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55
2023.5.1. (월) 오후에 잠시 탐방
청주 여행은 '21년 12월 어느 날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당시엔 기차를 탔지만, 오늘은 더 이른 시각에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했다.
게다가 버스터미널은 시내 안쪽에 있어 목적지까지 이동거리가 훨씬 짧은 이점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요령이 점점 더 생긴다.
사찰의 철당간은 청주 용두사지,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등 세 군데에 있다.
보은 법주사에도 철당간이 있긴 하지만, 2000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신라의 진표율사가 세웠다는 법주사 철당간은 1866년 당백전을 만들 때 조정에서 뜯어가 없어졌다.
그러니 위에 언급한 세 군데의 철당간이 진정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 청주 용두사지의 철당간을 둘러보며 세 군데 철당간을 모두 마치게 된다.
제일 먼저 본 곳은 안성 칠장사의 철당간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어제 본 공주 갑사의 철당간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용두사지 철당간을 오늘 마지막으로 보며, 법주사 철당간도 기회가 되면 보기로 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위치
ㅁ 용두사지 철당간 (龍頭寺址 鐵幢竿)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철당간의 석재 당간지주에 홈(간구)을 파 철당간 외부로 가로지르는 철로 1차 고정하고,
당간지주 밖으로 철을 한 번 더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완벽하게 고정했다.
밋밋했을 당간지주에 일자형 선을 얕게 넣어 훤칠한 키를 더 크게 돋보이게 했다.
지금은 철당간이 20마디 밖에 없지만 처음 만들 때 30 마디 끝에 당기를 달았다면
1~2km 밖에서도 당기를 잘 볼 수 있었겠다.
고려 광종 때 만들었다는 명문이 남아있어 역사성이 분명한 데다 보존상태가 좋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아래 그림처럼 여러 장치가 있겠으나 지금은 기단석 일부만 보일 뿐
지대석은 묻혀있어 보이지 않는다.
철당간 30 마디의 무게를 견질 정도라면 지대석을 거의 바위 크기 정도 되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간지주 상단에 철당간의 고정력을 높이기 위해 주철로 한 번 더 돌렸다.
주철이 지나가는 자리엔 돌출된 석재에 홈을 파 직선화했다.
주변지대보다 낮은 곳이라 배수시설과 석축을 쌓아 견고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
야간 조명시설도 보인다.
‘솟대’의 올바른 명칭 ‘짐대’
솟대라는 용어는 학자들의 책상에서만 쓰일 뿐, 민속 현장에서는 짐대, 진대, 돛대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립민속박물관이 1990년부터 1997년까지 8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현지 조사한
『OO지방 장승·솟대신앙』이라는 8권의 보고서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솟대는 1932년 손진태의 『소도고蘇塗考』에 처음 등장한다.
이 논문에서 손진태는 솔대·솟대는 소도의 음역으로 인식하고, 소도·솔대·솟대·소대를 동원어同源語로 해석하고 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전의 소도 기록에 쓰인 ‘입대목현령고立大木縣鈴鼓’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소도=솟대를 등식화 시켜놓고 민속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용어를 외면한 채 마을에 세워진 신간神竿을
솟대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사료의 해석이 논리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짐대는 긴 장대 꼭대기에 오리(또는 기러기)가 장식되어 있다.
이와 달리 마한의 소도는 방울과 북이 긴 장대에 걸려있는 형태이다.
방울과 북은 마한의 신기神器로서 이것이 오늘날 짐대의 오리로 바뀐 과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소도와 솟대의 관련성은 부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짐대가 왜,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짐대와 돛대는 당간에서 나오다
지금도 민속 현장에서 농민들은 짐대, 진대, 돛대, 오릿대, 오리짐대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민속 연구의 기본은 현장민속 어를 그대로 쓰는 일이다.
진대는 ‘진압鎭壓하는 장대’를 말하고, 돛대는 배 모양의 ‘행주형지세行舟形地勢의 장대’를 일컫는다.
진압은 풍수지리 용어인 압승壓勝과 동의어다.
짐대를 세우는 목적은 땅의 사악한 기운과 재앙을 눌러서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짐대는 지기地氣가 센 터를 눌러준다는 풍수비보의 상징물로서, 행주형지세에 세워지면 돛대가 된다.
행주형지세는 배의 형국을 말하는 것으로, 배가 돛대도 아니 달고 항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헌에 따르면 행주형지세에 세워지는 돛대를 주장舟檣이라 하고 돛대의 재질은 쇠, 돌, 나무인데
쇠돛대는 철장鐵檣, 돌돛대는 석장石檣, 나무돛대는 목장木檣이라고 한다.
역사상 행주형지세에 세워진 돛대는 청주읍성의 용두사 터의 동장銅檣이다.
이 돛대는 오늘날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위치한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을 가리킨다.
기록에는 고려 광종 13년(962) 청주읍성 안 용두사龍頭寺에 세웠다고 한다.
용두사는 명처명산名處名山에 절을 세우면 국운國運을 돕는다는 도참설圖讖說과 불교신앙에 의해서 세운
풍수비보사찰이었으며, 동장은 풍수비보 기능의 쇠돛대鐵檣였다.
청주시민들은 철당간을 돛대라고 부르고, 읍성을 주성舟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에는 읍성 동문 밖에는 석장이 세워져 있고,
동문 안에는 목장이 세워져 있다고 하였다.
나주읍이 행주형지세였기에 주를 설치할 때에 석장과 목장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나주시의 석당간은 사찰과 관계없이 읍성 안팎에 당간을 설치했음을 보여준다.
돛대에 오리를 앉히다
사찰과 읍성 안팎에 세워지던 짐대가 조선 후기에 마을로 내려온다.
그리고 형태에 변화가 생긴다. 행주형지세에 세워지던 하나의 돛대는 세 개의 짐대로 나누어진다.
돛대는 세 마리의 오리를 앉힐 목적으로 분화한다.
또 세 개의 오리짐대를 세우는 방식과 하나의 간주에 세 마리의 오리를 장식하는 방식까지 등장한다.
오리짐대의 출현은 숙종 15년(1689)에 세운 부안읍성 서문 안 돌짐대의 건립 명문으로 알 수 있다.
부안읍에는 남문 안 돌돛대와 남문 안, 동문 안, 서문 안 세 곳에 오리짐대가 세워져 있다.
세 마리의 오리는 동쪽, 남쪽, 서쪽에 위치한 만다라曼陀羅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세 곳의 오리짐대는 세 마리의 나무오리를 날려 보내 떨어지는 곳에 사찰과 마을을 조성한다는
목부비공형木鳧飛空形 설화를 차용한 것이다.
목부木鳧는 나무오리란 뜻으로 고승高僧들이 나뭇가지를 주워서 손으로 주물럭거려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 내려앉는 세 곳에 사찰을 조성한다는 택지법擇地法에서 비롯하였다.
택지법은 어떠한 땅을 택지하여 만다라를 조성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불교적 술법이다.
오리가 떨어진 마을은 사찰(만다라)과 같은 성역화된 공간의 상징성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짐대는 불교민속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민속화 하는 과정에서 당간의 간주竿柱와 택지법의 오리가 조합하면서
장대 끝에 오리 조각을 올려놓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형태인 오릿대, 오리짐대가 마을에 출현한 것이다.
행주형지세의 돛대에 오리를 앉혀 오리짐대로 변화하였고,
후대에 내려올수록 널리 확산되면서 세 마리에서 한 마리까지 앉히는 짐대문화로 정착하였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다
짐대가 땅의 사악한 기운을 눌러 평안을 추구하는 풍수비보 기능의 간주라면,
오리는 만다라와 같은 장엄한 불국정토세계가 마을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땅에서 높이 솟아서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오리짐대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며
마을 주민들의 염원을 담고 서 있는 것이다.
한편, 오리짐대는 마을과 고을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태평성대에는 굳이 오리짐대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숙종 연간에는 소빙기(이상기후현상)를 겪으며 자연재해에 따른 흉년,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하는
아비규환의 시기가 있었다.
굶주려 죽고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하던 17세기말 암울한 시점에서,
민심은 흉흉해지고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삶터를 지켜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에서 오리짐대를 세운 것이다.
주민들은 삶터에 오리짐대를 세워 불안 심리를 진정시키고 천상의 극락세계가 마을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극락조極樂鳥에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출처_송화섭 전주대학교 교수)
언젠가 청주에 계신 분이 청주는 배가 가라앉는 지세라 돈을 벌만 하면 외지로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오래된 향토기업이 없다고 했는데, 위 송화섭 교수님 글을 보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
청주가 오늘날 경북의 도청 소재지를 그 역할을 톡톡히 해 내는 것도 용두사지의 철당간이
이곳 충부 풍수의 약한 곳을 보강한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방 어디서 봐도 곧바른 형태가 맘에 든다.
청주시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 시내 중앙공원에 있는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鐵幢竿)은 당간의 조성 시기와 주체,
배경과 동기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국내 유일의 철당이다.
이 당간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에는 구리돛대로 표기되었다.
『용두사 철당기』에는 30단의 철통(鐵筒)을 쌓아 올린 60척 길이의 철당(鐵幢)이라고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철당을 동장(銅檣, 구리돛대)으로 표기한 것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동장은 철장(鐵檣)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동장 대신에 철장의 명칭을 사용한다.
철장은 청주 읍성 내에 위치한 용두사(龍頭寺) 절 안에 있다고 하였으며, 절은 폐사되었지만 돛대는 남아있다.
청주의 철장은 다른 당간의 형태 및 구조가 같고 용두사에 있었기에 사찰 당간의 유형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당간을 구리 돛대(銅檣)로 표현하였을까.
그동안 당간은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선양하는 화려한 장식의 번(幡)을 걸어놓는 당주라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용두사 철당기』에는 당간과 번개(幡盖)의 성격과 기능을 분명하게 정의해 놓았다.
내용인즉 “일찍이 듣건대 당간은 불문(佛門)을 장식하는 옥표요,
번개는 보전을 장식하는 신령스러운 깃발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당간은 사찰의 문을 장식하는 옥표라 하였고,
번개는 사찰의 대웅보전을 장식하는 신령스러운 불교의 깃발(佛幡)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하였다.
불문 장식의 당간과 보전 장식의 번개는 별개라는 사실이다.
당간은 석당간, 철당간, 목당간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당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철당간은 청주 용두사지,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보은 법주사 4곳의 사찰 경내에 세워져 있다.
목당간은 동남아시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라오스, 몽골 등 밀교문화권의
사찰 경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나주읍성 안에 목장(木檣)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사찰에서 목당간을 세우는 관행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당간은 밀교의례가 성행하던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사찰과 읍성에 조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용두사지 철당간도 고려 광종 13년에 조성되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청주 읍성 내 용두사 경내에 세워졌지만 불문을 장식하는 당간과 사뭇 다른 성격과
기능을 가진 쇠돛대(鐵檣)이다.
청주 시내의 용두사지 철장은 나주 읍성의 석장(石檣)과 성격 및 기능이 흡사하다.
둘 다 행주형지세에 세워진 읍치당간이다.
당간이지만 돛대(檣)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게 둘 다 적합하다.
나주의 석당간이 화강암으로 만든 돌돛대라면, 청주의 철당간은 쇠를 사용하여 만든
쇠돛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당간(幢竿)과 장(檣)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당간은 사찰의 문 안쪽 대웅전 전면에 조성되어 있고, 대체로 한 쌍으로 보전 앞 좌우 양쪽에 세워지고,
사찰의 괘불과 장엄물을 걸어놓는 당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은 사찰과 읍성에 풍수비보의 기능을 하고, 행주형지세의 돛대로서 상징성을 가지며,
한 쌍이 아닌 1개의 돛대가 조성될 뿐이다.
당간과 장은 간주와 지주의 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성격과 기능은 다르다.
용두사지, 법주사, 갑사, 칠장사 4곳의 철당간은 행주형지세에 쇠돛대의 기능을 한다.
철장의 간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통을 연결하여 만들어져 당번을 거는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청주 읍성의 철당과 흡사한 나주 석장에는 간주의 상부에 옥간석과 여의보주를 올려놓았고,
석주에 철주를 연결하여 세운 담양읍 당간의 상부에는 법륜 장식과 삼지창을 꽂아 놓았다.
나주, 담양 당간 외에 보은 법주사 철당간의 간두 장식을 살펴보아도 당번을 걸 수 있는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사찰의 철장은 행주형지세를 진압할 목적으로 세웠기에 당번을 걸어놓는 장치가 없다.
따라서 모든 당간이 번을 거는 용도였다는 인식이 획일화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철장·석장은 행주형지세의 사찰과 고을에 세운 돛대라는 시각과 관념으로 접근해야
그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와 나주목 고적조에 “세상에 전하기를 처음 주를 설치할 때에
술자들의 말을 빌어, 이것을 세워 행주지세를 나타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청주의 철당과 나주의 석장은 행주형지세에 세운 돛대(檣)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돛대를 무거운 쇠, 돌로 세워 고을의 터를 진압·비보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용두사지의 철장은 행주형지세에 세워놓은 돛대(檣)가 분명하다.
이런 연유로 청주 읍성을 주성(舟城)이라고 부른다.
청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이 무심천이다.
무심천은 남동출 북서류하는 배역(背逆)의 원천이다.
청주의 주산인 우암산에서 철장을 바라보면 전형적인 행주형 지세의 중심에 위치한다.
행주형 지세의 돛대는 돛단배의 돛대를 연상시킨다.
이 쇠돛대(鐵檣)는 고려 전기 청주의 대표적인 향리집단이 주도하여 세웠다.
『용두사 철당기』에는 김(金), 한(韓), 손(孫), 경(慶) 등 토성집단의 시주자가 등장한다.
철장의 건립은 청주의 대표적인 문벌지족(門閥之族:州里豪家 鄕閭冠族)인 청주 김 씨 가문이 주도하였다.
당대등 김예종은 전염성 질병에 걸려 치병(治病)을 목적으로 용두사에 철장 건립을 약속했고,
용두사에서는 밀교의 치병법에 따라 치병수행의례를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용두사철당기』는 신라말 고려 초 불교와 풍수지리가 결합한 밀교의 발달, 밀교의례의 성행,
사찰의 당간이 읍성의 돛대로 확산되어 가는 사회현상의 단면을 담고 있다.
글‧송화섭(전주대학교 글로컬창의학과 교수)
용두사지 철당간을 다녀옴으로써 역사성이 있는 철당간 모두를 살펴봤다.
보은 법주사 철당간은 셩복궁 중건을 위해 돈이 필요하자 조정에서 탈취해 가며 사라졌다.
이후 2000년도에 새로 조성한 것이니 역사성은 없지만 언젠가 둘러볼 생각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을 둘러보는 것으로 테마가 있는 여행 한 편을 끝낸다.
공주 갑사의 철당간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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