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35B
2023. 8. 24. (목) 오전에 탐방
용인에 있는 경기도 박물관은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탐방객이 거의 없다.
박물관을 전세 낸 듯 천천히 이동하며 살펴보고 사진도 두둑이 찍는다.
특히 안내문을 많이 찍으면 유물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안내문을 찍은 사진은 그대도 문자로 전환이 가능하므로 큰 노력 없이 한글 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개성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지금은 북한 지역이라 고려시대 유물은 별로 없다.
경기도인 개성은 휴전선만 없으면 파주에서 지척인 곳이다.
김포 문수산의 문수산성에서 개성의 송악산은 북한산만큼 가깝게 보인다.
지금은 남북한이 극명하게 대치하는 상태라 우리 세대에 통일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북한 방문은 어렵겠다.
예전처럼 남북한의 학자들이 상호 방문하면 그나마 적대감은 줄어들 텐데 정치권에선 이런 걸 바라지 않는다.
상호 적대감을 심어주고 자기네 체제가 우월하다는 걸 입증해야 지지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 등 동북아 삼국이 서로 헐뜯는 이유와 같다.
동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핵을 보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의 종말은 언제 올까?
고려와 조선 전시실은 같은 공간에 있다.
고려의 유물은 대부분 북한의 개성에 있고,
조선시대 유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외
조세, 소방, 한글, 농업, 기상, 항공 등 직능별 박물관도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경기도는 지방분권 정치라 도시의 규모가 한계가 있다.
다만, 강화도나 수원화성, 남한산성은 그 자체가 야외 박물관인 셈이다.
고려의 건국과 통일
900년 경 북쪽의 발해와 비교하여 남쪽에서는 후삼국인 신라, 후백제, 태봉(후고구려)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918년 태봉의 신하들은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의 '고려'로 바꾸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송악(개성) 출신의 왕건은 민심을 수습하는 정책을 펴며 지방 세력인 호족과 협력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토대를 마련해 갔다.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후백제와는 세력 대결을 벌였다.
결국 후백제의 내부 분열과 신라의 항복으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936년)
옛 고구려, 백제, 신라뿐 아니라 발해 유민까지 받아들여 새롭게 확장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안내문)
천하의 중심 고려, 고려의 중심 경기
10~12세기 동아시아에 자리했던 크고 작은 왕조들은 충돌 또는 교류·협력하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송·거란(요)·서하·여진(금) 등에서는 자신들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각각의 세계관(천하)을 형성하였고,
황제제도를 운영하였다.
고려가 주관한 축제인 팔관회에는 여진과 탐라의 사절들이 참석하여 고려 임금에게 예를 갖추어 선물을 바쳤다.
고려에서는 그들에게 관직과 하사품을 주었다.
송·거란·일본의 상인들도 교역을 하려 참가하였다.
'경기'는 원래 황제[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곳을 뜻하였으나 점차 수도를 아우르는 지역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경기는 자연스럽게 고려의 중앙에 자리하게 되었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나라의 근본이라 여겼고, 백성을 위한 정치가 가장 먼저 미치는 곳이었다. (안내문)
경기의 등장
경기란 수도를 아우르는 지역이란 의미로 왕실과 수도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중국 당나라의 '경기제'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주변이, 조선시대에는 한양 주변 지역이 경기에 해당되었다.
고려에서는 적현赤縣(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불렀던 수도 주변 12개의 고을峴을 묶어 1018년
(고려 현종 9) '경기'로 하였다.
다른 지방과는 달리 중앙에 속했으며 일종의 특별구역이었다.
몽골과의 전쟁을 치를 때에는 도읍을 강화로 옮기면서 자연스레 역할이 줄어들었다.
고려 말까지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쳤지만, 경기는 나라의 중심이자 근본의 땅(國家根本之地)이었다. (안내문)
개성의 문화유적
개성은 약 500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으며 개경, 황도, 황성, 송도 등으로 불렸다.
이 지역의 고려시대 유적은 2013년 '개성역사유적 지구 The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로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개경성의 성곽, 남대문, 고려궁성,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7릉군, 명릉, 공민왕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내문)
'코리아'의 시작
한국을 일컫는 '코리아'는 고려에서 유래하였다.
여러 나라와 교류했던 고려는 1300년경 발표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카울리(caule),
솔랑가(Solanga) 등으로 소개되었다.
고려 전기에는 중국의 송을 비롯한 거란, 여진, 일본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드나들었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세계와 연결되는 국제항구였고, 개경은 국제 도시였다.
후기에는 원(몽골)과의 교류가 있었다. 원나라는 동서양을 잇던 세계무역의 중심이었다.
해로와 육로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문물이 교류되었고, 고려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여기가 코리아
13세기 동아시아에 들어선 몽골(원) 제국은 서쪽으로는 유럽과 중동, 동쪽으로는 고려까지 침략하였다.
몽골(원)과 30여 년의 전쟁을 외교로 끝낸 고려는 80여 년간 내정 간섭과 영향을 받게 된다.
원(몽골)의 풍속이 고려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고, 고려의 복식·음식·음악 등은 원의 상류층에서 유행하였다.
원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개경과 경기에는 몽골, 중국, 아랍, 중앙아시아 등의 사람들이 오갔고,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다양한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때 전해진 주자학 성리학, 라마교, 화약, 달력(수시력), 면화, 농업기술 등은 고려 백성들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특히 주자학은 조선 사회의 정치철학으로 자리하였다. (안내문)
청자 상감 꽃과 새 무늬 의자
고려, 13세기
아랫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간 원통형의 몸통에 여러 가지 문양을 투각, 상감, 양각, 음각 등의 수법으로
장식한 청자 의자이다.
의자 윗면에는 한 쌍의 봉황을 음각했고, 몸통 중앙에는 마름꽃 모양의 창을 배치하여 공작, 모란, 매화,
대나무, 학, 버드나무가 있는 물가 풍경의 모습을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고려 문화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안내문)
천하제일, 고려청자
10세기 경 고려에서는 중국의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경기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지역이다.
황해도의 배천 원산리, 경기도의 고양 원흥동,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등의 벽돌가마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차[茶]와 관련된 그릇을 주로 생산하였다.
청자는 개경과 경기의 왕실·관청·사원 등에서 사용되었고, 수요는 갈수록 늘어났다.
11세기 무렵 청자 제작의 중심지는 전라도 강진, 부안 쪽으로 옮겨지고 제작기술도 발전시켰다.
12세기에 이르러 제작된 비색청자는 중국에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 13 세기에는 고려만의 독특한 상감청자가 유행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도자기로 자리 잡았다
중국 정주의 백자 등과 함께 고려 비색(秘色, 비색청자)이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 따라 하려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 송나라의 책 「수중금」 (안내문)
청자 철화 톱니무늬 광구병
고려 11세기
입술이 넓은 병으로 목과 어깨에는 톱니무늬와 덩굴무늬를 음각 또는 흑상감으로 새겼다.
몸체는 칼로 거칠게 깎아 각진 형태로 만들었다. (안내문)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찻그릇
고려, 13세기
안쪽에는 백상감된 국화잎이 배치되었고 여백에 구름과 학 무늬를 베풀었다.
바깥쪽에는 당초무늬와 국화무늬, 연잎 무늬로 장식하였다.
청자 음각 앵무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그릇 안쪽에는 성스러운 새인 앵무새 두 마리와 꽃잎이 음각되어 있다.
청자 철화 풀무늬 (맨 오른쪽)
고려 11세기
지방 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로 전체적으로 녹갈색 유약을 바른 항아리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는 향아리에 철화로 풀 무늬를 그려 넣고 나비모양으로 만든 장식을
양옆으로 붙여 놓은 모습이 조화를 이룬다. (안내문)
청자 상감 국화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고려, 13세기
긴 부리 손잡이를 갖춘 볼륨감 있는 주전자이다.
전체를 여덟 구획으로 나누고 국화무늬 도장으로 빽빽하게 상감하였다.
바닥과 닿는 부분에 연꽃무늬를 둘러 멋을 더 하였다. (안내문)
청자 음각 꽃무늬 잔과 잔받침 (아래 사진 왼쪽)
고려, 12세기
꽃을 형상화한 잔과 잔받침이다.
잔받침은 편평한 바닥에 음각으로 꽃잎을 새기고, 굽은 꽃잎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잔이 놓이는 자리는 연꽃무늬를 새겨 높였으며, 그 중앙에는 국화꽃을 양각하였다. (안내문)
청자 참외 모양 주전자 (위 사진 오른쪽)
고려 12세기
몸체를 8등분하여 사실감 있게 표현한 참외 모양 주전자이다.
덩굴처럼 곡선을 이룬 주전자부리와 손잡이, 참외꼭지 모양의 뚜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짙은 비색 청자유를 두껍게 바르고 구웠다.
전남 강진지역의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백자 철화 풀무늬 매병
고려, 12세기
몸체에 풀무늬가 철화로 시문 되어 있다.
풀은 잎사귀가 위로 올라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안내문)
세계 최고의 인쇄문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발달한 인쇄문화는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경기는 인쇄의 중심지였고 대장경 목판과 금속활자가 제작된 곳이다.
대장경은 고려에서 크게 두 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거란이 침입했던 시기에 이를 막기 위해 만든 초조대장경,
초조대장경 목판이 몽골군 침략에 불에 타서 다시 만든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또한 농업 관련 책과 「향약구급방」 등의 의학서가 목판으로 만들어지고 전국에 보급되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금속활자는 13세기 초에 발명되어 개경과 경기에서 널리 쓰이다가 지방에까지 퍼져 고려 말까지 사용되었다.
목판에 비해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도 신속한 인쇄가 가능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는 개성에서만 소량 발견되었다. (안내문)
대장경이란?
부처의 가르침(경장), 불교에서 지켜야 할 규칙(율장), 경장과 율장에 대한 후대의 해설(논장)을 모은 것으로
불교 경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초조대장경
983년 중국 송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되자 인쇄술이 발달한 고려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곧 대장경 제작에 나섰다.
'초조대장경'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새긴 대장경이라는 의미이다.
'화엄경'은 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을 가리킨다.
초조대장경은 고려의 거란 침입 때 만들었다.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수도 개경을 빼앗겼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시절이다.
부처의 힘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불안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쳐 만든 대장경 목판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현종 2년(1011)에 거란이 침입하자 국왕은 남쪽으로 피난했으나 거란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국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큰 소원을 세워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새겨 완성시키겠다는 맹세를 한 뒤에야
거란의 군사들이 물러갔습니다.... - 이규보의 「군신기고문」
초조대장경 화엄경 권제1
고려, 11세기 국보 복제
고려 현종(재위 1011~1031) 때 거란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고자 만든 대장경이다.
중국 북송시기에 만들어져 고려에 수입된 대장경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나,
북송 것보다 더 나은 판본으로 평가된다.
최고 수준에 이르렀던 고려 인쇄술을 잘 보여준다.
목판본으로 인쇄된 초조본 중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권제1로,
11세기에 찍어낸 대장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초조대장경 화엄경 권제1 전체 모습
초조본 성지세다라니경
고려, 11세기, 보물 제1579호
고려인의 삶
송나라 역사책에서는 고려의 인구를 210만여 명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고구려계 유민을 포함한 후삼국 주민들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나라에서 귀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는데, 그들은 농사지은 곡식, 지역 특산물 등을 세금으로 내고
나라에서 정한 일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지배층은 과거 등을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여 형성되었다.
이 계층 내에서는 대대로 서로 혼인하며 고위 관료를 낸 문벌門閥 집안도 나타났다.
고려는 불교·유교·도교 등과 토착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였다.
그중에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불교와 토풍 회화로 불리는 토착문화라 할 수 있다.
출생·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과 신앙을 전통적인 토착문화와 불교에 의지하였다.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 고려도경 (안내문)
민심을 좌우한 신앙, 불교
고려는 불교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건국과 후삼국 통일, 국정의 운영에 있어 민심을 좌우한 불
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외적이 침입하는 등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국가가 주관하는 불교 행사가 많았고, 왕실의 도움으로 절이 세워지거나 운영된 예도 흔했다.
절에는 여관의 역할을 했던 원격을 두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짐승이나 도적으로부터 보호했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음식을 베풀기도 하였다.
백성들 역시 불교 신앙에 의지하여 부처에게 복을 빌고, 불고 행사에 참석하였다.
시주를 하거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죽은 뒤에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불교의 신앙 활동을 위해 조직된 모임인 '향도'는 마을의 행사를 주관하기도 하면서 지역 공동체로서 기능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정성스러웠다.
성안의 절이 민가보다 더 많았다. - 연복사탑 비문 (안내문)
세 발 달린 청동향완
고려, 11~12세기
불교의식에서 향을 사르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다.
향로 중에서 나팔 모양 받침과 발우 모양 몸통을 가진 향로를 향완이라 한다.
받침에는 세 발의 다리가 있고, 뚜껑에는 세 개의 연기구멍이 있다. (안내문)
청동 정병
고려
맑은 물을 담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구이다.
고려시대 전형적인 청동 정병으로 일반 병보다 목이 가늘고 길다. (안내문)
청동 사리병 (왼쪽) 금강령 (오른쪽)
고려 고려
사리를 담는 병이다. 불교의식에 쓰이는 물건으로 손에 들고 흔드는 종이다.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이 신성하게 여겼고, 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었다.
사리를 담는 용기도 귀한 재료로 만들었다. 중생의 몸과 마음을 깨우쳐 주는 의미가 있다.
보통 여러 겹의 용기에 넣어 안치하였다. (안내문)
청동 거울
고려
청동거울은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무늬가 없는 뒷면과 물체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동거울은 붉은색의 구리와 흰색의 주석으로 만든 합금으로 주석의 함량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데,
주석함량이 높을수록 은백색으로 변한다.
1 종 모양 거울, 2 용무늬 거울, 3 용 나무 전각 무늬 거울, 4 청동 거울, 5.6.8 무늬 없는 청동 거울, 7 청동 거울
사통팔달의 땅
경기도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조선팔도 방방곡곡으로 향하는 일상의 길에서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연행길,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길처럼 세계를 향해나가는 길도 모두 경기를 통했다.
강도 물길로서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물자의 원거리 대량 수송은 대체로 물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경기도에는 도내를 남북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한강과 북부를 동서로 흐르다 한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임진강이 흐른다.
이런 강과 하천을 이용하여 경기도는 일찍부터 전국을 잇는 수운(水運)의 중심지가 되었다. (안내문)
고려와 조선실을 하나로 묶어 한 방에 전시했다.
대부분의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보니 경기도 박물관엔 유물이 별로 없다.
이곳 박물관은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수도를 감싸는 지역적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고려시대는 유물보다 지리적 배경 설명에 더 많은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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