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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서울 몽촌토성 내 한성백제박물관

by 즐풍 2023. 7. 20.

2023_113

 

 

 

2023.7.7. (금) 오후에 탐방

 

 

오전에 아차산성에 이어 풍납토성을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들어왔다.

산성을 둘러보려는데 먼저 한성백제박물관이 먼저 보여 잠시 들어간다.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두어 번 천도할 때도 지역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렇게 천도할 때마다 때마다 지역명을 추가하는 건 역사학자나 학생들 모두 이해가 빠르다.

백제인은 오직 백제로 알고 있는데, 후세인들이 그렇게 분류한 것이다.

신라만 해도 신라와 통일신라로 구분 지으니 이러한 것은 세계 역사분야의 보편적 특징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게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된 청화백자이다.

청화백자는 흰 백자 표면에 코발트 안료를 이용하여 푸른색의 화려하고 다양한 무늬가 들어갔다.

중국 명대에 시작된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내내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서울에서는 청진동 외 여러 곳에서 중국산 청화백자가 출토된다고 한다.

오늘날 구찌나 루이뷔통, 프라다, 샤넬가방 등이 세계 패션시장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풍조이다.

이번 기획전시 작품은 소연 이상윤 선생님이 기증한 중국 청화백자와 서울에서 발굴된 청화백자이다.

 

 

 

 

 

전시를 열며

 

청화백자靑花白瓷는 한 가지 색채로 장식되었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무늬로 인하여 다채롭고 화려하다.

중국 청화백자는 명대明代의 영락永樂·선덕宣德 성화연간成化年間과 청대淸代의 강희康熙·옹정雍正·

건륭연간乾隆年間의 것들이 유명하고,  그 기술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청화백자의 여러 면모를 기증자료 중심으로 꾸려진 제1주제 <청화백자, 기증으로 피어나다>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중국의 청화백자는 조선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의 지속적인 수요로 인하여 조선시대 내내 꾸준하게 유입되었다.

청화백자의 주요 소비지인 서울에서는 청진동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중국 청화백자가 출토되고 있다.

제2주제 <청화백자, 출토품과 어울리다>에서는 기증자료와 출토자료의 비교를 통해 기증자료의 학술적 가치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전파양상을 살펴본다.
서울 출토 자료로 꾸며진 제3주제 <청화백자, 서울에서 만나다>에서는 박물관 소장 중국 청화백자와 

조선 청화백자를 함께 선보이면서 청화백자의 다양한 매력을 느끼도록 기획하였다. (안내문)

 

 

 

경덕진요와 경덕진요계의 청화백자

 

청화백자의 제작과 흥성을 주도했던 경덕진요景德鎭窯는 당唐 무덕연간武德年間, 618-626부터 그릇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대五代 및 송대까지 주로 청자와 청백자를 생산하였으며 원대에 청화백자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원대와 더불어 명·청대까지도 궁정의 수요를 담당하던 황실 전용 가마였다.

 

경덕진요는 원대부터 관리기구를 두고 생산을 감독하게 했다. 

원대에는 지정至正 15년(1278)에 부량자국浮梁姿局이 설치되었고, 명대는 홍무연간에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었다.
경덕진요는 사실상 여러 군집 가마의 총칭이라 할 수 있는데, 양매정요·석호만요·황니두요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그 밖에 호전요가 유명하다.


청화백자의 주요 형태는 매병·옥호추병·항아리·대접·접시와 꽃 및 고족배高足杯 등이 있으며,

영지·파초 등과 같은 식물무늬와 용·봉황·기린 학·물고기 등과 같은 동물무늬를 중심으로 넝쿨무늬나

번개무늬 등과 같은 보조무늬가 그려졌다.
경덕진요의 영향 아래 민간 가마에서도 청화백자를 생산하였다.

경덕진요계라고 여겨지는 곳은 강서성의 백사요와 길주요, 안휘성의 가가충요, 복건성의 덕화요,

민청요·완요향요·안계요·광동성의 조안요·호북성의 금구요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청화백자를 생산하 곳은 덕화요와 안계요 및 조안요 정도로 확인된다.

그밖에 운남성과 호남성 등지에서도 청화백자를 생산하였는데, 운남성은 건수요와 옥계요, 호남성은 의약요가

대표적이다.  (안내문)

 

 

 

한성백제박물관은 2010년 소연 이상윤 선생님으로부터 약 35,000점의 유물을 기증받아 관리하고 있다.

기증받은 유물들은 연구·정리·등록의 절차를 거쳐 유물정보 전산시스템을 통해 관리되는데,

'이상윤 컬렉션'과 같은 대량의 유물들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리계획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다.
올해 주요 전시 대상인 청화백자는 2020년부터 연구 정리·등록을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정보들을

2021년 12월에 관련 서적 한성백제박물관 소장품목록 XI: 이상윤기증유물 8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청화백자, 기증으로 피어나다>에서는, 이상윤 기증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시작된 청화백자를 

제작부터 다채로운 종류와 무늬까지 살펴봄으로써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자 하신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안내문)

 

 

두청유 청화 사자무늬 꽃모양 입 접시

중국 명, 이상윤 기증

 

백자 청화 유리홍 봉황 해무늬 접시, 중국 청나라

 

백자 청화 사슴무늬 접시

 

 

청화백자 기획전시실에 전시된 작품 모두를 담아낼 수 없다.

중국 작품은 지금까지 보던 것과 다른 그림을 만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그림이 소박하다면 중국은 다소 화려하고 추상적인 작품이 많다.

 

이제부터는 한성백제를 중심으로 서울 지역에서 출토된 작품 위주로 전시되었다.

간혹 지방에서 출토된 문화재도 보인다.

 

 

 

 

춘천 교동동굴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단지

 

서울 암사동에서 발굴된 갈돌·갈판

벼나 보리, 밀 등을 이 갈돌에 놓고 둥근돌을 굴리며 껍질을 까는 도구다.

 

용인 초부리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청동거푸집과 청동검

 

 

 

간돌도끼(마제석부)

 

아직 유약을 바르지 않던 초기 백제의 토기이다.

이런 걸 보면서 지금 현생인류로 살아가면서 누리는 문명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주 왕곡면 신포리 정촌고분 2호분 옹관
대용 : 길이 133.8cm, 아가리지름 86.0cm, 소용 : 길이 135.0cm , 아가리지름 78.0cm
동신대학교박물관


신포리 정촌고분은 영산강의 남쪽 얕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13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11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 

정촌고분에서는 움무덤, 움무덤+옹관묘, 옹관묘+옹관묘(추가장追加葬)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2호분만 유일하게 옹관묘 1기로 된 단독 고분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주구周溝(도랑)를 가지고 있고 주구 안에서 옹관 파편도 일부 확인되었다.
출토 당시 용관의 전체 길이는 252cm이며, 대옹 길이는 131cm, 소용 길이는 124cm 정도이다.
출토유물로는 대옹에 들어있던 항아리 모양 토기 2점과 단지 1점, 용관 속 흙에서 나온 다량의 옥 등이 있다.

2호분은 13기의 고분 중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왕도 한성

 

왕도王都는 왕이 머물며 나라를 다스리던 도읍을 뜻한다. 

왕도는 왕권이 발현되는 상징적 장소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역량이 집약되어 있다.
백제의 왕도는 시기별로 변화하였지만 그 중심지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이다. 

특히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백제 왕이 머물던 왕성이며, 

석촌동 고분군은 왕이 잠든 왕릉구역으로 왕도의 핵심이었다.
'왕도한성'은 온조가 위례성에 처음 도읍한 이래 나라가 성장하면서 왕도의 규모가 커지자 그에 걸맞게

\붙여진 새로운 명칭으로 '큰 성'이라는 뜻이다.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두 왕성을 중심으로 석촌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왕릉구역 및 왕성 바깥쪽의

마을과 생산시설, 성곽 등을 모두 아우르는 범위이다.

                                                                                   (안내문)

 

 

 

 

 

 

 

 

 

사진이나 지도에 소개된 산성이나 토성을 맘먹고 다녀와야 하는 데 토성은 흔적도 찾기 힘들고,

산성도 오래된 곳을 군데군데 돌무더기만 뵈는 곳도 많다.

그래도 아래에서 소개된 것 중 몽촌토성, 풍납토성, 파사성, 설봉산성, 설성산성, 망이산성은 다녀왔다.

 

 

백제는 지방의 유력자에게 각종 고급물품을 내려주었다.

고급물품은 금·은을 비롯한 귀한 재료로 정교하게 만든 금동관모·금동신발·장식큰칼, 중국에서 수입한 

청자·유약바른도기 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고급물품이 출토된 지역은 백제의 세력 범위로 해석한다.
백제의 고급물품이 출토된 대표적인 유적은 화성 요리, 원주 법천리, 천안 화성리 용원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익산 입점리, 고창 봉덕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지의 무덤이다.

 한편,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무덤에서도 백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1세트가 출토되었다.

                                                                                                           (안내문)

 

 

 

 

 

 

뼈 갑옷骨製札甲


몽촌토성 남쪽 성문 가까이에 위치한 저장구덩이에서 출토되었으며 뼈 조각(소찰)의 크기는 

길이 10cm, 폭 2~4cm이다.

뼈 조각 이음이 모두 4단으로 구성되었으며 허리 아랫부분을 감싸는 역할을 했다. 

출토상태를 바탕으로 복원해 보니 모두 185개의 뼈 조각으로 위와 같은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무게 3.3kg).

 뼈 갑옷 위의 가슴·배 부분은 쇠 찰갑에 천을 두르고 옻칠을 하였으며,

모두 514개의 조각을 이어 갑옷을 만들었다(무게 6.4kg)       (안내문)

 

 


어떻게 살았을까?  사상과 풍속


백제 사람들은 고유의 토착 신앙의 토대 위에 유교, 도쿄, 불교 등 외부에서 전래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유교와 도교에 대한 이해는 한자의 보급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침류왕사 조은 384년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이후 불교가 백제 사상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놀이로는 바둑과 주사위 놀이가 유행했는데 특히 바둑은 왕실과 귀족들이 주로 즐겼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도 제기차기나 사방치기 등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음악은 국가 제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요 악기로는 북과 백제금百濟琴이 알려져 있다.

                                                                                                                          (안내문)

 

 

 

 

문자와 정신세계

 

한반도에서 한자와 같은 문자는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된 붓으로 보아 원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다. 

이 밖에도 문자의 사용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자료는 벼루, 도자 등이 있다. 

특히 하남 미사리와 풍납토성 출토 벼루는 한성기 백제의 문자 사용을 증명해 준다.
문헌을 통해서는 근초고왕 때의 박사 고흥 이 서기요를 편찬하였고,

근초고왕 때의 장군인 막고해후유가 「도덕경불출품」의 문구를 인용한 기록으로 보아 일찍이 유교와 도가

사상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84년 침류왕은 동진으로부터 고대국가 정신세계의 바탕을 이룬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사찰건축을 통해서 당시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사비기 절터에 해당된다.

이 밖에도 다양한 모양의 부호가 새겨져 있는 토기와 토기 안에 담겨 있던 토우 등을 통해 고대를 살았던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당시의 기와는 오늘날 민가에서 쓰는 기와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지금은 기계로 찍어내다시피 하니 천편일률적이라 개성이 없는 데,

당시엔 여러 문양이 들어가 훌륭한 회화작품들이다.

 

 

 

 

백제의 집

 

백제 왕도는 최고 지배층이 모여 살았던 곳인 만큼 백제 최고의 건축기술과 양식이 집약되어 있다. 

풍납동 토성 일부 건물에는 흙을 다져 쌓은 다음 되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지하 초석식' 기둥과 같이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

또한 왕궁과 관청에는 왕실과 나라의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 건축자재인 기와가 주로 사용되었다.

풍납동 토성의 발굴에서는 한 구덩이에서만 수천 여 점의 기와가 쏟아져 나왔으며,

수키와 끝을 마감하는 다양한 무늬의 수막새도 10여 종이나 된다.  (안내문)

 

 

철기시대의 무기류

 

 

백제의 철제 농기구

 

농기구는 밭을 길거나 일구고 제초• 수확할 때 쓰인다. 

백제 사람들은 밭을 갈거나 일굴 때 주조괭이, 쇠도끼, 따비, U자형삽날, 쇠스랑, 살포 등을 사용하고,

제초• 수확할 때에는 호미, 낫 등을 사용하였다.

쇠스랑은 출토양이 많지 않으나 중요한 농기구의 하나이다.

살포는 논둑의 물고를 트거나 깎는 데 사용하였는데, 큰칼과 함께 지방 수장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예가 많다.

신라에서는 살포가 주로 실용적인 농기구로써 무덤에 부장 되었으나 백제에서는 의례와 관련되어 지방

수장층의 권위를 나타냈다.

지금까지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는 하남 미사리, 의정부 민락동, 화성 석우리 먹실 등지에서 백제의 밭유적이

확인되었다.
공구는 손칼, 쇠끌, 집게, 가위, 망치, 등이 있다.

손칼은 나무손질뿐 아니라 목간의 글씨를 지울 때에도 쓰였다.

다양한 공구의 사용은 기술을 동반한 수공업의 발달을 의미한다.  (안내문)

 

 

 

안성 망이산성에서 출토된 철제 판갑(갑옷)

 

 

 

 

 

 

 

 

 

 

부안 죽막동에서 발굴된 배 모양 토기 

 

 

 

쌍범 당도리선 모형

 

 

무령왕릉 출토 유물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고분군 안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중국 양나라 무덤 형식을 본떠 쌓은 벽돌무덤으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출입구에 놓여 있었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 형식과 유물을 통해 종국 남조 문화의 영향, 일본과의 문화교류 등 웅진기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할 수 있다.

                                                                                                              (안내문)

 

 

이러한 고대 유물을 보면 옛날 사찰이나 성곽, 왕릉 등에서 현존하는 유물의 대부분이 출토되었다.

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조사를 핑계로 크게 한몫 챙기며 털어갔고,

또 전문도굴꾼들에 의해 털렸다.

하지만 성곽이나 폐사지에서는 그들도 유물이 어디서 쏟아져 나올지 몰라 방치했기에

지금도 출토한다고 손만 대면 가끔씩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부여 나성 인근에 있는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이 작품은 누가 봐도 당시의 종교관을 담은 향로라는 걸 알 수 있는 백제의 대작으로 창의성이 뛰어나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금속공예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것은 없다고 본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사리감은 능산리사지의 중앙부에 위치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cm, 가로•세로 50cm이다. 

내부는 높이 45cm 정도로 파내었으며, 안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입구 양쪽 면에 10자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창건 연대와 발원자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위덕왕)이 567년 만들었으며,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안내문)

 

 

석재로 만든 마구리장식 기와

백제, 부여 부소산성 출토

 

상자모양 벽돌, 백제 부여 군수리 출토

 

 

산수무늬 벽돌

백제 부여 외리 출토

 

학교에 다닐 때 국사시간은 그저 지나가는 시간에 불과했다.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을 땐 신라 문화가 최고라고 생각했으나 백재 문화도 전혀 손색이 없다.

남아 있는 산성은 백제의 것이 더 튼튼하고 훌륭하기까지 하다.

알수록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