람이 스물네 번 불었다는 가사 안에는 신재효의 애틋한 마음이 녹아나 있다.
또한 이 노래는 명창이 된 채선이 공연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 공연과정이 숨어 있으며, 절대가인의 풍류가 없었던 것을 한하고

여창자를 역대 풍류가객과 견주어 보려는 신재효의 긍지가 나타나 있다.
동리의 곁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싹튼 애틋한 연모의 정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못다 한 연정이 

아름다운 노래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 고창은 진채선을 필두로 허금파, 김여란 등 여성명창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김소희 등의 걸출한 여성명창이 배출되었다.

                                                                        (안내문)

 

 

 

 

 

 

 

 

김소희 판소리의 특징
천의무봉의 목소리

 

"하늘이 거둬간 하늘의 소리" 한겨레21 제57호(1995. 5. 4.) 김소희의 판소리를 말할 때, 먼저 드는 것은 천부적인 목소리이다. 

김소희는 다른 점은 몰라도 소리 때문에, 노래가 잘 되지 않아서 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김소희는 또 폭포수 밑에서 소리를 해 보았느냐는 물음에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울 때 해 보았는데,

박동실이 '자네는 하느님이 내준 목이니까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해서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요컨대 김소희가 천부적인 성대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여러 경로로 입증되는 것이다.

 

동서편 소리의 완벽한 조화
김소희 명창은 동서편의 기라성 같은 스승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워 그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완벽하게 조화시켰다.
김소희 판소리를 구성하는 두 줄기는 송만갑의 동편 소리와 정정렬과 박동실의 서편 소리다. 

김소희는 송만갑으로부터 동편소리의 소박·정대함과 정정열의 절차탁마의 기교 넘치는 소리로부터 장점을 끌어왔으며,

박동실과 정응민으로부터 지침을 얻어 오랜 노력 끝에 김소희제 소리를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창조적인 예술가
김소희의 판소리 수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판소리 어느 한 바탕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사람의 것을 오롯하게 

이어받아 부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롯하게 전수받은 소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김소희는 그것을 다 그대로 부르지는 않았고, 자신의 안목에 따라 다시

재배열하고 재창조해서 불렸다.

다시 말하면, 김소희는 전통에 충실한 소리꾼이라기보다 자신의 안목으로 판소리를 부른 창조적인 소리꾼이었다는

점이다. 

            (최동현, 「동리연구 3호, "김소희의 예술세계 )

                                                                                                                          (안내문)

 

명창과 고수

뮤지컬이나 여러 음악회와 달리 판소리는 명창과 고수 단 두 사람만으로 모든 공연이 이루어진다.

고수는 북으로 장단을 맞추고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은 것으로 긴 시간을 함께 한다.

 

 

 

 

동리 신재효란 걸출한 인물이 있어 중구난방으로 전해오던 판소리를 채집해 뜻과 의미에 맞게 재정립했다.

또한 많은 명창을 발굴하며 판소리를 널리 전파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같은 고향사람인 전채선이 경복궁 낙성연에 올라가 흥선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령기생이 되면서 이별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리화가 시대를 넘어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다시 단편 영화로 만들어져 심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