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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용인의 경기도 박물관 선사·고대실

by 즐풍 2023. 8. 27.

2023_135 A

 

 

2023. 8. 24. (목)  오전에 탐방

 

 

아무리 백수건달이라고 해도 맥없이 하루를 보낸다는 건 죄악은 아니라도 죄스럽다.

그런 죄스러움이 때로 잉여인간이란 생각에 미치게 되면 슬픔이 살짝 묻어날 조짐도 보인다.

그러다 보면 우울증에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 전에 밖으로 나간다.

 

지하철이나 버스는 덧옷을 입어야 할 만큼 냉기가 흘러도 걷는 동안엔 땀이 난다.

수원에 있는 줄 알았던 경기도 박물관이 용인 상갈동에 있기에 도착했더니 10:20이다.

하루 세 차례 있는 첫 프로그램 안내가 11시에 시작된다기에 어린이 박물관부터 들린다.

그곳은 어린이와 함께 입장이 가능하다기에 문턱도 못 넘고 경기도 박물관에 들어선다.

 

 

 

 

문인석(文人石)

무덤에는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들이 나타나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형물로 표현하였다.
무덤 앞에 석인을 배치하는 것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한나라 때부터 실물과 기록이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확인되고,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다.
이 석인은 양관조복(梁冠朝服, 머리에는 양관을 쓰고, 조복을 입음)에 홀(笏)을 들고 있는 문인석이다.

양관 전면을 구름무늬로 장식했고,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비교적 뚜렷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조복과 신체 표현 등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나 자세에서 도식적인 느낌을 주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신체 비례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점, 양관의 량을 따로 표현하는 기법,

화려한 폐슬(무릎을 가리기 위하여 허리 아래로 늘이는 천)과 우수 장식 등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의 양식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1989년 안양 평촌동 신도시 개발공사 때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 이제(李瑅, 1598~1624)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인석은 경기도 박물관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조선시대 유물이다.

 

경기도 박물관 근경

 

안내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에 경기도 어린이 박문관부터 들려보지만

대동한 어린이가 없어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다.

 

 

 

경기도 약자와 뮤지엄의 영문을 도식화한 마크

 

 

제일 먼저 선사·고대실부터 들린다.

경기도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수도였던 적이 없다.

한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때가 있어 한성백제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서울 송파동 몽촌토성에 「한성백제박물관」이 있기에 경기도 박물관엔 백제, 신라, 고구려 방이 따로 없다.

선사·고대실에서 바로 고려·조선실로 넘어간다.

 

 

선사와 고대의 경기

 

경기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다. 

구석기인들은 이 땅에서 석기를 가지고 살았고, 신석기인들은 하천 주변에 정착하여 토기를 만들었다.
청동기인들은 도구를 발달시켰는데, 농업생산물이 많아지면서 권력이 생겨 여러 집단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면서 역사의 여명이 싹트게 되었다.
역사시대가 되면서 북방지역의 발전된 생산기술을 가진 이주민이 건너와 토착주민과 어울려 살았다. 

사회가 발전하고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경기 땅에서의 첫 국가인 백제가 등장하였다. 

경기 땅은 다른 나라와 교류하기 위한 최적의 지역이었고, 이 땅을 차지하는 나라가 결국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경기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역사의 주요 무대였고, 

고려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문)

 

 

 

경기도의 자연환경

 

경기도는 3개의 산맥(마식령·광주·차령)과 3개의 하천(임진강·한강·안성천)을 통해 육지와 바다가 만난다.

산맥 때문에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며, 하천 주변으로 넓은 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바다와 접한 해안가는 굴곡이 심하여 만(灣)과 섬이 많았지만, 현재에는 간척사업으로 단순해졌다.

연평균 기온은 10°C 내외이고,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불며, 강수량은 1,300mm 정도이다.

내륙지역은 추운 대신 비는 조금 덜 내리는 편이다.
선사시대의 자연환경은 어떠했을까? 

구석기시대에는 지금보다 추운 빙하기로 사람보다 동물이 살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기원전 1만 년 경부터 기온이 점차 올라가 바닷물도 많아져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의 육지에 바다가 생겼다. 

현재 한반도와 비슷한 해안선이 만들어진 시기는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안내문)

 

 

구석기나 신석기는 물론 청동기나 철기시대까지 대부분의 일상은 가장이 모두 처리해야 했다.

철기시대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후반부터 겨우 산업화가 시작되어 생필품을 구하기 쉬워졌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인구부터 별 어려움 없이 자란 세대이나 최근 들어 삶은 점차 팍팍해지기 시작한다.

1970년대 이후 급성장하며 미국으로 저가에 수출하던 호황은 1998년 IMF로 철퇴를 맞은 후

인건비가 비싸지며 생산 기지는 중국에서 동남아로 나간 이후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자녀들 교육 등의 뒷바라지로 저축울 하지 못한 우리 세대는 어려움에 처했다.

자녀 세대도 마찬가지다.

힘든 일은 하기 싫고, 마땅한 직장은 잡기 어렵고, 직업을 구하기는 점점 어렵다.

부모에게도 남은 돈이 별로 없으니 상속받을 재산도 변변치 않으니 이들의 노후는 지금보다 더 걱정스럽다.

그나마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가장 복 받은 세대인 셈이다.

 

 

 

권력의 등장, 복잡해진 사회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쓰면서 청동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기능에 따라 전문화된 도구를 사용했고, 정형화된 무덤제도가 등장했으며, 

농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사회복합도가 매우 높아졌다. 

집단이 나뉘고, 경제적인 부를 지닌 권력이 발생하면서 개인 및 집단 사이에 갈등도 생겨났다. 

기원전 300년경에 이르면 중국 연나라에서 철기가 들어오면서 서서히 역사시대로 전환이 시작된다. (안내문)

 

 

 

간돌검이나 간돌 화살촉을 만들 때 힘이 좋은 신석기인들도 무척이나 힘들었겠다.

저렇게 칼을 만들기까지 며칠이고 돌을 갈자면 돌의 성질도 잘 알아야 했다.

박물관에서 이런 간돌검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지배자의 등장 


청동기시대에는 마을을 감싸는 도랑인 환호에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인 목책을 설치하고

청동검·간돌칼·돌화살촉·돌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켰다.

또 만드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고인들을 세웠다.

무덤에 죽은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 부장품을 무덤에 묻고 종교적 의례를 했다.

이것은 청동기시대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특별한 개인과 집단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경기도에는 약 1,20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안내문)

 

 

 

아래 그림 중

1. 간돌검(마제석검)                      2. 연천 삼거리
   청동기시대, 출토지 미상               찌르는 데 사용되는 실생활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고인돌에서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제사 용도로도 활용된 도구다.
3. 돌창(석청) 
    청동기시대, 출토지 미상

 

 

철기, 새로운 역사의 시작


청동기시대가 끝나갈 무렵 중국으로부터 한반도에 철기 문화가 들어왔다. 

철기가 보급되었지만 오히려 청동기문화가 정점을 찍은 이 시기를 '초기철기시대'라고 한다.
사람들은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비교적 높은 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유물은 점토토기와 목이 긴 항아리, 흑색간토기다. 

또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가 확인된다. 

철기의 등장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시대의 시작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안내문)

 

 

 

당초무늬 암막새  
통일신라, 안성 봉업사

 

 

오른쪽 2                                                                            왼쪽 3

굽 사다리발, 통일신라, 광주 대쌍령리 출토                     뼈항아리, 통일신라

신라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불교가 유행하면서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담았던 항아리 

원래 무덤에 껴묻는 토기의 양이 많았지만,

통일신라 시기에 이르면 껴묻는 토기의 양이 적어진다.

 

 

신라 대형기와   

통일신라, 토지주택박물관


남한산성 내부에 있는 조선시대 행궁터에서 신라의 초대형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건물의 흔적(길이 50m, 벽체 두께 2m)으로 미루어 군사 창고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이 기와는 하나의 무게가 19kg에 이르며, 보통의 신라 기와에 비해 3~4배나 크고 무겁다. 

672년 신라는 주장성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아 중국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는데, 

이 기와는 주장성을 쌓았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안내문에서 보듯 기와는 현재 사용되는 기와보다 훨씬 크다.

이런 대형 기와를 쓰는 건물이면 건물 자체가 매우 튼튼하겠단 생각이 든다.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도처에 건물로 쓸 나무는 많았을  테니 나무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폰 14를 수키와 사이에 넣어 봤는데 중간에 틈이 조금 생길 정도로 크다.

 

 

다시, 나라의 중심으로 


동일 이후 신라가 지방제도(군현제)를 정비하면서 경기 지역에는 교통로가 발달하여 당성唐城(화성)은

대외교류의 거점이 되었다.

한강의 남쪽인 경기 지역 남부에는 여러 사찰이 건립되어 불교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하지만 8세기 후반

신라는 혼란을 맞았다.

825년 고달산(여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평양(현재 서울 인근)에 도움 하려던 김범문의 난을 계기로

사회가 더욱 혼란해졌다.

지방 곳곳에서 호족이 나타나 사회변동을 이끌었다.

죽주(안성) 세력 기훤의 아래 있던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했으나, 예성강 일대의 송악(개성)에  상장한

왕건 서력에게 제거되며 고대사회가 끝나고, 경기 지역은 중세 고려왕조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안내문)

 

 

 

갑옷, 삼국시대

 

병사가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방어용 무기이다. 

삼국시대 갑옷은 여러 모양의 철판을 이어 만들었는데, 

물고기 비늘처럼 작은 조각을 붙이는 형태[치마 또는 긴 판을 이어 작은 못으로 연결한 형태(판갑)로 나뉜다.
이 갑옷은 안성 망이산성 출토 백제 갑옷으로,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출토 가야 갑옷 등과 유사한 형태이다. (안내문)

 

중국이나 유렵의 전쟁영화를 보면 멋진 갑옷을 입고 싸우는 장면에서 그들의 갑옷이 부러웠다.

이 갑옷은 안성의 망이산성에서 나온 철갑 제품인데, 가벼운 가죽 제품의 갑옷도 출토되었다.

 

 

경기도 안성의 망이산성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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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와서 세운 비석(北漢山 眞興王巡狩碑)


이 비석은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 비봉에 올라 처음 발견했다.
진흥왕(왕위 기간 540~576년)이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석에는 왕이 방문한 목적과 비를 만든 이유, 참여한 인물 등을 12줄 32개 글자로 기록하였다.

진흥왕은 확대된 영토를 찾아가 여러 고을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를 석방하여,

직접 민심을 살피고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크기 : 높이 154cm, 너비 69cm)  (안내문)

 

한때 4~5년을 내리 북한산, 도봉산만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북한산 비봉에서 진흥왕 수순시 복제품을 만나며 진품을 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조선 후기에 들어와 금석학이 발달하면서 김정희가 비석을 탁본하며

진흥왕순수비라는 걸 최초로 확인했다.

추사 김정희는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려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에 세워진 관악산 표지석에 새긴

한자도 김정희문 글자에서 뽑아낸 글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북한산 비봉의 전체적인 모습이 궁금하면... 

 

북한산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산행일자 2017.08.26. 토 10:08~14:40(이동시간 04:32, 이동거리 6.78km, 평균속도 1.7km/h, 휴식시간 40분) 날씨: 맑음 올여름은 며칠 반짝 덥다가 이상기온으로 열대야도 별로 없이 무난히 지나가는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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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정상 추사 김정희의 표지석 글자가 궁금하면... 

 

여러 방향에서 본 관악산 연주대와 응진전

2021_167 2021.12.03 (금) 08:25~14:22 (10.7km 이동, 5시간 57분 산행, 평속 1.9km/h) 맑음 어제 비가 오면서 미세먼지를 쓸어버렸을 테니 오늘 날씨는 선명할 것이다. 이런 날씨에 산행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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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실의 토기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경기도 박물관의 심벌마크를 토기로 배열하여 만든 참신한 기획이다.

 

 

삼국통일의 첫걸음, 한강 유역


6세기 중엽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맞서며, 마침내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내쫓았다. 

두 나라는 영토를 나누기로 약속했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여 새로운 지방행정지역이라는 뜻인

'신주新州'를 경기도 광주에 설치했다.

진흥왕은 중국과 교역이 가능한 한강 유역을 얻으면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7세기에 김유신은 낭비성을 공격하고 경기 지역 북부의 칠중하(임진강) 건너까지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다. 

신라는 임진강 유역에 성곽을 쌓아 경기 땅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며,

676년 당나라와의 매소성(연천) 전투에서 승리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삼한이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안내문)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데다 지금까지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어 부끄럽게도 삼국사기를 읽어볼 일이 없었다.

위 안내문을 보며 삼국사기에는 사마천의 「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고구려

 

4세기 초 고구려는 낙랑을 몰아내고 백제와 전쟁을 벌였지만 오히려 열세에 놓여 있었다. 

5세기에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인 나제동맹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까지 고구려는 경기 지역에 보루 등

군사 기지를 두었고, 그들은 무덤 등의 유적을 남겼다.
고구려 유적은 군대가 이동했던 임진강 유역, 양주 분지, 아차산(구리) 일대, 성남·용인·화성지역에

밀집 분포한다.

고구려의 남진위원에 대한 불분명한 역사기록을 보완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구려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전쟁과 방어체계


한성백제의 수도는 한강 남쪽 가까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있었다. 

경기 지역의 주요 교통로에는 도움을 보호하기 위해 성곽을 쌓고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구릉과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은 처음에 흙을 다져 쌓다가 점차 돌로 쌓아 방어력을 높였다. 

성곽은 전쟁을 목적으로 쌓았지만, 평소에는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사용하였다.
성곽은 한강을 둘러싼 고구려-신라와의 치열한 전투로 다시 쌓거나, 보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고 수도를 웅진(공주로 옮긴 후에도, 한성백제 성곽의 일부는 

그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나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다. (안내문)

 

 

풍납토성이 궁금하면... 

 

서울 한강 인근의 풍납토성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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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공원에 있는 몽촌토성이 궁금하면...  

 

몽촌토성은 백제가 서울시민에게 준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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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독(大甕)

한성백제 포천 자작리 출토


대형의 집터 안에서 발견된 토기로 많은 양의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큰 독은 너무 커서 2~3 부분으로 나눠 만들어서 이어 붙였는데,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가졌던 장인이 만든 백제의 명품이다. 

삼국시대 토기 가운데 가장 큰 기器種으로 전라지역에서는 무덤으로 사용되는데 반해,

경기 지역에서는 백제의 지방 세력가가 살았던 큰 집터에서 발견된다.

제일 큰 항아리는 바닥이 둥글고 입이 커서, 마치 포탄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겉면이 얼룩덜룩한 이유는 당시 집이 화재로 무너지면서 독이 부서지고 조각이 불에 타면서

이러한 모습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안내문)

 

 

포천 자작리 유적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의 포천천 주변에 위치한 한성 백제시기 대표적인 마을 유적이다.

 2000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한 결과, 마을 내에서 '여품' 자형 집터(2호)가 발견되었는데 

평면 육각형의 주거공간에 사다리꼴의 출입구가 통로로 연결된 모양으로 확인되었다. 

전체길이는 약 24m, 주거 공간의 크기는 160 m(약 50평)이 넘어, 당시 수도인 한성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집 내부에서는 그릇받침과 많은 양의 기와조각, 여러 개의 큰 독 등이 발견되어 신분이 높은 사람이 

살던 것으로 여겨진다. 

4~5세기 백제 중양의 영향 아래에 있던 지방의 중요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한성백제 사람의 삶

 

경기 땅에 살던 백제 사람의 흔적은 대개 왕실과 귀족이 살았던 마을, 무덤, 산성 등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출입구를 따로 만든 평면 육각형의 집에 살았다.

집 안에는 난방과 조리를 위해 부뚜막 시설을 만들었고, 한쪽에 식량을 저장하는 큰 항아리를 두었다.

생활도구는 토기가 대부분이고, 생산도구와 무기는 강한 철기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죽은 후에는 돌무지무덤이나 움무덤에 묻혔으나, 점차 돌방무덤도 만들어졌다. 

껴묻거리는 매우 적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귀중한 물건을 껴묻었다. 

멱절산성(고양)에서 확인되듯이 특정한 공간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안내문)

 

 

 

선사인의 발명품, 토기


토기는 흙으로 모양을 빚은 뒤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이다. 

토기의 발명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크게 변화했다. 

먹거리를 조리하고 저장하며 운반하는 활동, 농사, 정착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에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했다. 

점과 선으로 삼각무늬, 사각무늬, 격자무늬, 방사선무늬 등을 새겼다.

 한편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표면에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민무늬토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더욱 분화되어 매장의례에 쓰는 붉은 간토기나 채문토기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토기는 고고학지의 최대 자원이다. 플린더스 페트리(Flinders Petre)  (안내문)

 

 

 

최초의 도구, 석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로 만든 도구인 뗀석기를 사용했다. 

이른 시기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친 돌감을 이용하여 주먹도끼, 찍개, 여러 면석기 등의 

대형석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점차 시기가 지남에 따라 세밀한 가공이 가능한 좋은 품질의 돌감을 이용하여 슴베찌르개, 

돌날과 같은 작고 정교한 석기를 사용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석기를 이용하여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면서 먹거리를 얻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로, 도구가 없으면 하찮은 존재이고 도구가 있으면 엄청난 존재이다.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안내문)

 

 

 

경기 땅에 사람이 등장하다


경기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흔적은 한탄강, 임진강, 한강 등의 큰 강과 그 지류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식량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다.
경기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친 유적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연천 전곡리, 남양주 호평동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경기도 지역은 삼국이 자웅을 겨루는 동안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강유역은 한때 백제의 백제의 수도였으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지금의 공주로 수도를 옮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어도 수도는 여전히 경주에 두었다.

국토의 중심인 서울을 수도로 삼았으면 신라의 역사는 더 길게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