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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경기도박물관의 6·25전쟁 정전 70주년 특별전

by 즐풍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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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24. (목)  오전에 탐방

 

 

경기도 박물관 특별전시실에 「두 얼굴의 평화, DMZ」이 전시되기에 들어가 본다.

6·25 전쟁을 잠깐 덮어놓고 휴전을 맺으며 생긴 DMZ을 알기에 충분한 자료가 전시되었다.

전쟁 유물은 전사자 발굴을 하며 수습한 총기류 등이 대두분이며, 나머지는 안내문 등이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언제든 다시 전쟁이 재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서로 대결 없이 평화롭게 전쟁을 종식시킬 지도자는 영영 나타나지 않은 걸까?

우리 민족의 구세주가 얼른 나타나길 간절히 기원한다.

 

 

 

 

 

 

 

DMZ 메타버스 : 사라진 마을

 

6·25 전쟁 이전 DMZ에는 400여 개의 마을이 존재했다. 

그중 연천군 고랑포리·항동리, 철원군 외촌리·유정리, 양구군 문등리, 고성군 대강리·사비리 등

큰 규모의 마을을 우선 조사했다.

해당지역과 관련된 문헌들을 분석하여 당시 마을위치와 특성을 확인하고, 현지 방문 및 생존 주민과의

면담을 통해 문화와 추억을 모은 뒤 메타버스를 구현했다.

생생하게 구현된 1940년대 마을의 주민생활을 게임과 미션으로 체험해 보자.
•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던 1940년대 연천 고랑포리(임진강, 화신백화점)
• 문화의 중심지였던 1940년대 철원 관전리(철원극장)
• 활발한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1940년대 철원 사요리(철원역)
• 형석광 광부와 인삼 재배 농사가 몰렸던 1940년대 양구 문등리(광부, 인삼재배)
• 한적한 어촌마을이었던 1940년대 고성 대강리(금강산과 해금강, 동해바다)

 

 

비무장 관련 서적 일부

 

금강전도_겸재 정선의 그림을 천연색으로 바꿈

 

 

정전협정 지도로 보는 DMZ, 한강하구 NLL

 

정전협정은 첨부된 지도를 통해 제1조 2항에서 군사분계선의 위치를 표시하였고,

제1조 3항에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으로 확정된 DMZ를 명시하였다. 

또한 제1조 제5항은 한강하구 수역으로 쌍방의 민간선박이 들어갈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문구만으로는 항해에 별다른 제한이 없는 것처럼 해석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양측 군사정전위는 1953년 10월 3일 제22차 회의에서 정전협정 후속 합의를 하고

 '한강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대한 규칙 및 관계 사항'을 비준했다. 

1주일 뒤 발효 된 이 규칙은 육상 비무장지대(DMZ)에 적용되는 규정을 중립 수역에 준용하며 

군사정전위원회에 등록한 민용 선박에 한해서만 중립 수역 중앙으로 향해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가 실제로 활동하지 않으므로 이 합의서는 사실 사문화되었다.
정전 당시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던 북한은 한동안 NLL(북방한계선)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해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1970년대부터 NLL 문제를 집중 거론하기 시작했다.

1973년 북한은 서해 5도 주변 수역이 영해라고 주장한 이후 수시로 선박을 북방한계선 아래로 남하

시켰으며 1977년에는 200해리 경계수역 선포와 함께 서해에 해상 군사경계선을 일방적으로 설정했다.

또 1999년 서해 해상분계선 선포, 2003년 서해 5개 섬 통항 질서 발표 등 북방한계선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주장을 이어 갔다.

이런 가운데 1999년 제1 연평해전, 2002년 제2 연평해전, 2009년 대청해전 등 전투가 벌어지고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 북방한계선으로 인한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사라진 마을

 

한반도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기 이전 그곳에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2개 도, 9개 군, 35개 면의 행정구역이 

존재하였다. 

경기도의 경우 군의 일부가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된 곳은 개풍군, 장단군, 연천군 등 3개 군이다.
개풍군은 2개 면, 연천군은 5개 면이며, 장단군이 8개 면으로 가장 많았다. 

그중에서 비무장지대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장단군 장단면의 경우 8개의 행정 리와 30개의 부속마을이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되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연천군의 경우는 총 16개 행정리와 60개의 부속마을이 사라졌다. 

경기도 전체를 보면 3개 군, 15개 면, 55개 행정리, 204개 부속마을이 있었다.

 

강원도는 철원군, 평강군, 김화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 6개 군의 일부가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되었다. 

철원군은 총 6개 면, 16개의 행정리와 72개의 부속마을이, 평강군은 남부 지역인 남면 일부의 3개 행정리와 

9개의 부속마을이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되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행정구역이 비무장지대에 속하게 된 김화군은 7개 면, 21개 행정리, 74개의 부속마을이, 

양구군은 3개 면 6개 행정리와 9개 부속 마을이, 인제군은 2개 행정리와 12개 부속마을이,

고성군은 2개 면, 13개 행정리와 21개 부속마을이 각각 비무장지대에 있었다. 

강원도 전체를 보면 6개 군, 20개 면, 61개 행정리, 197개 부속마을이 있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비무장지대가 탄생하면서 사라진 마을은 총 2개 도, 9개 군, 35개 면, 116개 행정리와 

401개의 부속마을이다.

 

 

 

내일을 위한 기억

 

6·25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소냉전의 대결장이었으며, 

한국인에게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6·25 전쟁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는데, 당시 전투지원국과 의료지원국

이외에도 물자지원국과 니카라과, 볼리비아, 브라질 등 지원 의사를 표명한 나라까지 합지면 총 63개국이 

다양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6·25 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많은 숙제를 안겼다.

이산가족문제, 국군포로문제, 서해북방한계선 문제, 한미동맹 체제, 한반도 평화체제 모색 등이 모두

6·25 전쟁의 유산이다.
대한민국은 정전체제 하에서 70년을 살았다. 

6·25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많은 위기를 겪었다.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1968),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 1. 23.), 무장공비 120명 삼척·울진 침투사건

(1968.10-11), 도끼만행사건(1976. 8. 18), 강릉 침투사건(1996. 9. 17), 천안함 피사전(2010. 3. 26), 

연평도 포격도발사전(2010. 11. 23), 중서부 전선의 목함지뢰 사건(2015. 8. 4.)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비무장지대 내에 존재했던 400여 개의 마을과 근대문화유산들,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전쟁·분단·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전쟁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를 기록한 사진집, 다시 가 보고 싶은 '그리운 금강산',

비무장지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 등은 DMZ의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를 준비해 가는 기억이다.

                                                                                                      (안내문)

 

 

백마고지 전사자, 고 하사 김일수 유품

 

 

백마고지 전사자, 고 하사 편귀만 유품

 

 

화살머리고지 전사자, 고 하사 정영진 유품

 

 

경의선 철도 도로 연결 사업 발굴 유물 - 포탄
1. 8인치 포탄    2. 4.2인치 조명탄   3. 65m 포탄   4. 포탄 신관 등 포탄부수기재 전쟁기념관, 파주시청

 

경기도 지역 DMZ

 

 

철원 성산성 수습 유물

 

성산성은 철원 성재산 정상부를 감싸면서 돌로 쌓은 산성이다.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성벽의 총길이는 약 982m이며 삼국~남북국 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 전체에서 삼국~고려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1~ 3. 도기편, 삼국~고려, 길이 2.6cm(왼쪽)
4~11. 암키와편, 삼국~고려, 길이 12.6cm(왼쪽),  국립문화재연구원

 

 

6·25 전쟁 정전 후 최초로 DMZ 기록 촬영을 한 박종우 작가 


2009년 가을, 나는 국방부로부터 1953년 휴전 이후 최초의 민간인 사진가로 비무장지대 내부에 들어가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프로젝트를 제의받았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휴전 후 최초로 민간인에게 DMZ 내부를 공개한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비무장지대의 현재'를 기록해 두자는 취지였다.

비무장지대 작업은 쉽지 않았다.

매번 DMZ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국방부, 합동 참모본부, 육군본부,

해당 지역 사단의 허가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주로 평야지역인 비무장지대의 서측에는 원래 사람이 살던 곳이 많았다.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비무장지대에서 인간의 흔적은 지워지고 땅은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이 세상 어디서도 그렇게 시간이 거꾸로 흐른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무장지대 수색로를 다니다 보면 주변엔 아직 까지도 사람이 살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만들어진 수리시설, 금강산을 오가던 전기철도의 잔해가 옛 모습 거의 그대로이고,

숲 속에선 무너진 대문 기둥, 깨진 항아리가 눈에 띄는가 하면 전쟁 전 어느 집 마당을 장식했음직한 작은

정원 연못의 흔적도 있었다.
땅에서 제대로 느끼지 못한 비무장지대를 진정 가슴으로 느낀 것은 하늘에서였다.

헬기를 타고 서부전선의 평원지대와 동부전선의 산악지대를 교차로 오가면서 내려다본 비무장지대에는

찢기고 할퀴어진 자국이 선명했다.
그런 자국은 남북이 설치한 철조망과 그 주변의 수풀을 제거한 시계 청소작전에 기인한 것이었다.

'국토의 배를 갈랐다'라는 표현이 정말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이곳이 '분단의 현장'이라는 실감이 났다.

 

남과 북의 경계는 매우 뚜렷했다. 

숲이 우거진 남쪽과 헐벗은 북쪽의 산은 자연스레 서로의 경계를 드러냈고 그 사이에 세워진 철책선이 

끊이지 않고 동서로 내달렸다. 

지상에서의 철책은 무척 견고하고 통과불가능하게 보였으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철책은 그저 보잘것없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험준한 산악지대, 울창한 수풀과 늪지를 대표 이미지로 갖고 있는 비무장 지대를 말할 때 가장 흔히 쓰는 

표현이 '자연생태계의 보고'라는 수식어다.
하지만 실제 DMZ는 동식물의 낙원,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아니었다. 

원시림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수시로 일어나는 산불로 인해 나무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개발의 손길은 DMZ 턱밑까지 뻗어 있다. 

민간인출입통제선(CCL)과 남방한계선(SLL) 사이의 민통선구역(CCZ)은 개발의 여파로 신음 소리가 드높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과 단체, 지자체들이 '평화와 친환경' 구호로 포장된 DMZ 개발 이슈를 끊임없이 꺼내든다. 

그나마 한반도에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자연환경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이 특이한 공간마저

훼손되고 사라진다면 우리 환경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다.

비무장지대는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언젠가 다가올 통일의 시대에 그 오랜 시간 동안 민족의 한을 담고서 지켜온 그 모습 그대로를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박종우 작가의 사진

 

 

두 얼굴의 DMZ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경기도 파주시와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양구군·인제군·고성군 등지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 탓에 대체로 정전협정 이전의 경관과 문화유산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전쟁 이후 복원된 자연생태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관 요소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한 장소성을 나타내기에 문화유산 또는 문화경관, 

자연유산의 범주에 포함되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DMZ에서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 그 안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수많은 무기를 가지고 숨죽이고 있다. 

비무장지대의 남방 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은 2중, 3중의 철책으로 이루어졌다. 

정전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과 북의 GP(감시초소)가 서로 감시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면서 심지어 서로 580m 떨어진 지역까지 접근하게 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GP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군사 충돌의 위험성도 커지므로 남북 양측은 2018년 군사 분야 

합의에 따라 상호 1km 이내로 과도하게 근접한 11기 GP에서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중 1개씩은 보존하고 각기 10군데의 GP 철거를 완료했다. 

현재 남한의 국군은 약 60여 개의 GP를 운용하고 있다.
전쟁 직후 군사분계선은 200미터 간격으로 세운 말뚝의 노란색 표지판 형태였다.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1,292개이던 휴전선 말뚝은 많이 쓰러지거나 유실되었다. 

1970년대 이후 비무장지대 중간중간에  추진한 철책이 많아지고 지뢰 매설량이 점점 늘어났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 유해와 유품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안내문)

 

 

박종우 작가의 사진

 

 

DMZ 정의와 용어

 

비무장지대 DMZ, Demilitarized Zone은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따라 무장이 금지된 완충 지대이다.

무력충돌을 방지하거나 국제적인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하며, 군대 주둔, 무기 배치, 군사시설 설치

등을 금지한다.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대한 정전협정 체결 시 설정되었다. 

정전협정 지도에 따라 서쪽의 임진강부터 동해안까지 1,292개 군사분계선 MDL, Mitary Demarcation Line 

표식물이 설치되었으며, 그로부터 남북 각 2km 구간이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군사분계선의 길이 총 241km, 남북 길이 4km, 영역을 면적으로 환산하면 964km㎢이다. 

한반도 면적의 0.4% 정도에 해당한다.

비무장지대의 경계는 남방한계선 SBL(Southern Boundary Line)과 북방한계선 NBL(Northern Boundary Line)이다.

                                                                                                                                  (안내문)

 

 

학도병 이우근의 편지

 

1950년 8월 11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학도 의용군 71명은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48명이 전사했는데, 이우근 학도병은 그중 한 명이다. 

당시 서울동성중학교 3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이우근 학도병의 주머니 속에서 피 묻은 메모지에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글이 발견됐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풀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젖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광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해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 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털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누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군요.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재검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6·25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동안 이우근 학도병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직 소년의 티가 그대로 남아있을 중학교 3학년이 던진 수류탄에 같은 형제가 처참히 산화되는 걸  보다니...

그렇게 밀려온 두려움은 하얀 내복이 자신의 수의가 될 것이란 예감을 한다.

누가 어린 소년을 전쟁터로 내몰았을까?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전쟁으로 내몰려는 족속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죽음이 멀리 있지 않으니 전쟁터로 나가지 않겠지만, 손자가 전쟁터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강대국과 이데올로기의 놀음에서 벗어나 전쟁 없이 평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

 

 

 

정전협정 체결

 

1951년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Yakov A. Malik)가 '평화의 가치'라는 유엔의 라디오방송에서

한국에서 휴전하자고 제의했다.
중국과 북한이 이를 수락한 뒤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핵심 내용은 군사분계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정전 감독기구는 어떻게 구성하고 포로는 언제 어떻게 송환할 것인가, 

평화적 해 결을 위한 정치회담은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었는데, 양쪽의 이해관계가 크게 달랐다.
휴전협상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전쟁을 1년 동안 치른 뒤 개최한 휴전협상은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미국은 휴전이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국제평화를 파괴한 북한을 유엔의 깃발 아래 군사적으로 응징했으니

일차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정전 후 정치회담을 통해 달성한다는 계획으로 휴전을 추진했다.
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 협정은 국제연합군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사령원이 서명한 군사적 성격의 

협정이다.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는 16개 유엔 참전군과 한국군의 통합군 사령관이었다. 

반면에 별도의 단일 지휘체계를 갖지 않았던 공산군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안내문)

 

 

 

전쟁과 삐라

 

전쟁을 할 때에는 물리적인 전쟁 이외에 심리적인 전쟁도 동시에 수행한다.

심리적인 전쟁은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의욕을 상실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을

목표로 한다.
삐라 살포는 대표적인 심리전의 예이다. 

삐라는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글씨와 사진, 그림 등을 넣었는데, 

보통 짧은 글과 간단한 그림을 넣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긴 글을 넣어 만들기도 하였다.
사실 '빠라' 대신 '전단지'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전단지는 어떤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낱장의 종이를 말한다.

이 '전단지'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빌(Bill)'을 일본 사람들이 '삐라'라고 발음했는데,

우리가 그대로 사용해서 아직도 '삐라'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모두가 삐라를 만들어서 살포하였다.
자기 나라의 글로 만들거나 아니면 상대편 나라의 글로 만들어서,

해당 국가의 군인이나 국민들이 읽어보도록 하였다.  (안내문)

 

 

삐라의 종류

 

 

전사자 유품 - 개인화기류 
1. Mi 개런드 소총   2. M1 개런드 소총 개머리판   3. 카빈 소총   4. 수류탄 발사기
5. 모신나강 소총    6. 모신나강 소총 개머리판      7. 슈파긴 기관단층(PPSh-41)

 

 

6·25 전쟁 시 사용한 국군•국제연합군의 무기


1. M1911A1 권총  
    길이 21.9cm, 구경 11.43cm
    1910년 미국에서 개발된 자동권총으로, 제1, 2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쟁을 거쳐 사용된 미군의 제식권총이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군과 국군의 중화기 운용인원과 장교에게 주로 지급되었다.
2. M1 소총
    길이 110cm, 구경 7.62cm
    1906년 미국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의 제식 반자동 소총이다.

    1948-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며 국군에게 대량으로 인도하였으며, 6·25 전쟁 중 미군과 국군 모두에게서 가장

    널리 쓰인 개인화기이다.
3. M1 카빈 
   길이 90.37cm,  구경 7.62cm 
   1942년 미국에서 개발된 경량 소총이다.

   15~30발들이 탄알집을 사용하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2.6kg에 불과한 중량으로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카반(carbine)은 원래 기병들을 위해 소총의 총열을 짧게 줄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소총의 휴대가 번거로운 비전투요원이나 차량승무원, 장비 운용인원 등에게 지급되었다.
4.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B.A.R.) 

   길이 123.95cm, 구경 7.62cm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기관총과 같이 운용하는 소총의 개념으로 개발되었다. 

   20발들이 탄알집을 이용해 분당 최대 500발의 속도로 사격할 수 있었다.
   6·25 전쟁 기간 중 미군과 국군의 분대급 자원화기로 운용되었으며,

   특히 자동화기가 부족했던 국군에게 유용한 화기였다. 

   '브라우닝 자동소총'의 약칭으로 비에이알 (BAR) 혹은 에이알(AR)로 불렸다.

 

 

6·25 전쟁 시 사용한 북한군·중공군의 무기

 

1. TT-33 '토카레프' 권총 
   길이 19.5cm, 구경 7.62m 
   1933년 소련에서 개발된 자동권총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1950년대까지 소련군과 공산권 군대에서 가장 널리 쓰인 권충이었으며,

    6·25 전쟁 중에는 북한군과 중공군 장교들의 개인화기로 주로 사용되었다.
2. M44 '모신나강' 카빈 
   길이 102cm, 구경 7.62m  
    1943년 M91/30 모신나강 소충의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총열을 단축시킨 형태이다.

     6·25 전쟁 중 비전투요원이나 장비 운용인원에게 주로 지급되었다.
3. PPSh-41 '슈파긴' 기관단총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에 개발된 소련의 기관단총이다. 

   권총탄 7발이 장전되는 특유의 원형 탄알집과 분당 최대 900발에 달하는 빠른 연사속도가 특징이다.
   북한군은 모신나강 소총과 함께 이 기관단총을 대량으로 운영하였으며,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따발총多發銃"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1949년 '49식 기관단총'이라는 이름으로 이 기관단총을 자체 생산하기도 했다.
4. PPS-43 '수다예프' 기관단총
   길이 82cm, , 구경 7.62m

   1943년에 개발된 소련의 기관단총으로, 앞선 슈파긴 기관단총보다 단순하고 생산단가가 저렴한 화기이다.

   접이식 개머리판과 3.04kg에 불과한 무게로, 6·25 전쟁 중에는 북한군의 후방 침투요원 등에게 사용되었다. 

                                                                                                           (안내문)

 

 

끝나지 않은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남침하기 시작했다.
개전 직전에 북한군 전체병력은 20만 1,050명이었고, 

한국군은 10만 3,827명으로 약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무기나 장비 면에서도 북한군이 한국군보다 월등히 앞섰으며, 

결정적으로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전령하였고, 

8월 말에는 낙동강에 이르러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유엔은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부대를 급히 파견해 한국군을 돕고 6개국이 의료를 지원하였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뒤집은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러자 국경 부근에서 대기하던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며 참전하였고,

1951년 1월 4일에는 공산군이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후 경기도 남부지역까지 밀렸던 유엔군은 3월에야 서울을 되찾았다.
전쟁 개시 1년 만에 38°선 부근에서 다시 대치하게 된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에게 휴전협상은 불가피했다.

한국은 휴전을 반대했지만 혼자서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미국과 유엔의 휴전정책에 따라야 했다.

2년이 넘는 동안 158회의 협상 끝에 이루어진 정전협정으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생겨났다.

한반도가 두 동강 난 것이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하고, 소련은 망하고, 중국은 개방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살얼음판 냉전 지대이다.

                                                                                          (안내문)

 

 

38선, 전쟁의 시작이 된 경계선


6·25 전쟁의 시작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어진 38선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항복으로 미국의 국무부와 군부는 태평양 지역 연합국 최고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리고, 다른 연합국 정부들과 일본의 항복에 대해 필요한 협의를 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가졌다. 

의제는 일본 항복의 수락에 관한 것으로 국무부는 미군이 가능한 한반도 북쪽으로 올라가 항복을 접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군부는 미군이 부족했고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소련이 진입하기에 앞서 더 이상 

북진은 곤란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 크 대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1942년판 지도상에서 

정치적인 희망과 미군이 당도할 수 있는 명백한 능력의 한계 사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38선을 작성했다.

                                                                                                                (안내문)

 

 

10월 1일,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날

 

38선은 공산군의 침략으로 두 번씩이나 내줬지만 1950년 10월 1일 오전 5시에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를 선두로 38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 바로 10월 1일 국군의 날이다. 

현재는 38선이 수많은 질곡 속에 남북 분단의 휴 선으로 바뀌어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38선을 처음 돌파한 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이 제정됐다. (안내문)

 

 

63개국 가장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한 세계기록

 

625 전쟁 당시 전투지원국과 의료지원국 이외에도 물자지원국과 니카라과, 볼리비아, 브라질 등 

지원 의사 표명 국가까지 총 63개국이 다양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하나의 전쟁에 참여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세계 기록 인증을 받은 바 있다.
                                                                                                               (안내문)

 

1,957,816명, 625 전쟁 참전 인원

 

전투지원 16개국과 의료지원 6개국인 총 22개국의 6·25 전쟁 참전 인원은 195만 7,816명이었다.
미 국방부와 보훈부에 따르면 연인원으로 미군 178만 9,000명이 참전했다. 

이 가운데 전사자는 3만 3,686명, 부상자 9만 2,134명, 실종자 3,737명, 포로가 4,439명이다.

정전하기까지 미국을 포함 한 유엔군 전사자는 3만 7,902명, 부상자는 10만 3,469명, 실종자 3,950명,

포로가 5,817명으로 전체적으로 15만 1,129명이나 피해를 본 것이다.  (안내문)

 

 

 

972,600명,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 추정 중공군 손

 

중공군의 사망자 규모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미국과 유엔군은 중공군 사망자를 40만여 명, 부상자를 48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중국은 정확한 사망자를 밝히지 않은 채 사망자와 부상자 합해 약 36만 명이라고 모호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 연구부에서 발간한 <중국군의 한국전쟁사>에는 전투손실 36만 6,000여 명,

비전투손실 2만 5,000여 명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한국 측에서 발간한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국방군사연구소)>에는 중공군 전투손실 36만 9,600명,

비전투손실 60만 3,000명 등 총 97만 2,6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621,479명, 국군 피해자 수

 

6·25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남북한 당사자들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국군 전사자는 13만 7,899명, 부상자는 45만 742명, 

실종자 2만 4,495명, 포로는 8,343명으로 총 62만 1,479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24만여 명, 양민 학살로 숨진 사람은

12만 8,000여 명, 부상자 22만여 명, 실종자는 30만 명 등 총 99만여 명의 인명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군사정전위원회 편람에 따르면 북한군은 사망자 52만여 명, 실종 및 포로  12만 명, 

북한 지역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000명, 실종자는 79만 6,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안내문)
 

 

60% 이상 전쟁의 피해를 입은 남북한 인구

 

미 통계청이 6·25 전쟁 발발 당시 남한 인구를 2,040만 명, 북한은 970만 명이라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전쟁으로 희생된 남북한 인구는 거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 등이 발생해

남북한 인구 약 3,000만 명 중 60% 이상인 1,900여만 명 정도가 피해 입은 것이다. 

 또한 국토의 3부의 1이 초토화되고 각종 건물이 파괴됐는데, 국가 기반 시설은 45%나 폐허가 됐다.

공장 시설 45%, 가옥 60%, 농업 27%, 공업 43%, 광업은 50%가 파괴됐고,

공공건물 542동, 학교 건물 3만 3,015개, 의료기관 940개, 일반주택 62만여 채, 종교 및 사회단체

건물도 1,191만 평이나 피해를 입었다. (안내문)

 

 

 

 

남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 참전한 국가들까지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

전쟁의 포화 속에 남은 건 맨 주먹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아프리카만도 못했던 나라는 이제 세계에서도 선진국으로 발돋음했다.

그러나 정치는 3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민주주의는 도리어 후퇴하고 있다.

하루 빨리 광명정대한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