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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서원과 산지승원

문대통령이 공부해 사시에 합격했다는 두륜산 대흥사

by 즐풍 2021. 11. 30.

 

 

2019.3.23 두륜산 산행 끝내고 잠시 탐방

 

 

모처럼 어렵게 두륜산까지 왔는데, 산행 내내 비가 올 듯 하루 종일 흐렸다.

산행을 끝내고 대흥사에 들어올 때 한두 방울씩 비가 내려 비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등산이나 여행할 땐 날씨가 좋기를 바라지만, 메마른 대지는 비가 내리길 원한다.

봄바람은 건조하니 이럴 때 비라도 흠뻑 내려야 한다.

 

두륜산 자락에 있는 대흥사는 조계종 22 교구의 본사이니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다.

명찰이 아니라도 산행하며 만나는 사찰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짧아 서둘러 볼 수밖에 없다.

시간이 되어도 법당에 들어가 사진 찍는 무례를 범하긴 싫어 사찰 사진은 늘 간단하다.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주변 자연을 경계로 삼아 산 안쪽에 위치한 입지 특성을 갖고, 

오늘날까지 불교 출가자와 신자의 수행과 신앙, 생활이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승원이다. 

7~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당시 사찰이 수도인 경주 등 도시에 위치한 것과 달리 등재된 7개 산사는 산지에 창건되었다.
산사가 처음 경영되던 7세기에 통도사와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가 차례로 창건되어 교단 활동을 이끌었다. 

통도사는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자장이 계율을 강조한 사찰로 창건하였고, 

화엄종에서는 부석사와 봉정사를 창건하였으며 법상종의 사상적 바탕에서 법주사가 창건되었다.
8세기 말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선종이 유행하게 되자 선 수행의 장소로서 이상적인 입지조건을 갖춘 

전국의 명산에 본격적으로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가 이 시기에 창건되었다.
이후 산사의 운영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경영되며 한국불교의 시대적 변모를 담아 왔다.

                                                                                 [출처_대한불교 조계종]

 

 

 

□ 천년고찰_대흥사(大興寺)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 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

(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갓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 종사 풍담(風潭)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강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 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출처_대흥사]

 

자연스럽게 생긴 연못이라 정감이 간다.

되는 대로 쌓은 바위며 잘 손질된 향나무도 보기 좋다.

 

안쪽 문틀 상단에 해탈문이란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제법 많은 누각이 어깨를 맞대고 제법 늘어선 게 보인다.

 

 

□ 침계루(枕溪樓)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 지었다. 

중층 누각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 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안내문)

 

 

홍매화 그놈 참 예쁘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의 중심 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 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 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 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안내문)

 

 

 

□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안내문)

 

도자기 등

 

침계루 뒷면 

 

 

대웅보전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안내문)

 

 

 

□ 대흥사 응진당 앞 삼층석탑(大興寺 應眞堂前 三層石塔)

대흥사 응진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은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 부근에 세워진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_대흥사]

 

 

대웅보전 옆모습

 

 

 

 

 

 

 

범종각

 

대흥사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느티나무는 연리근이다.

 

범종각

 

□  천불전 기도 영험 유래 (千佛殿 祈禱 靈驗 由來)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 흥사) 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 분의 부처님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다.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 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에 표착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 구의 옥불을 싣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라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다음 해 7월 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줄 것을 현몽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이다.  (안내문)
 

 

적묵당

 

 

 

 

 

 

 

 

 

거대한 돌수조

 

 

 

부도탑

 

 

 

일주문 뒷면

 

일주문

 

 

 

 

 

해남 대흥사 동국선원 7번 방은 문재인 대통령이 1978년 8개월여 머물며 사시공부에 정진해 

1차 시험에 합격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방이다.

이렇게 공덕이 큰 사찰이니 9수까지 해가며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사시에 패스하지 않는다.

선한 마음으로 산사에서 지내면 마음도 차분해지리라.