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35C
2023. 8. 24. (목) 오전에 탐방
경기도 박물관은 고려와 조선은 하나의 전시실에 함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앞쪽에는 고려, 뒤쪽에 조선 유물을 몰아넣으며 구분하는 정도로 유물은 적은 편이다.
1996년 6월 21일에 개관한 박물관이니 그전에 수집된 대부분의 유물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박물관 개관 이후 산성을 복원하거나 옛날 절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또는
대규모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발굴되는 유물을 수습한 게 대부분이다.
남해 또는 서해안은 풍랑이 심해 무역선이나 상선이 운행 과정에서 바다에 침몰되는 경우도 많다.
전라도 지역에서 침몰한 고선박에서 유물을 건진 건 목포에 국립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충청도 지역에서 수습한 유물은 태안의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옛날의 선박은 지금과 달리 작다고 해도 도자기를 달걀꾸러미처럼 엮어 적재하므로 그 양은 엄청 많다.
이렇게 수습된 유물은 목포와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각각 몇만 점씩 되나 그 일부만 전시되고 있다.
두 기관의 수장고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유물의 일부라도 임대 형식을 빌려 전시하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경기, 나라의 근본
조선왕조실록에는 경기의 정체성을 '나라의 근본' '국가 근본의 땅'이라고 정리하였다.
지리적으로도 한반도의 중심에 있지만, 모든 길은 경기로 통했다.
새로운 학문과 사상·문물이 경기로 들어와 수용되고 경기에서 재창조되었다.
또한 국왕의 가르침[敎化]이 가장 먼저 실행되었고, 그 혜택을 먼저 받는 사람들도 '경기인'이었다.
경기는 조선시대 사대부문화의 중심이었다.
특히 서울• 경기 지역의 사대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사회적인 모순을 지적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실용을 가치로 한 양명학·실학
등으로 개혁을 탐색하기도 하였다.
경기는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지하는 뿌리이자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물줄기가 시작된 곳이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 자라서 무성하고, 물은 샘으로부터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
나라에 기전※행이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샘이 있음과 같다."
- 중종이 경기관찰사 임백령에게 내린 교서 중에서 (안내문)
심지원 묘지墓誌
조선, 17세기말~18세기 초, 청송 심씨 인수부윤공파
심지원(1593-1662)의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이다.
효종 1년(1650) 경기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지냈다.
묘지명은 심지원이 죽은 지 29년 후에 박세채가 지었다.
정선된 상태의 흰색 바탕에 맑고 밝은 청화 안료로 쓴 글씨로 전체가 푸른 기를 머금고 있는
최고품질의 청화지석이다.
필체는 석봉체를 기본으로 했는데, 단정하고 가지련한 모습이다. (안내문)
분청사기 상감 '정통4년명' 김명리 묘지
조선, 1439년 안동김씨 문온공파 위탁, 보물 제1830호
경기경력經歷 [현 경기도 부지사]과 성천도호부 부사를 지낸 김명리(1368-1438)의
가계와 평생을 정리한 묘지이다.
고려 말 성리학자로 유명한 척약재 김구용의 아들이다. 집현전직제학을 지낸 류의손이 지었다.
상단의 연꽃봉오리를 투각으로 장식한 종 모양의 분청사기와 해서체로 정갈하게 새긴 글씨는
도자사와 서예사에서 가치가 크다.
또 바닥에는 장례를 모신 행자 '학민'과 산지기 '단동'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황수신 묘지(墓誌)
조선, 1467년 장수 황씨 열성공파 기증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58호
황희의 아들인 황수신(1407~1467)의 묘지이다.
세조 정권을 유지하는데 역할을 하였고, 제천례를 설행하였다.
아버지에 이어 우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묘지는 4장으로 황수신의 생애는 1~3장에 실려 있고, 마지막 한 장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청화백자묘지 중에서 두 번째로 시기가 빠른 작품으로,
광주의 분원 성립 초기 백자 제작양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정도전이 지은 법전 조선경국전
조선, 1394년 수원화성박물관 보물 제1924호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도 불리는 정도전 1월 1(1342~1398)이 태조 이성계에게 지어 올린 법전이다.
모두 2권이다. 조선 건국의 철학과 나라를 운영하는 기준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후에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바탕이 되었다. (안내문)
한양 지도
정몽주 초상 鄮夢周 肖像
조선, 16세기, 영일 정씨 종중 기증, 보물 제1110-2호 복제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이자 뛰어난 성리학(주자학)자이다.
원·명·일본과 복잡하게 얽힌 외교 문제를 여러 차례 풀어낸 유능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성계, 정도전과도 한때 뜻을 함께하며 고려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 세력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안내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초상
조선
공민왕(재위 1351~1374)은 원나라가 쇠퇴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명나라가 등장하는 시기에
고려의 왕이 되었다.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농장·노비를 없애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그림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서로 마주 보듯 앉아 있다.
공민왕은 복두를 쓰고 홍포단령에 홀을 들고 있고, 노국대장공주는 복잡한 머리 모양에 당나라 복식을 하고 있다.
(안내문)
조선 태조 어진
조선, 1872년, 어진박물관 복제 (국보 제317호)
이성계(재위 1392~1398)는 고려 말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 주자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는 데 남다른 공을 세웠으며,
위화도 회군을 기회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정도전·조준 등 새롭게 성장한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다. (안내문)
경기감영도 12 병풍
송규태 모사본
인왕산·북악산·삼각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돈의문 밖 경기감영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오른쪽 제1 폭에 돈의문이 있고, 제5~7폭에 걸쳐 경기감영이 보인다.
제6폭의 중앙에 감영의 본관 건물이 있는데, 건물 정면에는 "임금의 덕을 베풀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인
'선화당'이란 편액을 달았다.
경기감영 주위로 영은문·모화관·활터 등 주변 지역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경기감영과 주변의 경관 및 시설물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화이자 주변 지형 등을 파악하여 그린
일종의 회화식 지도이다.
또한 감영 주변의 수많은 민가와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풍속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제4~6폭 하단에는 관찰사 행렬과 구경꾼들의 모습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경기감영이 사대문 안에 위치한 것은 왕실과의 관계에서 경기의 위상을 보여준다. (안내문)
이재학 초상
조선, 19세기, 용인 이씨 이태한 기증
이재학(1745-1807)의 초상화이다. 그는 아들 이규현과 손자 이원 함께 3대에 걸쳐 경기관찰사를 지냈다.
1777년과 1793년 청나 사신의 서장관과 부사로 2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고,
경기 관찰사로 총융청과 수어청의 폐단 시정, 연천 숭의전의 수리, 가뭄에 따른 농사 대책 등을 건의했다.
우측 상단에 50세 때의 모습이라 적혀 있는데, 1799년(정조 23)에 해당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오사모에 쌍학 문양의 흉배가 부착된 단령을 입고, 정 2품의 관직을 나타내는 삽금대鈒金帶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전신상임에도 화폭이 크지 않은 점, 단령의 묘사나 호피 깔린 의자, 귓바퀴의 짙은 음영,
입술 채색이나 질감 처리 등을 감안할 때,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를 토대로 축소하여 이모 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이재학에게 내린 교지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
전 이재관(1783~1849), 조선 1849년, 용인 이씨 이종한 기증 복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일(1538~1601) 장군이 선조 21년(1588) 함경도를 자주 침략했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이다.
위쪽에 그림의 제목이 있고, 중앙에 여진족을 토벌하는 전투장면을 그렸다.
아래쪽에는 전투에 참여했던 이일을 비롯하여 휘하 장병들의 계급과 이름이 있다.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확인된다.
17세기에 그린 원본을 바탕으로 이일의 8세손인 이재관이 헌종 15년(1849)에 모사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안내문)
활과 화살
화살과 화살통
임진왜란과 경기
1592년 4월, 20만 명에 가까운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거듭된 패전 소식에 선조는 서둘러 피난을 떠났고, 20여 일 만에 한양이 적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과 경기도 곳곳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점차 전쟁의 국면은 바뀌었다.
권율은 독산성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승리하여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도성 탈환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지만,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1598년에야 전쟁이 끝났다. (안내문)
개혁의 중심
조선의 모든 길은 경기로 통했고, 경기는 국토의 동서남북을 쉽게 연결시켰다.
경기를 향해 뻗은 교통로를 따라 사람과 물자가 오갔고, 시장과 도시가 발달했다.
강과 연결된 바닷길로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의 싹을 틔우고
다른 곳으로 전파하는 곳이 경기였다.
이런 특성은 '경기'를 개혁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세종 때 토지세 개혁안[貢法]을 실험한 곳도,
조선 최고의 개혁이라 일컫는 '대동법'을 처음 실험한 곳도 '경기'였다.
조선 후기에 민생을 위한 새로운 학문인 실학의 중심도 '경기'였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려 했던 곳도 '경기'였다.
정조의 새로운 도시 화성 건설은 개혁을 위한 승부수였다.
'경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개혁의 기운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했고,
그들의 삶을 바꾸었으며, 미래를 향한 동력을 조성해 주었다.
그것이 '경기도' '경기인'의 힘이었다. (안내문)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비석 탁본
조선 1659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0호 탁본
대동법의 시행을 알리고, 공이 큰 김육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대동법은 광해군 1년(1608) 경기에서 처음 실시된 후 여러 난관을 겪으면서 전국으로 확대
시행되기까지 백 년이 걸렸다.
비석의 원래 이름은 김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善惠碑였다.
삼남지방의 길목인 평택에 세워졌다. (안내문)
대동법의 실험, 경기선혜법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전세田稅, 공납貢納, 부역負役의 의무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부담스럽고 고된 것이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이었다.
그 폐해는 이미 16세기 초부터 나타났다.
따라서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나라의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세 개혁이 필요했다.
대동법은 각 집에서 내야 하는 특산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고르게 쌀로 내도록 한 제도이다
또한 수령이나 아전이 제멋대로 거둬들였던 지방 관아의 운영비 등을 세금에 포함시키는 개혁안이었다.
그 시작은
1608년에 초기 형태인 '경기선혜법으로 나타났다.
이후 수많은 반대와 토론, 시행착오를 거치며 강원도 1625년, 충청도 1651년, 전라도 1658년,
경상도 1677년, 황해도 1708년으로 확대되어 100년의 개혁을 완성하였다. (안내문)
홍명호 반신상
조선 후기, 홍기일 기증
조선 후기 문신으로 강화부와 수원부유수 등을 지낸 홍명호 (1736~1819)의 반신상이다.
전신상과 함께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꼼꼼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반면, 복식은 질감을 살리면서도 과감하게 처리했다.
뛰어난 솜씨의 화원의 작품으로 보인다. (안내문)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조선시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경기에서는 사대부문화가 그 중심에 있었다.
사대부 문화는 문학과 예술을 아울렀다.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고 개성 넘치는 분청사기가 유행했으며,
왕실 백자의 고향이자 조선 최고의 도자 생산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학문과 사상의 중심에도 경기가 있었다.
16세기 화담학파와 율곡학파를 필두로 18세기 실학과 서학 등 진보적인 학문이 경기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학문적인 개방성과 유연성을 갖춘 경기인들은 그들의 삶을 바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선구자였다. (안내문)
학문과 사상
경기도는 한양의 지적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지역적 특성인 개방성도 갖추어 조선 후기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 사상계는 개성을 근거지로 한 서경덕의 화담학파와 파주를 근거지로 한 이이의 율곡학파가
이끌었다.
17세기에는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에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박세당은 주자학의 관점에서 양명학의 정립을 시도했고,
정제두는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이루었다. (안내문)
한 여름 봉암에서의 피서
윤제홍(1764~?), 조선 18세기
윤제홍과 박사문이 한 여름 봉암에서 피서를 하면서 시·서·화를 나눈 문인 취향의 작품이다.
윤제홍은 양주 출신의 문인화가로 빼어난 절경을 담은 실경산수를 잘 그렸다.
이 그림은 채색을 하지 않고 수묵으로만 널찍한 바위에 앉아 절경을 즐기는 두 사람을 그리고 있다.
왼쪽에 먼 산과 바위산 사이로 드러난 소나무 숲은 농묵의 거친 필치로 그렸고,
오른쪽의 소나무는 세밀하면서 정갈하게 묘사하였다. (안내문)
눈 내리는 양화나루
정선 햇봄(1676~1759), 조선 18세기
진경산수로 조선의 산천을 그린 겸재 정선의 작품이다.
그는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강 일대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예부터 경치가 빼어나기로 소문난 양화나루의 눈 내리는 전경을 그린 것이다.
나귀 탄 나그네와 그를 기다리는 사공,
그리고 손님을 태우고 강을 저어 가는 나룻배의 모습이 정감 있다. (안내문)
화조도
심사정(1707~1769), 조선 후기
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심사정의 새와 꽃을 그린 그림이다.
어려서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는 진경산수뿐만 아니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이루었다. (안내문)
산수도
전 강세황(1713~1791), 조선 18세기
조선 후기 예원의 총수였던 강세황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는 76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문과 실경산수화를 남기는 등 연로한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한쪽에 치우친 산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좌측에는 '표암선생 모정독서도라는 제목이 있고,
우측에는 심사정의 인장인 '현재호출'이 찍혀있는데, 후대에 날인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분청사기 당초무늬 장군
조선 15세기
거친 솜씨로 물레자국이 나게 제작된 몸통은 가로로 긴 형태이며,
타원형의 굽과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주둥이를 한 장군이다.
몸통 전체를 귀얄로 두껍게 백토를 바른 후, 철화 안료로 대범한 조형의 당초무늬를 그려 넣었다.
도공이 무심히 그려 넣은 간략한 당초무늬는 현대의 세련된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예술성이 뛰어난 수작이다. (안내문)
분청사기 파도용무늬 주전자
조선, 15세기
능화창 안에 용이 온몸을 S자로 휘어 감고 있으며, 바깥쪽엔 파도와 연꽃, 국화꽃 등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이런 문양은 고려 후기 청자에서 등장하는 것이며, 주전자 형태는 조선시대에 나타나는 요소이다. (안내문)
백자 모란당초무늬 병
조선, 15세기
조선 전기의 순백자 병과 같이 나팔 모양의 주둥이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안정감 있는 몸통을 가진 병이다.
몸통 중앙에 당초무늬를 배치하고, 윗부분에는 간략하게 조형화된 모란 당초무늬를 배치하였다.
흑상감이 매우 가늘게 표현되었고, 붉은빛이 돈다.
태토는 경질이고, 빙열 없이 얇고 투명한 백자유가 시유되었다. (안내문)
사진을 찍고 보니 너무 오른쪽에 공간이 없게 치우쳤다.
결국, 도자기만 복사해 가운데로 정렬시킨 것이다.
백자장군
조선, 16세기
짤막한 원통형 몸체 가운데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주둥이를 가진 장군이다.
약간 푸른빛이 도는 백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시유되어 있다.
장군은 주로 액체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고, 백자에서는 조선 전기에만 보이는 기형이다.
16세기 전반 광주 일대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어릴 때는 똥장군만 봤다.
푸세식 변소에서 입구가 넓은 곳에 변을 가득 채운 후 밭둑 끝에 깊게 판 공간에 가져다 부었다.
시간이 지나 숙성이 끝나면 밭에 거름으로 사용했다.
양반가에서는 이렇게 예쁜 장군에 밤에 마실 물을 담아 자리끼로 사용했다.
농촌과 양반가의 극명한 용도 차이를 차이를 보여주는 제품이다.
이 작품을 전시한 사람은 제 용도대로 눕히지 않고 세워놓았다.
백자 매화와 대나무무늬 편병
조선, 19세기
병 전체를 붉은색의 구리 안료로 칠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몸통에는 매화와 대나무를 양각으로 장식하였고, 양쪽으로 동물 모양 손잡이를 붙였다.
뛰어난 조형성이 돋보인다. 분원 말기에 제작된 동화백자 편병으로 매우 희귀하며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안내문)
백자 모란무늬 주전자
조선, 19세기
풍만한 몸통에 넝쿨을 꼬아 만든 모양의 두꺼운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이다.
몸통과 뚜껑에 모란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뚜껑 꼭지는 식물의 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인 형태와 잘 어울려 독특한 조형미를 풍긴다.
푸른 기가 도는 설백색의 유색에 잡티가 없이 깨끗하다. 분원에서 만들어진 갑기匣器로 우수한 작품이다.
(안내문)
분청사기 모란무늬 장군
조선, 15세기
당당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기형에 모란꽃과 격자문의 조화로운 구도는 세련된 미감을 보여준다.
굽다리는 별도로 제작하여 붙였다.
몸통은 백토 분장과 회녹색 태토가 대비를 이뤄 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모란꽃 부분을 넓게 면상감한 기법이 장군에 사용된 점 등이 희귀하여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내문)
백자정화 사자모양 병
조선, 19세기
표주박 형태의 병을 등에 업고 앞발을 다소곳이 모은 사자모양 술병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는 목에 방울을 달고, 큰 귀와 코, 부릅뜬 눈을 가지고 있다.
물구멍은 입과 술병 위 두 군데가 있다.
분원 말기의 기형으로, 형태도 의젓하고 청화문양과 조각장식도 솜씨가 뛰어나다. (안내문)
백자 항아리
조선, 15세기
보주형의 꼭지와 날렵한 모양의 뚜껑을 갖춘 항아리이다.
어깨가 당당히 벌어지면서 곡선을 이루었고, 바닥 부분으로 좁아드는 형태이다.
유태가 정선되고 밝은 회백색으로 표면이 깨끗하고 매끄러워 갑번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약이 전면에 곱게 시유된 가운데 굽은 정성스럽게 깎고,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내어 가는 모래를 받쳐 구웠다.
이런 형태의 항아리는 주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광주 일대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남바위(暖帽)
일제강점기, 권기호 기증
갓(黑笠)
조선
탕건과 탕건집
조선, 홍승인 기증
노리개
노리개
곽분양의 즐거운 잔치
조선, 19세기, 권성욱 위탁
중국 당나라 때 사람인 곽자의 (697-781)의 잔치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곽자의는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양왕에 봉해졌기에 곽분양이라고 불렸다.
그는 여든이 넘게 장수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며 많은 자식을 두었고,
그 자손들 또한 번창했으므로 부귀영화와 오복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화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 세 폭에는 뒤뜰의 정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연회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의 모습이 담겼다.
중앙에는 연회 장면을 그렸는데, 곽분양은 그 가운데에 자리 잡고 무희들의 춤을 감상하고 있다.
그의 주변을 아들과 사위, 신하와 궁녀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편 세 폭은 과분양 집안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여성들과 아이들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담았다.
(안내문)
칠보자개로 만든 장롱은 주변의 다른 제품과 섞여 사진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장롱만 따로 떼어낸 사진이다.
책거리 8폭 병풍
조선 후기, 장한종
책거리는 책을 놓는 시렁이라는 뜻이며, 책가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책과 여러 물건이 함께 책거리에 놓인 그림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가인 장한종(1768-1815)의 작품인데,
그림의 가장 왼쪽 폭 하단에 그려진 도장에 숨기듯이 그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전해지는 책거리 병풍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8폭이다. 노란 장막을 걷어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렸으며,
서가에는 투시도법을 적용해 장막 뒤에 더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은 시각적 환영을 만들었다.
각목마다 놓인 책과 책갑冊匣은 서가의 주인이 학식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함께 그려진 여러 종류의 도자기, 문방구, 과일, 꽃 등은 그림에 호화로운 분위기를 더하며 좋은 일을
기원하기 소재가 되고 있다. (안내문)
위 그림에서 가운데 일부만 확대해 찍은 사진이다.
옛날 서적은 지금과 달리 전부 눕혀 놓았다.
지금처럼 책이 서가에 세워서 꽂아놓는 것은 불과 100여 년의 역사 밖에 안 된다.
조진명의 묘지에 묻힌 지석
조선, 1832년경 조장희, 조융희 위탁 소장 13518
조진명(1741-1803)의 자는 공화公華이며, 조환의 장남이자 조득영의 아버지이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다가 뒤늦게 음관으로 관직에 올라 평양부윤 등을 지냈다.
묘지명은 돌을 깎아 만든 벼루 모양 1점에 이름을 새기고, 다른 1점에 삶의 이력을 간략하게 적었다.
원래 3점을 목관과 함께 매장했으나, 1 점은 사라졌다. (안내문)
조진명의 묘지석은 찍지 못했다.
아래 사진은 조득영의 초상화로 50세 되던 해의 초상이다.
조득영 초상 경진본
조선 1820년 조장희, 조융회 위탁 위탁
조득영(1762-1824)의 유복본儒服本 초상화이다.
머리에는 내관과 외관으로 이루어진 동파관東坡冠을 썼으며, 흰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 흰 세조대를 둘렀다.
얼굴의 외곽선과 이목구비는 약간 굵은 갈색의 선으로 중요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쪽으로 흐리고 짧은 필선을 부분적으로 그어가면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했다.
눈가의 주름이 앞의 1811년에 그린 초상화보다 늘어났고, 흰 수염도 훨씬 더 많아졌다.
풍성한 수염은 구불거리는 얇은 선을 정교하게 사용해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입고 있는 도포의 옷주름 묘사에서 명암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위에 글을 적어 조득영의 59세 모습을 1820년에 초상화로 제작한 것임을 밝혔다. (안내문)
조환의 묘에서 출토된 심의
조선 18세기 조장희, 조융희 기증 소장 13065-13069
양주시 풍양 조씨 회양공파 묘역의 조환 무덤에서 출토된 심의 한 벌이다.
조상기의 큰아들인 조환은 영 • 정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그 후손들이 19세기에 풍양 조씨 세도의 중심을 이끌었다.
심의는 둥근 소매와 굽은 깃을 갖춘 표현의 일종으로, 고려 말부터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많이 입던 옷이다.
이 심의는 가장 바깥에서 조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옷이다.
허리띠와 그 위에 거는 비단 끈장식, 천으로 만든 두건과 신을 함께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심의와 같이 입던 것이다.
옷은 무늬가 없는 명주로 만들었으며, 깃과 옷의 끝단은 검은 비단으로 장식했다.
법도에 따라 상의는 6폭, 치마는 12폭을 연결해 만들었다.
신은 무늬가 없는 비단을 바탕으로, 앞코와 뒤축을 구름무늬로 장식했다. (안내문)
안동 권씨 묘에서 출토된 원삼과 재현품
조선 18세기, 중요민속문화재 전주 이씨 인평대군파 기증
안동 권씨는 임금의 친족인 의원군 이혁(1661-1722)의 부인이다.
하남시에 있던 무덤에서 출토된 원삼으로 장례 때 시신을 감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원삼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이던 여성의 예복이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양반과 서민의 혼례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옷의 겉감은 구름·용·수 자 무늬의 고급 비단을 사용하였고, 글자 부분은 더 화려하게 금실을 섞어 만들었다.
안감은 연꽃넝쿨무늬 비단으로 따로 만든 후에 겉감과 붙여 꿰맸다.
연꽃넝쿨무늬의 옅은 색 비단을 소매 끝에 달았으나 색동이 따로 없다는 점이 여느 원상과 다르다.
옷의 앞 길이는 뒤보다 13cm 짧다.
좌우 깃이 가운데에서 만나며, 이를 고정 위한 3쌍의 고름이 있다.
허리띠인 대대는 원삼의 겉감과 같은 비단으로 만들었다.
무덤에서 출토될 때에는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띠었기에, 이를 근거로 재현품을 만들었다. (안내문)
재현품
1층 로비의 매점
경기도는 수도 한양을 감싼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중심이라 해도 '모 아니면 도'란 옛말의 도에 해당한다.
역사가 깊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서울을 포함한 경기권의 유물이 모누 전시되어 있고,
경기도 박물관은 1996년 6월이 비로소 개관되어 보유한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경기도 땅은 어딜 가나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며 땅이 파헤쳐진다.
이런 개발과정에서 출토되는 유물 하나라도 소중히 여겨 경기도박물관에 전시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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