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51B
2023.3.31. (금) 오후에 탐방
신라미술관은 신라의 찬란한 미술 문화와 역사를 보여드리는 전시관이다.
1층의 불교조각실은 신라 불교조각의 아름다움과 시각적 다채로움이 역사, 전설,
정토라는 개념 위에서 펼쳐지도록 구성했다.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믿음, 신라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와 위안을 주고
전설이 된 부처와 보살 이야기, 불교적 이상세계인 정토가 전하는 희망과 위안의 메시지를 전한다.
2층의 불교사원실은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감은사, 사천왕사 등에서
출토된 사리기(감은사 서탑 사리장엄구, 보물), 기와, 전돌, 벽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_홈피)
신라미술관 로비에는 석굴암 본존불 주변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 등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전체를 다 사진 찍지 않고 그중에 십일면관음보살만 예쁘게 촬영했다.
내용은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홈페이지에서 가져왔다.
ㅁ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십일면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부처님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 부처님 바로 뒤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 위에 작은 아홉 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보살님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ㅁ 경주 이차돈 순교비
신라 법흥왕 14년(527)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비석으로,
조성연대는 헌덕왕 9~10년(817~818)으로 추정된다.
불교 공인을 기록한 현존 최고의 사료이며, 통일신라의 복식사와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석은 받침돌과 6면의 몸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면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전하는 이차돈의 순교 모습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제2면에서 제6면은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도록 평행 음각선을 그어 7행, 25칸의 정간(井間)을 치고
그 안에 한 글자씩 음각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신라에서는 전통신앙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반발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자 법흥왕은 이차돈의 희생을 계기로 527년 또는 528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 조에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우윳빛 같은 흰 피가 솟아올랐고,
머리는 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자취를 새긴 비석이 백률사 근처에서 발견된 이차돈 순교비이다.
비석은 6면으로 구성되었는데,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로 묘사했다.
나머지 면에는 불교를 널리 전파하려는 법흥왕의 의지, 이차돈과 법흥왕의 대화,
불교 공인을 둘러싼 왕과 신하들의 대립, 이차돈의 죽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차돈 순교비는 불교 공인의 순간을 글과 그림으로 담은 중요한 비석이며,
불교의 공인은 신라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금강역사상 경주 하동, 통일신라
석탑 1층 몸돌 네 귀퉁이라고 생각되는 돌에 조각한 금강역사상이다.
대부분 한 손을 들어 권법 자세를 취했는데, 한 구는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눈은 부릅뜨고 윗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허리를 꺾었으며, 팔다리의 움직임은 활발하다.
금강역사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안내문)
역시 금강역사의 얼굴과 손, 팔이다.
금강역사는 인왕仁王 또는 이왕二王으로 불리며, 보통 입을 벌린 상과 입을 다문 상이 쌍을 이루어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한다.
이 금강역사상 얼굴조각은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석굴암 제1차 수리 때 굴 내부에 쌓여 있는 흙 속에서
왼쪽 팔뚝과 왼손과 함께 발견된 것이다.
머리카락은 정수리로 바싹 추켜올려 상투머리로 묶었으며, 부릅뜬 두 눈과 치켜 올라간 눈썹,
튀어나온 광대뼈 등, 분노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출처_국립경주박물관)
금동아미타삼존판불좌상, 금동판삼존불좌상 (가운데)
너비20cm ,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10구의 금동판불 10구(驅) 중 하나이다.
중앙의 본존(本尊)은 우리나라에서 예가 드문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을 맺고 있다.
이중의 연화문(二重蓮花文) 에 다시 인동문(忍冬文)이 배치된 연화대좌(蓮花臺座)에 오른발이 왼발 위에 올라간
길상좌(吉祥坐)로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질서 정연한 옷주름이 반복된 단정한 느낌의 법의(法衣)를 입고 있다.
두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본존을 향하여 율동적인 삼곡(三曲)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광배(光背)는 삼존 각각의 두광(頭光)을 당초문(唐草文)이 감싸 안아 삼존 전체의 광배를 이룬 특이한 형태이다.
(출처_국립경주박물관)
금동아미타삼존판불좌상의 양 옆엔 보살이다.
ㅁ 약사여래 국보
크기: 180cm,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는 모든 질병을 치료해 주고, 수명을 연장해 주며,
인간 생활의 전반에 이익을 주는 부처로 널리 신앙되었다.
그의 정토는 동쪽에 있으며, 다채로운 보석으로 장식되어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믿어진다.
백률사에 모셨던 이 약사여래는 높이가 180cm에 가까운 큰 체구에 조형적으로 완성미가 뛰어나
불국사의 아미타불, 비로자나불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로 불린다.
현재 따로 만들어 끼운 두 손은 없어졌지만 팔을 든 자세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1917년)에 실린
사진에 약단지로 보이는 물체를 왼손에 든 모습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추정한다.
가슴에는 내의를 묶은 띠 매듭이 보이며, 몸 전체를 덮은 법의法衣는 자연스러운 옷 주름으로
신체의 입체감을 살렸다.
백률사에 봉안되어 있던 사진(1919년)에서는 온몸을 하얗게 칠한 모습이지만,
현재는 붉은색, 푸른색, 녹색, 검은색이 금동불 겉면에 남아 있다.
이러한 채색이 처음 불상을 만들 때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겉에 금을 입힌 뒤 칠한 것으로 본다.
이 불상은 수준 높은 주조 기술로 대형 금동상을 제작했으며 뛰어난 조형성을 구현했다.
정수리와 머리, 등 뒤에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상을 만든 뒤 내형토內型土를 제거할 때 사용한 것이다.
구멍 테두리에 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감판을 끼운 것으로 보인다.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바깥틀과 안 틀을 고정하는 틀잡이[형지型持]의 마감 흔적이 있다.
뒷면 위아래 두 곳에는 광배를 꽂았던 촉이 달려 있다.
(출처_국립경주박물관)
- 전체높이 112.0㎝, 신라시대
- 경주 인왕동에서 옮겨온 것으로, 정확한 발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는다.
- 하나의 돌에 불신과 광배, 대좌를 모두 조각하였다.
- 민머리에 육계가 큼직하며, 얼굴은 부분적으로 마모되었으나 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 옷은 좁은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형식이다.
- 두 손은 손가락의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위로 올리고,
- 왼손은 아래로 내린 시무외여원인의 손갖춤을 하였다.
-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형식과 고요히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보아
- 7세기의 신라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_국립경주박물관)
- 높이 : 201.cm
- 시대통일신라 7세기 후반~8세기
- 상세정보이 석불입상은 남산 도당산 토성 동쪽의 왕정골에서 옮겨왔습니다. 몸에 두 어깨를 가리는 방식으로 입은 대의는 옷주름이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손의 표현은 약간 어색합니다. 등 뒤의 광배에는 나뭇잎처럼 단순화된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석불입상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어 통일신라 당시 이 유형의 불상에 대한 특정한 신앙이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ㅁ 미륵삼존불
크기높이 160.0㎝ (본존미륵불)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골의 한 석실에서 옮겨왔습니다.
가운데 본존의 자세가 특이한데, 이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倚子座]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유일합니다.
중국의 6~7세기 불상 중에도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불상이 있는데 대부분 미륵불이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중국의 예로 미루어 본존불 또한 미륵불로 추정합니다.
좌우의 보살은 4등신의 자그마한 체구에 연꽃을 손에 쥐고 서 있습니다.
머리에는 세 개의 꽃장식이 있는 보관을 썼으며,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보입니다.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이용하여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석불입니다.
가운데 미륵본존불만 따로 찍은 사진이다.
ㅁ 망새 (다른 명칭 치미鸱尾)
경주 황룡사지 출토, 신라시대
높이: 182cm 옆너비: 105cm
이 망새[鴟尾]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 가운데에서 가장 크다.
대형이기 때문에 상, 하부를 따로 분리하여 제작하였다.
이 망새는 양측면과 뒷면에 연화무늬[蓮花文], 남·여 인면무늬[人面文]로 장식하였는데,
특히 인면문의 남자는 수염까지 상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색채는 흑회색을 보이며, 표면의 경도는 단단한 편이다.
초대형으로 제작된 이 망새는 좌우측이 안정된 구조를 이룰 뿐만 아니라 깃과 문양까지도
아주 세부적으로 표현되어 걸작이다.
(출처_국립경주박물관)
신상을 새긴 석탑 몸돌
경주읍성 동문터 발굴, 통일신라
석탑 몸돌의 일부로 각 면에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을 문비 양쪽에 배치했다.
신상은 어린아이와 같은 인상의 동그란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짧은 군의를 입고 악귀나 바위 위에 서 있다.
팔이 네 개인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다비의 신은 대체로 밀교 계통으로 이어진다. (안내문)
불교사원의 기와
도깨비얼굴모양 기와
사천왕사 녹유신장상(四天王寺 綠釉神將像, 녹유신장벽전 綠釉神將壁塼)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재위 661~681년)이 경주 낭산 신유림(狼山 神遊林)에 건립한 호국사찰로,
낭산 신유림은 신라를 공격하는 당(唐) 나라의 해군을 막기 위해 승려 명랑이 밀교 의식을 설행한 곳이기에
사천왕사는 신라의 중요 사찰이었다.
사찰은 고려 초까지 번성했지만 고려 말부터 쇠락하여 조선 시대에 폐사되었다.
사천왕사에 대한 근대적인 재인식은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지에서
녹유신장벽전의 깨어진 조각 일부를 수습하면서 시작했다.
경주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은 1915년 최초 발견 당시, 세 종류의 벽전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부서져 깨어진 조각(파편)만이 옛 경주 사천왕사 자리에 묻혀 있었다.
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生靈)을 깔고 앉아 보는 이를 주시한다.
앞을 지나가면 각기 달라져 보이는 장수의 표정에서 이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에 사천왕사 발굴을 개시했고
1922년부터 ‘고적발굴조사사업’의 하나로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발굴로 사찰과 녹유신장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발굴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벽전 파편을 조립한 결과,
최소 두 종류의 신장(왼손에 칼을 든 신장과 활과 화살을 든 신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을 거쳐,
200여 점의 파편을 3차원 입체(3D) 스캔하고 이를 참고로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하였다.
또한, 이들이 사천왕사지 동·서 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음도 밝혀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은 세 종류가 한 묶음으로 탑 한 면에 두 묶음씩 동·서 목탑 기단에
16개의 묶음으로 배치되어 벽전의 총 수는 48점인 것도 알게 되었다.
발굴 성과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하단부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서탑지 북편에서 발굴 수습한 상단부 6점이
같은 상이었음을 확인하였다.
201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7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빠진 부분은 같은 유형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 파편을 참고하여 이 벽전을 복원했다.
이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정밀한 발굴과 그간의 복원 과정의 결실이며 쾌거이다.
(출처_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 2018.3월)
2018년은 국립경주박물관은 처음 사천왕사 발굴을 진행한 지 100년 만에 최초로 원래 짝을 찾아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을 전시한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사천왕사의 건립과 100년에 걸친 녹유신장상의 발굴 조사 약사(略史),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정밀한 발굴 과정, 글과 영상으로 녹여낸 탑 기단부 녹유신장벽전의 배치 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복원된 3가지 유형의 벽전이 탑지뿐만 아니라 금당지나 단석지 등 사역 내 여러 위치에서 출토된 같
은 유형의 다른 벽전을 참고하여 복원한 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시에 나온 녹유신장벽전뿐만 아니라 월지관의 ‘월지 출토 금동판불상’(보물 제1475호)과
신라미술관의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366호) 사리외함을 함께 관람한다면
통일신라의 국제성과 신라인의 종교·예술적 역량을 최고로 표출한 3종의 신라문화유산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한 번에 즐기는 것이다.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전시 설명회는 2018.3.15.~8.5. 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2시 30분까지
신라미술관 1층 불교미술 제1실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출처_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 중 일부)
2018년 3월부터 8월 초까지 전시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을 볼 기회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 이렇게 전시되어 있다.
당시 홍보 포스터
불국사 경내에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동일한 크기로 복제되어 있다.
불국사를 방문하면 언제든 많은 사람으로 온전한 사진 찍기도 어렵다.
이곳에서 최적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즐풍의 경험으로 보면 국립중앙박물관보다 이곳 경주박물관의 전시품이 더 화려하다.
통일신라 전후의 금으로 된 문화재나 화려한 불교문화재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적은 지붕만 없을 뿐 박물관과 동일하다.
최근 짓는 사찰의 부처님 관련 제품은 컴퓨터로 찍어내듯 동일해 개성 없는 작품이 많다.
우리의 옛 조상님들의 훌륭한 작품을 볼 때마다 감동과 감격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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