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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서원과 산지승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논산 돈암서원

by 즐풍 2021. 11. 29.

2021_165

 

 

2021.11.26 (금) 오전에 잠시 탐방

 

 

논산 탑정호에 생긴 출렁다리를 보겠다고 기차를 타고 연산역에 내렸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경비가 절반이나 줄어들고 정체도 없다.

탑정호 길목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돈암서원도 보게 돼 일석이조다.

낯선 지역의 여행에서 생각지도 않은 선물 하나를 덤으로 받는 기분이다.

 

 

 

□ 돈암서원의 개요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듯 포용하라.
학문을 넓고 깊이 익혀서 예(禮)를 실천하라.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길러라.

‘돈암서원’ 사당인 ‘숭례사’ 앞 꽃담에 한문 12자로 적혀 있는 조선 중기 대표적인 유학자

김장생(1548~1631)의 교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실천이 참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김장생이 살았던 16~17세기는 참혹한 사화와 반란, 임진・정유년의 왜란 등 잦은 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혼란을 겪던 때였습니다. 

더 이상 성리학 이념만으로는 무너진 사회기강과 윤리의식을 바르게 세울 수 없어, 

그 수습 대안으로 ‘예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김장생의 ‘예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이념과 정치철학은 국가적으로 절실한 리더십이었습니다.
김장생은 송익필과 이이의 가르침 속에 성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조선의 ‘예학’을 추스른 학자입니다. 

그가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김계휘가 세상을 떠나자 ‘상례’와 ‘제례’를 집안의 예법대로 따랐는데, 

이듬해 김장생은 신의경이 편집한 ‘상제서’를 일반인이 쓰기에 편하도록 정리했습니다.

‘상례 비요’입니다.

52세에는 관혼상제의 예를 연구한 ‘가례집람’을 완성했습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예학 실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남 논산에 있는 ‘돈암서원’은 1634년 김장생의 제자들과 지역 사림들이,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처음 세웠습니다.

그 뒤 1660년 현종이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돈암’은 ‘숲말’에 있는 바위 이름입니다.

홍수 때에는 물이 뜰까지 넘쳐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1880년 지금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서원은 낮은 구릉지에 동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문인 ‘입덕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양성당’을 중심으로 동재 ‘거경재’와 서재 ‘정의재’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양성당’ 앞에는 송시열이 쓴 ‘돈암서원 원정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양성재’의 서편에는 책판과 왕실의 하사품 등이 간직되어 있는 ‘장판각’입니다.

특히 예학 이론을 건축에 담은 ‘응도당’은, 김장생이 예학서 ‘가례집람’에 그려놓은 도면대로 지어졌습니다.

‘도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응도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칸살이 넓고 맵시가 훤칠합니다.

맞배지붕에 양쪽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 그 아래 눈썹처마를 달았습니다.

한국 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이곳 ‘응도당’에서,

예학 토론과 활발한 저술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돈암서원에는 많은 목판과 예학 이론서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06:43발 열차를 타고 가다 보니 여명이 밝아온다.

나음대로 멋진 모습이다.

 

돈암서원과 가까운 돈암서원 한옥마을에 잠시 들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보여주기 공간인데, 사람의 온기가 없어 썰렁해 사진은 찍었으나 싣지 않는다.

 

돈암서원 입구

 

 

□ 산앙루

 

여느 서원처럼 옛 선비들이 둘러앉아 시를 짓고, 토론하고, 그림을 그린 ‘그 시대의 유식 공간’이 아니라

2006년에 다시 지은 ‘현대식’ 건물이라고 한다.

 

처음 산앙루를 보며 편액을 읽을 때 산(山) 자는 쉬운 듯 보여도 처음 보는 글자라 당황했다.

건물 뒤에 걸린 편액을 보고 비로소 山 자라는 걸 알았다.

돈암서원에 배향된 김장생과 위패를 모신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숭고한 학문과 덕행을

커다란 산처럼 흠모하고 우러러 받들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 돈암서원

 

충남 논산에 위치하며 사적 제383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 유서를 기려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으며, 1659년에 사액을 받았다.

1881년 홍수 피해로 1954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강당 응도당 건물은 옛 제도를 그대로 이어 건축한 것으로 가치가 높아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주향으로 모신 김장생을 비롯한 김집, 제자 송준길, 송시열 등은 조선시대 예학을 집대성한 

인물들이었으며, 돈암서원이 바로 그 산실이다.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사진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 입덕문

 

서원의 외삼문이다.

 

외삼문엔 덕을 쌓으러 들어간다는 뜻의 입덕문이란 편액이 걸렸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 정의재, 오른쪽 거경재, 정면에 양성당이 보인다.

 

 

□ 거경재(居敬齋)

맞은편 정의재가 유생들 숙소라면 이곳은 선생이 머무르던 숙소이다. (안내문)

 

□ 돈암서원 원정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돈암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이다.

 

 

□ 돈암서원의 강학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 김장생은 그것을 ‘예(禮)’라 했다. 

그는 이 ‘예’를 보다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주희의 ‘가례’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쉽게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김장생은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경기도와 충청 지역중심의 성리학파)로, 

‘예’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학을 두루 양성했다.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 양성각(養性堂)

 

돈암서원 강당 현판으로 오랫동안 힘들여 본성을 기른다는 의미다. (안내문)

 

안쪽에서 바라보는 입덕문

 

 

□ 장판각(藏板閣)

 

장판(藏板)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한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온다. (안내문)

 

 

왼쪽 건물은 정회당이다.

붉은 줄기의 향나무가 양쪽으로 가지를 뻗으며 중간 부분이 갈라지고 있다.

 

 

□ 숭례사

 

사당 ‘숭례사’에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그의 둘째 아들이자 제자인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을 모셨다.
17세기 조선의 예학 연구를 이끈 김장생은 중앙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체계를 완성했다.
송시열은 김장생에게 예학을 배웠으나,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송준길은 이이와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효종에게 발탁됐다.
예학 이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한 이 네 분은 성균관 문묘에 모셔졌다.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숭례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벽돌에 읽기도 어려운 전서체의 4자 성어가 쓰여있다.

(내삼문은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② 박문약례는 문 양쪽에 두 글자씩 떨어져 있다.

글자는 우측에서 좌로 읽는다.

 

내삼문

 

□ 전사청 

 

제향과 관련된 제기가 보관된 곳이다.

 

거경재 마루가 회랑처럼 길게 보인다.

 

 

□ 정회당(精會堂)

 

김장생(1548~1631)의 아버지 김계휘(1526~1582)가 낙향한 후 연산현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정회는 고요히 모인다는 의미로 이 정화당이 훗날 돈암서원을 건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글씨는 이 일대에서 명필로 알려진 김예산이 8세에 쓴 것이다. (안내문)

 

 

 

 

 

 

 

 

 

 

□ ‘응도당(凝道堂)’

 

‘응도당(凝道堂)’은 보물 제1569호이다. 

김장생의 예학 관련 저술인 ‘상례비오’, ‘가례집람‘, ‘의례문해속’은 목판본과 함께 돈암서원 장판각에 간직되어 있다. 

고종 때 왕실에서 하사한 ‘벼루’와 ‘옥등잔’도 있다.

응도(凝道)란 덕을 닦고 학문을 모아 성취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돈암서원 강학 활동의 중심으로, 옛 건물의 제도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

                                                                                             [출처_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돈암서원은 처음에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에 창건되었다.

숲말에 돈암이라 새겨진 돼지가 엎드린 모습을 한 큰 바위 이름을 따 돈암서원이라 했다.

어느 해인가 큰 홍수가 나 개울이 넘쳐 마당까지 물이 들어와 1880년 이곳으로 이건 했다.

처음에 지은 건물을 그대로 뜯어 이전하여 다시 세우는 이건(移建)은 건축비를 줄일 수 있다.

그때 응보당은 건물 규모가 너무 커 이전을 못하고 남겨두다가 1971년에 비로소 이전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잠깐 만난 이곳 관계자의 말씀을 들어보면,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경운기로 해체한 건물을 겨우 옮겨올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함께 이건 했다면 가장 큰 강학 공간인 응도당은 현재의 위치로 밀려나지 않고 

숭례사 앞 양성당 자리에 들어가는 대신 다른 건물은 한 칸씩 밀렸을 것이다.

응도당은 한국 서원 중에서 가장 큰 강당의 규모이다.

1634년(인조 12) 서원 창건 당시 건축한 것으로 호서 사림의 활동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응도당 옆모습

 

측면에 눈썹지붕이 특이하다.

 

뒤에서 보는 마루 공간

 

400여 년 가까이 흐른 건물이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건물이 오래되다 보니 좀이 스는 걸 방지하기 위해 주춧돌과 맞닿는 기둥에 소금물을 입혔다.

건물을 지을 당시엔 주변에 제법 쓸만한 황장목이 많았나 보다.

 

앞은 거경재, 뒤쪽 건물은 전사청

 

전사청 입구

 

전사청

 

양성당

 

 

 

 

 

 

 

 

 

꽈리

 

 

 

 

 

밖에서 보는 산앙루 

 

돈암서원 전경

 

수락산으로 올라가며 다시 보는 돈암서원 전경

 

돈암서원의 편액 

 

 

서원은 요즘의 사립학교다.

향교는 국립학교로 공자님을 배향하며 학생을 교생이라 하는데, 서원에선 원생이라 한다.

서원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동안에는 군역이 면제됐다고 한다.

과거시험에 급제하면 벼슬에 오르고, 낙방하면 9수까지도 서원에 머무르며 학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많은 서원 중에 9개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