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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백제의 고도 국립공주박물관 둘러보기

by 즐풍 2023. 8. 18.

2023_132

 

 

 

2023. 4. 30. (일)  오전에 탐방

 

 

어느 지역을 방문하든 역사가 깊은 곳은 박물관이 있기 마련이다.

서울엔 우리나라 전 시대를 아우르는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의 고도인 경주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

백제와 관련된 박물관은 의외로 많다.

서울 몽촌토성에 한성백제박물관이 있고, 고구려에 밀려 웅진으로 천도한 후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

다시 사비로 천도하며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마한의 중심이었던 익산은 백제 무왕대에 또 한 번 정치문화의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이유로 국립익산박물과 등이 생기며 백제문화권에 네 개의 박물관이 있다.

이 외에도 백제권에 국립광주, 전주, 나주박물관 등이 있다.

각각의 지역 박물관은 기회가 될 때마다 들리겠지만, 오늘은 공주에 왔으니 공주박물관을 들린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백제 제25대 무령왕릉이 출토되며 이와 관련한 여러 부장풍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시 일원에서 출토된 유물은 물론이고, 야외 어디든 보이는 곳이 박물관인 셈이다.

박물관에 소장된 관련 유물을 하나씩 살펴본다.

 

 

 

웅진백제실부터 탐방하게 된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


진묘수는 중국 후한대부터 나타나는 뿔과 날개가 달인 상상의 동물로,

무덤을 지키고 죽는 사람의 영혼을 신선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머리에 뿔이 하나가 달리고 몸에는 갈기처럼 보이는 날개가 있으며,

입은 살짝 벌리고 네 다리로 걷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입과 몸통 일부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붉은 진사를 칠했다.

다리에는 녹색, 갈기에는 분홍색 안료도 확인된다. 몸통은 각섬석암을 깎아 만들었고, 뿔은 철로 만들었다.


길이 48.6cm, 높이 32.2cm, 무게 48.5kg  (안내문)

 

 

묘지석(왕, 국보)

 

세부사항 : 가로 41.5cm, 세로 35.2cm, 두께 5.0cm
전시실 : 웅진백제실


설명 : 왕의 묘지석 앞면에는 무령왕의 이름(斯麻)과 사망연도, 임시장례인 빈장殯葬에 관한 내용, 

          뒷면에는 간지도干支圖가 있다.

          묘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박물관 안내문)

 

 

묘지석(왕비, 국보)
세부사항 : 가로 41.5cm, 세로 35.2cm, 두께 4.7cm

 

전시실 : 웅진백제실
설명 : 왕비의 묘지석 앞면에는 빈장, 개장改葬에 관한 내용, 뒷면에는 지신地神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산 

           매지권買地券의 내용이 있다.

           묘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 : 병오년(526년) 11월 백제국 왕태비께서 수를 다하여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에 (빈전을 설치하여) 삼 년을 모신 뒤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대묘大墓로 옮기어

       장사 지내며 이와 같이 기록한다.

뒤 : 돈 1만 냥, 이상 일건, 을사년(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위의 금액은 토왕, 토백,

       토부모에게, 토하중관에게는 이천석을 주고 왕궁의 남서쪽에 있는 토지를 사서 능묘를 만들고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을 삼으니, 율령을 따르지 않는다.  (안내문)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

 

백제 제25대 무령왕료 포(재위 501~523)은 462년(개로왕 8)에 태어났다.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麻·斯摩 또는 융隆이었고, 8척의 큰 키에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에 왕위에 올랐다.
무령왕은 왕권 강화와 민심안정 정책을 펼쳤다. 

그는 담로제(擔魯制)를 강화하였고, 고구려와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대외적으로 입지를 높였다.

또한, 기근 해결과 농사 장려 등 민생안정에도 힘을 쏟았다.

무령왕은 521년 중국 양梁니라에 국서를 보내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更爲强國"고 알렸다.

무령왕은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켜 사비백제의 중흥 기반을 마련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안내문)

 

 

무령왕의 관꾸미개 金製冠飾
크기높이 30.7cm, 너비 14.0cm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처음 발굴되었다.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금제관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 금제관식은 왕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 정도인 둥글고 작은 원판으로 된 영락을 달았다.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서 메단 영락은 숫자가 모두 127에 달한다. 

『구당서(舊唐書)』에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을 근거로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武寧王妃 관꾸미개  金製冠飾  
크기높이 22.2cm, 현재길이 2.1cm, 너비 13.4cm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처음 발굴되었다.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금제관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비의 금제관식은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고,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다. 

중앙에는 7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꽃병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이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서는 사각형과 오각형 금판장식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 판 장식의 테두리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어 실을 이용, 관테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백제 문화의 정수

무령왕과 왕비의 꾸미개들은 정고하고 화려하며 금, 은의 순도가 매우 높다. 

누금鏤金기법 장식, 섬세한 무늬를 새기기 위한 다양한 기법 등 수준 높은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왕의 관꾸미개는 얇게 편 금판을 오려서 인동초무늬와 꽃무늬를 만들고 달개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중국 남조나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무늬를 백제의 미감으로 재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왕비 머리 쪽에서 발견된 은잔은 겉에 화려한 무늬들을 새겼다.

연꽃, 인면조人面鳥, 용, 봉황 등 전체적인 도상 배치와 요소는 백제금동대향로, 부여 외리 출토 무늬벽돌과 유사하다.

6 세기 전반 중국에서 들어온 청동탁잔靑銅托盞을 백제화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은잔(銀盞)
높이 15.0cm, 전시실 : 웅진백제실


설명 : 왕비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받침托, 잔盞, 뚜껑蓋으로 구성되어 있다. 

잔에는 굽이 있고, 받침 중앙에는 잔을 끼우는 홈이 있다. 

받침에는 신선, 용,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면조신人面鳥身 등을, 

잔에는 산악, 연꽃, 봉황, 용, 사슴, 나무 등을 새겼다.

또한, 뚜껑에는 산, 나무, 사슴 등을 새겼고,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은잔에 표현된 무늬들은 백제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은잔이라고 하지만, 조명 때문이지 황금빛 금잔처럼 보인다.

 

 

 

1971년 7월 5일, 여름철에 송산리 무덤 안에 물이 새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만드는 작업 도중 

한 인부의 팽이 끝에 벽돌이 걸렸다.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무덤에 묻힌 지 약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대 발견으로 꼽히는 무령왕릉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신중히 조사를 했어야 했지만, 

각지에서 모여든 기자들, 구경꾼들로 인해 원활하게 조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장마철에 따른 무덤 안 침수 및 유물의 부식 우려 등을 고려하여 유물을 빨리 수습하고, 

무덤 구조를 조사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유물 수습 작업은 약 17시간 만에 끝이 나 아쉬움이 남았지만, 

당시 백제의 화려한 문화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은 백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안내문)

 

 

 

 

금•은장식 손칼(왕) 


왕 허리 부근 은허리띠와 용• 봉황무늬 고리자루 큰 칼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자루끝장식은 은판을 두드려 만들었고, 손으로 잡는 곳 위아래로 마름모꼴 장식을 가득 제운 금판을 끼웠다.

금판 테두리에는 새김눈을 둘렀는데, 이 새김눈은 손잡이에 사선으로 감아 돌린 금실에도 있다.

금실과 안에 남아 있는 목심 사이에는 공간이 있는데, 손잡이를 가족으로 감싼 것으로 추정된다.

손잡이 중간에는 고리가 달린 은판이 끼워져 있다. 칼집의 장식은 손잡이와 비슷하다.
X선 분석 결과 칼집 속 칼의 같이는 13.2cm로 확인되었다.  (안내문)

 

 

오각형 은꾸미개(왕비) 銀製五角形裝飾 
공주 무령왕릉 (1971 발굴)

 

 

 

금•은장식 손칼(왕비) 金銀製裝飾刀子 


공주 무령왕릉 (1971 발굴)
왕비 목관에서 3점의 금·은장식 손칼이 발견되었다.

각각 왕비 머리 쪽(1), 허리 부근(2), 금동신발 부근(3)에서 출토되었다. (안내문)

 

 

은허리띠와 금 은허리띠드리개(왕) 銀製銙帶 •金銀製腰佩 

공주 무령왕릉 (1971 발굴)

 

왕의 허리 부분에서 출토되었다. 

은허리띠는 크고 작은 타원형 판을 교대로 연결하고 한쪽 끝에는 띠고리를, 반대쪽 끝에는 꽃모양 꾸미개를 달았다. 

타원형 판은 오목한 부분이 바깥쪽이고 볼록한 부분이 몸에 닿는 면이다. 

하트 모양 달개를 큰 판에 2개, 작은 판에 1개를 달고, 판의 양 끝에는 각각 4개와 3개씩 원형 달개를 달았다.
허리띠드리개는 큰 판에만 하트 모양 달개를 2개씩 달았다. 

드리게 위에는 두꺼비를 맞새김한 오각형 금판을 달았고, 아래에는 도깨비 무늬를 맞새김한 금판과 백호,
주작으로 보이는 신수를 새긴 은판을 달았다. (안내문)

 

 

청동거울(왕) 

 

무령왕릉의 청동거울은 널방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왕 쪽에서는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수대경이, 

왕비 쪽에서는 수문경이 나왔다. 

같은 틀에서 만들어져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울들이 우리나라와 일본 고분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거울이 국가 간의 교류를 통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방격규구신수문경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수를 표현하였다.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을 표현하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하의만 입은 모습이며 

손에는 창을 들고 4마리의 큼직한 짐승들을 사냥하는 모습이다. 

손잡이 주위에는 4 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지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바깥 둘레에는 "尙方作竟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 壽(如)金石兮

(상방에서 만든 거울은 참으로 좋아서 옛날 신선들이 늙지 않았고, 목이 마르면 옥천의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대추를 먹으며 쇠나 돌같이 긴 생명을 누렸다.)"라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반영한 글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무령왕 금귀걸이 금제이식武寧王 

크기길이 8.5cm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 처음 발굴되었다.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금제관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 장식이 달려있다.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다. 

끝 장식은 담녹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 것으로 금 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안내문)

 

 

금귀걸이(왕비, 국보)
세부사항 : 길이 11.8cm


전시실 : 웅진백제실
설명 :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왕의 귀걸이처럼 중심 고리에 두 줄을 달았다.

          긴 쪽은 달개步搖를 사슬처럼 붙여 늘어뜨리고 탄알 모양의 끝장식을 달았다.

          짧은 쪽은 중간에 담녹색 유리구슬을 장식하였으며,

          누금鏤金으로 장식한 펜촉 모양의 끝장식을 달았습니다.  (안내문)

 

 

무령왕비 금귀걸이 武寧王妃 金製耳飾
크기전체길이 8.8cm, 지름 2.2cm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된 두 쌍의 금귀걸이 중 한 쌍이다.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를 연결하고 그 아래에 담녹색 유리구슬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펜촉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X-선 형광분석 결과, 금(Au) 97.0~99.8%, 은(Ag) 0.1~0.5%, 동(Cu) 0.1~1.1% 정도의 함유량을 보인다. (안내문)

 

 

왕비의 금목걸이 (금제칠절경식 金製七節頸飾)
공주시 출토, 크기길이 7.0cm, 최대지름 14.0cm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목걸이로, 7개의 금막대가 연결되어 있어 7절 목걸이라고도 한다. 

금막대의 양끝에는 둥근 연결고리가 있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이와 같은 모양의 9절 목걸이도 출토되었다. 

이 목걸이는 고구려는 물론 신라나 가야지역에서 볼 수 없는 백제만의 특징을 지닌다.  (안내문)

 

 

무령왕릉 목관(武寧王陵 木棺)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과 왕비를 모셨던 목관 2개가 출토되었는데, 

관재(棺材)로 사용된 목재의 수종을 분석한 결과, 상엽침엽수 계통의 금송(金松)으로 판명되었다.

세계적으로 1과 1속 1종의 금송은 일본 남부지방의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고급 목재로

고대의 일본에서도 지배계층이 사용했던 관재였다.

이러한 금송이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부여 능산리 동하총(東下塚), 익산 쌍릉(雙陵)과 같이 백제 왕릉급

고분의 목관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했던 교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 자료가 되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은 삼국시대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목관 중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자료이다.

목관은 목재에 옻칠을 한 관재를 기본으로 하여 금,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6개의 운반용 관고리,

다수의 관정(棺釘) 등을 결구하여 만들어졌다.

목관의 장측판(長側板)은 2개의 관재를 나무 쐐기와 나무못으로 연결하여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왕과 왕비 목관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사용된 관재의 수량, 각종 부속구의 종류 등

세부적인 형상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왕의 목관은 뚜껑[蓋板]에 5개의 관재를 사용하였고, 뚜껑, 장측판 등의 마구리 부분에 은제금구(銀製金具)를

덧붙여 장식성을 높였다.

이에 반해, 왕비의 목관은 뚜껑에 3개의 관재를 사용하였고, 별도의 은제금구를 결구하지 않았다.

왕 목관의 관고리는 2중의 꽃 모양 좌판(座板)에 두꺼운 철판(鐵板)을 부가하여 왕비의 관고리보다 볼륨감이 있다.

왕 목관의 관정은 꽃 모양의 좌판을 두고 머리에 금판(金板)을 씌웠지만, 왕비 목관의 관정은 별도의 좌판 없이

못머리 부분에 은판(銀板)을 씌웠다.

이와 같이 왕의 목관은 왕비의 목관에 비해 장식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 신분적 지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전체 복원 크기는 왕 목관이 길이 262.0cm, 너비 77.0cm, 높이 97.0cm이며,

왕비 목관이 길이 250.0cm, 너비 75.0cm, 높이 94.0cm이다.  (안내문)

 

 

 

금팔찌 (금제천金製釧)
공주시 출토 
크기: 지름 7.0cm, 너비 0.7cm 

 

 

무령왕비 금팔찌(武寧王妃 金製釧)  
크기지름 5.2cm


왕비의 발 부근에서 출토된 두 쌍의 팔찌이다. 한 쌍은 은팔찌이고 다른 한 쌍은 금도금 은팔찌이다. 

은팔찌는 중앙이 볼록하고 양 끝으로 가면서 가늘어지는 다면은봉(多面銀棒)의 형태로 끝을 구부린 

고리를 만들어 다른 마디에 연결시켰다. 금도금 은팔찌는 은팔찌와 형태가 동일하다. (안내문)

 

 

 

 

무령왕과 왕비의 껴묻거리

 

무령왕과 왕비의 관에는 권위를 상징하거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하는 껴묻거리(副葬品)를

넣었다.

왕과 왕비의 껴묻거리 중 베개와 발받침, 관꾸미개•귀걸이•목걸이와 같은 장신구, 금동신발 등은 공통적으로

보이는 권위의 상징물이다.

이 가운데 관꾸미개는 금판을 오려 만든 꽃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은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쓴다" 라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용•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과 허리띠•뒤꽂이 등은 무령왕, 팔찌•은잔•다리미 등은 왕비를 위한 권위의

상징물이다.

한편 청동거울•흑옥 장식•유리동자상은 벽사의 기능을 하며, 청동거울은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안내문)

 

 

 

 

 

무령왕 금동신발 (武寧王 金銅飾履)

공주 무령왕릉 (1971 발굴) 

크기길이 35.0cm, 너비 2.2cm, 높이 10.0cm
 
금동신발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되는 장례용 껴묻거리[副葬品]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신발이 모두 발견되었다. 

왕의 신발은 발등을 덮는 2개의 측판과 1개의 바닥판으로 만들어졌다. 

안쪽에는 은판, 바깥쪽에는 맞새김[透彫]한 금동판을 덧대었다. 

정으로 두드려 육각무늬를 만들고 그 안에는 맞새김으로 꽃무늬와 봉황무늬를 표현하고 달개[步搖]를 달았다. (안내문)

 

금동신발(왕비) 金銅節履(王妃)
공주 무령왕릉 (1971 발굴)


왕비의 금동신발은 뒤끔치가 부서져 없어진 채 발견되었다.

왕의 신발과는 달리 안쪽과 바깥쪽 모두 금동판을 사용하였다.
안쪽은 무늬가 없지만, 바깥쪽은 육각무늬를 맞새김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 등을 새겼다.
2개의 금동판은 동제 실과 못으로 고정하고 달개를 달았다.

바닥판에는 원뿔모양의 옷을 부착하고, 그 사이에 원형의 달개를 달았다. (안내문)

 

 

영혼을 위한 백제의 마지막 신발

 

금동신발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례용품으로 삼국시대 대형 무덤에서 확인된다.

사후 영혼을 위한 무덤 껴묻거리로 시신의 발에 신기기도 하고 주변에 놓기도 했다.
백제 금동신발은 얇은 동판으로 모양을 만들어 도금하고 표면을 여러 무늬로 장식한 뒤

바닥에 못(스파이크)을 여러 개 붙여 만들었다.

이와 달리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은 금동판 안쪽에 은판이나 금동만을 덧대어 만들었다.

또한 표면에는 연속 육각무늬를 만들고 그 안에 봉황, 연꽃 등의 무늬를 맞새김하였으며,

바닥판과 측판에는 달개 장식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무령 양과 왕비의 금동신발은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제의 마지막 금동신발로, 

이후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안내문)

 

 

간돌검

 

돌화살촉

 

청동검

 

빗살무늬토기 

 

 

갈판과 갈돌 
아산 장재리 출토  
2005~2006년 발굴 

 

갈판과 갈돌은 짝을 이루어 열매나 곡물 등의 껍질을 벗기거나 으깨는 데 사용되었다.
넓고 납작한 갈판에 열매나 알곡 등을 올려놓고 길쭉한 갈돌로 갈았다.

갈판과 갈돌은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도토리 같은 견과류의 가공에 사용되었으며, 

이후 농경이 발달하면서 곡물 가공에도 쓰였다.  (안내문)

 

 

석검, 石劍, 마제석검, 간돌검 
국적/시대한국-청동기​
 공주시 출토 
크기길이 41.0cm 등

 

잔무늬거울, 방울, 한국식 동검

 

 

투겁창과 물미 鐵鉾 • 鐵鐏
서산 여미리 방죽골 출토 
2009년 발굴 
 
길이가 길고 자루 부분이 직선이었던 투겁창은 4세기 이후부터 제비꼬리모양으로 변하게 되며 길이가 짧아진다.

말갖춤을 갖춘 기병부대에 맞서기 위해 모양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6세기 고분에서 발견되는 물미는 자루 끝에 끼워 창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안내문)

 

아궁이 
서산 언암리 출토 
2009~2010년 발굴


불을 이용하여 난방, 취사, 제습 등의 기능을 하는 화덕시설을 아궁이라고 한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 위에 계란모양 토기를 놓고, 그 위에 시루를 올려 조리를 하였다.
조리가 끝난 뒤, 아궁이 뚜껑을 덮어 난방을 하였다. (안내문)

 

 

백제 토기의 확산

 

백제 토기에는 곧은입 항아리, 넓은입 긴 목 항아리, 세발토기, 굽다리 접시, 흑색마연토기 등이 있다.

3세기 경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충청도 일대에는 4세기 중후반 경의 백제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이 지역에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굽다리토기. 손잡이 달린 항아리 등

 

 

예식진묘지석 탁본 祢寔進慕誌石拓本
 중국 하남성 낙양 
중국 당


백제 장군이었던 예식진(615-672년)의 묘지석 탁본이다. 

낙양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는 백제의 좌평이었던 조부와 부친 등의 가계와 행장을 기록하였다. 

예식진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입 때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과 같이 당에 투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당나라로 건너가 정3품 좌위위대장군에 올랐고, 672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안내문)

 

위 탁본을 근거로 묘지석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예식진 장국의 행적을 탁본한 것

당시 중국으로 거너가 장군까지 지낸 후 사망하며 한문 종주국에서 만든 묘지석이라 한자의 자체가 좋다.

 

 

공주 의당 금동관음보살입상(公州 儀堂 金銅觀音菩薩立像)

백제​, 출토지공주시
크기현재높이 25.0cm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왼손에는 정병(淨甁), 오른손에는 연봉오리를 들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관(三面冠)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는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 임을 알 수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둥근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몸에 밀착된 천의(天衣)는 무릎 앞에서 X자 모양으로 교차하여 어깨 뒤로 넘어가 U자형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목걸이에 연결된 구슬 장식은 한 줄로 내려와 배 위의 장식을 중심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뒤로 연결된다. (안내문)

 

귀때 토기

공주 학봉리 출토

 

짧은목단지, 병 

 

기와 

 

 

부처(금동여래입상)

1981년 충남 금산 음지리 출토

통일신라시대

 

 

소조상편(塑造像片)

보령 성주사터 출토, 1972년 발굴 
고려 


성주사 삼천불전터에서 출토된 소조상편이다.

소조상은 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태토에는 지푸라기 등이 섞여 있다.

삼천불은 시·공간을 초월해 무수한 부처가 존재한다는 천불 신양이 발전해 과거, 현재, 미래로 확대된 개념이다.

당시 삼천불전에 소조상이 삼천 개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는 130여 점이 발견되었다. (안내문)

 

 

경자(靑銅磬子)
청원 장앙리, 1987년 발견 
고려


경자는 불경을 읽거나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범음구이다.

주로 법당에서 사용되며, 나무망치인 당목이나 노루 뿔 등으로 두드려 소리를 낸다.

두드리는 부위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와 올림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금고( 金鼓)
명칭금고, 金鼓고려​
천안시 출토
너비 36.5cm, 두께 7.5cm, 입지름 28.0cm 


고려시대의 쇠북으로 북면은 내구와 외구로 구성되어 있다. 

내구 중앙에는 작은 동심원을 만들고 그 안에 1+8의 연자를 양각으로 새겼다. 

내구는 중앙에 굵은 띠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가는 양각선을 새겼다. 

내구 바깥쪽으로는 구름무늬를 가는 양각선으로 표현하였다. 

측면은 상단에 2개의 사각형 고리를 부착하였고, 왼쪽 고리에는 철로 만든 둥근 고리가 달려있다. 

측면은 가운데 굵은 선을 중심으로 양옆에 가는 양각선을 새겼다. 

뒷면은 구연이 짧은 형식으로 끝부분을 한단 높게 처리하였다. 

측면과 뒷면의 전에는 가질의 흔적이 있다. 뒷면의 구연이 짧은 것으로 보아 반자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차와 술을 담는 그릇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그릇이 제작되었다. 

특히 식물과 동물의 형상을 본 따 만든 경우가 많은데, 표주박모양 병과 참외모양 주전자 등이 있다.

잔은 탁잔과 마상배도 만들어졌다.
1. 표주박모양 병 보일 125 Coirdishaped Borice 1 1947년 성낙준 기증 | 공 253
2. 표주박모양 병 위원 121분 Courd. ahaped Borde 1 1947년 성낙준 기증 | 공 254
4. 국화무늬 잔 함: tRE.XHa Cup and Sceand, cctadon I 공 140
5 모란무늬 잔 위제로 지운AX fc, Cup and Seand, ceaudon I 공 210
6. 참외모양 주전자 함량 파% 주 Lobed Ewer, Candona I 공 144

 

 

부처에게서 나오는 빛 장식(光背)
공주 금학동 출토, 1963년,  남북국시대(통일신라)


공주 제민천변 금학동 절터에서 옮겨 온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광배다. 

연꽃형 전신광배이며, 불꽃무늬가 강조되었다. 

외형은 백제 양식이나 내부 무늬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에 가깝다. 

금학동 광배의 본존은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공주 서혈사지 석조여래좌상(西穴寺址 石造如來坐像)
통일신라​, 출토지공주시
전체높이 187.0cm, 불신높이 96.0cm, 대좌높이 91.0cm, 어깨너비 42.5cm

공주시 웅진동 망월산 동쪽 서혈사터[西穴寺址]에서 발견된 불상(佛像)이다. 

양 어깨를 감싼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몸에 밀착하였고, 가슴 부근에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다리 위에 올려놓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하고,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좌는 상(上)·중(中)·하대석(下台石)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상대석(上台石)에는 앙련(仰蓮),

하대석에는 복련(覆蓮)과 귀꽃[耳花]이 표현되어 있다. 지대석(地臺石)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天人)과

새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새겼다.

이 불상은 각 부분의 세부표현으로 보아 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박물관에 전시하지 않고 일괄로 수습하여 보관 중인 수장고를 개방하여 밖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수장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층층이 내려가면서 관람할 수 있다.

워낙 많은 토기가 수장고에 있어 잘 복원하고 정리되는 대로 좋은 작품은 전시되면 좋겠다.

 

 

 

 

 

 

 

 

 

 

 

 

 

 

 

 

 

 

 

 

 

 

 

 

 

 

 

 

 

 

 

조그만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씨족, 부족국가부터 삼국을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가 명멸해 갔다.

국립공주박물관은 공주를 중심으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번에 박물관에서 스치듯 짧은 시간에 대강을 훑고 왔으나 부족한 게 사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찬찬히 살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